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문학평론

[스크랩] 시와 언어

운산 최의상 2011. 9. 2. 19:12

시와 언어

1. 시인의 운명

시인은 언어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무정형의 정신에 질서를 잡아가는 과정을 통해서 흐트러진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새로운 정신의 비전을 제시하기도 한다.

물론 이 모든 과정은 언어의 질서화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언어가 ‘존재의 집’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존재의 집은 처절한 고독과의 자기투쟁 속에서 비로소 마련될 수 있다. 그러므로 시인은 ‘아픈 동물’ sick animal 이며 고통의 신음소리를 내게 된다. 소포클레스의 「필록티티즈」에 대한 앙드레 지드의 해석에서처럼, 시인․작가의 기표로서의 필록티티즈는 운명의 독사에 물려 아파하며 그것이 곪아터질 때에는 심한 악취를 풍기기 마련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진저리를 치면서 그를 회피하게 된다. 결국 그는 외딴 섬에 갇혀서 원죄와도 같은 고독의 형벌을 안고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고립에 비례해서 그의 영혼은 더욱 맑아지고 인간과 우주에 관한 심오한 안목에 눈뜨는 것이다. 고통 속에서 터져 나오는 이러한 시인의 언어를 통해서만 이 세계는 그 신비스런 비밀의 문을 열어보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인의 고감도 안테나에 의해 포착된 한편의 시, 인간존재의 심연에서 길어 올린 한편의 시는 미쳐 알지 못했던 우리 자신의 참된 모습을 비추어보는 ‘거울’의 구실을 하게 되는 것이며, 또한 동시에 상처 입은 채 살아가는 우리 어두운 영혼에 ‘등불’로 다가올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어찌 시가 한낱 가증스런 말장난에 떨어질 수가 있으며, 깊이있는 사유가 결여된 채 하릴없이 뱉어내는 쇄말잡사의 자기배설에 떨어질 수 있겠는가.


4.

