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시인마을

서지월

운산 최의상 2012. 12. 14. 12:18

 

 

서지월

 

[문예시대](2008.봄)<시인포커스>서지월 시-''가난한 꽃' 외9편 ∵∵∵∵∵

<1>가난한 꽃

<2>江물과 빨랫줄

<3>첫 뻐꾸기 울음소리

<4>파냄새 속에서 

<5>푸른 하늘의 뜻은

<6>소월의 산새는 지금도 우는가

<7>비슬산 참꽃

<8>韓國의 달빛

<9>朝鮮의 눈발

<10>밥그릇

 

가난한 꽃

                                    서 지 월 

 

 

금빛 햇살 나려드는 산모롱이에

산모롱이 양지짝 애기풀밭에

꽃구름 흘러서 개울물 흘러서

가난한 꽃 한 송이 피어납니다.

 

나그네가 숨이 차서 보고 가다가

동네 처녀 산보 나와 보고 가다가

가난한 꽃 그대로 지고 맙니다.

 

꽃샘바람 불어오는 산고갯길에

고개 들면 수줍은 각시풀밭에

산바람 불어서 솔바람 불어서

가난한 꽃 한 송이 피어납니다

 

 행상 가는 낮달이 보고 가다가

동네 총각 풀짐 놓고 보고 가다가`

꽃 그대로 지고 맙니다.

 

 

江물과 빨랫줄

                                      서 지 월 

 

오늘도 어머니는 강물을 훔쳐 와

한 자락씩 줄에 너신다.

누런 호박오랭이 썰어 말리듯이

햇빛은 항시 정면으로 부딪쳐 오는 것이지만

얼굴 없는 바람은 부뚜막 위에서 불고

장독대를 넘어와 어머니의 허이여신 머리칼 위에도 분다.

 

하늘과 땅 그 크낙한 화해를 위해

세상의 이쪽과 저쪽의 분별을 위해

두 귀 바지랑대는 생명의 줄을 튼튼히 받치고 있다.

 

천년풍우 그 어느날에도 우리의 祭器, 祭器 같은 것.

먼 산 그리메 숱한 메밀밭 위으로 낮달이 조을고

젖은 빨래의 그 휴식의 표정을 보고 있으면

파란 하늘은 아득히 멀고 나는 왠지 눈물이 핑 돈다.

 

 

첫 뻐꾸기 울음소리

                                               서 지 월

 

 

누이의 버선코를 돌아서 오는 것 같네.

빨랫줄에 널린 빨래 더욱 눈부신 대낮,

후미진 골짜기마다 魂불 놓아

 

사월이라 초파일 엄마는 절에 가시고

나는 그 소리 들으며 대청마루에 앉아 댓돌 보네 댓돌 보네.

곳간 절구방아 멈춘 지 오래 병풍 가린 문간방에

잠든 누이야 사푼사푼 걸어나와 하늘을 보아라

 

서낭당 내 너머 꽃구름 피고 극락세계 부처님 행차하신다.

청산은 왼몸으로 초록저고리 초록저고리 옷고름 연등 날리는 날

춘향이 언제 살아 죽었단 말인가 우리 누나 어느 봄날 저승 갔단 말인가

 

아른아른 비쳐오는 하늘 한자락

天雲寺 탑을 돌아 바스라지는데

홍진에 죽은 누이 하마 울까 웃으실까,

스란치마 깃을 치는 첫 뻐꾸기 울음소리.

 

 

파냄새 속에서  

                                               서 지 월     

 

정작으로 우리가 가야 하는 길이 있다면

파냄새 속에 흥건한 어머니 치마폭 같은

훈훈한 바람드리워진

하늘의 思想과흙빛으로 물드는 노을,

 

저문 밭둑에 아무도 휘파람 부는 이 없어도

세월은 파꽃처럼 피었다 지고새로 돋아나는

파냄새의 이랑 사이실눈 뜨고 봄은 오건만

먼길 걸어온 나비들의 靑山에 깃들기 전

 

조금씩은 나래 접어 눈물을 심고 가는

길나는 그 파냄새 속에서

코고무신 끌고 오시는 어머니의 갸름한 모습을

지난밤 꿈속에서도 보았었네.

