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문학평론

[스크랩] 윤동주 시, 이렇게 14억 중국인에게 알려졌다

운산 최의상 2014. 6. 18. 11:45

윤동주문학관 탐방 자료 1

 

윤동주 시, 이렇게 14억 중국인에게 알려졌다

 

                                    김 정 오

 

 

들어가며

윤동주는 1941년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를 졸업할 때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77부 한정판 자선 시집을 출간하려하였다. 그러나 이양하 교수가 일제의 검열을 통과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충고와 출판 비 부족으로 출판을 못했다. 그 대신 친필로 쓴 시작 노트 세권을 만들어 한 권은 이양하 교수, 또 한 권은 정병욱 교수, 나머지 한 권은 자신이 소장했다. 그러나 일본제국주의 경찰은 윤동주를 모국어(한글)로 시를 썼다는 이유로 사상범으로 체포하고 말았다. 그 후 윤동주는 후쿠오카 감옥에서 2년 동안 생체실험을 당한 끝에 1945년 2월 16일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다. 만 27년 2개월의 꽃다운 나이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읽고 있는 윤동주의 시는 모두 25세 이전에 쓰인 시들이다.

 

그런데 그가 남긴 세권의 시집 가운데 두 권은 사라지고 정병욱 교수가 소장했던 한권만이 남게 되었다. 정병욱 교수가 아니었다면 윤동주와 그 명시들은 영원히 햇빛을 보지 못할 뻔하였다. 또 윤동주의 시가 해방 후 세상에 처음 알려지게 된 것은 당시 경향신문사 기자로 있던 강처증에 의해서였다. 윤동주와 연희전문 동창인 그는 당시 편집국장이던 정지용 시인에게 윤동주 시를 보여주었다. 시를 본 정지용은 1947년 2월 13일자 경향신문에 '쉽게 쓰여진 시' 를 자신의 해설까지 붙여 실었다 비록 세상을 떠났지만 화려한 등단이었다. 그리고 다음해 1948년 1월10일 정음사(正音社)에서 정지용이 서문을 쓰고 강처증이 발문을 쓴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발간되었다.

 

정지용의 서문과 강처증의 발문

정지용은 훗날 명문장이 될 윤동주 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서문을 이렇게 썼다. “ 서(序)__랄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이고 정성껏 몇 마디 써야만 할 의무를 가졌건만 붓을 잡기가 죽기 보담 싫은 날, 나는 천의를 뒤집어쓰고 차라리 병(病)아닌 신음을 하고 있다. 무엇이라고 써야하나? 재조(才操)도 탕진하고 용기도 상실하고 8.15이후에 나는 부당하게도 늙어 간다. 누가 있어서 ‘너는 일편(一片)의 정성까지도 잃었느냐?󰡑 질타한다면 소허(少許) 항론(抗論)이 없이 앉음을 고쳐 무릎을 꿇으리라. 아직 무릎을 꿇을 만한 기력이 남았기에 나는 이 붓을 들어 시인 윤동주의 유고에 분향하노라

 

겨우 30 여 편 되는 유시 이외에 윤동주의 그의 시인됨에 관한 목증한 바 재료를 나는 갖지 않았다. “호사유피(虎死留皮)”라는 말이 있겠다. 범이 죽어 가죽이 남았다면 그의 호피를 감정하여 “수남(壽男)”이라고 하랴?󰡒복동(福童)”이라고 하랴? 범이란 범이 모조리 이름이 없었던 것이다. 내가 시인 윤동주를 몰랐기로소니 윤동주의 시가 바로<시>고 보면 그만 아니냐? 호피는 마침내 호피에 지나지 못하고 말 것이나, 그의 <시>로써 그의 <시인>됨을 알기는 어렵지 않은 일이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 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이 지나친 병노(病,勞)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그의 유시병원 (遺詩“病院”)의 일절 <중략>

 

