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좋은 시(詩)

[스크랩] [지상중계] 문학의 현장 - 도종환 시인

운산 최의상 2013. 9. 15. 16:50

[지상중계] 문학의 현장 - 도종환 시인
“나는 저 작은 꽃보다 예쁜가”
[52호] 2011년 09월 10일 (토) 정리 / 이승희 시인
   
편집자

무더위와 장마가 우리의 일상을 짓쳐 드는 7월,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느냐며
고단한 나날의 설움을 다독여주는 도종환 시인이
문학의 현장을 찾았다.
속리산 자락의 산방(山房)에서
자연과 사람이 동등한 우애를 나누고 있다는 시인은
신사동 가로숫길의 몰자연(沒自然)을 어떻게 위로할까?
무위자연적 성찰과 사색 속에서
산다는 것의 특별한 기쁨을 누린다는 도종환 시인을 만나 본다.

■ 일시 :   7월 12일 화요일 6시 30분      ■ 장소 :   유심아카데미 세미나실

 ‘현장’이라는 말은 참 생기 있다. 그것은 뭔가 살아 있음의 느낌이기 때문일 터. 이날도 마찬가지였다. 초대시인으로 온 도종환 시인이나, 그와 함께 문학의 현장에 참여한 시인들의 눈빛, 마음 빛 모두 그러했다. 살아 있음, 이 얼마나 신나는 느낌인가. 그런 살아 있음의 열기는 시인이 절망에서 건져 낸 시편들과 함께 찬란했다.

 

하모니카 연주가 끝난 후에 도종환 시인의 시 〈해인으로 가는 길〉 〈담쟁이〉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 등 세 편을 정숙자, 안정애, 최도선 시인이 낭독했다. 그리고 흰 바탕 검정 꽃무늬의 반소매 셔츠 차림의 도종환 시인이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 작품을 시작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산벚나무 잎 한쪽이 고추잠자리보다
더 빨갛게 물들고 있다 지금 우주의
계절은 가을을 지나고 있고, 내 인생의
시간은 오후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에
와 있다 내 생의 열두 시에서 한 시
사이도 치열하였으나 그 뒤편은
벌레 먹은 자국이 많았다

 

이미 나는 중심의 시간에서 멀어져
있지만 어두워지기 전까지 아직
몇 시간이 남아 있다는 것이 고맙고,
해가 다 저물기 전 물들이는 찬란한
노을과 황홀을 한번은 허락하시라는
생각만으로도 기쁘다

 

머지않아 겨울이 올 것이다 그때는
지구 북쪽 끝의 얼음이 녹아 가까운
바닷가 마을까지 얼음조각을
흘려보내는 날이 오리라 한다 그때도
숲은 내 저문 육신과 그림자를
내치지 않을 것을 믿는다 지난봄과
여름 내가 굴참나무와 다람쥐와
아이들과, 제비꽃을 얼마나
좋아하였는지,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보낸 시간이 얼마나 험했는지 꽃과
나무들이 알고 있으므로 대지가
고요한 손을 들어 증거해줄 것이다

 

아직도 내게는 몇 시간이 남아 있다
지금은 세 시에서 다섯 시사이
   ―도종환 〈세시에서 다섯 시 사이〉 전문

이 시를 쓸 무렵에 제 인생을 시간으로 바꾸어보면 세 시는 넘은 것 같고, 네 시 무렵 혹은 네 시도 조금 지난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지금 다시 읽으면서 보니 거의 다섯 시쯤에 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 곧 어둠이 오겠지요.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생각하면, 그동안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게 되고, 그러면 조바심이 나거나 의기소침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것도 얼마든지 다르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직도 몇 시간이나 남았네.’ 이렇게 생각하자는 거죠. ‘그래 아직도 몇 시간이 남았다. 그리고 아직도 남아 있는 몇 시간을 고맙게 생각하자.’ 고맙게 생각하면서 이 시간을 살자는 거죠. 저는 과거에도 그랬지만 시를 붙들고 살아왔고, 앞으로도 또 남은 몇 시간을 시를 붙들고 살 텐데, 그렇게 시를 붙들고 남은 시간을 살아내면서 정말 좋은 시를 쓸 수 있다면 그것은 오히려 감사할 일이 아닌가, 이 시를 쓰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초록은 연두가 얼마나 예쁠까?
모든 새끼들이 예쁜 크기와 보드라운 솜털과
동그란 머리와 반짝이는 눈
쉼 없이 재잘대는 부리를 지니고 있듯
갓 태어난 연두들도 그런 것을 지니고 있다
연두는 초록의 어린 새끼
어린 새끼들이 부리를 하늘로 향한 채
일제히 재잘대는 소란스러움으로 출렁이는 숲을
초록은 눈 떼지 못하고 내려다본다
          ―도종환 〈연두〉 전문