 

 

푸른 하늘의 뜻은

                                                서 지 월

 

 

내 마음의 시렁 위에 바람은 와서 머무나

검은 솥뚜껑 같은 구름 걷힌 밤나무 사이로

빤히 올려다보이는 하늘일 때

어머니는 젊은 날 木花밭을 오르시고

나는 그 밭둑에 홀로 핀 엉겅퀴꽃 해지도록 바라보고 있었네.

 

잡초 우거진 산길에는 땅을 오르는 꽃상여 상여꾼의 노래소리가

발밑에서 들려오고 장승처럼 머언 들녘에

봉긋 솟은 돌무덤 가으론 잦아드는 흑가마귀떼 울음소리,

 

등 굽은 새우마냥 낮에 나온 저 반달은

할머니적 마당가에 꽃씨 심던 호미 같고

우우 맑은 하늘에 바람 지나가는 것은

저려오는 손끝 장차 무엇이 될까

곰곰 생각하고 생각했던 돌각담 물달개비꽃 꿈이었네.

 

 

소월의 산새는 지금도 우는가

                                         서 지 월 

 

하이네도 좋고 릴케도 좋고 바이런도 좋고 구르몽도 좋지만

우리의 산에는 우리와 같은 밥을 먹고

우리와 같이 눈물 흘리며 핍박 받아오던 시대의

소월의 산새는 지금도 우는가,

 

붉은 목젖의 피여

헝클어진 진달래꽃 다발 안고

북녘 어느 소년은 남으로 남으로 내려오고 있는가,

 

흰옷 입고 자라고 흰 창호지빛 문틈으로 세상 엿보고

동여맨 흰수건 튼튼한 쇠가죽북 울리며 예까지 흘러왔건만

소월의 산새는 지금 어디쯤 날아간 묘지우에서

점점이 멀어져간 돌다리와 짚신과 물레방아와 자주댕기 얼레빗...

이 땅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 섬돌밑에 잠드는가

 

그리운 백도라지 뿌리 깊이 내리여

천길 땅속 흐르는 물소리에 귀 기울이는가

비슬산 참꽃

 서 지 월 

 비슬산 참꽃 속에는 조그만초가집 한 채 들어 있어툇마루 다듬잇돌 다듬이 소리쿵쿵쿵쿵 가슴 두들겨 옵니다

기름진 땅 착한 백성무슨 잘못 있어서 얼굴 붉히고큰일난 듯 큰일난 듯 발병이 나버선발 딛고 아리랑고개 넘어왔나요

꽃이야 오천년을 흘러 피었겠지만한 떨기 꽃속에 초가집 한 채씩이태백 달 밝은 밤 지어내어서대낮이면 들려오는 다듬이 소리,

어머니 누나들 그런 날의 산천초목얄리얄리 얄랴셩 얄랴리 얄라,쿵쿵쿵쿵 물방아 돌리며 달을 보고흰 적삼에 한껏 붉은 참꽃물 들었었지요

 

 

韓國의 달빛

                                                서 지 월

 

쟁반 위에 놓여져 床을 받치고

더러는 바람부는 청솔가지 솔잎 사이로

물소리 흩뿌리는 수작을 걸면서

억겹 산을 넘어 지름길로 오는구나.

 

玉돌이야 갈고 닦아 서슬이 푸른 밤

싸늘한 바위 속 어둠 밝히며

쟁쟁쟁 울려오는 은쟁반 소리 은쟁반 위의 거문고,

바람이 훔쳐내는 나의 파도소리…….

 

옛날엔 이런 밤 홀로 걸었노라.

