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론연구] 박경수 교수님 2012년 4월 2일. 발표자 유병기(석1)
자유시론, 민요시론, 시조론의 논쟁0)
1. 1920년 시론전개 2. 김억과 황석우에 주도된 상징파 운동과 그에 따른 논쟁 3. 1920년대 민요시 운동 4.근대시의 형식 논쟁과 그 탐구방향 5. 근대시의 형식 논쟁과 그 쟁점 1)민요시와 자유시 2)민요시와 시조 3) 민요시와 프로시 4) 마무리 |
1. 1920년대 시론 전개
1920년 대 시론 전개를 몇 개의 굵은 흐름으로 조감 할 때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층위를 고려해 넣어야 할 것이다. 우선, 1910년 대 후반부터 비롯된 상징주의 시론의 수용에 대한 계승과 확산이며 이것은 20년 대 초반 동인지 운동에서 <페허>와 <장미촌>을 무대로 감억과 황석우에 의해 주도 되었다. 최남선에 의한 신시운동이 지나친 계몽주의와 교술성 일변도로 기울어져 시적 포에지의 실질을 얻지 못한 사정에 대한 반작용으로 서구문예의 수용과 내면적 정서의 탐구라는 측면에서 이 유파는 그 나름의 문학사적 역할을 담당 하였다. 본격적 서정시의 창작과 그 이론적 뒷받침은, 그러므로, 1910년대 말부터 1920년대 벽두에 비롯된다고 보아야 옳다. 뒤이어 <백조> 동인들에 의한 낭만주의 문학운동이 주도 되었고 이상화, 홍사용, 박종화, 박영희 등이 중심이 되어 우리시의 낭만주의 운동이 활기 있게 전개되었다. 이들의 시 운동은 확고한 이론적 뒷받침� 배경으로 한 것이라기보다 창작 운동의 측면에서 귀중한 자산으로 남는다. 한편 외래지향성이 지닌 포우즈의 허망함을 자각한 20년대 낭만파 그룹은 스스로 민족적 정서의 재발견과 재구성을 위한 변신을 시도하게 되는데, 그것이 20년대 중반을 이끌어간 민요시 운동이었다. 민족적 아이덴티티를 정립하기 위한 이들의 지향은 상당히 논리적인 자기주장과 시정신의 원론을 펼치게 되어 소위 ‘조선심’ 혹은 ‘조선혼’으로 불리웠던 전통정서의 재현을 위한 시론을 제공한다.
다른 일군의 시인이나 이론가들은 20년대 중엽이후 주도적으로 전개된 프로문학운동에 경시되었다. 김기진과 박영희에 의해 주도된 이 계열의 문학 운동은 문학을 사회적 기능과 이념에 충실한 수단으로 활용하기를 원하였고 그 이론적 무장도 확고하였다. 카프의 조직과 방향 전환 및 자체 투쟁의 과정을 통하여 비평의 시대를 연출한 주역이 그들이었다. 자연히 이에 맞서는 반대편 그룹에서는 계급 우선의 이론에 대은하여 민족주의 내지는 국민문학 운
0)목차 1-3까지는 오세영외「한국 현대 시론사」모음사.1992.p113-p150. <조창환, 1920년대 시론의 전개>요약 정리한 것이며, 4-5번까지는
박경수.「한국 현대시 정체성 탐구」. 국학자료원. 2000.6.30.p140-p176까지 요약 정리한 내용임
동이라는 가치아래 문학관을 함게 하게 되었고 이들 국민문학파의 주된 관심사는 시조 부흥
운동을 통한 민족정신의 탐구라는 측면에서 프로 문학에 응전하였다
프로문학파의 정치투쟁과 국민문학파의 문화운동은 각각 그 나름의 이론적 배경을 근거로 한 것이었다. 양측 모두 문학의 사회적 기능을 의식한 가열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몇 가지 층위는 1920년대의 시에 관한 이론을 다양하게 증폭하고 심화시킨 굵은 흐름을 형성한다.
2. 김억과 황석우에 의해 주도된 상징파 운동과 그에 따른 논쟁
<태서 문예신보> 이후 <창조>, <폐허> 등의 동인지 문단의 초창기를 주도하였다.
김억의 시론 <스핑스의 고뇌,(<폐허> 창간호,1920>는 그의 초기 시론의 주된 관심 영역이 프랑스 상징주의의 수용과 소개 쪽에 기울어져 있었음을 보여준다. 김억은 보를레르를 근대적 신비주의 상징파의 제 1인자로 손꼽았다. 보를레르는 ‘새로운 공포의 창시자’였고 ‘신성한 시인’이었다. ‘단테는 지옥으로 가고 보들레르는 지옥에서 왔다.’라는 말은 김억의 초기 시론에 보를레르를 중심으로 한 세기말적 퇴폐주의 색체가 얼마나 깊이 침륜되어 있었던가를 말해준다. 김억은 상징파 시인들의 방법론 중에서도 말라르메의 신비 사상에 이끌려 있었다.
상징주의란 무엇이냐? 상징과 시인들은 잡기 어려운, 이해를 뛰어나는 신비적 해답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마는 <기술을 말아라 다만 신비로운 암시>. 그것 인 듯한다. 상징은 신비의 환희라고 생각할 수 있다.
김억의 초기 프랑스 상징파의 시풍을 모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황석우의 상징주위 소개는 <일본 시단의 2대경향>(<폐허> 창간호, 1920)에 잘 드러나 있다. 여기서 황석우는 상전민에서 비롯된 일본의 상징주위가 삼목노풍에 의하여 완성되었음을 말하며, 일본의 영문학자 산궁윤의 해설을 통하여 문예사조적 개념과 범주, 독특성을 소개하고 있다. 오상순과 변영로의 글도 같은 맥락의 평문이었다.1) 이들의 퇴폐적 상징시 창작에 대한 찬반의 시비가 황석우와 현쳘의 논쟁으로 전개되어 흥미를 끈다. 황석우가 <개벽>제6호에서 현진건의 소설 <희생화>와 오상순의 <신시>를 혹평하자, 이 잡지의 편잡자인 현철은 같은 지면에서 이에 대한 반박문을 게재하고 이어서 황석우와 현철의 소위 ‘몽롱체 시비’로 발전한다.2) 작품 평에서 발단된 이 논쟁은 처음의 주지에서 벗어나 다분히 감정적 어조로 황석우의 상징시에 대한 현철의 비판과 황석우의 옹호로 일관한다.
황군이 자칭 시인이라는 명목 하에서 단행의 어구를 나열하야 그 형식은 소위 자유시라는 이름에 밀고 그 뜻은 상징주의라는 간판에 붙여 성대히 몽롱체를 만들며 한편으로는 국민적 색이니 국민시가니 국민성에 촉 하느니 세계시형이니 하애 현금 조선시국의 인심에 이유하려고 하는 그 심리야 말로 참 가련한 생각이 난다.3)
황석우에 대한 현철의 공격은 방법론적 자각이 부족한 채로 ‘어렵게만 써놓으면 그 가운데 무슨 의미가 있는 것 같이 독자를 기만할 수단으로’ 소위 상징시의 몽롱체로 문체를 쓴다는 논조로 이어지는데 황석우는 자유시가 국민적 시가로서 가치 있는 것이며 서구시형을 모방 하였다는 것이 문제 될 것 없다는 논리로 맞선다.