 

지금 제가 지내는 곳은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 법주리라는 곳입니다. 약 9년 전쯤에 병을 핑계로 들어와 지금까지도 지내고 있습니다. 이곳은 해마다 4월 20일경이면 연둣빛 잎들이 온 산 어느 한 곳 빠지지 않고 일제히 돋아납니다. 제가 살고 있는 집은 깊은 산 속 숲의 배꼽처럼 쏙 들어간 곳 비탈에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 무렵이면 온 세상이 연두천지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온 산에 연둣빛이 일제히 돋아나는 장면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뿐만 아니라 그 사이에 연분홍 산벚나무 꽃이 어우러져 있는데, 그게 한 일주일 열흘, 5월 초까지 끊임없이 조금씩 변하면서 움직입니다. 그게 또 얼마나 예쁜지 몰라요. 그럴 때마다 이런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연두는 특히 제 마음을 끄는데요, 새끼 때 예쁘지 않은 게 없잖아요. 강아지나 병아리도 어미 때와는 다릅니다. 동그란 눈과 앙증맞은 입을 갖고 있고요. 그리고 아주 여린 빛의 솜털과 얼굴 모양이 우리가 봐도 아주 예뻐요. 짐승의 새끼들이 다 그래요.

그런데 우리가 봐도 저렇게 예쁘니, 어미가 보면 얼마나 예쁘겠습니까? 연둣빛도 그렇습니다. 일제히 돋아났을 때 새끼손톱만 한 잎들이에요. 그러면 그것을 이렇게 돋아나게 해놓고 나무들은 그것을 얼마나 예뻐할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그러니 연두는 초록의 어린 새끼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런 연두를 생각하면 저도 덩달아 예뻐서 방에서 마당으로 마당에서 뒤뜰로 막 왔다 갔다 합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나무들 아래에는 여러분도 이미 통성명을 해서 아시는 제비꽃, 민들레 씀바귀꽃, 꽃다지는 물론이고, 많이 인사를 나누지 않은 더 작은 주름꽃, 봄맞이꽃 같은 콩깍지만 한 눈물방울만 한 꽃들도 좍 핍니다. 멀리 보는 산 풍경도 예쁘지만 그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앞뒤마당의 작은 꽃들도 얼마나 예쁜지 모릅니다.

 

가까이 가서 들여다보면 예쁘지 않은 꽃은 없습니다. 우리 시인들은 남들이 하찮다고 하고, 별거 아니라고 하는 사물과 현상, 사람과 일, 이런 것을 가까이 가서 깊이 들여다보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거기서 무엇인가 발견하고 창조하고, 사유의 눈으로 보고, 그것을 글로 써내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 생각합니다. 그럼으로써 남들의 인생에, 남들의 세계관에 아름다운 영향을 주는 일을 하면서 사는 사람들인 거죠. 그러려면 우리가 먼저 늘 아름답게 살려고 하고, 아름답게 보려고 하고, 깊이 있게 들여다보려고 하는 눈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법정 스님께서도 《한 사람은 모두를 모두는 한 사람을》이라는 책에서 그런 것들이 별거 아니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정말 감사한 마음으로 바라봐야 하고, 신비로운 힘의 모습으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는 했습니다.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우리가 그런 꽃을 보고 감탄하고, 좋아하고, 그 옆에 같이 있고 싶어하는 것은 인간의 내면에 꽃다운 요소를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내면에 있는 그 아름다운 요소를 살려서 얼마나 아름답게 꽃 피울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것을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님께서 말씀하신, 그런 눈을 회복하는 일이 문학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먼저 회복해야 남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고, 그리고 남들에게 아름다운 영향을 주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예로 박완서 선생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쓰신 글에서 정원에 피어 있는 꽃들의 출석을 부르신다고 하셨습니다. 저도 흉내를 내서 집에 있는 꽃들의 출석을 불러본 적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해마다 못 본 것들도 하나씩 더 와서 거기 참여해 있었습니다. 아마도 지난해에 보았으면서도 제대로 못 봤던거라 생각해요. 그런데 어느 날은 출석을 부르면서 이것은 이미 박완서 선생님이 다 하신 거잖아 하는 생각이 들어서, 가까이 가서 제비꽃을 보고 “제비꽃 양 참 예쁘게 피웠는데, 요렇게 손톱만 한 꽃을 피워놓고 정말 이게 최선을 다한 거예요? 확실해요?” 하고 물어봐요. 또 봄맞이꽃이나 주름꽃처럼 더 작은 꽃들에게도 물어봅니다. “정말 이게 최선을 다한 거예요? 확실해요?” 이러면 이 꽃들이 뭐라고 대답할까요? 열이면 열 다 “그럼요, 최선이죠.”라고 대답합니다.