걸어서 거뜬히 몇 십리도 갔노라

짚세기 신고 돌담길 세 번쯤 돌아

모시적삼 남끝동 임을 만나고

수줍어 돌아서는 강물도 보고

손 포개고 눈 포개고 달빛 또한 포갯노라.

 

창망히 멀어져 간 수틀 위 꽃밭과

애달피 구슬꿰는 피리소리가

시렁 위에 얹혀서 돌아올 때면

쑥국쑥국 쑥국새는 숲에서 울고

칭얼칭얼 어린 것은 엄마품에 잠든다.

 

 

朝鮮의 눈발

                                             서 지 월 

 

 

나는 지금 세계의 가장 평안한 우차(牛車)에실려가고 있다

아침 상 받으면풋풋한 생채나물그 미각을 더불어어린 날의

서당골 물푸레나무결 고운 길을 따라잠 덜 깬

포대기 속 아이의꿈결같이 굴러가고 있다

 

우리가 닿아야 할 예지의 나라순은(純銀)의 밀알들,

바다와 강江이 놋요강처럼 놓이고능陵은 풀잎처럼 잠든다

문경 새재에 눈이 내리면청솔가지 꺾어들고 오는하얀 버선코,

사슴의 무리가 눈을 뜬다

 

지붕밑 동박새가 살을 부빈다

마을에서도 숲에서도눈은 내리고

누군가 흰 고무신 눈발속을조심조심미끄러져 가고 있다

 

아침 신문 유액 위 '조선통사(朝鮮通史)'가 빛나고

한 술의 배고픔보다 천 근의 무게로 울려 올우리의 풍악소리.....

몇 백년쯤의 뒷날을 다시 생각노니,

지금 나는세계의 가장 평안한 우차(牛車)에 실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잘도 넘어간다

 

 

밥그릇 

서 지 월 

바람이 부는 것은 몇 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꼭 같다. 단군할아버짓적 박달나무 가지끝에서부터 불던 바람이 하사(下賜) 받듯 차례로 징검다리를 건네온 것이 目下, 수 천년 귓구멍 뚫린 콧구멍 뚫린 살풀이 한다.

바람 부는 날, 청솔방울 몸 데울 때는 다락에 올라서 피리를 불자. 밥그릇이 넘치도록 피리를 불자.

밥상 위의 밥그릇, 밥상 밑에 밥그릇, 부뚜막 위에 밥그릇, 부뚜막 밑에 밥그릇, 장독간에 밥그릇, 마당가의 개밥그릇...... 어디를 가나 밥그릇은 하나씩 놓여 있다. 하나씩 놓여 있는 밥그릇에 六情의 唐菊花는 피고 한 그릇 한 그릇씩 떠받들어 온 香불, 숙원이여.

내 물려받은 하나의 밥그릇에도 朝夕으로 김이 서리고 그 唐菊花같은 香불같은 풀리지 않는 새벽 강의 김이 서리어 바다로 밀려난 뱃머리에서나 산으로 올라간 상여꾼의 북소리 끝에도 그 김이 서려 있는 걸 나는 보았다.

오늘 아침 밥상 위에도 맨 그 김은 서리고 새 바람 아닌 새 바람이 이 밥그릇으로 내림하는 수작을 알아차린 나는 두 귀가 번쩍 띄었다.

<시작노트>

  내가 시의 길을 그렇게 많이 걸어온 건 아니지만 길게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굽이진 길을 쓰리고 아린 아리랑고개처럼 왔기에 긴 시간처럼 생각되는지 모르겠다. 앞으로 어떤 길을 모색하더라도 여기의 시는 내 시의 전형이라 감히 힘주어 말할 수 있는 작품들을 엄선해 본 것이다.