방파제 끝 더는 갈 수 없는 길, 格浦의 등대 끝

한 시대의 캄캄한 물밑 속을 들여다보며, 나는

낚시를 묻는다

개밥바라기 별자리가 어제보다 더욱 선명하고

큰독수리좌의 날개치는 소리가 아픈 별 하나를

어디론가 어디론가 한밤중에 끌고 간다


어둠 속에서 형광물질 같은 등지느러미를 뒤채는

학꽁치 한 마리

희번덕 박주가리떼의 발톱에 찍혀 사라진다

허공을 휘두르는 낚싯대의 형광 찌가 이따금

공중에서 폭발하면서

그 박주가리떼를 슬프게 한다


밤새도 아니고 낮쥐도 아닌 이 슬픈 시인의 운명이, 이 불꽃 같은

삶의 운명이

어디서 탄생하였던가를

저 캄캄한 입을 벌리고 서 있는

동굴 속을 들여다 보고서야

나는 비로소 알았다

           -송수권, 「海蝕 동굴」 중 4,


시인 송수권은 ‘그늘을 갖지 못한 詩, 그늘을 갖지 못한 삶, 그늘을 갖지 못한 사랑은 푸석거리는 먼지와 같다’(「작은 상징」)고 노래한 바 있다. 고통을 모르는 자가 인생을 깊이 알 수 없듯이 시간의 시련을 이겨낸 자만이 세계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보는 것이다. 근자에 왕성한 시적 활력을 펼쳐 보이고 있는 이 시인이 이번에 발표한 위의 작품은 현 한국 시단의 축도와 아울러 그 속에서 고뇌하고 있는 시인들의 꿈과 그 초상을 잘 대변해 보여주고 있는 명편이라 할 것이다. 시인의 胸襟은 이제 완숙의 경지에 들어 있는 듯하고 언어구사의 감각도 녹슬지 않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작품은 네 개의 단락으로 구성돼 있고 각 단락에는 아라비아 숫자로 번호가 매겨져 있다. 1의 冒頭에서 시인은 ‘한 시대의 궁핍한 정신’을 결실한 채 ‘도사와 신선이 된 시인들’ 이 철버덕거리고 있는 현실을 적시하고 허황한 언어의 ‘粥桶’ 속에서 흐느적거리는 시인들과, 그들이 판을 치는 ‘죽에 잠기는 세상, 죽 쑤는 세상’을 통박한다. 유협이 ꡔ文心雕龍ꡕ에서 “仙心이 섞이면서 시가 가벼워졌다”고 했듯이, 초절적이고 탈현실적인 시인의 자세는 자칫 현실을 몰각한 추상적, 관념적 세계에 빠지게 하기 쉽다. 그러한 도사와 신선의 세계는 시인의 현실적 고뇌를 無化시키는 비문학적인 함정에로 시인을 빠지게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그 초절적인 高處로부터 뛰어내리며 현실의 고통 속에서 새로운 意境을 찾아 변증법적 모색의 길을 가야 할 것이다. 그러기에 송수권 시인은 시대정신이 사상된 채 허우적대는 시단의 현실, ‘한숨같은 안개’를 발산하는 그 동굴과, 불모의 ‘모래밭 속을 파는 염낭게들의 혀’ 들을 목격한다. 2에서 시인은 그 불모의 현실 속으로 깊숙이 침잠해 본다. 추억을 더듬어 언젠가 그 ‘동굴’ 속으로 들어가 본 때를 회억한다. ‘냉장고 같은 통풍’이 스며나오는 거기엔 ‘하나같이 눈이 퇴화해 있고, 새라고 하기엔 어설프고/ 또 쥐라고 하기에도 어설픈 존재’들이, ‘박주가리떼들’이 거꾸로 매달려 몽상을 꿈꾸고 있다. 어쩌면 현재의 한국 시단의 풍경을 이토록 절묘하게 형상할 수 있는가 싶다. 그러나 그런 어두운 동굴에도 어디선가 ‘얼어붙은 시간’을 일깨우는 물방울은 떨어진다. 그것은 ‘봄비 소리’ 같기도 하고 ‘말울음 소리’와도 같은 희망의 속삭임이다. 그리고 이 동굴의 벽면에도 어김없이 ‘그 머나먼 꽃밭’을 꿈꾸는 ‘나비떼’들이 알을 슬고 있다. 아무리 암울한 절망의 시대에도 ‘노래의 씨’를 뿌리는 시인은 있고, ‘백마타고 오는’ 희망의 빛은 존재하는 것이다. 3에 오면 마침내 ‘한 바다의 뒤끓는 파도를 짓밟고’ 알에서 부화한 ‘그 현란한 나비떼들’이 동굴에서 흘러나와 절벽을 휘감는 진풍경을 목도한다. 그것은 ‘歲歲生生 물 위를 휘감는 가시연꽃밭 같은 삶’의 모습이기도 하다. 태어난 모든 존재들은 ‘더듬이와 날개를 하늘거리며’ 어디론가 간다. 우주 공간, 그 끝간 데 없는 그 바깥에까지라도 가고 싶은 것이 원초적 욕망인 것이다. 그러나 욕망이란 또 얼마나 허망한 것이던가? 이제 동굴은 ‘흔적만 남아 있고’ ‘닿을 길 없는 수평선 쪽으로 입을 벌리고’ 돌아누워 하나의 ‘傳說’로만 존재한다. 무상한 세월은, 젊은 시절은 그렇게 흘러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추억은 언제나 그런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화자는 비로소 지금의 현실로 돌아온다. 위에 인용한 4에서 미당식으로 표현한다면 ‘젊음의 어두운 뒤안길’ 과도 같은 동굴의 시간을 지나온 중년의 현재 시점에서 시인은 현실을 새롭게 직면한다. ‘방파제 끝 더는 갈 수 없는 길, 格浦의 등대 끝’에서, 지난한 시간을 지나온 자의 절명의식과 중년의 원숙한 시선으로 ‘한 시대의 캄캄한 물밑 속’의 현실을 관조한다. 기나긴 고통의 동굴을 지나온 자에게 이제 세계는 제 참모습을 드러낸다.


개밥바라기 별자리가 어제보다 더욱 선명하고      

큰독수리좌의 날개치는 소리가 아픈 별 하나를

어디론가 어디론가 한밤중에 끌고 간다


시인은 이제 담담하게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관조한다. 그리고 시인은 깨닫는다. 시인이란 존재의 모순과 이중성을, 탄생의 서글픈 신비를. ‘밤새도 낮쥐도 아닌 이 슬픈 시인의 운명’이 결국은 ‘저 캄캄한 입을 벌리고 서 있는’ ‘동굴’ 자체이었음을.

그러기에 더러 시인들에게 우리는 그들이 자진해서 고독 속으로 걸어 들어가 그곳 깊은 심연에서 길어 올린 맑은 물 한 통의 언어를 일상의 때에 절어 살아가는 우리 혼탁한 영혼들에게 공급해주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이 장에서는 이러한 정신의 기율이 살아있는 시들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2. 언어와 정신의 기율


오세영은 지천명을 지나 이순의 세계로 나아가고 있는 중견시인이다. 한국의 현대시를 정밀하게 학술적으로 읽어내는 동시에 대학에서 시학을 가르치는 교수이기도 한 이 시인이 한겨울에 잠시 속세를 떠나 설악산 백담사에 칩거하여 침묵의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진실은 언어…… 인간의 언어가 아니라 침묵으로 전달된다”고 단언한다. 그곳에서 그는 오염될 대로 오염된 인간의 언어가 아닌 자연의 소리, 솔바람 소리, 강물 소리, 꽃 피는 소리, 별이 반짝이는 소리 등 사물의 참된 소리를 듣게 된다. 언어의 한계성을 누구보다도 절감하고 있기에 그는 ‘언어를 믿지 마라’고 강변하기도 한다. 어쩌면 그에게, 아니 모든 시인에게 언어란 ‘은산철벽’과도 같은 거대한 절벽이 아닐까?