1) 오상순,(시대고와 그 희생>,≪폐허≫ 창간호 제2호 1920.
2) 황석우, <희생화와 신시를 읽고> 및 현철, <비평을 알고 비평을 하라>, ≪개벽≫ 제6호,1920.
3) 현철,<소위 신시형과 몽롱체>, ≪개벽≫ 제 8호,1921.
이들의 논전은 현철이 상징주의 시에 대한 기본적 소양이 부족했다는 점과 황석우가 자신이의 상징시에 대한 옹호를 엉뚱하게도 국민시가의 이론적 토대에서 찾았다는 점에서 모두 옆길로 빠져버린 결과를 초래 하였다. 어떻든 폐허파의 퇴폐적 상징시에 대한 격한 비판과 웅전이 있었던 점은 주목할 만하다.
3. 20년대 민요시 운동
20년대 민요시 운동은 시구지향적 자유시 운동의 자체 반성과 우리민족의 정서에 걸맞는 시형을 모색하기 위한 주체성 정립의 한 과정으로 대두 되었다. 20년대의 민요시 운동은 우리시의 잠재적인 전통을 재인식 하면서 민족 정서에 맞는 시형을 모색한 점에서 의의가 있다. 전통적인 것에 대한 각성은 민족의식 민중의식의 표현인 민요의 재조명에서 그 갈길을 찾았고 이것은 20년대 중반이 후 시단의 주류적 경향의 하나로 자리 잡게 되었다. 민요시는 전통 양식인 시조나 가사에 대응되는 문화적 지양이었으며,
서구적 자유 시형이나 계급주의적 프로시와 맞설만한 응전력을 갖춘 것으로 인식 되었다. 이 방면의 문학론은 민요에 대한 중요성을 언급한 것과 이를 어떻게 근대적 자유시의 영역에 수용해 나갈 것인가에 대한 논의로 집약된다. 홍사용, 김동환은 민요에 대한 일반론을 말했고 김억, 주요한 등은 창작에 관한 시론을 발표 하였다. 민요시 창작 활동이 활발했던 시기가 20년대 초 중반기였음에 비하여 그들의 체계적 민요시론들은 20년대 후반에 주로 발표 되었는데, 이는 창작을 통한 시인들의 의식적 변모가 선행 하였고 그 후에 자신들의 창작 경향을 변호 하려는 의도에서 문학론이 씌어졌기 때문이다. 아울러 20년대 후반의 프로계열의 적극적 이론 공세에 맞서는 대응력을 지니면서 그들의 자연 발생적인 시적 변모가 정리 될 만한 역량의 축적을 위해서는 시간적 여유가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주요한과 김억은 이 땅에 서구적 근대 자유시의 실험적 선구를 담당 하였던 시인들이었으므로 그들의 민요시 지향은 서구 시 체험과 창작 실험의 결과 얻어진 자체 반동의 성격이 강하였다. 초기 자유시의 자기 체면적 정서의 시게가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기에 미흡하다는 것을 개달은 이들 자유시의 선구자들은 민족, 민중, 그리고 조선 혼의 재발견에 관심을 기울인다.
주요한은 <노래를 지으시려는 이에게>에서 우리시의 나아갈 방향을 두 가지로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민족적 정조와 사상을 바로 해석하고 표현하는 것과 조선말의 미와 힘을 찾아내고 지어내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제 우리의 나아갈 길은 다름이 아니라 이 외국문화 전체에서 벗어나서 국민적 독창 문학을 건설함에 있습니다....<중략>....튜톤 문학에 튜톤의 피가 흐르고 라틴 문학에 라틴의 피가 흐름같이 조선 문학에 조선의 피가 뛰 놀아야 할 것이외다....<중략>....조선의 신시 운동이 성공하려면 반드시 민요를 기초삼고 나아가야 되리라 합니다.4)
4) 주요한,<노래를 지으시려는 이에게>,≪조선문단≫,1924, 10~12
이처럼 주요한은 독창적인 국민 문학의 건설을 위해서는 그 민족 정서가 담긴 민요를 바탕으로 해야 하고, 어떤 나라의 문학사를 보아도 민요가 그 나라 근대 문학의 기초를 형성하였다는 점을 역설한다. 이러한 태도는 그 몇 년 후에 대두되는 최남선 등의 국민문학파의 이념적 지향을 함께 하는 것이면서5) 민중에게로 더 가까이 하기 위한 민중 시론의 표출이었다.
김억은 1924년 전후해서 민요시 쪽으로 방향을 돌리는데 이는 그의 초기 시에서 보인 퇴페적 상징시 편력이 방향전환결과였다. 김억은 ‘정말로 현대의 조선심을 이해하는 시인이 있다하면 그 시가는 일반을 모르나 어떤 큰 부분의 사람에게는 반드시 큰 공명의 음악을 줄줄 압니다’6)라고 하여 민족시의 아이텐티를 정립하기 위한 자기 변신을 보인다.
홍사용은≪백조≫ 동인 시절부터 민요에 관심을 보여 왔는데, 그는 민요의 세계를 인간의 상상력과 극적 본능이 만들어 놓은 가락과 흥이 어울린 ‘신화 세계’라 하였다. 그는 민용의 세계에 우리 넋이 깃들어 있다고 하며 민족 공동체의 정서의 원천을 민요에서 찾고자 하였다. 홍사용은 20년대 시인이나 시론가중에 가장 폭넓고 진지한 구비문학의 이해자였다. 한편 김동환은 계급 주의적 입장에서 이 문제에 접근 하였다. 그는 계급 해방 문학을 주장하며 조선조 말기의 평민문학을 높이 평가하여 이 시기를 ‘조선인 문학상 정서의 대 해방시대’라고 보았다. 김동환은 프로문학파의 입장에서 국민학파를 공격한다.
그러나 대체 조선심 조선혼이란 무엇이냐, 조선의 구세주는 오직 그 <심>과 <혼>이라 하고 자꾸 고조하면 어떻게 되느냐 대답하기 전에 먼저 말한 것은 조선의 문사는 전부 XX 적<인텔겐챠>다. 따라서 작품도 공리적일 것이다.7)
막연하고 관념적인 조선심, 조선혼의 고취는 정치적 해방이나 경제적 자유를 위한 투쟁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시기의 민요시론과는 좀 다른 차원에 놓이지만 김소월의 <시혼><《개벽》제59호, 1925.5)도 검토 할만 한 가치가 있다. 화려한 수식어로 장식된 이 시론은 변화 하지 않는 영원한 것을 추구하는 고아한 시인의 정신을 예찬한 것이다. 그는 평범하고 관습적인데에 진리가 있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밤, 전원, 자연의 아름다움 속의 전통적 삶의 공간에서 찾았다. 시인의 절대 불변의 혼의 울림과 메아리가 시로 표현된다는 생각은 서양의 후기 낭만주의적 시관과 상통하는 바 있다. 김소월은 보편적이며 객관적인 삶의 원동력을 자연과 향토의 아름다움에서 찾았다. 이러한 그의 시관은 당대 사회의 총체성과 구조적 모순의 이해로까지 발전한 것은 아니었으나, 전통 서정의 세계를 자신의 시에 수용하여 고독과 비애, 한과 소외의식을 표현하는 시로 승화시킨 점에 의의가 있다.