 

최선을 다해 피우지 않는 꽃은 없습니다. 그 꽃 피운 모습이 남에게 기쁨이 되고 있고, 내가 달라진 만큼 세상이 아름다워진다는 걸 보여주면서 피어 있는 게 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자기가 가진 모든 힘을 다해 피웠고요, 그것이 남에게 기쁨이 되고 있고, 아름다움이 되고 있고, 내가 변한 만큼 세상이 변한다고 생각하며 꽃 피우고 있어요. 그러니까 저 작은 꽃 하나가 그냥 꽃이 아닌 거란 말이죠. 과연 우리는 저것보다 잘 살고 있는지 묻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저 작은 들꽃 한 송이보다 잘 살고 있나? 나도 최선을 다하고 있나?  내가 최선을 다한 모습이 남에게 아름다움이 되고 있나? 기쁨이 되고 있나?’ 그리하여 나는 나 자신의 삶을 꽃피우고 있나 하는 것을 묻게 되는 것입니다.

 

꽃은 진종일 비에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
빗방울 무게도 가누기 힘들어
출렁 허리가 휘는
꽃의 오후
꽃은 하루 종일 비에 젖어도
빛깔은 지워지지 않는다
빗물에 연보라 여린 빛이
창백하게 흘러내릴 듯
순한 얼굴

 

꽃은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
꽃은 젖어도 빛깔은 지워지지 않는다
           ―도종환 〈라일락 꽃〉 전문

 

〈라일락꽃〉이라는 시를 쓸 때도 그랬습니다. 길을 걸어가는데, 어디선가 달콤한 향기가 번져와서 뒤를 돌아보니 골목 끝에 라일락 꽃나무 한 그루가 있었습니다. ‘하루 종일 비가 내리는데 이렇게 멀리까지 향기를 보내네?’ 하는 생각을 하다가 ‘향기는 꽃의 언어니까 향기로 말을 걸고, 나를 부르는 이유가 있겠지?. 왜 향기로 나를 불렀을까? 한 번 가볼까?’ 이렇게 생각하고 꽃나무에게로 가까이 갔습니다. 그리고 주위를 서성이다 “꽃은 진종일 비에 젖어도/ 향기는 비에 젖지 않는다”라는 말과 만났습니다. 이것은 제가 비 맞는 라일락꽃을 보다가 머릿속의 생각과 충돌하면서 툭 튀어나온 한 줄의 시겠지라고 생각해도 되지만, 저는 ‘이 말을 하려고 꽃이 향기로 지나가는 나를 불렀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베껴 적는 것이 시라고 생각합니다.

 

  사물이나 어떤 현상, 사람의 일이 내 생각과 부딪히면서 또는 그것에 귀를 기울이는 동안 그것이 내게 건넨 그 말을 들었다가 옮겨 적고, 베껴 적는 게 바로 우리가 쓰는 시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남들이 별거 아니라고 생각한 것의 주위를 서성이고, 바라보고 그러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남들이 별거 아니다, 하찮다고 하는 것을 하찮게 보지 않는 그런 눈을 가진 사람들, 그게 시인 아닙니까?

 

라일락꽃이 빗속에서 향기를 멀리까지 보낼 때 사실은 저를 불렀던 것은 아니겠지요.  절박하게 빗속에서라도 꽃 피우지 않으면 안 될, 수정하지 않으면 안 될 그 어떤 절박함 때문에 그 멀리까지 빗속에서도 향기를 보내고 있었을 텐데, 괜히 제가 개입하는 거죠. 그 장면에 개입해서 ‘혹시 나를 부른 건 아닐까’ 생각하는 거죠. 그렇게 또 엉뚱하게 개입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시인인 거죠. 제 주위에 있는 어떤 사물과 현상 이런 것들에 자꾸 개입하고 싶어 하고, 가능하면 창조적으로 개입하고 싶어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시인입니다.