노자(老子) 오천언(五千言)에 “허기심(虛其心) 실기복(實其腹) 약기지(弱其志) 강기골(强其骨)”이라는 구(句)가 있다. 청년 윤동주는 의지가 약하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서정시에 우수한 것이겠고, 그러나 뼈가 강하였던 것이리라. 그렇기에 일적(日賊)에게 살을 내던지고 뼈를 차지 한 것이 아니었던가!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구나! /29세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적도 없이 /일제시대에 날뛰던 부일문사 놈들의 글이 다시 보아 침을 배앝을 것 뿐이나, 무명 윤동주가 부끄럽지 않고 슬프고 아름답기 한이 없는 시를 남기지 않았나! 시와 시인은 원래 이러한 것이다. (중략) 일제헌병은 동 섣달에도 꽃과 같은, 얼음 아래 다시 한 마리 잉어와 같은 조선청년 시인을 죽이고 제 나라를 망치었다. 뼈가 강한 죄로 죽은 윤동주의 백골은 이제 고토 간도에 누어있다.(이하약) (1947년 12월 28일 지용)

 

또 강처증은 발문에서 윤동주와 친구들 사이에 얽혀 있던 우정의 자취를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이는 중요한 사료적 가치로 인정받고 있다. 이렇게 윤동주의 시가 세상에 알려지고 시집까지 발간된 것은 정병욱과 강처증 그리고 정지용과 그의 친동생 윤일주 교수의 공로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윤동주는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 되었으며, 그의 <서시>는 가장 애송하는 시가 되었다. 그의 시가 얼마나 마음에 들었으면 당시 최고의 시인 정지용이 서문에서 "무시무시한 고독 속에서 죽었고나! 29세(한국식 나이)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 적도 없이!"라고 썼을 것인가!

 

윤동주 3형제가 모두 시인

그가 숨을 거둘 때 고향에는 부모님과 할아버지 그리고 두 명의 남동생(일주, 광주)과 여동생 혜원이 있었다. 그 후 남동생 일주와 광주도 시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을 싫어했고,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윤동주보다 10살 아래인 윤일주 시인(1927-85, 전 성균관대 건축공학과 교수)은 1955년 <문학예술>을 통해 등단했다. 그러나 형 동주가 시집 한권 권 내지 못하고 세상을 뜬 것이 마음에 걸려서인지 시집을 내지 않았다. 결국 그가 세상을 뜬 후 「 민들레」라는 유고시집이 나왔다. 막내 동생 광주가 시인이었던 사실을 밝힌 사람은 매형 오형범이다. 그가 죽은 지 40여 년이나 지난 후 오씨가 연길에서 광주의 시를 찾아낸 것이다. 광주는 해방 후 월남하지 못하고 중국 공산치하에서 시인으로 활동하다가 31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떴다. 1990년에 연변을 찾은 오형범은 연변일보 10년 치와 문학지 <천지>를 일일이 뒤져서 광주의 시 편들을 찾아냈다.윤동주의 유일한 혈육인 윤혜원은 부군 오형범과 함께 윤동주의 일에 앞장서고 있다. 1990년 이후, 매년 연변을 찾아 윤동주 묘지를 돌보면서 '윤동주 문학상'까지 운영하고 있다.

 

지난 2008년에는 윤동주 63주기를 맞이하여 20여 년 동안 살고 있는 시드니에서 한국, 중국, 일본, 미국, 캐나다, 독일 등지의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윤동주 연구가들을 초청해서 윤동주 문학 심포지엄을 열기도 했다. 특히 미국의 현봉학와 캐나다의 김태균씨를 초청했다. 광명학교 시절에 윤동주와 2년 동안 한 방에서 지냈던 김태균씨는 윤여문 기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윤동주의 시에서는 무슨 사상이나 무슨 주의주장으로 설명할 수 있는 시는 보이지 않지만, 그의 시를 읽으면 사랑이 생기고, 눈물 나는 참회가 생기고, 그리고 가슴이 뭉클해지는 감동이 생긴다"고 말했다.

