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바빌론의 공중정원 : 바빌론(지금의 이라크 남부)의 왕궁 안에 꾸몄던 정원
세계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로 꼽히며 실제로 공중에 떠 있는 것이 아니라 높이 솟아 있는, 즉 지구라트에 연속된 계단식 테라스에 만든 옥상 정원으로 유프라테스 강물을 펌프로 끌어올려 물을 댔다. 전해 내려오는 말로는 반(半)전설적 인물인 삼무 라마트 여왕(그리스어로는 세미라미스이며 BC 810~783년에 아시리아를 다스린 아다드 니라리 3세의 어머니)이 만들었다고도 하고, 네부카드네자르 2세(BC 604~562 재위)가 고향의 산과 푸른 나무를 그리워하는 메디아 출신의 아내 아미티스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만들었다고도 한다.
고대 그리스 로마 작가들은 공중정원에 대해 자세히 기술해 놓았다. 이에 따르면 정원의 계단식 테라스에는 돌로 발코니를 만들어 씌우고, 그 위에 갈대와 역청·납 등을 층층이 쌓아 관개수가 새나가지 않도록 했다고 한다. 공중정원이 있었다는 뚜렷한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독일 고고학자 로베르트 콜데바이는 바빌론에 있는 궁전 북동쪽 모퉁이에서, 독특하게 연이어 있는 방과 지하실의 기초를 발굴해 냈다. 그 한가운데의 지하실에 특이한 우물이 있는데, 이 우물은 공중정원 기초의 일부인 듯하며 사슬 펌프로 물을 퍼올려 이곳에 저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2. 이집트 쿠푸왕의 대 피라미드 : 제4왕조때, 알지자(기자) 근처에 세워진 3개의 피라미드
이중 가장 북쪽에 있는 가장 오래되고 큰 피라미드는 제4왕조 2번째 왕 쿠푸(그리스어로는 케오프스)가 세웠다. 대(大)피라미드라고도 하며, 밑변 평균길이 230.4m, 원래 높이 147m이다. 가운데 피라미드는 제4왕조의 8명의 왕 중 4번째 왕 카프레(그리스어로 케프렌)가 세웠고 각 밑변길이 216m, 원래 높이 143m이다. 남쪽 끝에 있는 마지막으로 세워진 피라미드는 제4왕조의 6번째 왕 멘카우레(그리스어로 미케리노스)의 피라미드로 밑변길이 109m, 완공 때 높이 66m였다. 3개의 피라미드는 내부·외부가 모두 고대에 이미 도굴당해 시체안치실에 있던 껴묻거리[副葬品] 대부분이 사라졌다. 무른 흰색 석회석의 외벽도 거의 모두 벗겨져버렸기 때문에 피라미드들의 높이가 원래보다 낮아져 대피라미드도 지금은 138m 높이에 불과하다. 가운데 있는 카프레 피라미드 꼭대기에는 삽도(揷圖)에서도 볼 수 있듯이 아직도 석회석 외벽이 남아 있다.
쿠푸는 지금까지 인류가 만든 단일 건축물로는 가장 규모가 큰 것이다. 옆면 경사가 51°52'이며 밑변은 정확하게 동서남북을 향해 있다. 대피라미드의 중심부는 황색 석회암 벽돌로 만들어졌고 지금은 거의 없어진 바깥벽과 내부통로는 그보다 고운 입자의 옅은 색조의 석회암으로 되어 있으며, 내부의 시체안치실은 커다란 화강암 덩어리로 만들었다. 이 거대한 건축물에는 1개당 평균 2.5t 무게의 돌 230만 개가 사용되었다.
3.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등대 : BC 280년경 소스트라토스가 프톨레마이오스 2세를 위해 파로스 섬에 세운 등대
가장 유명한 고대의 등대로 기술적인 위업이며 이후 세워진 모든 등대의 원형이다. BC 280년경 크니도스의 소스트라토스가 이집트 왕 프톨레마이오스 2세를 위해 알렉산드리아 항 안에 있는 파로스 섬에 세웠고 높이가 135m 이상이었다고 전해진다. 이 등대는 3단식으로 맨 아래층은 4각형, 중간층은 8각형, 꼭대기층은 원통형이며 모두 약간 안쪽으로 쏠리게 지어졌다. 폭이 넓은 나선형 경사로가 옥탑으로 이어져 있었으며 옥탑에서 밤에 불을 밝혔다.
이 등대 위에는 거대한 조상(彫像)이 높이 솟아 있었는데,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나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를 태양신 헬리오스의 형상으로 나타낸 것으로 여겨진다. 이 등대는 일찍부터 잘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6세기까지는 불가사의 목록에 오르지 않았다(최초의 목록은 그대신 바빌론의 성벽을 꼽고 있음). 중세 아랍인들은 꼭대기 등대를 작은 모스크로 바꾸었다. 이 등대는 12세기 이후에 무너졌으며 1477년경 맘루크 술탄 카이트 베이는 그 잔해를 이용해 요새를 지었다.