  즉, 전통서정시가 되겠는데 여기에서 전통이란 우리 민족만이 누리며 가질 수 있는 정서 아니겠는가. 전통정서가 민족정서가 융화되어 민족서정시가 된다고 보는데 나는 젊은 날부터 이것에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가난한 꽃>에서는 소박한 산골 풀내음 정서가, <江물과 빨랫줄>에서는 시골 마당가의 빨랫줄과 모성애, <첫 뻐꾸기 울음소리>에서는 누이의 죽음을 뻐꾹새소리의 부활적 이미지와 접목시켜 보았으며,  <파냄새 속에서>는  어머니의 자애로움을,  <푸른 하늘의 뜻은>에서는 내 살아온 삶의 정서를,  <소월의 산새는 지금도 우는가>에서는 남북분단과 통일에의 염원을, <비슬산 참꽃>에서는 우리 민족 고유정서와 애환을, <韓國의 달빛>에서는 고유정서와 민족정서의 융합을, <朝鮮의 눈발>에서는 민족의식과 역사의식을, <밥그릇>에서는 역시 우리 민족의 혈통의 내림을 읊었던 것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면, 저 만주땅 우리 한민족 정서가 되겠는데 무궁무진하다 아니할 수 없는 것은 오천년 역사 시원의 땅일 뿐만 아니라 고조선을 거쳐 부여 고구려 발해를 잇는 민족혼과 일제치하 독립운동 정신사가 맞닿아있는 곳이기 때문이리라. 우리가 정치를 하든 과학을 하든 경제를 하든 예술을 하든 한시도 잊어서는 아니 될 부활을 꿈꾸어야 하는 땅이다. 그게 없으면 우리는 애비 없는 자식으로 앞만 보고 가다가 뿌리 잃은 민족으로 불운을 맞게 되는 것이다. 두고 보라구! (서지월 記)   

[서지월시인 약력]

• 1955년, 연개소문과 같은 생일인 음력 5월 5일 단오날 대구 달성군 가창면 대일리 371번지에서 태어남. 본명 서석행(徐錫幸), 아명 건식(巾湜).• 가창초등학교, 대륜중고등학교를 거쳐 대구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과 졸업.• 1985년 10월, 제2회「전국교원학예술상」문예부문에 시 <꽃잎이여>로 大賞에 당선, 문교부장관상 수상.• 1985년 12월,『심상』신인상에 시 <겨울 信號燈>외 3편 당선.• 1986년 6월,『아동문예』신인문학상 동시 <바람에 귀대이면> 외 4편 당선.• 1986년 8월,『한국문학』신인작품상에 시 <朝鮮의 눈발> 당선.• 1993년, 제3회 대구시인협회상 수상.• 1998년, 제1회「한하운문학상」본상 수상.• 1999년, 전업작가 정부특별문예창작지원금 1천만원 수혜시인에 선정됨.• 2000년, 한국문인협회 문경지부 주관「正文文學賞」수상.• 2002년, 한국시인협회 주관 중국 서안-돈황 '실크로드 아시아시인대회' 참가.• 2002년, 중국「長白山文學賞」(세계문학상) 수상.• 2003년, 중국 연길 한국정지용시인 국제세미나 참가 등 일곱 차례에 걸쳐 만주땅 전역을 답사함 .• 2005년, 일본 최대 詩잡지「지구」詩 초청으로 도쿄 아시아환태평양시인대회 참가.• 2006년, 시 <건들바위>, <울릉도 섬말나리꽃>, <영양고추> 등이 창작 예술가곡으로 작곡 되어 불리워짐.• 2006년, 대구 MBC 문화방송 노래 <달구벌의 빛과 소리>가 가곡으로 작곡됨.• 2006년, 한국전원생활운동본부 주관, 詩碑「신 귀거래사」가 영천 보현산자연수련원에 세워짐.• 2007년, 한국시인협회 창립 50주년기념 향토적인 삶을 찬양하고 노래하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시인으로 선정됨.• 2007년, 달성군 주관, 한국시인협회 MBC KBS 등 후원으로 詩碑「비슬산 참꽃」이 비슬산 자연휴양림에 세워짐.• 2008년, 서울특별시「시가 흐르는 서울」에 시 <내 사랑>, <인생을 묻는 그대에게>가 선정됨.