한편, 1920년대 중반에 대두되어 카프게열의 프로문학 운동과 이념적 대결을 벌였던 국민문학파는 민족 문학의 정체성 확립이라는 큰 흐름에서 보아 앞서 언급한 민요시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파악 될 수 있다.
5) 졸고,<주요한과 자유시의 실험>, ≪한국 현대시사 연구≫ (일지사,1983),p.79.
6)김억, <조선심을 배경삼아>,≪동아일보≫1924.1.1.
7) 김동환,<애국문학에 대하여>,《동아일보》1927,5.17.
문단사적 논쟁의 측면에서 보면 국민문학파가 카프와의 대타의식에서 등장한 것으로 보이나 , 장르 선택의 방행과 문학관 기조로 볼 때 이 그룹의 형성과 활동은 민족주의 이념의 실천 운동의 맥락으로 이해되어짐 하다. 최남선, 이광수, 김억, 주요한, 김동인, 변영로등 비카프계열의 문인들이 망라된 이 계열의 지향 목표는 ‘조선심’과 조선의 문학‘으로 요약되는 소위’조선주의‘의 탐색이었다. 시와 시론에 있어 이들은 시조와 민요를 중심으로 한 민족문학의 양식적 재조명에 초점을 맞추었다. 국민문학파의 민족주의 문학론은 이론적 무장이 사회주의 문학론에 비하여 취약하였음으로 당시대 현실의 총체적 조망과 상황에 대한 구조적 인식이 결여된 채로 민족적 문화유산의 재발견과 부흥이라는 다소 막연하고 감정적인 방향으로 홀렸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시조 부흥 운동 등을 통한 민족적 문학유산의 부활과 재창조 등은 이들의 공적으로 남았다.
최남선은 <조선 국민 문학으로서의 시조>(《조선문단》제60호, 1926,5)에서 시조는 조선심, 조선어, 조선 음률을 표현한 민족 문학의 자산이라는 점, 구조(句調), 음절, 단락, 체계의 정형을 이룬 고유의 장르라는 점을 말하면서 이를 부흥하고 그 가치를 새롭게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최남선의 시조 옹호론은 국민 문학파의 장르선택을 주도하면서 동시에 카프파에 의한 격렬한 반론에 부딪친다. 김기진은 귀족 계급의 예술인 시조는 반민중적이며 국가 형태나 생활조직의 변천과 함께 민족적 개성이라는 것도 중요성을 잃게 마련이라고 공박한다. 김기진의 계급주의적 관점은 민족적 개성 자체를 무시하는 입장에 서지만 변화된 역사적 현실에서 복고적 과거 지향성에 대한 비판을 제기한 점에서 의의가 있었다.
20년대 후반 프로 문학에 대한 하나의 대응체로서 온건한 민족주의 성향에 위치한 국민문학파는 무산대중을 위한 계급투쟁을 지상 과제로 삼은 사회주의 계열의 문학론과 신채호의 급진적 폭력투쟁의 저항 민족주의 양측으로 부터의 공격을 감내해야 하였다
그런대로 ‘조선주의’를 정신적 지주로 삼아 시조와 민용의 부흥운동, 고전연구 등의 방식으로 민족문학의 유산을 되살려 정신사적 지속의 전통성을 회복하고자 노력한 점은 의의 있는 것이었다.
1923년 무렵부터 약 10여 년간은 무산대중의 해방을 외치는 사회주의 문학이 우리 문단을 주도 하였다. 러시아 혁명의 거센 파고가 일본 문단을 강타
하였고 이에 자극받은 백조파의 김기진이 귀국하여 박영희와 함게 소위 신경학파 문학 운동을 선도 하였다. 1925년에는 이들이 주도한 사회주의 문학운동 단체인 <파스큘라>가 이적효, 이호 등의 <염군사> 계열의 문화단체와 제휴하면서 계급 문학적 자각으로 무장한 조선 프로테리아 예술가 동맹(K.A.P.F)을 결성한다. 조직화된 이들의 문학 운동은 1927년의 전국대회에서 ‘예술을 무기로 하여 조선민족의 계급적 해방을 목적으로 한다.’는 강령을 채택하게 되는데 이는 조중곤, 김두용, 홍효민 등 ‘제3전선파’의 강경노선이 미온적 문화 운동으로서의 카프적 문학 활동을 강화 할 것을 요구한 결과였다. 1930년을 전후하여 카프의 볼세비키화가 시작되어 이 이념적 투쟁보다 강화되고 문학적 편향성은 더욱 경직 되었다. 이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의 연합체인 ‘신간회’가 해체되고 민족보다도 계급을 우선하는 행동적 신세대인 임화, 권환, 김남천, 안막 등의 ‘전투하는 계급의식’의 주장이 내부 투쟁에서 승리한 결과였다. 이 과정에서 안으로는 카프 맹원들간의 이념적 갈등이 노정 되는데 그것이 소위 내용과 형식논쟁, 대중화 논쟁이었고, 밖으로는 국민 문학파 밒 해외문학파와의 논쟁을 거치게 된다.
이러한 이념적 문예 운동은 비평이 선도 하였고 초창기 경향 문학의 이론가로는 김기진을 꼽지 않을 수 없다. 김기진은 <클라르테 운동의 세계화>를 비롯한 3년의 연재 평론에서8)
프로레타리아 계급의 자유와 미에 봉사하는 문학, 그들의 해방을 위한 수단으로서 문학, 우리의 현실에 맞는 적극적인 문학을 주장한다. 이에 <지배계급 교화, 피지배 계급 교화>《개벽》 제43호,1924.1)등의 논문을 통하여 김기진은 문학의 목적을 사회조직의 개혁을 통한 민중의 교화에 있다고 보며, 식민지 치하 지식인의 역할은 민족 해방 운동과 계급 해방 운동의 양축을 함께 담당해야 한다는 주장을 편다. 그는 식민지 치하의 브르조아지의 운명은 6, 7년 내에 프로테리화 할 것이라 예언하며 양자는 공동의 과제를 위하여 협동 전선을 펼쳐야 한다고 역설한다. 김기진의 이러한 논점은 당시대 사회적 구조를 통합한 총체로 파악한 점에서 올바른 시야를 지닌 것이었다. 박영희 역시 ‘무산화 하는 조선민족’이라는 관점을 지녀 조선의 피폐화를 직시하고 고통의 현실로서 당대 사회를 바라보았다. 고통의 현실에 대한 맞섬에서 현실을 뚫고 나오는 희망을 얻을 수 있으며 이러한 문학적 현실 인식과 전망을 그는 ‘신이상주의’라 불러다 박영희는 김기진과 같은 부석적 이론 전개와 호소력을 지니지 못한 대신 관념적이고 감상적 차원에서 진보적 지식인다운 열정과 혁명적 낭만성을 보였다.