 

내가 분꽃씨만 한 눈동자를 깜빡이며
처음으로 세상을 바라보았을 때
거기 어머니와 꽃밭이 있었다
내가 아장아장 걸음을 떼기 시작할 때
내 발걸음마다 채송화가 기우뚱거리며 따라왔고
무엇을 잡으려고 푸른 단풍잎 같은 손가락을
햇살 속에 내밀 때면
분꽃이 입을 열어 나팔소리를 들려주었다

 

왜 내가 처음 본 것이 검푸른 바다 빛이거나
짐승의 윤기 흐르는 잔등이 아니라
과꽃이 진보라 빛 향기를 흔드는 꽃밭이었을까

 

민들레만 하던 내가 달리아처럼 자라서
장뜰을 떠나온 뒤에도 꽃들은 나를 떠나지 않았다
내가 사나운 짐승처럼 도시의 골목을 치달려갈 때면
거칠어지지 말라고 꽃들은 다가와 발목을 붙잡는다
슬픔 속에 잠겨 젖은 얼굴을 파묻고 있을 때면
괜찮다고 괜찮다고 다독이며
꽃잎의 손수건을 내민다

 

지금도 내 마음의 마당 끝에는 꽃밭이 있다
내가 산맥을 먼저 보고 꽃밭을 보았다면
꽃밭은 작고 시시해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꽃밭을 보고 앵두나무와 두타산을 보았기 때문에
산 너머 하늘이 푸르고 싱싱하게 보였다
꽃밭을 보고 살구꽃 향기를 알게 되고
연분홍 그 향기를 따라가다 강물을 만났기 때문에
삶의 유장함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처음 눈을 열어 세상을 보았을 때
거기 꽃밭이 있었던 건 다행이었다
지금도 내 옷 소매에 소박한 향기가 묻어 있는 것이
            ―도종환 〈꽃밭〉 전문

 

제가 시작하면서 꽃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요, 제 인생의 새벽쯤에 제일 먼저 본 것이 무얼까 생각해보니 어머니와 꽃이었습니다. 세 살, 네 살 이 무렵의 한두 장면이 기억에 남습니다. 가장 먼저 본 것은 분명히 어머니였을 텐데, 꽃밭에 대한 기억만이 선명해요. 그 꽃밭에는 분꽃, 과꽃, 채송화, 봉숭아, 달리아 뭐 이런 꽃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내 인생의 아홉 시 열 시 시절에는 비록 시골에서 살았지만 단란했던 시간이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열 시 넘어서부터는 그 단란함이 깨지고 냉혹한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친척들 집에 얹혀살아야 했고, 우리 집이 망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고, 친척들이 나를 학교에 보내주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내 인생의 아홉 시 열 시 이후는 참 추운 시기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벌목을 하다 잠시 쉴 때면 자작나무에 등을 기댄 채 떨어진 자작나무 껍질 주워 편지를 쓰곤 했다 자작나무 껍질은 희고 얇아서 마음의 몇 조각을 옮겨 적기에 알맞았다 백 년에 이 백여 리씩 녹으며 후진하는 빙하가 남긴 영토를 따라 우리는 북쪽으로 올라갔다 야크와 순록과 여우가 먼저 올라갔고 늑대의 발자국을 따라 우리가 그 뒤를 따랐다

 

빙하기로부터 시작한 내 어린 날의 결빙이 언제 풀어질지 그때는 짐작할 수 없었다 월세 이천 원짜리 쪽방에 기거하는 동안 연탄불이 자주 꺼졌다 손도끼로 침엽수 도막을 잘게 부수어 십구공탄에 불을 붙이는 동안 삶은 매캐했고 문짝도 없는 부엌에서부터 일찍 어두워졌다 내가 눕는 윗목에는 그릇의 물이 바로바로 얼었고 내 몸도 밤새 달그락거렸다

 

추운 지방에 사는 사람들이 늘 그렇듯 나는 말이 없었고 한 마을에 사는 친구와도 졸업 때까지 두세 마디 짧은 말밖에 주고받지 않았다 말을 할 때도 눈을 내리깔거나 시선을 피하는 것은 영하의 숲에 사는 이들의 특징이기도 했다 그러나 추위는 사람을 느리지만 끈질기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흑야는 길었고 일찍 진 해는 늦게 떠올랐다 수렵을 그만둔 아버지도 정착할 곳을 정하지 못한 나도 각각 우울하였다 보드카는 추위를 이기기에 좋았다 고독한 늑대 한 마리 멀리서 측은하게 나를 바라볼 때도 있었다 그때 고독한 것들에게 보낸 자작나무 엽서는 어느 숲과 바람 속을 떠돌고 있을까 생각하는 저녁이면 어둠과 칼바람이 친구처럼 찾아와 오래 곁에 머물곤 했다
                 ―도종환 〈빙하기〉 전문

 

