아내를 위한 밥상
최의상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청청한 봄날이다. 봄날은 왔는데 이 세상은 사람 대하기가 두려운 세상이 되었다. 약국 앞에 마스크를 사려는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11시부터 배급을 한다고 했다.
약국 위에 병원으로 들어갔다. 손소독과 열 감지를 끝마치고 승강기에 올라 투석 신장실로 들어갔다. 투석을 마친 이권사가 기진맥진하여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만성신부전환자로 투석에 의지하여 생명을 연장하는 처지이다. 휠체어를 밀고 나와 차에 태우고 출발하였다. 지금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고 3시간 이상을 침상에 누워 피 갈음을 하면서 노폐물을 여과시키다 보면 심신이 탈진되는 것이다. 이런 생활을 한 지 어언 3년이 지났다. 투석을 하여서 신장이 되살아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죽을 때까지 노폐물을 걸러내기 위한 신진대사 작용을 대신 할 뿐이다. 어쩌면 희망이 없는 치료방법이다. 암은 고칠 수 있다는 희망이라도 있지만 이 신장병환자는 투석으로 연명하는 일 외에는 희망이 없다. 이런 환자들이 나날이 늘어가고 있다. 때로는 좋지 않은 생가도 든다. 병원만 살찌우는 일이라고, 의학이 발달되었다고 하는데 희망적인 치료방법이 개발되지 않는 것이 야속하다. 아니면 투석기를 최소화 하여 집에서 각자가 자가 투석하는 치료 방법을 개발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최적의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신장이식수술이다. 그러나 구하기도 어렵고 돈도 많이 드는 일이기에 원하고는 있으나 성공률은 희박하다.
맛있는 점심이라도 잘 먹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비게이션에서 융건릉으로 목표를 잡았다. 오래 전에 융건릉 앞 길 건너편에 <임금님 수라상>집이 있어 이권사가 몸이 건강할 때 여기서 임금님 수라상을 받아먹은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방향이 집에서 멀어지자 어디 가느냐고 묻기에 임금님 수라상 받으러 가자고 했다. 화장실을 자주 가야하는 긴박감에 멀리 가는 것을 꺼려하여 멀리 가기가 어려운 형편이어서 근방의 음식점을 생각한 것이다. 옛날 내 방식 대로 운전을 하면 길이 어긋나서 네비게이션 아가씨에게 맡기면 내가 생각하던 길에서 엉뚱한 길로 접어들었다. 알고 보면 새로 난 길이다.
<임금님 수라상>간판은 없고 대신 <한국인의 밥상>집으로 간판이 변하여 있었다. 십년이면 강산이 바뀐다고 하니 간판 이름이 바뀐 것이 이상할 수는 없다. 이 집의 내부는 한옥 박물관처럼 옛날 사용하던 화초장, 풍구, 다리미, 인두, 등잔, 도자기종류, 절구, 맷돌 등이 요소에 진열되어 있고 옛날 사용하던 전화기, 라디오, 턴테이불도 있어 마치 1900년대로 뒤돌아간 느낌을 주면서도 우리에게는 낯설지 않은 물건들이라 친숙감이 들어 향수에 젖을 수도 있다.
한 상 차려 놓은 한국인의 밥상은 조촐하면서도 기름지지 않고 담백한 차림의 상이었다. 무려 반찬이 18가지이다. 분량은 2인분으로 예를 들면 연근은 딱 2개, 두부 2쪽, 나물 2젓까락량,감자전 2쪽 등이다. 12개의 작은 접시에는 나물종류로 채반에 전부 담겨 상위에 올려놓았고 그 외 길고 큰 접시와 국은 채반 밖에 놓았다. 이 정도가 기본정식으로 1인분 10,000원이며 더 맛있는 것을 먹고 싶으면 추가메뉴로 간장게장 1인분 15,000원 돼지장작구이 200g 10,000원 소장작구이 200g 15,000원 추가하면 진수성찬이 될 것이다, 우리 이권사는 고기와 짠 것을 피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추가하지 않고 기본 밥상으로 만족하였다.