까치 한 마리

미루나무 높은 가지 끝에 앉아

새파랗게 얼어붙은 겨울 하늘을

엿보고 있다.

은산철벽(銀山鐵壁),

어떻게 깨트리고 오를 것인가.

문 열어라, 하늘아.

바위도 벼락 맞아 깨진 틈새에서만

난초 꽃 대궁을 밀어 올린다.

문 열어라, 하늘아.

         -오세영, 「은산철벽(銀山鐵壁)」 전문


마치 ‘문 열어라, 꽃아’ 하고 외쳤던 미당의 「꽃밭의 독백」의 어조를 느끼게 하는 이 시에서 시인의 분신이라 할 화자 앞에는 거대한 절벽이 가로놓여 있다. 그것은 현실의 장벽일 수도 있겠고 앞서 말한 것처럼 인간존재의 유한성과 언어의 장벽일 수도 있겠다. 화자를 상징하는 ‘까치 한 마리’는 지금 ‘미루나무 높은 가지 끝’에 앉아 도무지 해답을 내보이지 않을 것 같은 하늘, ‘새파랗게 얼어붙은 하늘’을 ‘엿보고’ 있다. 시인은 끊임없이 상승을 꿈꾸는 존재이기에 그는 지금 인간존재와 현실의 구극에까지 나아가 어떻게 하면 그 장벽을 ‘깨트리고 오를 것인가’를 고민한다. 그러기에 시인에게는 고립과 단절의 시간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경우에 따라서는 ‘새파랗게 얼어붙은 겨울하늘’이란, 세계자본주의의 불안정성과 체제실험의 실패가 초래한 아시아 경제위기가 몰고 온 위태로운 현실을 암시하는 코드가 될 수도 있겠지만, 이 시에서의 그것은 보다 더 개인주의적이고 존재론적 차원의 의미로 다가온다. 그러나 새로운 세계, 또는 새로운 생명을 얻기란 얼마나 지난한 것인가. ‘바위도 벼락 맞아 깨진 틈새’에서만 ‘난초 꽃 대궁’을 밀어올리듯이 그것은 온몸이 찢겨나가는 아픔과 처절한 고뇌의 열도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기에 시인은 추운 겨울에, 따뜻한 아랫목에서 손주들의 재롱을 볼 수도 있는 나이에, 「절정」의 육사나 「생명의 서」의 청마가 그러했듯이, 첩첩산중의 고립된 공간에 스스로를 가두고 ‘문 열어라’고 외치며 자신을 채찍질하고 있는 것이다.