카프 조직후 1927년 김기진과 박영희 간의 ‘내용과 형식 논쟁’은 이들의 이념 투쟁과정에서 발생한 최초의 내부 갈등이었으며 프로문학의 방향정립을 확고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논쟁은 박영희의 소설<철야>와 <지옥순례>를 김기진이 공격함으로써 발단되었는데 ‘소설은 한 개의 건축이다’라는 명제로 김기진이 공격함으로써 발단 되었는데 ‘소설은 한 개의 건축이다’라는 명제로 김기진이 프로문학도 일정한 예술적 형식미를 갖추어야 한다고
비판하자9)
박영희는 즉각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계급투쟁의 단계에서는 예술성은 일단 유보해도 좋다는 반론을 편다.10) 박영희는 무산계급의 문화건설을 위한 투쟁기의 문학의 임무는 이데올로기적 전체성 속의 한 부분으로서 기능해야 하며 선전과 선동을 통한 계급의식이 고취가 문학의 독자성에 우선 한다는 태도를 취한다. 박영희는 청야계길(淸野季吉)의 목적 의식론을 도입하여 문화사적 비평의 단계에서의 비평의 역할을 말함으로써 김기진의 내용과 형식의 조화라는 문학 원론적 가치 평가 태도에 맞선 것이다. 이 논쟁은 프로문학의 목적 주의적 운동성이라는 대명제 아래 김기진이 투항 하는 것으로 끝나는데, 작품론에 우선하는 조직 운동의 차원이 가프파의 데세를 휩쓸었고, 공교롭게도 아나키스트 김화산의 예술의 독립성 주장에 대한 카프파의 목적 주의적 대결 의지가 일치된 단결력을 발휘하던 시기와 맞물려 있었기 때문이다.11)
현대 시론의 형성 과정 측면에서 보면 이 논쟁은 러시아 형태주의와 마르크스 레닌주의 미학에 대한 문학 이론의 수용과 한계를 함께 보여주는 것이었다.
8) 김기진,<클라르테 운동의 세계화>《개벽》제39호, 1923,9)및 <바르뷔스 대 로마롤랭간의 쟁론>(《개벽》제40호,1923,10),<또다시 ‘클라르테’ 에 대하여)《개벽》 제41호,1923,11).
9) 김기진, <문예시평>,《조선지광》1926.12.
10) 박영희, <투쟁에 있는 문예비평가의 태도>,《조선지광》1927.1.
11) 김화산이 <계급 예술론의 신전개>《조선문단》1927.3)에서 아나키즘은 볼세비즘과 구별되며 예술은 독립할 가치가 있다고 프로 문학파를 공격하자, 프로파의 조중곤, 운기정,한설야가 일제히 반격해 나섰고 (조중곤,<선전과예술>,《중앙일보》,1927.3, 윤기정,<계급예술의 신전개를 읽고>《조선일보》1927.3.25, 한설야,<무산문예가의 입장에서-김화산군의 허구문예론, 관념론적 당위론을 박함>, 《동아일보》,1927.4.5) 다시 김화산이 (뇌동성 문예론의 극복)(《현대 평론》1927.9.4)일치된 논조로 아나키즘에 대한 집중 공격을 퍼 부었다.
회월 팔봉 사이에서 드러난 논쟁에서 드러난 내용. 형식의 문제는, 전자의 경우 마르크스주의 미학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에도 도달하지 못하였고 후자의 경우 마르크스주의 미학으로서 형태주의에 대한 관점이 확립되어 있지 못하였다는 데 약점이 있다는 지적12) 은 이 시가 문학론의 취약성을 지적한 것이 된다.
예술은 현실의 반영이라는 대전제 아래 형식은 내용을 확정짓는 예술 작품의 본질적인 조직이며 구조라는 마르크스주의 미학은 형식에 대한 내용의 우위성을 강조 하지만 이 양자의 변증법적 통합을 지향하는 것이었으나, 김기진과 박영희의 내용과 형식 논쟁은 이러한 미학적 원리에 대한 본질로부터 벗어나 투쟁을 위한 문예 운동이라는 현실 문제에만 몰두한 것이었다. 그러나 김기진이<시가의 음악적 방면>(《개벽》1925.8)등의 논문에서 우리시의 운율론적 이론 탐구와 시적 비유에 관한 관심을 보인점은 주목할만하다.
새로운 문예 운동은 새로운 양식상의 변화를 요구한다. 이념은 목표를 결정하고 이에 걸맞는 방법적 수단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계급 문화의 대상인 노동자와 농민층의 의식 수준과 생활상에 적합한 문학 형식으로 나타난 것이 ‘농민시’와 단편서사시‘등이었다. 아울러 독자 대중의 교양 수준이나 이념적 목적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선동의 수단에 대한 방법적 논의가 대두 되는데, 1929년경 소위 예술 대중화 논쟁이 그것 이었다. 이 창작 방법론에 관한 논쟁은 김기진과 임화, 안막 사이에서 전개 되었다. 김기진은 프로시가의 방향은 대중이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흥미를 가미하며 통속화 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무산 대중의 자각과 계급 투쟁의 집단 운동을 공격적으로 노골화 하자 검열이 강화 되고 프로 문학 창작은 상대적으로 위축 되었던 상황에서 대중화론은 그들의 방법적 탈출구의 모색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임화의 <탁류를 행하여>(《조선지광》1929.8)는 김기진의 대중화론을 볼세비키화의 입장에서 비판 하면서도, 김기진의 ‘변증적 사실주의’에 대해서는 동의하는 논조를 편다.
임화는 ‘사회적 사실주의(social realism)' 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프로테리아 전위의 눈으로 역사적 현실을 볼 것을 주장하며, 이를 단순한 양식상의 문제가 아니라 계급 예술이 발전하는 한 단계로 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변증적 사실주의’니 ‘사회적 사실주의’니 하는 용어상의 혼돈과 그에 따른 개념들은 안막의 ‘프로테리아 리얼리즘’이라는 용어 개념으로 정리 되면서 논의는 점차 마르크스주의의 전체성 속에서 ‘전위의 눈으로 세계를 보라’는 볼세비키아 관점으로 진전 되었다.13)
임화, 김남천, 안막 등의 보다 더 적극화된 투쟁 노선은 1930년 경 프로 문학의 볼세비키화로 귀결되고 이어서 이들 소장파의 대두에 밀린 박영희 등이 타율적 사회정세의 업악을 계기로 전향 하면서 30년 대 초반으로 프로문학 운동은 붕괴 과정에 들어서게 된다.
12) 한게전,《한국 현대시론연구》(일지사,1983),p98.
13) 안막,<프로에술의 형식문제-프로테리아 리얼리즘의 길로>,《조선지광》1930.3.
4. 근대시의 형식 논쟁과 그 탐구방향 14)
우리 시가 근대시로서 본격 개화되기 시작한 것은 1910년 대 중반 이후부터다 김억(金億), 주요한(朱耀翰), 황석우(黃錫禹) 등 일본에 유학한 당대의 젊은 시인들이 일본에서 습득한 서구 및 일본 근대시의 새로운 경향을 소개하는 한편, 그러한 경향의 시를 우리 국어로써 시험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시 형식이 모색 되었다.
