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지역 극작가의 창작희곡 사
― 해방 공간부터 2006년까지
김 문 홍
1. 서론(序論)
1) 희곡사(戱曲史)와 연극사(演劇史)
희곡은 편의상 번역 희곡(飜譯戱曲)과 창작 희곡(創作戱曲)으로 분류하고 있는데, 번역 희곡은 외국 작품이 우리말로 번역된 희곡을 말하는 것이고, 창작 희곡은 국내 극작가들의 오리지널 창작 희곡을 지칭하는 것이다. 우리 나라의 경우에는 번역 희곡사와 창작 희곡사의 출발은 시기적으로 조금 차이가 있으나, 번역 희곡의 소개가 창작 희곡보다 조금 앞서고 있다. 창작 희곡의 출발을 1910년대1)로 볼 때 우리 나라의 창작 희곡사는 80년을 조금 넘고 있는데, 번역 희곡사는 이보다 조금 앞서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그러나 희곡은 공연으로까지 연결이 되었을 때만이 그 존재 가치가 드러나기 때문에 번역 희곡은 1920년대의「토월회(土月會)」와 1930년대의「극예술연구회」의 활동부터 그 공연이 활성화되었다고 본다면 우리의 경우는 창작 희곡의 역사가 오히려 번역 희곡보다는 앞서 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이와 같이 희곡은 항상 연극사와 맞물려 있기 때문에 희곡사는 연극사 속에서 파악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희곡은 문학이면서 공연예술인인 연극의 1차적 텍스트이기 때문에 문학의 범주에서만 머무름이 없이 언제나 공연의 범주 속에서 논의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문학의 갈래로서의 독자적인 희곡의 논의는 큰 의의를 지니지 못한다. 항상 공연예술인 연극의 범주 속에서 논의되어야만 그 존재 가치를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읽기 위한 희곡으로서의 문학성이 강한 레제 드라마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희곡으로서는 큰 의의를 지니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희곡을 논의할 때는 항상 문학성과 연극성을 염두에 두고 출발을 해야 한다. 희곡 작가는 항상 새로운 희곡을 창작하면서 행복한 환상에 젖곤 한다. 자신이 쓰는 희곡이 좋은 연출자와 좋은 배우를 만나 무대 위에서 형상화(공연)되어 관객을 감동시키기를 바라면서 희곡을 쓰는 것이지, 자신이 쓰는 희곡이 절대로 공연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문학적인 독선에 빠져서 희곡을 쓰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희곡을 창작하려는 사람은 어느 정도는 연극의 특성과 무대의 메커니즘을 알고 희곡을 써야 그 작품이 공연으로까지 연결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고 연극성을 도외시한 문학성이 강한 희곡만을 창작했을 경우에는 연출자를 비롯한 일선 연극 현장의 작업자들을 난감하게 하고 마는 것이다.
또한, 문학 작품으로서의 희곡과 공연된 텍스트로서의 희곡 사이에는 많은 거리를 두고 있다. 문학 작품으로서의 희곡이 아무런 수정․보완이 없이 공연으로까지 연결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문학 갈래로서의 희곡은 공연 예술의 1차적 텍스트이기 때문에 연출자를 비롯한 현장 작업자들에 의해 연극성이 강한 대본으로 변형되어 무대화되고, 또 그렇게 되었을 때만이 연극사 속에서의 진정한 희곡으로 자리매김이 되는 것이다. 희곡은 공연을 통하여 완성되고 연출자는 제2의 창조자라는 말도 여기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희곡사는 그것의 무대화인 공연사, 즉 연극사 속에서 파악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수많은 희곡을 창작하여 발표했지만 대부분의 작품이 공연되지 못하고 문학사 속에서만 존재한다면 우선 그 1차적 책임은 희곡 창작의 주체인 극작가의 몫이다. 그러한 문학성이 강한 희곡은 문학적 특성으로서의ꡐ들려주기ꡑ(서술)에만 충실했지, 연극적 특성으로서의ꡐ보여주기ꡑ(표출)를 도외시한 결과에서 비롯된 것이다.