• 중앙일보「한국을 움직인 인물들」,조선일보「국내 주요인사 인물정보 BD」,문화일보「문화예술인 BD」,연합뉴스「한국 주요인물」에 선정됨. 불교TV방송국『불교인명대사전』에 수록됨.『韓國詩大事典』에 수록됨.• 국제펜클럽· 한국문인협회· 한국시인협회 회원(중앙위원)· 한국아동문학인협회· 한국동시문학회 · 아동문예작가회 회원. 대구문인협회 및 대구시인협회 회원. <낭만시> 동인으로 활동.• 현재, 만해실천사상선양회 자문위원. 영남오페라단 이사. 한중공동 시전문지『해란강』한국측 편집 주필. 만주사랑문화인협회 상임고문. 동아문화센터, MBC문화센터, 경주대사회교육원, 달성시인대학 등을 거쳐 현재 대구시인학교 지도시인.

시집

¤『꽃이 되었나 별이 되었나』(1988, 나남출판사)¤『江물과 빨랫줄』(1989, 문학사상사)¤『가난한 꽃』(1993, 도서출판 전망).대구시인협회상 수상시집.¤『소월의 산새는 지금도 우는가』(1994, 시와 시학사)¤『팔조령에서의 별보기』(1996, 도서출판 중문.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우수시집으로 선정됨).¤『백도라지꽃의 노래』(2002, 중국 요녕민족출판사),(중국 '장백산문학상' 수상시집)¤CD롬시집『가난한 꽃』(1998, 한국문연, 정선시 188편 수록)¤『지금은 눈물의 시간이 아니다』(2003,천년의 시작.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우수시집으로 선정됨).¤동시집『휘파람나무』(1987, 아동문예사. 공저).¤『한국아동문학선집.권42』에 동시가 수록됨(계몽사)

[연락처]

(우)711-860¤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대일리 78, 시산방 徐芝月(시인)¤전화:(053)767-7421 핸디폰 011-505-0095¤이메일: poemmoon55@hanmail.net¤홈페이지: http://poemtree21.net/

 

[시감상] 서지월 님의 <개밥그릇의 노래>를 읽고 ∵∵∵∵∵

이 시를 말한다 - 서지월 시 <개밥그릇의 노래>

유감스럽게도 사회적으로 시인이 깍듯이 대접을 받지 못하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돈 안 되는 시를 쓰는 시인은 그래서 늘 가난하고, 어쩌면 가난해야 시다운 시가 써지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이 땅에서 좋은 시 쓰는 훌륭한 시인이 마땅히 환영 받고, 그 격에 맞는 충분한 대우를 받는 그런 날은 과연 언제쯤 와 줄까? 그리고 어쩌다 의식의 눈이 번쩍 뜨이는 시를 만났을 때, '이런 시 쓰는 진정한 시인이 소음 같은 헛말만 허공에 남발하는, 소위 떠들썩한 일부 위정자(爲政者)들보다 참으로 존경 받고 융숭한 대접을 받아야 옳다고 생각지 않는가.'하는 주제넘은 바람이 분수처럼 강하게 솟구치는 것이다.

지난 한해 동안도 한 번 읽고 놓아버리기엔 아까운 몇 편의 시를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것이 커다한 수확이었다. 마치 장인 정신을 지닌 어느 옹기장이가 공들여 빚어낸 질그릇 중의 질그릇을 발견한 듯이.

사람마다 살아오면서 아마 밥 안 먹어도 배부른 순간을 더러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바로 이런 <개밥그릇의 노래>와 같이 잘 빚어진 한 편의 시를 읽고 있노라면 배고픈 줄 모르고, 그만 넋을 잃고 빠져들어 오히려 밥 먹은 것보다 더 정신적 포만을 느끼는 것이다.