1920년 대 중반 이후 특히 서구 지향의 자유시에 대한 반성이 폭넓게 일어났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근대 초창기에 서구시의 경향을 앞장서서 수용 하고자 했던 김억, 주요한 등이 자신들의 과거 문학 행위를 적극 반성하는 자세를 보였다는 점이다. 이들의 초기에 긍정해썬 자유시 및 산문시가 오히려 우리시 형식으로서 개성을 상실하고 시다운 맛을 잃어 버리는 결과를 초래 했다고 비판했다. 따라서 앞으로의 시는 민족적 리듬과 민족 정서를 살릴 수 있는 시가 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시조 부흥과 함께 민요에 바탕을 둔 시 즉 민요시를 쓸 것을 주장 했다. 이런 주장은 민족 문학파15)의 적극적 지지를 얻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문족 문학파와 대립적 입장에 있었던 계급 문학파의 주장은 이와 크게 달랐다. 이들의 관점은 물적 토대가 중시되는 산업화 시대에 민요시의 형식은 부적절하며 자유시의 형식이 마당하다고 했다. 물론 계급 문학의 진행 과정에서 대중화를 위한 시형식으로 이른바 ‘단편서사시’나 민요시의 형식도 제안되고 또한 지속적으로 쓰여지기도 했다. 우리시의 시 형식 모색은 이외에도 초기 자유시의 형식을 끝까지 고집한 경우도 있었으며 시조 등의 전통 시 형식을 제인식 하고 부흥 시키고자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우리 근대시는 다양한 방향에서 형식 탐구가 이루어지는 한편, 때로 진지한 논쟁을 겪으며 전개 되었다.
5. 근대시의 형식 논쟁과 그 쟁점
1) 민요시와 자유시
근대시는 시조 가사 등 전 시대의 시가가 지닌 한계를 극복하고 우리시로서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으려는 노력에서 그 형식 탐구가 이루어졌다. 이런 점에서 자유시와 민요시는 서로 다른 시적 토대에 기반을 두고 모색한 우리시의 근대적 형식이다. 즉 자유시는 우리시로서의 새로운 가능성을 서구 시(일본 시 포함)에 근원을 두고 모색한 것이었고, 민요시는 우리시로서의 합당한 조건을 시조, 가사와는 또 다른 우리시의 내적 전통인 미요에 두고 모색한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논쟁의 초점을 삼고자 하는 것은 이들 시가 1920년대의 시적 상황에서 어떻게 인식, 수용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러한 문제는 자유시와 민요시를 두고 일어난 당시의 논란을 해명 하는 데에서 분명하게 파악 될 수 있다. 우리의 자유시는 주지하다시피 김억, 주요한, 황석우 등의 시인에 의해 나타났다.
이들은 특히 서구 및 일본의 상징주의 시를 체험하는 과정에서 자유시가 근대적인 시로서 새롭게 형성 되었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시를 소개, 수용하는 일을 적극 펼치는 한편 우리의 국어로써 시험한 자유시를 쓰고자했다. 이글이 서구 및 일본의 상징주의에 기초한 자유시를 수용한 구체적 방향은 시인에 따라 서로 다르다. 그렇지만, 이들은 우리에게 본받을 만한 시적 전통이 없다고 생각한 데에서 서구 자유시 수용 명분을 삼았다. 전통 부재의식 내지 전통 비하의식을 기진 이들 시인에게 서구의 자유시는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서구 시 및 일본 시에 기초한 자유시의 경향은 점차 젊은 시인들에게 확대 되면서 근대적 시 형식으로 보편화 되는 추세로 나아갔다. 그러나 자유시의 전개 과정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정형의 리듬에 익숙한 독자에게 자유시는 매우 생소하거나 생경한 형태를 보여주는 것으로 인식되고, 또한 자유시가 우리시에 내적 전통을 부정한 바탕 위에서 모색되었기 때문에 진정한 우리시가 될 수 없다는 비판이 제기 되었다. 1920년대 초에 일어난 황석우와 현철(玄哲)의 시 논쟁은 근대 초창기 자유시의 수용 문제를 둘러싼 갈등 상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황석우와 현철 사이의 시 논쟁에서, 먼저 자유시 형식이 근대시가 취할 합당한 형식임을 주장하고 있는 황석우의 글을 보자.
민족혼이 인류 혼으로 다양하게 독립한 각 민족의 국가가 일어(日語)로 통일 되어 가려는 금일에 ...중략...국민시가 요건을 그 랭궤지 위에 두는 것보다 그 시의 작가가 그 국민의 일원 되는 것의 위에 둘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둘째는 그 국민성을 표현한 것임을 요하겠습니다. 「랭궤지」는 그 시에 재한 물적 재료 곧 그 사상, 감정을 발표하는 한 그릇에 지내지 못하는 것이니까 ....(중략)...우리의 쓰는 시가 서양에서 생긴 시형을 모방 하였다고 그것을 「시형뿐을 모방하였다는 의미」로라도 서시(西詩)의 모방이라고 하는 것은 불온당한 말입니다. 나는 모방이란 이 이자(二字)를 그 다지 문제로 하는 바는 아닙니다마는 이미 세계적으로 공개된 시형 곧 인류 공통의 시형이라고 하여도 가한 서사형을 가지고 쓴 것에게 모방이라는 문제가 생겨날 리가 업지 안습니까.16)
이글에서 황석우가 자유시를 옹호하는 논리가 분명히 드러난다. 자유시는 이미 세계 보편적인 시형으로서의 의의를 가지기 때문에 서양시의 모방으로만 보는 관점은 잘못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시가 국민시가로서 독자성을 어떻게 가지느냐 하는 문제보다 얼마나 세게적 보편성을 지니느냐 하는 점을 더욱 우선시 하고 있다. 황석우가 옹호한 자유시는 말 그대로 서양의 시를 모방한 시일 수는 있어도 진정한 의미의 근대시나 민족시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시를 쓰는 주체의 요건만 갖추면 국민시가 된다는 것도 논리 비약일 뿐만 아니라 억지에 불과하다. 시의 주체, 언어, 형식의 요건은 상호 보완적 관계를 형성 하면서 국민시가로서의 성립에 제각기 필요한 구실을 한다. 그럼에도 언어와 형식 문제를 도외시 하면 극단적인 경
우 한국인이 쓴 시이면 다른 조건은 논외로 하고 모두 민족시로 운위할 위험이 있다. 황석우는 자유시가 국민시가로서의 진정한 우리시가 되지 못한다는 견해에 대하여 자기중심적인 입장에서 합리화하기만 했다. 이에 대한 현철의 비판은 상당히 날카롭다.
14) 목차 4-5번가지 박경수.「한국 현대시 정체성 탐구」. 국학자료원. 2000.6.30.p140-p176까지 요약 정리한 내용임
15) 민족 문학파란 당시 국민 문학파 또는 민족 문학주의파로 통칭 되었던 것이다.