난 그림을 그리고 싶었지만 그 길을 갈 수가 없었습니다.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고, 내가 만화를 그려놓으면 친구들이 오 원, 십 원씩 주고 사갈 정도로 잘 그렸고, 그래서 나는 어른이 되면 그림 그리는 일을 하면서 살 거라고 생각했어요. 제 가슴속에는 지금도 한 소년이 남아 있어요. 바로 여러분도 아시는 그 소년입니다. 가난하고, 할아버지와 함께 늘 일하고 살지만, 남들이 버린 강아지 데려다가 같이 살면서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던, 열심히 일하며 사는 그 소년. 그 소년은 좋아하는 소녀도 있었지만, 소녀의 가족들에게 제대로 이해받지 못했고, 그 무렵 그렇게 기대고 의지하던 할아버지도 성탄을 얼마 앞두고 돌아가신 후에 그 소년은 자기가 그토록 좋아하던 그림 앞에서 쓸쓸하게 죽어갔습니다. 아시죠? 바로 그 소년이 제 가슴에 남아 있어요. 그 소년이 시를 쓰게 합니다. 좌절이 시를 쓰게 하고, 겨울바람을 기억하게 하고, 냉혹했던 시간을 떠올리게 하고, 그리고 나를 자꾸 시 쓰는 쪽으로 밀어 올리곤 합니다.

 

고등학생 시절에 집안 사정이 어렵고, 아버지가 정착을 못 해서 혼자 지내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학교에서 집으로 자전거를 타고 돌아오다가 강둑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한참을 울던 시절이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 대학 가는 것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그림도 물론 접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중에 친척들이 “객지에서 고생하지 말고 고향에 내려오면 밥을 안 굶을 거다. 그리고 국가에서 등록금 대주는 사범대학에 가라, 그게 유일하게 살 수 있는 길이다.” 하는 말씀을 듣고 고향에 있는 국립대 사범대학을 들어갈 때도 미대를 못 가고 돈 제일 안 들어가게 생긴 과를 생각하다가 국어교육과를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방황도 많이 하면서 퇴폐적 낭만주의자로 살던 시절도 있었어요. 수업시간에도 강의가 마음에 안 들면 교수님 판서하실 때 소주를 꺼내 따라 마시고, 그런 시절이었는데, 그런 저를 문학 끼가 있는 것으로 생각한 문학서클 선배들이 저를 끌고 간 것이 제가 지금 걷고 있는 시의 길의 단초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20대 중반 넘어서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대학원을 진학했습니다. 졸업하고 바로 군대를 가야 하는데, 아버지가 담석증에 걸려서 생활문제의 마땅한 대책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대학원에 진학해서 군대를 연기하고, 몇 년 동안 교직에 나가서 생계문제를 책임졌던 것이죠. 졸업 후에 나이가 들어서 군대를 갔는데, 1980년 5월에 광주와 만나게 되었습니다.

 

제겐 커다란 충격이었고, 그런 격변을 겪고 부딪치고, 충돌하면서 20대 후반에 문단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등단하여 작품활동을 시작하려고 보니까 발표 매체들이 싹 없어져 버린 상태였습니다. 문지나 창비 등 문학지들을 포함하여 정기간행물을 발행하지 못하게 하던 시기와 겹쳐버린 거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시대와 불화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더욱 그 시대를 뜨겁게 살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살면서 그 시대를 통과할 수밖에 없었던 거죠.

 

그렇게 제 인생의 열 시 이후부터 어긋나기 시작해서 이후 열한 시, 열두 시, 한 시 치열하게 살았다고 말하지만 현실적으로 보면 참 안 풀리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나아지고 괜찮아지려다 보면 아주 어려운 일이 생기고, 이것이 지나서 나아지겠지 싶으면 또 다른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머니께서 늘 제게 자주 하신 말씀 중엔 거창한 말씀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아프지 말고, 화목하게, 남에게 엄한 소리 듣지 말고, 너무 험한 길 가지 말고. 그렇게 좀 살아라.” 늘 말씀하신 게 그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평범한 요구를 하나도 못 들어드렸어요. 내 인생의 열 시부터 한 시에서 두 시로 이어지는 그 시기에 상처를 했다던가, 감옥을 갔다던가, 직장에서 쫓겨났다던가 하는 그런 시간을 보냈어요.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 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방울 없고 씨앗 한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도종환 〈담쟁이〉 전문

 

모든 어려움을 벗어났다 싶은 시기가 왔고, 국가에서 민주화운동 유공자 증서도 받았고, 직장도 돌아갈 수 있었으므로 대학에서 겸임교수 하던 것을 그만두고 충청도 시골중학교로 가서 정말 행복하고 즐겁게 선생 노릇 하면서 살았는데 덜컥 병이 들었습니다. 많은 어려움이 다 지나가고 이제 좋은 일만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정작 좋아야 할 때가 되어서는 몸에 병이 들어서 가졌던 모든 것을 다 잃고 아주 깊고 적막한 산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거죠. 누구와 이야기를 할 수도 없고, 모든 인간관계는 끊어지고, 직장에 못 나가니 수입도 없이 몇 년이 그냥 흘러가는 그런 세월이었습니다.