머리를 덮고 먼 광야의 시간을 달려갈

넓은 여행을 꿈꾸며 초록으로 감긴 눈에서

홀로 가야 한다는 단단한 고독함을 느낀다

고단한 들녘에서 뿌리내려야 할 고통의 비장함을 느낀다

고달픈 계절을 죽여 나가는 숨겨진 또 다른 계절

항상 희망일 수 있다는 절박함을 느낀다

뜬눈으로 달려나가 정지해야 할 시간 한계를 느낀다

통속을 뛰어 넘은 청정한 가지 위

사람들의 동네 불쌍한 잔치의 끝 눈물이 고인

어쩔 수 없는 그 최후의 고백이 올라서 있다

어서 늙어 버려라

고목이 되면 홀씨들 훨훨 날아 광야의 끝으로 가거늘

두려울 것 없이 커버려라

그리고 세월이 낡아 홀로 남거든

이끼와 새들에게 넓지 못한 시간들이었노라고 속삭이고

쓰러지지 말고 앉아서 지금 심은 크기로 작아지거라

새벽 찬이슬 하나에도 너는 크겠지만

어린 가지 사이 죽어가는 동네가 보이는 까닭은

억지로 늙어가는 사람들의 등들이

제각기 돌아서 있기 때문일 게다

소나무 무수히 버려져 있는 작은 산 언덕배기

지금 심은 소나무 훌쩍 자라

사람들의 동네 등돌린 골목에다

가벼운 홀씨들 옮겨올 수는 없는 것일까

     -김성철, 「지금 심은 소나무」 전문


지금 한국사회는 정신의 성숙을 도외시한 채 경제 개발로만 치달아온 결과로 야기된, 천민자본주의가 그 극에 달하였으며 누적된 사회의 구조적 모순은 마침내 부실과 파탄의 실상을 드러내어 크나큰 질곡에 처해 있다. 시인들은 그 정신적 결핍의 공동을 메우려는 모색의 일환으로 사라져가는 선비의 품격과 정신을 복원시키려는 일련의 노력들을 기울여 왔으며 그것이 이른바 ‘정신주의 시’라는 명칭으로 운위되어 오고 있다. 이는 후기산업사회의 물신숭배 풍조 및 상업주의적 대중문화의 범람이 야기한 정신적 위기감의 한 표출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 경향과 거의 동시적으로 대두된 이러한 시 경향은 점점 퇴색해가는 시의 위의를 지키고, 훼손돼가는 생명의 고귀함과 정신의 기품을 사수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서, 또한 지금의 우리 시에 대한 반성의 한 징표로도 이해된다. 근래에 우리 시단 일각에서 제기된 바 있는 있는 이른바 정신주의 시 논의는 그러나 치열함과 깊이가 담보되지 않는다면 자기기만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세상이 병들었기 때문에 그 일부인 나도 병들어 있다’는 自他不二의 대승적 자아발견을 기초로 하여, 시인의 ‘온몸’에서 우러나온 언어에 의해 예술적 형상성을 지닐 때만 정신주의 시는 비로소 존재 의의를 확보하게 될 것이다.

천민자본주의를 건너는 마지막 존재증명’으로 혹은 ‘선비의 품격’을 지녔다는 평을 받으며 데뷔한 김성철의 시는 시적 수사가 다소 서틀긴 하지만 나름대로 튼실한 선비정신의 힘을 보여준다. 이러한 시적 전통은 단재 만해 지훈 육사의 흐름에 연결된다. 詩品은 곧 人品에서 나온다. 시는 곧 그 사람인 것이다. 따라서 시인은 고상한 품덕을 갖추는 동시에 반드시 성정·지혜·총명·재변 등이 내재한 흉금을 성숙시켜 나가야 하고, 흉금이 성숙되면 사물을 파악하는 주관적 조건인 才···力이 상호 보완되면서 창작을 이루게 된다.

현대로 오면 시란 곧 한 시인의 정신사 그 자체를 의미하게 된다. 시가 뜻의 나아가는 바이며, 한 시인이 사물에 대해 느끼고 반응하는 마음과 생각들의 소산이라면, 우리는 그들이 시를 통하여 보여주는 뜻의 경계(意境)를 접함으로써 거기에다 자신의 마음을 비춰보게 되고 자아성찰의 기회를 갖게 되는 것이다.

위의 시에서 화자는 출발점에 서 있다. 먼 광야의 시간을 홀로 달려가야 하기에 ‘단단한 고독함’을 느낀다. ‘고독-고단함-고통-고달픈’ 으로 이어지는 시어의 계열체에서 삶의 힘겨움, 뿌리 내리기의 힘겨움을 볼 수 있다. 그것은 ‘통속을 뛰어넘은 청정한 가지 위’의 삶을 지향하며 ‘뜬눈으로 달려나가’는 자에게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짐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항상 희망일 수 있다는 절박함’으로 살아가려 한다. ‘불쌍한 잔치의 끝 눈물이 고인’ ‘사람들의 동네’에서의 시간의식은 ‘어서 늙어버려라’ 이다. 그러나 그것은 ‘억지로 늙어가는’ 것이다. 어서 늙어서 ‘고목이 되면 홀씨들 훨훨 날아 광야의 끝으로 가거늘/ 두려울 것 없이 커버려라’ 라는 진술 속에는 절박한 현실인식과 함께 빨리 시간이 흘러 새로운 시간이 도래하기를 기다리는 자의 열망이 느껴진다.


소나무 무수히 버려져 있는 작은 산 언덕배기

지금 심은 소나무 훌쩍 자라

사람들의 동네 등돌린 골목에다

가벼운 홀씨들 옮겨올 수는 없는 것일까


마지막 부분에서 시인은 다시 한번 황량한 세계의 한 모퉁이에서 새로운 출발을 향한 기대와 의지를 피력하고 있다. 이육사가 광야에서 ‘노래의 씨’를 뿌리듯이 시인은 이 불모의 시대에 한 그루의 ‘소나무’를 심고 그 소나무들이 훌쩍 자라 ‘사람들의 동네 등돌린 골목마다’ 새로운 희망의 ‘가벼운 홀씨들’을 옮겨오기를 열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시는 어두운 시대에 던지는 경계와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소위 대문자 I로 시작하는 이 궁핍한 시대에 시인은 어떠한 노래를 불러야 하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궁핍의 원인이 무엇이었으며 그 어려움을 딛고 설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가난한 이 시대를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답변의 예지를 담은 시가 아닐까 하는 것이다.  