16) 황석우, <주문치 아니한 시의 정의를 일러 주겠다는 현철군에게>,《개벽》 제7호(1921.1) 원문의 인용에서 한자어를 모두 한글로, 고어 표기나 현대 맞춤법에 어긋난 표기를 모두 현대어 표기로 바꾸었다. 다만 한자어를 한글로 바꿀 경우 뜻이 모호해 지는 경우만 한글 다음에 괄호 표시를 하고 해당 한자어를 넣었다. 이하 인용문은 모두 이와 같은 방식으로 표기했다.
황군이 자칭 시인이라는 명목하에서 단행의 어구를 나열하야 그 형식은 소위 자유시라는 이름에 밀고 그 뜻은 상징주의라는 간판에 부쳐 성대히 몽롱체(朦朧體)를 만들며 한편으로는 국민적 색이니 국민시가니 국민성에 촉(觸)하느니 세계시형이니 하야 현금 조선시국의 인심에 아유(阿諛)하려고 하는 그 심리야 말로 참 가련한 생각이 난다. ...중략...) 만일 황군의 말과 같이 진정한 성의로 조선 민족을 위하여 국민시가를 창설하려고 하거든 그 순서로써 먼저 우리의 고시를 연구하여 그 시상과 시형이며 또는 그 민족성이 나변(那邊)에 있는 것을 깊이 안후에 조선문을 -조선어를 신고(新古) 물론하고 잘 알아야 할지요. 그런 뒤에는 외국 사상이나 시형을 배울 것이며 또 그 주장을 참작하여 가장 우리 민족성의 특장(特長)에 융입(融入)하는 것이라야 참으로 황군의 위대한 소위 국민시가가 창조 될줄안다.17)
황석우의 견해를 비판한 현철의 이 글은 1920년대 초기에 아무런 방법론적 각성 없이 서구시의 경향을 수용하던 풍토에 충분한 각성을 불러일으킬 만한하다.
황석우가 상징주위 운운하며 자유시가 세계의 보편적 시형이기 때문에 이를 모방 한다고 해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다고 한 입장에서 정당한 반론을 펼친 것이다. 이러한 현철의 지적은 우리 시형의 모색에 충분한 반영이 되면서 당시 문단의 상황에 비추어 보았을 때 상당히 앞선 견해를 보여준 것으로 평가 된다.
1920년대 초기 낭만주의의 화려한 꽃을 수놓았던 백조파의 시인들도 각기 다른 방향에서 ‘자기상실’의 병리적 현상을 치유하고자했다. 박종화, 박영희 같은 이는 각각 소설, 비평으로 문학 장르를 전환시킴으로써 탈출의 방향을 잡아갔다. 서구지향의 자유시에 대한 자기반성은 1920년대 중반 이후 김억, 주요한, 김동환 등에 의해 일어났다.
근대 초기 자유시의 경향에 대한 비판 의식은 주요한의 경우처럼 전체적 자기부정의 태도로 나타나기도 했지만, 자유시의 언어, 리듬, 시정신등 여러 요소적 측면에서 세심하게 성찰 되는 쪽으로 전개되기도 했다. 특히 초기부터 상징주의에 입각한 자유시의 경향을 계속 고수하고자 한 황석우, 노자영 등의 시가 집중적으로 비판의 표적이 되었던 한편, 주요한을 비롯한 홍사용, 김억, 김동환등에 의해 초기 자유시 경험에 대한 자기비판이 함께 이루어졌다. 자유시 비판론들을 검토해 본다면, 자유시 비판의 중요 사항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언어의 사용에서 실패했다는 것이다.
둘째, 음악적 요소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셋째, 자유시의 작품들이 대부분우리의 사상과 감정을 배경으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넷째, 자유시의 내용은 현실을 등한시함으로써 민중으로부터 멀어져 버렸다는 것이다.
비현실 속에서 자기 탐닉, 막연한 애상에 의한 허무주의와 현실 부적응 상태에 빠진 자아의 모습을 보여줌. 등
17) 현철<소위 신시형과 몽롱체>, 《개벽》제 8호(1921.2).
이는 시의 리얼리즘 전신에 입각한 것이다. 춘성(春城) 노자영(盧子泳)의 시는 이런 점에서 많은 표적이 되었으며, 특히 계급 문학파의 공격은 강경할 수 밖에 없었다.
과도기적 자유시에 관한 비판적 내용은 여러 가지 점에서 당시 자유시가 안고 있는 한게를 적절히 지적하고 있다. 그러한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대안으로 제시된 민요시는 과연 실천적 대안으로서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는가? 특히 초기 자유시의 경향을 스스로 부정하며 민요시를 주장한 시인들, 이를 테면 김억, 주요한, 김동환 등 시인의 경우는 어떠한가. 이들의 민요시는 대체로 실패하거나 또 다른 문제점을 야기 했다고 말할 수 있다.
첫째, 민요시의 인식은 자유시의 산문적 리듬에 대신 지나친 부정으로 김억처럼 엄격한 음수률을 지키는 격조시(格調詩) 내지 절구체시(絶句體詩)를 만들어 버렸다.
둘째, 민요시를 써야 한다는 논리의 한 근거로 제시했던 것이 앞으로의 조선의 사상과 감정 즉 ‘조선심’을 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민요시 인식의 이러한 과도기적 단계의 자유시를 비판적으로 극복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1920년대 시의 또 다른 혼란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2) 민요시와 시조
민요시와 시조는 우기에 민족 문학파에서 ‘조선주의’의 문학적 이념을 실천하는 중요한 방법론적 대안으로 함께 옹호 되었다. 이는 민요시와 시조가 민족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해 온 문학의 오랜 양식이자, 면면히 계승 되어온 전통시가로서의 민요와 시조를 각각 재인식함으로써 성립 된다는 점에서 가장 전통적인 동시에 ‘조선적’인 시의 양식 일 수 있기 때문이다. 1920년대 시조 부흥 운동은 당시 민족 문학파에 속했던 최남선, 이광수를 비롯하여 이은상, 이병기, 조운 등을 중심으로 전개 되었다.
최남선의 시조 부흥 운동은 ‘규범적 시조인식’을 보이는 대표적인 경우이다.
조선시대의 시조는 분명히 한 작품을 넘어서서 그 사회 속에 양식화되어있는 정형양식이라 규정할 수 있다.
이병기와 이은상 등의 시조시인은 최남선의 시조 인식과 구별 된다. 그것은 새로운 시대의 시조는 조선조의 시조를 규범적으로 인식하는 데에서 탈피하여 새롭게 변화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리도 저옥이 조선 문학을 건설하려면 시조도 변환케 하여야 한다. 그러자면 그 내용을 새롭게 충실하게 하여애 한다....(중략)..., 내용을 참신케 하자면 따라서 그 형식도 얼마곰 변화가 있어야 하나. 만일 천편일률로 고시조의 조격(調格)만 본받어 짓는다 하면 비록 참신한 내용을 가진 것이라도 참신케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흔히 단순하고 평범하기 쉬울 것이다.18)
이상에서 이병기는 조선조의 시조는 조선조의 시대적 양식으로 인정하고, 현재의 시조는 조선조의 시조를 극복하고 계승하는 데에서 진정한 의의가 있다고 했다. 즉, 그는 시조의 격조를 시인 자신의 감정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리듬으로 인식했고, 현재의 새로운 의미
18) 이병기,<시조란 무엇인고>,《동아일보》1926.12.10~11).
