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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남, 「살구꽃」
마당에 살구꽃이 피었다
밤에도 흰 돛배처럼 떠 있다
흰빛에 분홍 얼룩 혹은
제 얼굴로 넘쳐버린 눈빛
더는 알 수 없는 빛도 스며서는
손 닿지 않는 데가 결리듯
담장 바깥까지도 환하다
지난 겨울엔 빈 가지 사이사이로
하늘이 튿어진 채 쏟아졌었다
그 하늘을 어쩌지 못하고 지금
이 꽃들을 피워서 제 몸뚱이에 꿰매는가?
꽃은 드문드문 굵은 가지 사이에도 돋았다
아무래도 이 꽃들은 지난 겨울 어떤,
하늘만 여러번씩 쳐다보던
살림살이의 사연만 같고 또
그 하늘 아래서는 제일로 낮은 말소리, 발소리 같은 것 들려서 내려온
神과 神의 얼굴만 같고
어스름녘 말없이 다니러 오는 누이만 같고
(살구가 익을 때,
시디신 하늘들이
여러 개의 살구빛으로 영글어올 때 우리는
늦은 밤에라도 한번씩 불을 켜고 나와서 바라다보자
그런 어느날은 한 끼니쯤은 굶어라도 보자)
그리고 또한, 멀리서 어머니가 오시듯 살구꽃은 피었다
흰빛에 분홍 얼룩 혹은
어머니에, 하늘에 우리를 꿰매 감친 굵은 실밥, 자국들
◆ 시_ 장석남 - 1965년 경기도 덕적에서 태어났으며, 198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새떼들에게로의 망명』,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뺨에 서쪽을 빛내다』 등이 있음. 김수영문학상,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함.
◆ 낭송_ 홍연경 - 서울TBN 리포터.
◆ 출전: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창작과비평사)
◆ 음악_ 권재욱
◆ 애니메이션_ 송승리
◆ 프로듀서_ 김태형
살구꽃이 오는 모양을 생각해 봅니다. 고양이 발걸음보다 가볍게, 눈송이 내리는 소리보다 더 낮게 오는 살구꽃. 바쁜 생활에 정신이 팔려 있는 사이, 세상에 살구꽃이라는 게 있는지 까맣게 잊고 있는 사이, "어스름녘 말없이 다니러 오는 누이"처럼 몰래 오는 살구꽃. 떼 지어 와서는 우리 어두운 내장 속에 은은한 광채를 확 부려놓고 떼 지어 가버리는 살구꽃. 살구꽃이 살구나무 가지와 단단하게 꿰매져 있듯이 우리 마음도 저도 모르게 살구꽃과 단단히 꿰매져 있을 겁니다.
살구꽃이 올 때가 되면 우리는 아마 "손닿지 않은 데"가 자꾸 가려울 것입니다. 어머니를 잊고 있어도,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우리 몸에는 어머니와 단단하게 꿰매고 감친 자리가 있어서 무의식중에 거기가 자꾸 가렵듯이.
문학집배원 김기택
출처 : 삼각산의 바람과 노래
글쓴이 : 흐르는 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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