 

14억 중국인에게 윤동주 시인을 처음 알린 사람들

윤동주는 1945년 이후 그의 고향 연길에서는 잊혀진 인물이 되었다. 그러다가 1984년 봄, 미국에 살고 있는 의학자 현봉학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간본(손자들이 낙서를 해놓은 상태)을 읽고 감동을 받은 후 그해 8월 중국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연변의 뜻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자치주정부를 찾아 윤동주에 대해 아는 사람을 찾았다. 그러나 윤동주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윤동주는 훌륭한 애국시인이었으며 일본에 의해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는 것을 알리고 그의 묘를 찾을 수 있도록 부탁하고 돌아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 다음해인 1985년 5월 중국의 개방 물결을 타고 연변대학의 객원교수로 부임했던 일본 와세다 대학 오무라 마쓰오 교수가 윤동주를 처음으로 알렸다. 그는 연변대학에 오게 된 동기를 이렇게 말했다

 

'1984년 여름 나는 일본에 와 있던 윤일주 교수를 만나 도쿄 히비아의 한 다방에서 그의 형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가 있었다...(중략) 그때 나는 윤동주 묘소와 그의 살던 고향을 찾고 싶은 강열한 충동적 욕구를 느꼈다. 그것은 윤동주를 억울하게 죽게 한 일본의 한사람으로서 느끼는 죄책감 같은 착잡한 심경 때문이었다. 윤동주를 훌륭한 시인으로 존경하는 사람으로서 그의 묘소를 참배하고 그의 한을 위무하며 더욱 진실하고 깊게 이해하기 위해 그가 고향에 남겨놓고 간 흔적을 찾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윤일주씨의 간곡한 부탁도 있었지만 윤동주의 고향을 찾고 싶은 마음은 내 스스로의 간절한 소망이기도 했다.' 라고 말했다. 오무라 교수는 1985년 4월 12일에 연길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연변 사람들은 물론 조선민족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는 학자들 까지 윤동주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오무라 교수는 공안국의 허가를 받아 5월 14일 연변대학 정판용 부총장과 권철 부교수 그리고 이해산 교수 용정중학의 한생철 선생등과 함께 윤일주 교수가 그려준 설명도를 들고 용정의 동산 교회 묘지에 가서 40년간이나 잡초에 묻혀있던 윤동주 시인의 묘지를 찾아낸 것이다. 1988년 6월에는 미국에 살고 있는 현봉학이 앞장선 미중한인우호협회(美中韓人友好協會)와 용정중학교 동창회가 힘을 합쳐 허물어진 묘지를 손보게 되었다. 그 후 2003년 5월경에는 호주 시드니에서 살고 있는 윤동주의 누이동생 윤혜원과 부군인 오형범 이 15년 만에 다시 손을 보아 그해 7월 15일에 완공하였다.

 