3. 시와 시대정신

그러나 道(진리)가 산 속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땀내 나는 세간 속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부대끼는 일상의 삶 속에서도 시인은 끊임없이 자신을 반추해보며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아름답고 완전한 삶의 길일까를 모색할 수 있는 것이다.


간장독에 띄울 숯을 사러

읍내에 간다

나무 타다 만 게 숯인데

나무토막 태워서 쓰자고 해도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아내는 참숯을 써야만 한단다


읍내 장터를 다 뒤져도 숯이 없다

가슴속 한 세상 더글거리는

타다 만 숯덩이들은 쓸모가 없겠지

육십릿길 더 달려간 도회지 시장통에서

가까스로 숯을 만난다

휘발유값이 몇배는 더 들겠다


불길이 한참 이글거릴 때

바람구멍을 막아야

참숯이 된다고,

참숯은 냄새도 연기도 없다고

숯가게 할아버지 설명이 길다

참숯은 냄새까지 연기까지

감쪽같이 태우나 보다


이글거리기도 전에 숨통이 막힌

내 청춘은 그나마 참숯이 되어 있는지

언재쯤 냄새도 연기도 없이

이글거릴지 어쩔지 


간장 독에 둥둥 떠서 한평생

이글거리지도 못할

까만 비닐봉지 속 숯토막들이

못견디게 서걱거린다

             -정양, 「참숯」 전문

 

완전연소된 삶의 아름다움, 앤트로피 제로의 완전한 죽음은 예로부터 이상적인 삶의 한 형태로 기대되어 왔다. ‘냄새도 연기도 없는’ 참숯과 같은 삶이란 가능한가. 그러한 삶에 도달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나. 그것은 ‘불길이 한참 이글거릴 때/바람구멍을 꽉 막아야’ 가능하다고 말한다. 이 부분에선 약간 동양학적․기철학적 관점과 연계된다. 그러니까 생명의 불꽃이 왕성할 때 그것을 소진하지 말고 그 생명기운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바람구멍’을 꽉 막아야 하는 것이다. 생태학적 관점이나 생명공학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우리는 이러한 동양의 지혜를 새겨들어야 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에너지 혹은 생명을 낭비하지 않고 그것을 리사이클링시킬 수 있는 방법 말이다. ‘간장 독에 둥둥 떠서’ 한번 멋지게 이글거려보지도 못한 채 사라져가는 존재들이란 얼마나 서글프고 초라할 것인가. 화자는 ‘이글거리기도 전에 숨통이 막힌’ 청춘을 회고해 보기도 한다. 한국과 같은 역사현실 속에서 수많은 청춘들이 피어보지도 못한 채 사그라져 갔다. 그러나 그들의 숭고한 희생들은 진정으로 깨끗하게 부활해서 ‘냄새도 연기도 없이’  이글거리는 참숯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도록 살아남은 자들이 더욱 더 각성해야 할 것이다.


4. 언어 세탁공의 꿈


근자에 들어 유하의 작품 발표가 부쩍 늘어난 것 같다. 새로운 밀레니엄을 앞둔 세기말의 시점에서 한 번쯤 짚어보아야 할 문명의 현주소에 대한 성찰과 그러한 문명 속에서 살아 온 시인의 자기반성과 임무 같은 주제를 천착하는 것이 특징인데, 그것은 포괄적인 문명사적 스코우프 위에서 자아나 문명의 현주소를 깊이있게 반추하는 형식을 지닌다. 이번에 나온 계간지의 봄호들에도 보면 ꡔ문예중앙ꡕ에 2편, ꡔ세계의 문학ꡕ에 5편, ꡔ동서문학ꡕ에 2편을 발표하고 있다. 우선 눈에 띄는 첫 번 째 이슈는 「코끼리가 지나간다」나 「느린 달팽이의 사랑」에 보이는 속도에 대한 비판의식 문제이다. 파시스트적 속도로 치달려온 인류의 문명은 이제 한계에 부딪쳐 있다는 인식이다. ‘쓸데없이 부지런한 욕망들이/코끼리의 영토를 망쳐놓았다’고 인식하는 화자는 평원 위를 느리게 걸어가는 코끼리를 모더니즘에서의 ‘산책가’에 비유하고 있다. 그는 ‘빠르게 지나가는 자들이 스치고 간 그 모든 것들에게’ ‘생명의 잎사귀’를 달아주는 존재다. 어쩌면 그것은 시인들의 사명이자 임무이기도 한 것들이다. 그 코끼리들은 오늘도 ‘긴 코를 구부려’ 이 세상에 거대한 물음표를 던진다. 그리고 그다지 밝은 전망을 지니지 못한 것으로 보이는 ‘달팽이’는 다분히 비관주의적 세계인식을 지닌 회의론자의 모습으로 비춰지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느린 열정, 느린 사랑’을 지니고 있는 ‘달팽이’는 더 이상 ‘평생을 가도, 먼 곳의 사랑에 당도하지 못하리라는’ 고독을 뼛속깊이 자각했기 때문이다. 「연애 편지」에서는 서양식 교육의 폐해로 지적되는 ‘단순히 지식을 배우는 게’ 아닌 몸과 마음을 함께 연마하는 ’쿵푸‘(功扶)에 어원을 둔 전통적인 공부론(工夫論)의 바탕 위에서 잘못된 우리 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번에 발표된 유하의 시들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시는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인 것 같다.