내용과 조화되면 시인의 개성을 상실한 천편일률적인 시가 되며, 단순하고 평범한 시가 된다고 했다.
1당시 대부분의 시인들은 시조를 정형의 규범적 양식으로 보았다. 1920년 대 당시 대부분의 민요 시인이 시조 부흥 운동에 대하여 회의적인 견해를 보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민요시인은 새로운 우리시의 성립 조건으로 민요시가 시조보다 바람직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편 카프에 가담하여 계급 문학을 옹호하고 있던 김동환은 시조 부흥 운동에 대하여 강하게 비판하는 태도를 보였다.
을파소(乙巴素) 김종서(金宗瑞) 이래 수백년을 일사불란으로 지켜온 낡은 정형이니만치 신시나 민요에 나을 것이 없겠지요. 또 초중종 3장의 제약이 기계밖에, 이미 내용이나 형식에 나을것이 없다면 애써 백골 파내듯이 파낼 필요는 없겠지요. 그것보다도 나는 타령이나 장가(長歌)나 가사(歌詞) 같은 것을 부흥 시키는 것이 휘씬 민중적이고 현실적이라고 생각합니다.19)
이처럼 김동환은 과거의 시조가 3장 형식의 기계적 제약을 가진 낡은 정형의 양식일 뿐만 아니라 반민중적이고 비현실적이기 때문에, 이를 부흥시킬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김동환은 “시조는 배격할 가치조차 없는 ‘사(死)문학’, 부패 문학의 잠들어 누운 묘지”라고 까지 극언을 했다. 그것은 시조가 도태한 과거 문학에 지나지 않으며, 민중의 생활 감정을 도외시한 귀족문학이기 때문에 그 형식이나 내용이 시대 조류를 다르지 못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김동환의 이러한 시조 배격 론은 민족 문학파의 시조 부흥 론을 정명으로 비판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민요시인의 시조에 대한 비판적 견해에 대해서 시조 부흥론 자들은 별도의 대응을 하지 않았다. 1920년대 시조부흥운동은 민요시 창작의 노력과 함게 새로운 우리시 모색의 중요한 방안이었다.
3)민요시와 프로시
민요시와 이른바 프로시는 1920년대 중반이후 문단의 대립적 관게속에서 서로 다른 문학 이념의 추구에 따라 본격화된 근대시 양식이라 말할 수 있다. 즉 민요시는 시조와 함께 문족 문학 편에서 이른자 ‘조선주의’의 이념을 구현하는 문학적 실천의 한 방법으로 본격화 되었으며, 이른바 프로시는 1925년 카프의 성립을 계기로 프로레타리아의 무산 계급을 위한 관계를 당시 문단의 대립적 구도에 의해서만 파악할 수 없다.
문단의 대립적 관계가 형성되기 이전에 이미 김소월, 홍사용, 김석송, 등의 시인들에 의해 쓰여지기 시작했다. 그 이후에도 민요시는 문학파에 속한 시인만이 아니라 카프 내부의 일부 시인들 -김동환, 양우정, 등의 시인들과 그 밖의 여러 시인들의 참여로 범문단적으로 확산 되어 갔던 것이다.
그러나 민요시와 프로시는 이런 사정에도 불구하고 당시 문단의 대립적 관계 국면에서 첨예한 논쟁의 대상이 되기도 했던 것이 사실이다. 민요시가 프로시가 구체적으로 어던 점에서 첨예한 논쟁의 대상이 되었는지 파악해 보자. 먼저 민요 시인들의 경우 카프에 속한 시인들을 제외하고 대부분 프로문학에 대해서 비판적이다. 프로문학에 대한 입장을 밝힌 김억의 다음 글을 보자
「프로테리아」문학이란 예술을 공리적 의식으로 이용한 것만큼 얼마 아니하야 올 다음 시대에는 반드시 이러한 운명을 받지 않을 수없습니다. 나는 「프로테리아」문학을 통속적 저급 문학이라하는 동시에 이 항의로써 그들의 반성을 최(崔)함에 지나지 아니함과 시대란 앞으로 나아감을 말해둡니다.20)
김억은 프로문학이란 목적의식의 고취를 문학을 단지 수단으로 이용한 것이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주요한이 ‘개념’으로 된 시를 부정한 것21)도 김억의 입장과 기본적으로 일치한다.
당시 민족 문학파의 편을 든 다음의 글은 그 적절한 예를 보여주는 것이다.
「개벽」4월호에는 적구(赤驅)씨의 「여직공」(女職工)외 수편이 실려 있었다. 적자로서는 눌린 계급, 짓밟힌 계급을 위하여 만곡(萬斛)의 혈루(血淚)를 뿌려가면서 대성질호(大聲疾呼)한 소위 프로시편이라 할런지 모르나, 시 감상자인 나에게는 하등의 감명을 주지 못한다. 왜 그러냐 하면, 이 「여직공」이란 일편은 그 시형이나, 그 시어가, 너무나 시 되기에는 조잡하고 「비시적」인 대문이다.22)
카프의 일원이었던 적구(赤驅)유완희(柳完熙)의 시를 비평하는 양주동의 태도는 이처럼 매우 비판적이다. 유완희의 시가 계급의식을 격정적으로 호소하고 있는 이른바 프로시의 범주에 속한다고는 하지만, 양주동의 관점에서는 시로서 인정하기 조건 미달이라는 것이다.
만족문학파의 민요 시인들과 양주동처럼 이를 지지한 시인들이 당시의 프로시를 바판한 논법은 다음과 같이 정리 할 수 있다.
프로시는 시의 독립적 가치를 거부하고, 계급투쟁의 목적 의식를 강조하기 위해 개념의 치장으로 된 관념시가 되었다. 그 결과, 프로 시는 시어가 조잡하고 시형이 제대로 자리 잡지 않는 동 시적 형상화에 실패하여 시답지 않은 시, 즉 아무런 감동을 줄 수 없는 시가 되고 말았다. 프로문학 측의 주장에 만족 문학파 시인들에 의해 주도 되고 있었던 민요시는 시조와 함께 비판의 표적이 되었던 것이다. 카프 쪽 문학인이 갖는 민요시에 대한 비판적 인식은 민족 문학파가 내세우는 조선주의에 대한 비판을 통해서 드러난다.
민요시와 프로시가 문단 대립의 관계 속에서 향토성 또는 민족성을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과정을 통해 전개되는 동안, 이들 시의 위상차이가 시 형식에 대한 대립적 인식에 의해 또한 부각 되었다. 먼저 민요시는, 앞에서 자유시와의 관계논의에서 언급한바 있듯이, 시의 본질인 음악성을 회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민요의 전통적 리듬을 계승하고자 했다. 이에 대해 프로 시는 카프 결성 초기에 시의 리듬, 형식 등 형태적 문제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지 못했다.