 

‘유배라는 것이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내 인생은 왜 이런가 하는 원망을 많이 하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거죠. ‘하느님이 정말 나를 버리시는 걸까? 내 인생은 여기서 이렇게 끝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그동안 어려움 속에서도 다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시고 담쟁이 같은 시를 주셨는데, 벽을 만났을 때마다 그 벽에서부터 시작하는 힘과 용기를 주셨는데, 지금 이 상태로 버리는 걸까? 그럼 받아들여야 하는 게 아닌가. 너의 역할은 여기까지라고 하면 그것조차 받아들여야 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한 것이죠. 내 목숨도 삶도, 재능도 다 내 것이 아니고 받은 것인데, 거두어가겠다면 드려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생각 후에는 안 아프게 해주세요라는 기도가 아니라, ‘죽이시든 살리시든 다 맡기겠습니다. 따르겠습니다’ 하고 생각하니 좀 편해지더라고요. ‘더 이상 시를 못 쓰면 어쩌나 그렇게 생각 말고, 시라도 쓸 수 있도록 해주시니까 쓰는 거다’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이자 비로소 마음의 평화가 왔습니다. ‘그만 쓰라 하면 그만 쓰자’ 이렇게 생각하면서부터 비로소 마음이 편해지고, 삶의 패턴이 바뀌고, 온갖 스트레스와 일에 대한 무거움을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화엄을 나섰으나 아직 해인에 이르지 못하였다
해인에 가는 길에 물소리 너무 좋아
숲 아랫길로 들었더니 나뭇잎소리 바람 소리다
그래도 신을 벗고 바람이 나뭇잎과 쌓은
중중연기 그 질긴 업을 풀었다 맺었다 하는 소리에
발을 담그고 앉아 있다
지난 몇십 년 화엄의 마당에서 나무들과 함께
숲을 이루며 한 세월 벅차고 즐거웠으나
심신에 병이 들어 쫓기듯 해인을 찾아간다
애초에 해인에서 출발하였으니
돌아가는 길이 낯설지는 않다
해인에서 거두어 주시어 풍랑이 가라앉고
경계에 걸리지 않아 무장무애하게 되면
다시 화엄의 숲으로 올 것이다
그땐 화엄과 해인이 지척일 것이다
아니 본래 화엄으로 휘몰아치기 직전이 해인이다
가라앉고 가라앉아 거기 미래의 나까지
바닷물에 다 비친 다음에야 화엄이다
그러나 아직 나는 해인에도 이르지 못하였다
지친 육신을 바랑 옆에 내려놓고
바다의 그림자가 비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누워 있다
지금은 바닥이 다 드러난 물줄기처럼 삭막해져 있지만
언젠가 해인의 고요한 암자 곁을 흘러
화엄의 바다에 드는 날이 있으리라
그날을 생각하며 천천히 천천히 해인으로 간다
           ―도종환 〈해인으로 가는 길〉 전문

 

그러면서 지금 처해 있는 이 고요한 시간을 불교 용어로 말하면 ‘해인’에 와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살아서 이루고자 했던 시간을 화엄의 세상이라고 한다면, 이렇게 하늘이 바다에 도장을 찍은 것처럼 비치는 고요함 즉, 바다 해(海) 도장 인(印) 자를 써서 해인의 상태라고 해보자. 이 고요한 상태를 무기력한 상태라고 보지 말고, 이것과 내가 이루고자 했던 세상이 둘이 아니라 하나일 수 있을 테니, 해인과 화엄이 둘이 아니라 하나가 되는 시간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고 좀 더 여유를 갖고 멀리 보자.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작가가 혼자 조용히 혼자 읽고 쓰고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이러면서 《해인으로 가는 길》이라는 시집에 실려 있는 시들을 다시 쓰게 되었던 것이죠.