내가 사는 동네 세탁소의 아가씨는

옷 수선을 아주 잘하죠

헐겁거나 꽉 조이는 바지들을

감쪽같은 맞춤복으로 고쳐놓지요

군더더기 없는 문장을 음미하듯

나는 그 옷을 입어요


솔벤트 내음 가득한 세탁소에 가면

그녀는 살짝 하얀 치아를 보이며 말하곤 하죠

세상을 떠돌다 돌아온 옷들에게

나는 많은 걸 배운답니다

그들에겐 새옷이 지닌 오만과 편견이 없지요

더러움의 끝에서 다시 순백의 빛을 보았으니까요


그녀의 세탁소에 갈 때면

그래요, 그녀의 세탁소에 갈 때면

난 그녀의 손길처럼 아름다운 문장을 꿈꾸어요

어둠의 끝에서 다시금 흰눈처럼 빛나는

옷들의 영혼을 꿈꾸어요

         -유하,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전문

이 시인이 위의 시에서 보여주는 아름다운 언어에의 꿈은 모든 시인들이 꿈꾸는 ‘이상태’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시에는 ‘군더더기 없는 문장’, ‘오만과 편견이 없는’ 올바른 문장과 더러움의 끝에서 ‘순백’의 빛을 보고, 어둠의 끝에서 흰눈처럼 빛나는 불굴의 문장을 지향하는 이 시인의 꿈이 잘 노래되고 있다. 전체적으로 매우 밝은 분위기를 지니고 있는 이 시에는 잠시 영화에 관심을 두기도 했었던 이 시인이 이제 그의 본령인 시의 길로 돌아와 왕성한 작품활동을 재개하면서 보여주는 바람직한 시의 모습을 ‘세탁소’라는 공간을 통해서 보여준다. 시인 역시 일상어에 묻은 때를 말끔히 씻겨내고 새로운 옷으로 탈바꿈시키는 언어의 세탁공이 아닌가.