옛날 <임금님 수라상>은 상 자체가 역사극에서 보는 임금님 수라상의 모양과 비슷한 상에다 차려 주고 놋그릇에 밥을 담아 주었다. 격식도 상궁이 임금님 상 드리듯 옷에 옛 풍을 드려 입고 두 상궁이 맏들어 공손이 상을 놓는 모습이 기억되었다. 어쩌면 놋그릇 취급과 상궁 모습꾸미기가 번거러워 <한국인 밥상>으로 바꾸었으리라 생각 하였다. 그러면서도 갑질이라든지 평등이라는 물결에 의하여 임금을 끌어내리고 백성이라 붙이기가 어설퍼 한국인의 밥상이라 명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이권사가 거동도 불편하고 힘들어 가정사를 내가 돌보아야 하기 때문에 하는 일이 많아져 하루가 금시 지나가곤 한다. 한편 이권사는 투석 2급환자 및 요양보호 4등급환자 판정을 받아 요양보호사가 필요하여 요양보호사 자격시험을 위해 작년 8월부터 5개월간 교육과 현장실습을 거쳐 국가고시를 보아 당당히 합격증을 받고 1월부터 이권사 재가요양보호사로 취직하여 매일 90분간 요양보호를 하게 되었다. 요양보호사가 하는 일은 신체활동지원이 주 목적이다. 식사, 보행, 화장실이용, 옷 입고 벗기 등을 도와주어야 한다. 1일 90분 재가요양보호를 하는 것은 수당을 받기 위한 행정적 시간이고 24시간 돌보아주어야 하는 것이 재가요양보호제도이다. 그 중에도 식사 준비하는 것이 제일 어렵다. 과거에 이권사가 나에게 해 주던 것을 이제는 내가 이권사를 위해 주방장이 되기 위해 핸드폰에서 레시피를 뒤적이고 있다.
저녁에는 <한국인의 밥상>을 생각하여 새로운 밥상을 차리기로 하였다. 한국인의 밥상은 작은 접시에 2인 분 반찬이 놓여 있었다. 예를 들면 연근 두 쪽, 두부 두 쪽, 나물 종류는 두 젓갈 분량만 담았다. 지금까지 반찬은 편리한 대로 냉장고에 넣은 크고 작은 플라스틱 반찬통을 그대로 식탁에 올려놓고 먹은 후에는 다시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 편리하다는 면으로 보면 쉽고 정말로 편리한 방법이다. <임금님의 수라상>이나 <한국인의 밥상>을 대하고 보니 내가 나를 생각하게 되었다. 나도 임금님의 수라상을 받고 싶다. 나도 임금님이 받는 밥상을 받고 싶다. 내가 나를 존중할 때 자존감이 생기는 것이다. 마침 딸이 준 콩깎지 같이 생긴 긴 접시는 세 종류의 반찬을 담을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그 접시 두 개에 2인용 반찬을 담아서 상 위에 놓았다. 식탁이 너줄하지 않고 단출하면서도 품위 있는 식탁이 되었다. 이권사는 새로운 식탁의 모습을 보고 빙그레 웃으며 좋아요 했다.
반찬은 다 먹게 되고 빈 접시 2개만 남았다. 2개를 설거지 하고 나니 시간도 절약되고 힘도 덜 들고 머리도 복잡하지 않고 품위 있는 밥상에서 품위 있게 식사를 하고 나자 자존감도 생기는 듯하였다. 편리하다고 개미 쳇바퀴 돌 듯 하는 생활은 죽은 생활이다. 무엇인가 변화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단순 명료한 생활일수록 질서가 있고 삶의 공간이 있고 희망의 빛이 새어 들 수 있다고 생각이 된다. 오늘 하루는 의미 있는 하루를 보냈다는 안도감이 나의 피로를 씻어주었다. 창밖이 어두워지고 내 방이 밝아지자 수많은 책들 속에 앉아 한 권의 책을 들었다. 읽고 있는 중인 <모스코바의 신사> 297쪽을 폈다. 알렉산드르 일리치 로스토프 백작이 메트로폴 호텔에서 오늘은 니나 백작을 반갑게 맞이하고 있다. (202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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