윤동주 유고집 발간을 위해 한겨레 역사문학연구원 창립

그러나 윤동주가 서거한지 50년이 넘도록 그의 시집이 중국에서 출판되지 못하였다. 조선족 학자들과 독자들은 한국과 일본에서 출판 된 그의 시집을 몇 권씩 어렵게 구해 돌려가며 읽고 있었다. 연변을 중심으로 960만 평방킬로미터나 되는 넓은 중국에 살고 있는 조선족 지식인들은 여러 차례 모임을 갖고 윤동주 시집을 중국어로 번역하여 전 중국 56개 민족 14억 인구에게 널리 알려야겠다는 간절한 염원으로 고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출판 경비가 문제였다. 연변대학교에서는 국내외로 출판 경비의 후원을 부탁하였으나 거듭된 실망만 있었을 뿐이었다. 그때 필자는 연변대 겸직 교수로 있으면서 정판룡 부총장과 최문식 교수를 날마다 만났다. 우리는 윤동주 시집의 중문 판 발간에 대해 논의 하였다. 그때 연변대학교 힘만으로는 이 일이 어렵다는 것을 생각했다. 한민족역사문화연구원”(훗날 한겨레 역사 문학 연구원)을 창립하게 된 이유였다. 윤동주 시집의 발간 비용의 조달을 위해서는 한국과 이어지는 연구기관이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한국의 한민족역사문화연구원(원장 김정오)과 연변대학교의 고적연구소(소장 최문식)가 힘을 모으기로 하였다. 연변대 박문일 총장을 상임고문으로 정팡용 부총장과 한국의 이상보(한글재단 이사장) 박사님을 고문으로 추대했다. 그리고 이재현 시인을 이사장으로 영입하고 출판비를 책임지도록 했다. 기획 편집은 연변대 고적 연구 소장 겸 민족 연구원장 최문식 교수와 연변대 출판사 김동훈 주필이 맡았으며, 번역은 베이징대 조선어학과 출신인 자형 선생이 맡았다. 그리고 연변대학 출판사 김경운 선생이 책임 편집을 맡았으며, 정판룡 교수와 권철 교수가 서문을 썼다. 그리고 최문식 교수가 머리말을 이재현 시인이 축사를 쓰도록 했다.

 

그렇게 해서 1997년 2월 윤동주 시집 중문판 초판 3천권을 발간하였다. 그해 3월 24일 오전 10시부터 연변의 녹원호텔에서 성대한 출판기념회와 학술대회를 가졌다. 연변대학교의 손동식 전 총장(당시 부총장)과 김병민 총장(당시 사대학장) 외 많은 학자들과 함께 연변 작가협회와 연변 사회과학원 등 저명인사들과 시인의 일가친척 등 내외 귀빈들이 대회를 빛내 주었다. 최문식 교수가 사회를 맡았고, 정판용 교수 외 몇 분이 축사를 했으며, 김정오 이해산 교수 등 5명의 학자들이 학술 발표회를 가졌다. 그리고 텔레비전 방송은 물론 연변일보와 연길석간 등 모든 언론이 특집 방송과 기사로써 윤동주 시인이 14억 중국인들에게 알려지는 역사적인 순간을 축하해 주었다. 또 윤동주의 시를 작곡한 50여곡의 노래 중 6곡을 이름 있는 성악가들의 열창으로 들려주었다.

 

같은 해 6월 27일 오후 6시 30분 전라남도 무안군 무안읍 동원 예식장에서 한민족역사문화원과(원장 김정오) 한국문인협회 무안지부(지부장 김정삼) 공동 주최로 윤동주 시집 중국어판 발간 출판 기념회를 크게 열었다 .이 자리에는 중국의 연변대학교에서 정판용 부총장과 권철, 최문식 교수가 자리를 함께 하여 자리를 빛내주었다. 그 때 필자는 윤동주 시인이 14억 중국인들에게 알려지게 된 경위를 설명했다. 그리고 목포대 대학원장 허형만 교수와 국민대 문과 대학장 장백일 교수가 서평을 해 주었으며, 최일환 목포예총회장과 전남 문협 김학래 회장 그리고 무안 문협 김정삼 회장 외 많은 문인들이 시 낭송과 축하의 말씀을 해주었다. 특히 권철 교수와 최문식 교수가“윤동주의 유고집 중문 판 출판경위“와”중국에서의 시인 윤동주 연구”라는 귀한 논문까지 발표해 주어서 더욱 알차고 값진 자료를 남기게 되었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필자는 연변대 총장과 민족 연구원장으로부터 공로패와 감사패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2천권을 더 발간하여 한국의 각처에 기증했다. 그리고 중앙일보 허의도 기자는 이 역사적인 사실을 기사로 써서 처음으로 세상에 알리기도 했다.