 

문학하는 후배들과 술자리에서 “문학청년 시기에는 낭만주의자였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 리얼리스트가 됐어.”라고 말하니, 그 말을 듣던 후배가 “선배는 리얼리스트가 아니고 계몽주의자예요.” 그러더라고요. 저는 “리얼리스트에 계몽주의자지.” 하면서 막 웃었지만 뜨끔했어요. 내 딴에는 치열하게 사는 리얼리스트라고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니 교육운동이나 그런 것을 하면서 쓰고 있는 시가 계몽적인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계몽이 필요한 시대도 있는 것이지만, 파블로 네루다가 말하길 ‘리얼리스트가 아닌 시인은 시인이 아니다’라고 했어요. 그다음에 ‘리얼리스트에 불과한 시인 또한 시인이 아니다’라고 말했지요. 우리를 아프게 하는 말이지만 맞는 말이거든요. 내가 리얼리스트라고 말했지만 어쩌면 리얼리스트에 불과한 시인이었는지도 모르지요. 그리고 체제와 불화하면서 썼던 그 많은 시들이 치열했다고 말을 하지만 할 말이 너무 많았던 거죠. 많은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거죠. 그런 당위로 시를 썼고, 그러다 보니 산만했고, 문학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고, 결국은 내가 병들어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많은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시와 함께한 시대를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것이 지나친 욕심이었던 거죠.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의 일을 해야 하고, 쓸 수 있는 만큼의 시를 써야 하는데 너무 많은 말을 하고 너무 많은 일을 하려고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던 거죠.

 

그러면 이제 나는 무슨 일을 할 것인가 생각해보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한 편의 좋은 시를 쓰는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지금 다섯 시에 와 있다면, 앞으로 주어진 시간을 고맙게 받아들인다면 내가 무얼 해야 하는가. 역시 한 편의 좋은 시를 쓰는 일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아홉 권 열 권의 시집을 냈다 이것을 자랑할 게 아니라 그중에서 정말 죽은 뒤에도 남을 만한 시 한 편이 있다면 뭐냐 물었을 때 나는 뭐라고 할까. 생각해보니 없어요. 제대로 된 한 편의 시를 쓰는 것도 정말 중요한데 그것을 못했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바이올린 켜는 여자와 살고 싶다
자꾸만 거창해지는 쪽으로
끌려가는 생을 때려 엎어
한 손에 들 수 있는 작고 단출한 짐 꾸려
그 여자 얇은 아랫턱과 어깨 사이에
쏙 들어가는 악기가 되고 싶다
왼팔로 들 수 있을 만큼 가벼워진
내 몸의 현들을 그녀가 천천히 긋고 가
노래 한 곡 될 수 있다면
내 나머지 생은 여기서 접고 싶다
바이올린 켜는 여자와 연애하고 싶다
그녀의 활에 내 갈비뼈를 맡기고 싶다
내 나머지 생이
가슴 저미는 노래 한 곡으로 남을 수 있다면
내 생이 여기서 거덜 나도 좋겠다
바이올린 소리의 발밑에
동전바구니로 있어도 좋겠다
거기 던져 주고 간 몇 잎의 지폐를 들고
뜨끈한 국물이 안경알을 뿌옇게 가리는
포장마차에 들러 후후 불어
밤의 온기를 나누어 마신 뒤
팔짱을 끼고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싶다
바이올린 켜는 여자와 살 수 있다면
         ―도종환 〈바이올린 켜는 여자〉 전문

 

언젠가 KBS에서 하는 공연을 본 적이 있는데요, 간주 부분에 바이올린을 연주하는데,  그 소리가 정말 가슴을 후벼 파는 것 같았어요. 그 사람은 무명의 바이올리니스트였지만 제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던 거죠. 그렇다면 내 시는 다른 사람의 가슴을 저렇게 뒤흔들어 놓았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런 시를 못 썼다면 이제라도 그런 시를 써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또 한 번 했습니다.

 

우리 시인들이 무슨 힘을 갖고 있습니까. 힘이 있다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을 가졌다는 게 유일한 힘이겠지요. 우리는 남의 마음을 움직일 힘을 가졌고, 남의 인생에 아름다운 영향을 줄 수 있는 힘을 가졌잖아요. 내 시는 저 바이올리니스트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한 번이라도 흔들기나 했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저런 바이올린 켜는 여자와 살아서 좋은 시 한 편을 쓸 수 있다면 바이올린 켜는 여자와 연애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이 시를 써보았습니다. 그만큼 한 편의 좋은 시를 쓰고 싶다는 말로 받아들였으면 합니다.