나는 철저히, 철저히 유배당한 지상에서의 짝 잃은 고무신 누

가 뭐래도 웃지 않고 울지 않는다 한낮의 해와 부엉이 우는 밤

이 골짜기 둥근 달이 내 움푹 패인 겨드랑이 훑고 가도 퍼담을

수 있는 건 주인이 내어다 주는 음식찌꺼기 그것만으로도 흡족

한 나는 이내 속이 비어져 늘 여유 있는 모습으로 당당히 낮과

밤의 시간을 함께 한다.

너희들의 식사시간을 은근히 습관처럼 기다리지만 너희들이

수저 놓고 자리 뜰 때 분주한 건 나 아무렇게나 마당가에 놓여

져 나의 여윈 살과 뼈와 살까지 핥는 강아지들을 보라 얼마나

눈물겨운 만찬인가

철저히 유배 온 이 지상에서 때론 빗물도 고여 마당 가득 채

워 주지만 내가 보여줄 수 있는 마지막 손길이라는 자부심에 넘

쳐 흐르며 꽃송아리를 헤는 아이마냥 해와 달을 셈하며 살아간다

서지월의 <개밥그릇의 노래> 全文

-「문학사상」1997년 7월호

가만 읽어 내려가 보면, 어디 한 군데 애써 말을 아름답게 꾸미거나 목소리 또한 의도적으로 한 옥타브 높인 데 없이, 그래서 이렇다 할 빼어나게 묘사한 한 구절 가구(佳句)도 없이, 그저 혼잣말하듯 담담한 어조로 읊은 평범한 노래인 듯하다. 하지만 호흡을 가다듬어 다시 읽어 내려가 보면, 마치 저 넓은 바다 한가운데서부터 시원한 한 줄기 파도가 서서히 밀려와 마른 가슴을 철썩 때리는 듯 전신이 저릿한, 그야말로 절창 중의 절창이라는 느낌을 자못 떨칠 수 가 없다. 그것이 이 시에서 한동안 눈을 떼지 못하게 한 이유이다.

마당가에 뒹구는 하찮은 개밥그릇 하나에, 이렇듯 신선하고 긍정적인 삶의 의미와 무게를 담아 슬며시 독자들 앞에 밀어내 놓고, 저만치 뒷짐지고 말없이 서 있는 시인의 그림자가 보지 않아도 본 것 이상으로 참으로 여유롭게 비쳐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건 자신의 마음을 송두리째 비우지 않고선 아무나 쉽사리 따라 부를 수 없는, 진정 마음이 가난한 시인의 노래이기 때문일 것이다.

일찍이 세상 욕심을 호주머니 속 먼지를 털어 내듯 툭툭 털어 버리고, 그 어떤 일에도 헤프게 웃거나 쓸데없이 눈물 보이지 않으며 유유자적 살아가는 시인의 맑고 투명한 정신이, 개밥그릇 그득 고인 빗물 속에 그대로 녹아 철철 넘쳐흐르고 있는 듯하다. 한낱 볼품 없는 개밥그릇을 화자(話者)로 하여, 자기 앞에 맞닥뜨린 궁색한 현실을 한 마디 불평도 없이 묵묵히 수용하고, 도리어 달관한 자세로 당당하게 살아가는 삶의 지혜를, 조금도 서두르지 않고 관조하듯이 집약해 놓은 능숙한 솜씨가 정말 놀랍고 부럽다. 하잘것없는 존재의 가치를 진지하게 일깨워 주는 묵시적인 교훈 같아 잠시 숙연해 진다. 한편 찌그러진 개밥그릇을 통하여 보여준 그 넉넉한 자족의 비결에 동화되어, 갈수록 험하고 살벌한 이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도, 문득 살고 싶은 강한 충동에 사로잡히고 마는 것이다.