 

윤동주 유고 시집 중국어판의 특징

우리나라는 1885년 갑오경장 이전의 문학을 고전으로 하고 그 이후의 문학을 신문학과 현대문학으로 나누고 있다 이광수의 무정과 주요한의 불놀이를 현대문학의 효시로 보는 이유가 그것이다. 그러므로 윤동주의 문학도 우리의 잣대로 보면 현대문학에 속한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1945년 광복을 깃 점으로 그 이전의 문학을 고전으로 치고 있다.(북한에서도 그렇게 하는 것 같다) 그래서 윤동주의 작품은 1945년 이전에 씌어졌기에 고전으로 나누고 있다. 중국어판 윤동주 유고시집은 <중국 조선족 고적 총서>에 수록되어 중국의 조선 문학사에 확고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또 윤동주의 유고시집 독자들이 중국인들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원시가 한글로 씌어졌고 시인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중시하여, 한글로 된 시를 앞부분에 놓았다. 그리고 중문 번역시를 뒷부분에 놓고 편집하였다. 원시에서는 한자를 사용하지 않았고, 정장 본(精裝本)과 간장 본(簡裝本)으로 나누어 초판을 3천부 한정판으로 출판하였다. 그리고 유고집 편집은 국내외에서 발간된 시집들의 배열 순서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하였다. 다시 말해 시인이 생전에 시가를 수장한 과정과 시인의 출판 의도를 고려하였다는 것이다. 시인의 자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수를 첫 부분에 배열하였고, 산문 부분은 시인의 원고지에 씌어진 대로 창작 연대순으로 배열하고, 대표 제목으로 <별 똥 떨어진 데>란 작품을 선정하였다. 이로서 시인의 사상 감정과 시 창작 발전 면모를 알아낼 수 있도록 하였다. 또 중국의 조선족 독자들의 낭독과 이해를 돕고자 시의 원문에 대한 철자와 문장부호 띄어쓰기는 모두 현행 중국 조선어 문법의 규범을 따랐으며 한자도 간자체(簡字體)를 사용하였다. 끝으로 이 유고 시집 작품 중 시인이 생전에 <카톨릭 소년>과 <조선일보>에 발표한 12수 외에 작품의 대부분은 시인이 생전에 발표하지 못 하였다. 그러므로 이 시집을 윤동주 유고집 (尹東柱遺稿集)이라고 한 것이다. 다음은 책을 발간할 때 공이 큰 연변대 민족 연구원장 최문식 교수의 말이다.

 

“시인의 서거 52년 만에 그의 고향에서 처음으로 유고집이 출판 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소중한 역사적인 가치가 있는 일이다. 이로서 중국에서의 시인과 그의 시에 대한 연구는 새로운 시원으로 발돋움 했으며, 우리 해 내외에서 발간된 여러 시집들의 판본들과 함께 윤동주 시인이야말로 우리 범민족의 대표적인 저항 시인으로 굳건하게 자리 잡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수천만의 독자층에서 57개 민족 14억의 독자층으로 독자가 확대되었으며, 중국 조선족 문화문고에 또 하나의 문화 재보(財寶)가 입고(入庫) 되었다.”

 

"윤동주 유고집" 에서 발췌 한 일부 내용이다.

-우리는 우리 연변이 낳은 우수한 민족시인 윤동주의 빛나는 생애와 그가 남긴 보귀한 문학유산을 중국의 조선족뿐 만아니라 14억 중국 인민에게 널리 알리게 하기 위하여 중국문과 조선 문으로 윤동주 시문집을 편집 출판하기로 했다. 우리의 이 생각은 국내외 많은 유지인사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저명한 번역가인 자형선생이 윤동주의 시문을 중국어로 번역하였으며 “윤동주 유고집” 중문판, 조문판의 출판을 이처럼 적극적으로 지지해 준 김정오 교수님께 삼가 깊은 감사를 드린다.

