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둑새벽 안개바다
윤 금 초
1
칭칭 몸에 휘감기는 찍찍한 그 붕대 같은,
절룩 다리 잰걸음 치는 무거운 미망의 시간
푸른빛 새벽을 겁탈한 짙은 안개 알갱이로.
2
물이 쌓여 깊이를 얻듯 한 뼘씩 자라난 그늘
허위허위 팔 저어도 멀미나는 긴 개어귀에,
이따금 젖은 제 무릎 반쯤 감추는 모래톱에.
3
포르말린 분말인가? 검은 해안을 에워싸고
울컥울컥 물미는 파도, 천 리 밖 수평선 앞에
선 채로 동살을 맞는 참 충직한 집사마냥.
4
날개 접질린 새처럼 솟구쳤다 곤두박인 물보라
똑 똑 여문 싸라기꽃을 하얗게 흩뿌려 놓고
슬픈 듯, 못내 슬픈 듯 철총마 우는 해조음을.
- 열린시학 2009 가을 호
파리야 극락 가자
- 조계산 선암사
비었다찼다비었다찼다, 절 한 채 지나면 또 절이다.
선암사엔 왜 가는가. 육백 년 묵은 매화처사 봄바람 날리러 가지, 손재주 부려먹는 사람 승선교 보러 가지, 잡을손 뜬 세상살이 속 거북한 사람 해우소 들리러 가지…. 멍들고 결린 데는 개똥, 머리털 숭숭 빠지는 데는 숫염소똥, 열병 황달에는 돼지똥, 눈 다래끼에는 제비똥, 배탈 설사에는 당나귀똥, 부종 곽란에는 소똥, 치질에는 토끼똥, 진통제는 박쥐똥, 신경통에는 묵은 인분이 특효약이지. 어서 와 속 풀어라. 꽃이나 똥이나 미추불이美醜不二 아니던가. 예나 제나 똥구멍만큼도 못한 입 구멍이 판치는 세상, 눈꼴 시려 주련 달지 않았는가. 선암사 뒷간 가서 눈물 콧물 다 쏟아내고, 꼬인 속 매듭 풀고 파리야 극락 가자.
그러게. 절도 사람도 풍경일 뿐인 것을.
- 심인보, ‘곱게 늙은 절집’ 부분 패러디.
- 열린시학 2009 가을 호
제3악장 ․ 3
윤 금 초
1
꽃, 너는 화냥년이다. 앵두 죄 불 질러 놓는,
고추장 바른 애년艾年 ♀의 입술연지 빛깔 같은.
깔 깔 깔 배꼽 홀랑 드러낸 복사꽃 비린 속살.
2
꽃, 너는 독화살이다. 건곤 다 까무러뜨리는,
사향노루 향낭처럼이나 암내 솔솔 게워내는.
할 할 할 코끝 문드러지도록 훔쳐 맡는 이 살내.
- 내일을 여는 작가 2009 가을 호
염소, 덫에 걸리다
한 목동이 염소와 나귀를 나란히 먹였습니다.
순둥이 당나귀는, 먹을 게 마냥 넌출진 순둥이 당나귀는, 건건이 푸성귀가 남아돌아갔으므로 염소가 늘 시샘을 했습니다. 골이 뿔끝에 오른 야살쟁이 염소가 끓는 부아 부쩌지 못해 씩둑거렸습니다. 때로는 흉물 떨고 때로는 이악스레 욱대기다 염소가 존조리 일렀습니다. 연자방아 돌리랴, 무거운 짐바리 나르랴, 네 삶은 고행의 연속이야. 나귀야, 내 말 새겨듣고 발작이 난 척 흙굴헝 속에 떨어져 푹 휴식을 취하는 게 어떻겠니? 오금 박는 염소 닦달에 그만 당나귀는, 순둥이 당나귀는 부러 엎어져 크게 다쳤습니다. 잰걸음 수의사를 부른 목동이 희나리 빠개듯, 희나리나 뻐개 젖히듯 댓바람에 처방전을 달랬습니다. 목소리도 또랑또랑 의사가 말했습니다. 염소 허파로 죽을 쑤어 한 두어 번 먹이세요.
우라질, 병치레 나귀 땜에 앰한 염소 초상이라니!
- 내일을 여는 작가 2009 가을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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