카프의 소장파들은 김기진의 프로문예 대중화론에 대하여 즉각적인 비판과 반론을 폈다. 임화는 김기진의 대중화론이 ‘마르크스적 원칙’의 포기라고 했으며, 권환도 이에 가세해 대중예술과 고급 예술의 이분법적 사고를 실랄히 비판하는 한편,(23) 민요시가 프로시의 형식이 될 수 없다는 점을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19) <문사방문기-파인 김동환 편>, 《조선문단》제4권 제3호(1927.3).
20) 김억<프로문학에 대한 항의,《동아일보》(1926.2.8)
21) 주요한,<발문>,시집『아름다운새벽』(조선문단사,1924.12).167쪽.
22) 양주동,<시단월단>,《조선문단》제17호(1926.6)
23) 임화,<탁류에 항(抗)-문예적인 시평>,《조선지광》제10권 8호(1929.8) 권환,<조선예술의 당면한 구체적 과정>, 《중앙일보》(1930.9.6)
마찬가지로 -곡조도 애수적이고 퇴폐적이어서 읽고 듣는자로 하여금 신경이 무의식적으로 마비 위축케 한다. 따라서 우리 프로레타리아 예술에서는 도저히 용납지 못할 형식의 하나이다.24)
카프의 대표적 시인의 한 사람이었던 권환은 민요를 바탕으로 쓰여 지는 시 즉 민요시 전체를 대상으로 비판적 진단을 하고 있다. 그는 민요시의 부당성을 말하기 전에 그 근거가 되는 민요를 매우 비판적이면서도 부정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카프의 프로시가 프롤레타리아의 민중을 위한 시를 지향함에도 불구하고, 민요의 이해에서 민중과의 관련성을 일단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있다. 그 대신 민요는 “봉건사회 부르 사회의 영락퇴폐(零落頹廢)한 자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하여, 민요를 과거의 봉건적 잔존물 내지 부르조와 사회의 퇴폐적 노래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따라서 민요의 내용은 물론 그 형식과 곡조도 애수적이고 퇴폐적이어서 취할 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민요는 애상적이고 퇴페적 성격만 지닌 것은 아니다. 민중들의 삶에 대한 고난과 그 극복 의지, 그리고 사회의 모순에 대한 비파의식을 한편으로 노래해 왔던 것이 우리민요의 특질이다. 아울러 민요를 봉건 시대의 잔존물로만 본 것도 커다란 문제이다. 민요는 민중의 생활과 더불어 끊임없이 생성, 변모, 소멸의 과정을 겪어 왔다. 설사 어떠한 민요가 비록 과거에 형성 되었다 해도 그것이 계속 전승되는 동안에는 그 당시의 민요로서 의의를 지니는 것이다. 그럼에도 민요의 성격을 애상적이거나 퇴폐적으로만 보거나, 봉건적 잔존물로만 본 것은 편협하기 이를데없는 민요의 인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카프의 계급문학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프로시의 접합한 형식으로 자유시, ‘단편서사시’, 민요시 등 다양한 형식이 모색 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는 당시의 프로시가 말 그대로 민중시로서의 분명한 위상을 정립하지 못하고 과도기적 혼돈의 과정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사실 프로 시에만 해당 되는 것이 아니며, 또 다른 차원의 자유시, 민요시, 시조 등 모두에 해단되는 사항이기도 하다. 식민지하에서의 우리시의 근대적 방향 정립이 그만큼 어려웠던 셈이다.
4) 마무리
민요시와 자유시 관계에서, 이들 시가 각각 전통 지향과 서구지향이란 서로 다른 입각점에서 우리시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고자 모색 되었다. 근대초기 자유시는, 황석우와 현철 사이의 논쟁에서 드러났듯이, 서구시의 무비판 모양으로 인해 어정쩡한 ‘몽롱체’가 되고 말았으며 , 당시 역사현실을 외면하고 우리문학의 전통을 계승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비판의 표적이 되었다. 다음 민요시와 시조는 둘 다 전통 지향의 시이며, 조선 주의의 추구를 문학이념으로 내세운 민족 문학파에서 함께 지지되고 옹호 되었다는 점에서 공통분모를 가졌다. 민요 시인들은 대체로 시조의 귀족 문학적 성격과 3장 형식의 제약, 그리고 한문 식의 표현을 이유로 들면서 우리시 모색의 바람직한 시 형식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최남선 같은 시인은 시조를 ‘조선심’이 표현된 신성한 양식으로 규범화 하면서 과거의 시조 형식을 답습하여 부활하는 것만으로도 의의가 있다고 보았으며, 이병기, 이은상, 같은 시인은 시조를 계승하되 규범적 시조 인식을 극복하고 당대 현실에 맞게 창조적으로 계승하는 것을 바람직하게 생각했다. 이러한 두 갈래의 시조 인식에서 민요 시인들은 전자의 규범적 시조인식에 입각한 당시의 시조 부흥운동에 대하여 대체로 비판적이었다.
끝으로 민요시와 프로시의 관계에서, 이들 시는 당시 문단의 대립적 구도에 얽혀 심각한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카프의 프로시인들은 민요 시인들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면서, 민족의식(조선주의포함)보다 계급의식을 담아내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 하다고 보았다.
24)권환,<시평>과 <시론>,《대조》제4호(1930.7.)
그러나 프로시인들은 시 형식 모색의 새로운 대안을 가지지 못하고 자유시를 프로시의 형식으로 삼았다. 이는 자유시가 산업 자본주의 시대에 적합한 시 형식으로 무산계급의 경제적 해방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형성 되었다고 본 때문이다. 그런데 프로 시는 자유시의 근대적 미학을 등한시 하였고, 단지 목적의식의 이념만을 불어 넣는 데 자유시의 형식을 이용하기만 했다. 바로 이점에서 프로 시에 대한 민요 시인들의 비판이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사실 프로 시는 민중을 위해 쓰여 지고, 민중에게 돌려져야 한다는 명분과는 달리 민중의 공감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민중으로부터 더욱 소외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김기진이 프로시의 이러한 한계를 반성하며 ‘단편 서사시’와 민요시의 형식을 프로시의 대중화 방안으로 제시하며 긍정적으로 수용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카프내부의 소장파들에 의한 반론이 더욱 강력해서 김기진의 주장은 단지 개인적인 견해로 치부되고 말았다.
이상의 요약에서 보듯이, 식민지하 근대시는 여러 다양한 시 형식의 모색을 통해 진정한 ‘우리 시’를 찾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그 과정은 시로 다른 문학관과 문학이념 때문에 ‘우리 시’의 방향 정립에 일정한 함의를 도출하지 못하고, 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이는 ‘우 리 시’의 모색이 그만큼 과도지적 상태에 있었음을 의미 하면서, 치열한 논쟁이 있었던 만큼 시의 본질에 대한 이해는 물론 ‘우리 시’의 바람직한 방향에 대한 한층 깊은 성찰이 있었음을 도한 뜻한다.
참고문헌
오세영외 공저「현대 시론사」 모음사. 1992.11.28.p113-p150. <조창환, 1920년대 시론의 전개>.
박경수 「한국 현대시 탐구」국학자료원. 2000.6.30. p.140-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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