몇 번을 거듭 읽어도 무얼 말하는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는 난해한 시의 시대에, 이 한 편의 시를 편안히 음미해 보면,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우리말의 진수(珍秀)를 어렴풋이 깨닫게 될 것이고, 따라서 술술 읽히는 이 시의 감칠맛에 매료되어 새로운 활력이 불끈 솟아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리저리 밟히면서 상처투성이로 살아가는 일에 지칠 만큼 지쳐, 세기말 벼랑 위에 선 이런 때일수록 한 편의 시를 읽으며, '꽃송아리를 헤는 아이마냥 해와 달을 셈하며 살아가는' 마음의 순수와 여유를 되찾는 노력이 절실히 필요하지 않겠는가. 따지고 보면, 제각기 철저히 이 지상에 유배 온 개밥그릇 같은 존재인지도 모르는 우리 모두 말이다.

"내가 노래할 수 있는 것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 같으면서 있잖은가, 변함없는 우리의 것, 잊혀지지 않고 마음속에 영원한 것......"

시작(詩作)메모에서도 시인이 이미 밝힌 바와 같이, 그러한 잊혀져 가는 소재들을 찾아내어 그 특유의 뛰어난 서정적 필치로 노래한 시, <개밥그릇이 노래>는 인간과 우주를 넉넉히 포용하고도 남음이 있으며, 오히려 우리들에게 영원성을 일깨워주는 큰 시인의 그릇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1998년「대구시인학교교재」에 수록-

[숭례문 화재 추도시] ⊙⊙⊙⊙⊙

곡(哭), 숭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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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월(시인)

 

곡(哭), 숭례문 숭례문 화재 추도시

서 지 월 도도한 역사의 물줄기는 오천년을 뻗어내려와 하늘의 해와 달 기운으로 오늘에 이르렀거늘 수많은 내우외환 거뜬히 이겨내고 祖國이라는 이름으로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밥숟갈과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의 물동이 종종걸음으로 6백년을 거뜬히 하늘 받들어 왔건만 오늘의 우리가 쑥과 마늘의 민족정신사 잃어버리고 치즈와 피자 맛으로 앞으로 앞으로만 내달리다 넘어지고 무릎 다쳐 붉은 피 흘리듯 삽시간에 저 붉은 불의 저주로 검은 재 되어 내려앉았으니 백두산이 내려다 보며 통곡할 일이요 한강이 올려다 보며 눈물 훔칠 일이다 어쩌자는 것인가, 오직 祖國 위해 한몸 바치다 총탄에 피흘리며 쓰러지고 말았던 우리의 金九선생 민족 근대역사의 비극 그새 잊었단 말인가 포은 정몽주선생 쓰러지고 金九선생 쓰러지고 숭례문마저 쓰러지며 아무 말 없으니 위대한 역사는 늘 말이 없단 말인가 여기 힘 없고 가난한 백성만 머리 조아리며 곡(哭)을 하나니, 곡(哭)을 하나니, 두리기둥 비둘기도 날아와 벗이 되고 추녀끝에 초승달도 배시시 미소 지으며 밤 문안 들었거니 이제는 간 곳 없는 민족의 얼이여 흰옷의 정서여, 저마다 자신만 잘나고 부귀영화 누리며 호의호식(好衣好食)하면 그만이라는 이기주의 팽배해 재산과 자식, 옷가지는 외국에 두고 조국은 나들이 장소쯤 생각하는 골 빈 지식인들 반민족적인 사고(思考)가 역사를 외면하고 고유한 것 외면하더니 아무도 돌보지 않아 밤이면 저혼자 불 밝히며 그래도 조국의 사직 든든히 지켜 내더니 모두들 등 돌린 시간, 어둠 속에서 홀로 다비(茶毘)를 치른 처연한 숭례문이여 내 아버지 아버지 같았던 얼굴이여

 

서지월 시-곡(哭), 숭례문 숭례문 화재 추도시곡(哭), 숭례문 숭례문 화재 추도시 서지월 도도한 역사의 물줄기는 오천년을 뻗어내려와 하늘의 해와 달 기운으로 오늘에 이르렀거늘 수많은 내...

02-16 07:2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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