4. 에페수스의 아르테미스 신전 : 리디아의 왕인 크로이소스가 BC 550년경에 지은 신전
이 거대한 신전은 리디아의 마지막 왕인 크로이소스가 BC 550년경에 지었고 헤로스트라토스라는 미치광이가 BC 356년 불을 질렀으나 그후 재건되었다. 아르테미스 신전은 거대한 크기(약 55×110m)만이 아니라 그것을 장식하고 있는 웅장하고 화려한 예술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이 신전은 고트족의 침략으로 AD 262년 파괴되어 다시는 복구되지 않았다. 신전의 유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대영박물관에는 많은 파편들이 보존되어 있고, 특히 부조로 장식된 기둥의 일부는 유명하다. 발굴한 결과 크로이소스가 지은 신전과 BC 4세기에 재건한 신전의 흔적이 드러났을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오래 전에 세워진 3개의 작은 신전의 흔적도 발견되었다. 유명한 아르테미스 여신상을 모방한 작품들은 아직도 남아 있는데, 이것은 두 팔을 밖으로 뻗치고 미라처럼 뻣뻣하게 서 있는 비그리스적인 표현 양식을 보여준다. 원래의 여신상은 황금과 흑단, 은과 검은 돌로 만들어져 두 다리와 엉덩이는 온갖 동물과 꿀벌이 돋을새김된 옷으로 덮여 있으며, 가슴에는 수많은 유방이 달려 있었다. 그리고 높은 기둥 모양의 머리 장식을 하고 있었다.
5.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상 : 그리스 조각가 페이디아스가 만든 2개의 걸작품 중 하나
그리스의 조각가 페이디아스가 만든 2개의 걸작품 중 하나(다른 하나는 파르테논의 아테나 상)로서 그리스 서부의 올림포스 산에 있는 거대한 제우스 신전에 놓여 있었다. 높이가 거의 12m에 이르며 시더 목(木)으로 만든 뒤 흑단·상아·금·보석 등으로 정교하게 장식하여 만든 것으로 옥좌에 앉은 제우스의 모습을 나타냈다. 오른손에는 니케 상(像), 왼손에는 독수리가 앉아 있는 홀(笏)이 들려 있었다. 8년에 걸쳐 제작된 것으로 여기에 표현된 신성한 위엄과 관용으로 유명하다. 1950년대 올림포스에서 페이디아스의 작업장 유적이 발견됨으로써 BC 430년경에 제작되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신전은 AD 426년에 파괴되었으며, 조각상은 그당시 파괴되었거나 아니면 그로부터 약 50년 뒤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에서 화재로 파괴되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정확한 복제품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6. 핼리카나소스의 마우솔러스영묘 : 마우솔로스 누이이자 미망인인 아르테미시아가 지은 묘
소아시아의 남서부에 있던 카리아의 폭군 마우솔로스의 영묘(靈廟)로서 그의 누이이며 미망인인 아르테미시아가 BC 353경~351년경에 지었다. 건축가는 피티우스(또는 피테오스)였고 4명의 뛰어난 그리스 예술가 스코파스·브리악시스·레오카레스·티모테오스 등이 조각을 맡았다. 로마의 저술가인 대(大)플리니우스(23~79)에 따르면 이 영묘는 거의 정4각형으로서 그 둘레가 125m에 이르렀다고 한다. 36개의 기둥이 둘러싸고 있고 24단의 계단식 피라미드로 꼭대기에는 대리석으로 만든 4두마차가 올려져 있었다. 대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유적의 단편으로는 그리스인과 아마존족의 전투장면을 새긴 프리즈와 마우솔로스 상으로 보이는 높이 3m의 조상 등이 있다. 이 영묘는 아마도 11~15세기에 지진으로 파괴된 것으로 보이며 무너진 돌은 이 지방의 건물을 짓는 데 다시 사용되었다.
7. 로데스항구의 크로이소스거상 : 로도스 섬 린두스 시(市)의 카레스가 만든 동상
로도스가 데메트리우스 폴리오르케테스의 오랜 포위(BC 305~304)에서 풀린 것을 기념해 만들었는데 주재료는 청동(철로 보강하고 돌로 무게를 더함)이며 태양의 신 헬리오스의 상(像)이다. 항구에 세워졌던 이 동상은 높이 30m가 넘으며 상상에 의해 만든 한 돋을새김 작품이 표현하듯이 한 손으로 두 눈을 가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 작품이 항구 입구에 양다리를 벌리고 서 있기는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렇게 되어 있었다는 많은 사람들의 믿음은 중세시대부터 시작되었다.
이 동상을 건조하는 데 12년이 걸렸으나(BC 292~280경) BC 225년경 지진으로 넘어졌다. 넘어진 거상은 AD 653년까지 그 자리에 남아 있다가 그해 로도스를 기습한 아랍인의 손에 파괴되어 청동은 조각으로 팔려 나갔다. 그 분량은 낙타 900마리에 실을 수 있는 양보다 많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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