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좋은 시(詩)

<2017년 현대문학 신인상 당선작 > 매듭 외 5편 / 오은경

운산 최의상 2018. 1. 29. 13:08



<2017년 현대문학 신인상 당선작 >  매듭 외 5편 / 오은경


매듭  5




어제와 같은 장소에 갔는데

당신이 없었기 때문에 당신이 없다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았던 내가

돌아갑니다

 

파출소를 지나면 공원이 보이고

어제는 없던 풍선 몇 개가

떠 있습니다

사이에는 하늘이

매듭을 지어 구름을 만들었습니다

 

내가 겪어보지 못한 풍경 속을

가로지르는 새떼처럼

먹고 잠들고 일어나 먼저 창문을 여는 것은

당신의 습관인데 볕이 내리쬐는

나는 무엇을 위해 눈을 감고 있던 걸까요?

 

낯선 풍경을 익숙하다고 느꼈던

나는 길을 잃습니다

 

내부가 보이지 않는 건물 앞에

멈춰 서 있습니다

구름이 변화를 거듭합니다

창문에 비친 세계를 이해한다고 믿었지만

나는 세계에 속해 있습니다

 

당신보다 나는 먼저 도착합니다

내가 없었기 때문에 내가 없다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았던 당신에게

나는 돌아와 있습니다





                     새싹 뽑기, 어린 짐승 쏘기*



 

나는 뒤를 돌아보는 것보다 돌아보지 않는 것을 택했지만

뒤를 돌아볼 수 있었다 다시

누군가 나를 쫓아오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따라가는 건 내가 아니었을까보이지 않는 누군가

나를 완성하고 있다고 느꼈다

 

잡초가 무성했으며

잡초 속에 발을 디딜 때마다 운동화를 잃어버린 것 같았다

여러 번 신발끈을 고쳐 묶었다

 

깨끗했던 운동화가 다른 사람의 신발을 신은 것처럼 낡았다

맨발로 길을 걷는 것처럼

나는 흙투성이였다 누군가 먼저 나에게 손을 내밀기 전에

 

내가 새싹을 뽑았다

망각이 거듭되었다 녹아버린 눈 때문에 운동화가 차가워졌고

나는 목이 마를 뿐이다 그러나 마실 물이 없다면

 

벌써 내 몫의 생수는 비워진 것이다

빵을 조금만 나눠줄 수 있느냐고 누군가 물었다

고개를 저었지만 나는 한 번도 열어본 적 없는 주머니를 지녔다

 

까만색 레인코트를 입은 내가

다른 사람을 찾고 있었을 때 누군가 코트자락을 펄럭이면서

나를 밟고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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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에 겐자부로, <새싹 뽑기어린 짐승 쏘기>에서 제목 차용




우리의 믿음이 만약 우리와 같다면




갑자기 통화를 끊겼고 네가 왔다

너는 세 시간 만에 고속버스에서 내려

달리는 승용차에서 번지는 헤드라이트

불빛을 따라 굴다리를 건넜다고 했다

 

너에게 주소를 알려준 적도 없는데

너는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걸까

 

너와 맞잡은 손은 금세 땀으로 축축해졌다

이사를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나조차도 잘 모르는

이곳분수대 뒤로 풍차가 회전하는 것이 보였다

정원에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먼 거리였지만 옆집 언니를 발견한 너는

갑자기 청색 모자를 쓴 사내였다 네가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아

나는 사내를 따라 모퉁이로 향했다

 

튤립이 피어 있었다 사내의 뒤꿈치에 밟힌

튤립처럼 나에게 푸르고 검은 거미줄이 묻었다

 

내 손에 거미가 붙었다고 언니가 알려주었다

사내 대신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언니는

나를 잡아당겼다 물에 젖은 나방을 발견했을 때

누군가 내 어깨를 밀쳤다

 

나는 넘어졌고 언니인 사내는

늙고 지친 노인이었다

집으로 돌아가자던 노인은 허리가 휘었고

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저녁 식사




당신은 나쁜 감정을 느낄 때조차 나를 위해 상을 차립니다돌을 씹은 탓에 나는 당신을 상상하게 되고 입안이 다쳤습니다입술을 깨물었습니다.

 

식탁에 남겨진 것은 피 묻은 파편이겠습니까빈 그릇이겠습니까그러나 나는 그만 부엌을 치워야 할 것 같습니다.

 

당신과 지내려면 내게도 맡은 바 역할이 있기 때문입니다당신이 붙여준 별명처럼 나는 늦게까지 잠을 잡니다천천히 밥을 먹습니다.

 

뽀뽀가 깨어났습니다뽀뽀는 짖고 짧은 꼬리를 흔들고 당신을 반갑게 맞아줍니다당신은 나를 찾고 저녁을 먹지 않았다고 이야기합니다작은 뽀뽀를 품에 안으면

 

뽀뽀는 미끄러집니다뽀뽀는 전에 아팠던 것 같고 흰 털은 노랗게 변했습니다.다만 운이 나빴을 뿐입니다당신은 뽀뽀는 노견 같다말하지 않습니다.

 

들려준 적 없는 침묵이 물질입니다보이지 않는 나의 표정은 당신의 얼굴입니다밥이 다 되었습니다오늘 저녁도 정말 고마웠습니다.






사이의 가족



 

나는 동생이 없었다.

엄마와 아빠가 나를 반겨주었다대문 바깥까지 나와서

사과 한 조각을 건네며 엄마는 내게 가깝게 다가왔다.

 

낮 동안의 열기는 잠식되었고

사건 사고를 보도하던 아홉 시 뉴스도 끝났다.

자리에서 일어난 아빠는 다시 소파로 가서 앉지 않았다.

 

나는 점심도 굶은 상태였다.

남은 잔반이 많았지만 우리는 함께 전을 부치기로 했다.

기름진 잡채가 자꾸만 젓가락에서 빠져나왔다.

 

포크를 쥔 엄마와 다르게 아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눈이 쌓여가고 있었다창문 바깥에서

엄마는 마른 흙을 걷어낸 다음 구덩이를 만들었다.

 

줄기가 꺾인 꽃의 흔적은 가려져 보이지 않았는데

기울어진 장독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 잔의 물도 마시지 못하고 보낸 저녁이었다.

 

그래도 나는 좋았다어둠은 차츰 두 눈에 익숙해지고

곁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으니까불 켜진 집 안에서

차갑게 식은 죽을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