해가 저물기 전에, 이제는 저무는 시간만이 남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해가 다 지기 전에 반드시 찬란한 노을이 하늘 전체를 덮는 시간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시간이 있다는 것을 믿고 살자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찬란한 노을이 한 번은 분명히 허락된다는 생각만으로도 얼마나 기쁜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내 나머지 시간 여섯 시 일곱 시 혹은 여덟 시 주어진 시간을 시와 함께 문학과 함께 살자는 것입니다.


청중과의 대화

 

―많은 사람들이 도종환 시인의 지금까지의 대표작으로 〈담쟁이〉와 〈접시꽃 당신〉을 기억합니다. 첫 번째는 그것에 만족하시는지 궁금하고, 그것이 아니라면 대표작품을 쓸 수 있는 가능성을 본인은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묻습니다.

 

▲ 많은 사람들이 저와 〈접시꽃 당신〉을 동시에 떠올리는 경우가 많고, 최근에는 〈담쟁이〉를 많이 거론하시니까, 그것이 대표작이냐 물으면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다만 〈접시꽃 당신〉은 너무 갑자기 대중적으로 이야기되다 보니 그것이 대중성이 있으면 문학성이 없는 작품일 거라고 대부분 생각하기 때문에 제가 그것을 어떻게 뛰어넘어야 할 것인가가 저에게는 늘 과제인데, 평생에 걸쳐 풀어야 하는 문제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한 그 두 편이, 아까 제가 말한 오래도록 남을 그 한 편의 시냐 그러면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을 아직 못 썼다고 생각하고, 써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리고 쓸 수 없을지 있을지는 모르지만 쓰기 위해 정말 남은 시간 동안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시와 더불어서 인생을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처음에 낭독한 〈해인으로 가는 길〉에서 해인이란 말이 어렵다고 여쭤본 적이 있는데요, 그래서 시 설명에서 혹시 가볍게 넘어간 부분이 있다면 좀 더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 해인은 해인사 할 때 그 해인이고, 화엄은 화엄사 할 때 그 화엄입니다. 둘 다 불교용어죠. 그리고 ‘해인’은 좀 전에 말씀드린 대로 바다 해, 도장 인입니다. 그러니까 하늘이 바다에 그대로 도장 찍은 것처럼 비치는 맑고 고요한 바다의 상태, 그러한 고요한 깨달음의 상태를 불교에서 해인이라고 하죠. 제가 그 용어를 만나게 된 것은 제가 지내는 산방하고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지금은 다른 이들도 한둘 들어와 살고 있지만, 처음에 들어가 살 때는 정말 아주 깊은 산 속에 집 한 채였고, 낮에도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 곳이었어요. 워낙 동네와 멀리 떨어진 곳이고, 원래는 스님의 토굴이 하나 있었는데 그 토굴 옆에 집을 지은 것으로 그 스님이 떠나신 후 산속에 낮에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 그런 곳이었어요. 그런 곳에 혼자 몸이 아픈 채로 아무것도 안 하고 지내는데요, 하루 이틀, 일 년, 이년 이렇게 지내다 보니 내가 있는 곳을 불교용어로 비유한다면 해인과 가까운 고요한 상태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직장도 그만두고 몸은 아프고 가만히 앉아서 아침에 한 시간씩 매일 명상과 기도를 할 때와 그것이 막 끝난 상태에서 고요해진 마음의 상태, ‘이것이 해인이다’ 하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해인을 완전히 이룬 것은 아니고 해인으로 가는 과정에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고요한 상태를 매일매일 경험하는 거죠. 그럼 ‘내 인생의 목적이 이거였나? 참선하고 혼자 각성하는 길인가? 아파서 들어오기 전에는 화엄의 대동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꿈이 더 컸는데, 내 생의 목표가 바뀐 것인가?’ 그건 아닙니다. 의지와 다르게 병이 들었고, 그런 상황에서 고요한 상태를 만나고 있는 거죠. 그럼 ‘내가 꿈꾸던 화엄세상의 목표는 어찌 된 건가? 별개의 것인가 하나인가?’ 완전히 다른 방식의 세계일 수도 있지만 큰스님 말씀에 의하면 그것은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거죠. 화엄으로 휘몰아치기 직전이 해인이라는 거죠. 무엇이든 그런 정신세계를 가지고 해야만 하화중생이 될 수 있다고 하시는 거죠. 그래서 그 둘이 하나가 되는 때를 만나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문학에서든 삶에서든 그런 것을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를 생각하면서 화엄과 해인이라는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정리 / 이승희(시인)

 


 <가져온 곳 : 유심>

- http://www.yousim.co.kr/news/articleView.html?idxno=5242 

 

 

출처 : 너에게 편지를
글쓴이 : 흐르는 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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