텔레비전을 본다

텔레비전 한 귀퉁이 조그만 원 안에서

수화로 이야기하는 사람을 본다


수화란 어떤 말의 번역이 아니라

미처 할 수 없었던 말의 번역이 아닐까


문득 날개를 치며 솟아오르거나 급선회하는 새들

느닷없이 피어 있는 길가의 꽃

급박하게 휘어진 조그만 길목

그리고 미처 다 하지 못했던 당신의 이야기


그것이 수화인 줄도 몰랐던

조그만 손짓들


지금은 까마득하기만 한,

그러나 여전히 알 수 없는,

                      -류시원, 「수화」, 전문


1966년 가드너 박사는 1년생 야생 침팬지 워슈washoe에게 아메슬란Ameslan이란 수화를 가르쳤다. 그 결과 10년 만에 어휘 160개와 二語文 300개 이상을 습득케 하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이것은 이에 앞서 있었던 비키vicki란 침팬지에게 영어 단어를 가르쳤던 결과와 비교해 보면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비키의 경우는 겨우 네 단어를 구사하는데 그쳤었다고 한다(ꡔ과학과 철학ꡕ5집 참조). 이로 보면 손짓언어가 음성언어보다 훨씬 더 원초적인 언어였임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손을 일컬어 ‘움직이는 뇌의 일부’(칸트), 혹은 ‘정신의 칼날’(브르노프스키)이라 했던 것처럼, 갑작스런 지각변동으로 밀림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초원에 남게 된 인류가 살아남기 위해 직립한 이래로 앞발이 이동기능에서 해방되면서 손은 도구를 사용하고 나아가 도구를 제작하게 되었으며 도구의 제작은 뇌의 발달을 가져와 의식을 탄생시켰고 의식의 발달이 결국은 언어를 탄생시키게 되었던 진화론적 설명을 참조할 때,  손가락은 최초의 알파벳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이 손으로 하는 언어표현, 즉 수화의 발생학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류시원의 시는 수화 뉴스를 소재로 하여 수화에 대한 색다른 해석을 가하고 있어 읽는 재미를 준다. 먼저 수화란 ‘어떤 말의 번역이 아니라/미처 할 수 없었던 말의 번역이 아닐까’ 라는 새로운 의미부여이다. 시란 평범한 일상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가 아닌가? 우리가 일상으로 쓰는 언어란 참으로 불완전한 것이다. 숱한 오해들과 싸움들이 처음에는 말로부터 시작되지 않는가. 자크 라깡이 말한 것처럼 시니피앙은 끊임없이 시니피에로부터 미끄러지고 만다. 그래서 인간의 무의식 속에는 ‘떠도는 시니피앙’들로 가득하며 하나의 약속의 체계, 관계와 관계의 기호체계에 불과한 언어에 의해 우리의 주체가 형성된다고 볼 때, 불변의 주체란 존재하지 않고 다만 관계들의 그물망만이 존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기존하고 있던 이 거대한 기호체계 안으로 우리가 들어가는 순간부터 엄청난 억압을 받으며 죽을 때까지 이 언어의 감옥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언어를 지닌 인간의 운명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언어를 배우는 순간부터 인간은 충만한 행복으로 가득했던 어머니와의 원초적인 시간에서 쫓겨난 소외되고 마는 것이며 이러한 소외를 받아들일 때에만 사회 속으로 들어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나’를 온전히 드러낼 수 없는 불완전한 언어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인간에게는 언제나 ‘미처 할 수 없었던 말’ 들이 많은 것이다. 어쩌면 시란 바로 이 ‘미처 할 수 없었던 말’들을 마저 하려는 인간의 순수한 욕망의 표현이 아닐까. 보다 완전하게 자신을 드러내려는 눈물겨운 노력들이 시라고 하는 하나의 문화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잃어버린 꿈과 억압된 현실 사이의 틈새에서 생의 어느 한 순간에 ‘문득 날개를 치며 솟아오르거나 급선회하는 새들’이나 ‘느닷없이 피어 있는 길가의 꽃’들은 있는 것이며, 그러한 ‘생의 약동’ 의 순간은 원초적인 언어인 수화 즉 시의 언어로만 표현될 수 있는 것이다. 일상의 불완전한 언어체계와 그러한 언어의 논리와 법칙에 의해 구조화되어 있는 인간의 무의식의 세계를, 시니피에의 세계로부터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시니피앙들을 붙잡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시인의 언어 뿐이 아니겠는가. 탄탄대로의 랑그의 세계로부터 끊임없이 미끄러져나오는 시니피에의 세계, 의식의 세계로부터 쉼없이 미끄러지고 있는 무의식의 세계, 그 생의 ‘급박하게 휘어진 조그만 골목’들을 포착할 수 있는 것도 또한 시의 ‘충만한 말’에 의해서가 아닐까? 하이데거는 공식적인 언어의 법칙 그러니까 랑그의 체계에 의해 이루어 지는 발화를 ‘담론Rede’이라 하고, 그러한 공식적인 담론의 체계에 갇힌 억압된 자아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전략으로서 내부의 틈새를 채우는 또 다른 발화행위를 ‘잡담Gerede’이라 했다. 어쩌면 시란 ‘잡담’의 세계에 더 가까울 지 모르겠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적 명제는 이제 ‘나는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고로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는 라깡적 명제로 전환되면서 고정불변의 실체가 있다고 확고하게 믿어왔던 자아란 것도 결국은 다양한 관계들의 그물망에 의해 유동적으로 형성되는 ‘과정 중의 주체’에 불과한 것이라는 데에 생각에 이르면 그러한 서구문명의 자아중심 관념이 얼마나 중대한 착각이었는지, 얼마나 커다란 幻 Maya이었는지를 알게 되고 이러한 생각은 이미 2500년 전에 붓다께서 이미 설파한 진리였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모든 존재는 어떤 인연 즉 관계의 그물망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이지 항구불변의 실체는 없는 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있다고 착각하여 집착하는 데서 모든 아집과 번뇌와 갈등이 생겨나는 것임을 이미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수화는 어쩌면 ‘그것이 수화인 줄도 몰랐던/조그만 손짓들’ 즉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고 놓쳐버렸던 수많은 관계들과 말씀들, ‘지금은 까마득하기만 한’ 숱한 생의 기미들이며, ‘그러나 여전히 알 수 없는’ 존재의 비밀의 암시가 되는 것이다. 음성언어보다 더 원초적인 손짓언어인 수화를 통해서 시인은 결국 잃어버린 인간의 꿈과 소망을 복원해내고 싶은 근원적 욕망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의 공식적인 담론체계 속의 한 단어에 불과했던 말이 다양한 시니피에의 의미망으로 읽혀지는 것, 삭막하고도 메마른 소통체계의 시녀에 불과하던 하나의 말이 보다 ‘충만한 말’로 읽혀질 때 독자 자신의 결핍도 어느 정도 메꿔질 것이며 이것이 바로 시를 읽는 재미가 아닌가 싶다. 이 시를 통해 우리는 ‘수화’라는 모국어의 한 단어가 지닌 새로운 의미를 만났고 보다 풍요로운 모국어 하나를 더 얻어 가지게 된 것이다. 