정판룡(연변대학교 부총장), 권 철(연변대학교민족연구원장)

1996년 11월 12일 - “윤동주 유고집”p9쪽

 

-훌륭한 유고집 발행을 위해 애써주신 연변대학교 박문일 총장님과 정판룡 전임 부총장님,고적연구소소장 최문식 교수님과 그 외 이 책이 출간되기까지 여러 면에서 적극 협력해 주신 관계자여러분, 그리고 한국에서 이일을 위해 애써주신 한국 한민족문화연구원원장 김정오 교수님께 거듭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 1996년 12- “윤동주 유고집”p16쪽

 

-“윤동주유고집”의 편집출간과정에서 연변대학의 정판룡 교수와 권철 교수는 편집과 번역에 열정적인 지도를 하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서문까지 써주었다. 한국 경기대학교의 김정오 교수는 이 유고집의 출판과 그 비용 충당에 시종관심을 기울여 주었고 보귀한 건의를 제기하였다.

편자 최문식(연변대학교 고적연구소장) / 김동훈(연변대학교출판위원장) ,

1996년 12월 1일 - “윤동주 유고집”p19쪽

 

마무리

위대한 시인과 그의 명시들이 정병욱 교수로 인해 햇빛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강처증과 사후이지만 윤동주 시를 추천하여 준 정지용의 업적 또한 길이 남을 것이다. 또 윤동주 시인을 중국에 처음으로 알린 오무라마스오 교수와 윤동주 시집을 중국어로 번역하여 14억 중국인들에게 알릴 수 있도록 도움을 준 당시 연변대학의 박문일 총장, 정판용 부총장, 권철교수와 최문식 교수와 자형선생과 그밖에 연변대학교 여러 교수님들을 비롯한 많은 분들의 공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끝으로 정판용 전 연변대 부총장을 잊을 수 없다. 그는 1932년 전남 담양에서 출생하여 5살 때 가족을 따라 흑룡강성으로 이주하였다. 그 후 연변대학을 졸업하고 전 중국의 최고 지도자들인 강택민 주석 이붕 총리 등과 함께 모스코바 대학교에 국비로 유학을 떠났다. 톨스토이 문학을 전공하여 학위를 받고 귀국한 후 북경 대학 등 세계적인 대학에서 초빙도 마다하고 모교에서 후진들을 위해 교수와 부총장과 종신교수를 역임하면서 세계적인 인물들을 길러 냈다. 국내외에서 큰 인물로 추앙 받았을 뿐만 아니라 윤동주 유고집의 중문 판 발행을 위해 절대적인 후원을 아끼지 않으셨다. 그러나 2001년 가을 하늘나라로 떠나신 정판용 교수님에게 다시 한 번 존경의 뜻을 올리면서 이 글을 바친다.  이 글에 대한 더욱 자세한 내용은 2003년 한국문인협회에서 당시 사무국장이던 김창완 시인이 직접 편집 책임을 맡아 「문단유사라」는 이름으로 이미 발간되었다는 사실을 알린다..

 

 

 

김정오(金 政 吾 ) 약력

수필가, 문학평론가, 숭실대에서 박사학위 받음, 중국연변대학교 객원교수, 러시아 국립극동연방대학교 교환교수 역임, 현재 위 대학교 종신연구교수. 숭실대학교 평생교육 연구소 연구교수, 한겨레역사문학연구원 원장, 한국문인협회 이사(역), 국제 펜클럽한국본부 이사(역), 한국일보 수필공모 심사위원장(역), 한일문화대상심사위원장, 안중근의사기념관 홍보대사,「지구문학」 편집인, 대한민국 문화예술대상 수상 외 여러 문학상 수상, ,

수필집: 빈 가슴을 적시는 단비처럼- 그 깊은 한의 강물이여- 양처기질 악처기질- 한이여 천년의 한이여- 지금 우리는 어디쯤 와 있는가? -아름다운 삶을 위하여-푸른솔 이야기- (외 논저 및 평론 다수)

출처 : 문예계간지 <시와 수상문학>
글쓴이 : 정병국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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