누나라는 말 속에는

밭이 있고, 언덕이 있고, 돌담이 있습니다.

그러한 풍경 속에는 또

서귀포라는 아름다운 항구도 있습니다.

     

오늘 나는 서귀포의 돌담길을 거닐다가

누나라는 말에 너무나 어울리는 풍경이다 싶어

누나! 하고 한번 불러 봤습니다.

내게 없는 누나가

저 돌담의 오랜지밭 한가운데서 오렌지를 따다가

광주리를 팽개치고 달려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봤지요.

그러면, 내 누나는 밭가에서

놀란 눈으로 나의 가방을 받아들이겠지요?

네 색씨는? 네 아이들은? 아버님은? 하며

뒤가 없는 질문도 연방 던져오겠지요?

그러다가 눈 주위가 갑자기 붉은 귤밭이 될 누나.


지금 서귀포의 전망 좋은 찻집에 앉아서

그런 누날 난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아니,

서귀포의 골목, 돌담, 오렌지밭이 내게

그런 누나가 한없이 생각나게 하고 있습니다.

누나가 얼마나 아름답고 포근한 섬인지도.

         -김영남, 「서귀포는 ‘진’이 누나를 생각나게 한다」 전문


위의 시는 우리가 점점 잃어가는 고향의 모습이 누나에 대한 사랑과 결부되면서 아름다운 언어에의 몽상을 보여주고 있으므로 이 시는 낭만주의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정지용이나 미당, 송수권 등으로 이어지는 누이콤플렉스 계열을 연상시키기도 하는 이 시 역시 결핍된 자의 노래, 몽상과 그리움의 세계를 특정 지역공간을 배경으로 노래하고 있다. 온지역으로 퍼져가는 그리움의 정체는 누군가를 몹시 사랑해 본 사람은 안다. 굳이 프로이트의 언명을 빌지 않더라도 모든 예술이란 것이 소망충족의 백일몽의 일종이라 한다면, 거친 세계에 내던져진 화자가 삶에 지친 중년에 접어들어 어쩌면 그 옛날, 잃어버린 모성적 사랑과 생명으로 충만한 그리움의 대상인 누이를 그리워하되, 그 대상을 떠올리게 하는 제주도의 풍토를 배경으로 친근감있게 불러본 목가적인 시다. 허망한 시적 기교에 탐닉하던 이 시인이 위와 같이 순연하게 마음을 열고 쉽게 풀어내는 진정성의 시가 왜 독자들에게 더 공감을 자아내게 되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근자에 시들은 많이 쏟아져 나와 양적으로는 매우 풍요로운 것 같으나 오래도록 두고두고 반복해서 다시금 읽고 싶은 시는 많지 않다. 조지훈의 말처럼 귀에 쟁쟁 울리는 듯한 음악성을 가진 시, 눈에 선하게 그 장면이 떠오르는 투명한 그림이 있는 시, 가슴에 절절하게 와 닿아 감동을 주는 시가 그립다. 그러면서도 언어의 긴장감이 느껴지는 시, 언어예술로서의 시의 기품을 갖춘 시, 정신의 기율을 느낄 수 있는 시가, 그래서 즉각 암송하고 싶은 시가 더 많이 발표되기를 기대해 본다. 언어에 대한 고민이 없이 지나치게 안이한 일상어로 쉽게 쓰여진 시는 별로 읽고 싶지 않다. 또 너무 교조적으로 흘러가는 시도 거부감이 온다. 또 지나치게 소아병적인 자아도취의 시들도 따분하다. 어느 선배시인의 충고처럼, 덜 익은 과일을 함부로 시장에 내다 팔려고 하지 말고 무르익어 터져 나오는 그런 충만한 언어의 열매들을 기다려보고 싶다. 무성의하게 내뱉는 경망스러운 시보다는 진실한 삶의 체험이 묻어 나는 시, 그리하여 누군가에게 영혼의 양식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시, 푹 익어 좋은 향기를 지니고 있는 한 잔의 술과도 같은 그런 시를 자주 그리고 많이 만나고 싶다.


출처 : 이천문인협회
글쓴이 : 한기석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