2) 희곡사의 범위와 한계
부산 지역의 창작 희곡이 활성화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부터이다. 그 이전까지는 오리지널 창작희곡이 전무한 상태로, 주로 소설을 각색한 작품, 번안 희곡, 월북 작가의 좌익계 작품들이 대부분이었다. 부산 지역의 오리지널 창작희곡은 고(故) 이주홍2)의 몇몇 작품에 불과하였으며, 1960년대 이후에는 김행호, 박두석 등이 한 두 작품만을 발표하였을 뿐 창작 희곡은 긴 휴면기에 들어갔다가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본격적인 창작 희곡의 시대3)가 도래하게 되었다.
부산 지역의 희곡사는 엄격하게 규정한다면 부산 지역에 거주하는 극작가들의 창작 희곡사라고 보는 것이 옳다. 그런 만큼 창작 희곡이기는 하지만 부산 지역 이외의 극작가들의 창작 희곡과 경남권에 속하는 극작가들의 작품4)은 본 희곡사에서 제외되어야 하리라고 본다. 그리고 확고한 작가의식을 바탕으로 한 공연의 1차적 텍스트로서의 희곡 작품이 창작 희곡인만큼 소설을 각색을 작품 역시 창작 희곡의 역사에서 제외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부산 지역의 창작 희곡사는 1970년대 중반 이후부터 그 출발을 잡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이러한 여러 가지 상황을 감안한다면 해방 공간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는 창작 희곡의 작가와 제명, 그리고 발표 시기와 공연을 중심으로 개괄적인 서술로 기술될 수밖에는 없고, 197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작가 중심으로 작품의 제명과 발표 시기, 작품의 의의와 연극사적 의미, 공연 상황을 중심으로 비교적 자세하게 기술되는 편협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창작 희곡 발표의 시대적 배경과 연극적 상황에 대해서는 연구자의 주관적 견해가 적용되고, 타 지역 작가들의 창작 희곡의 부산지역 공연은 지역 창작희곡사의 범위에서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하므로 제외될 수밖에는 없는 한계를 지니는 것 또한 사실이다.
3) 희곡사의 시대 구분(時代區分)
희곡은 문학의 갈래이지만 공연의 1차적 텍스트라는 특성 때문에 공연예술의 갈래이기도 하다. 또, 희곡은 그것이 공연으로까지 연결될 때만이 존재 의의를 지니기 때문에 시대 구분에 있어서는 연극사의 자장(磁場) 안에서 검토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부산 연극에 대한 시대 구분은 그동안 몇 사람이 견해5)를 내놓고 있지만 김동규의 시대 구분이 가장 설득력 있는 것으로 수용되고 있다. 부산 희곡사의 시대 구분 역시 연극사와 그 궤를 함께 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시대 구분과의 상호 연관성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희곡은 연극과는 달리 작가의 개인적인 작업의 소산물인 만큼 본 희곡사의 시대 구분은 10년을 주기로 하는 연대별 분할은 그것에 따를 필요가 있지만 각 연대에 대한 함축적인 정의는 따로 설정하기로 한다. 그리고 연극사의 시대 구분은 80년대로 종결되어 있지만 본 희곡사는 90년대도 이에 포함시켜야 할 필요성6)을 느낀다. 따라서 본 희곡사는 부산 연극사의 시대 구분을 따르되 각 연대에 대한 정의는 독자적으로 기술하고 90년대 중반 이후까지도 기술하기로 하겠다.
2. 본론(本論)
1) 창작 희곡의 여명기(黎明期)(1945~1959)
해방 공간부터 6.25 전쟁 발발까지는 우리 현대사에 있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제 분야에 있어서 과거를 반성하고 청산하면서 국가의 기초를 다지던 시기로 극도의 혼란을 거듭한 시기이다. 문학을 비롯한 문화예술 분야에 있어서도 이러한 혼미는 마찬가지였다. 친일 잔재 청산과 좌․우익의 대립과 갈등이 첨예화된 시기로, 연극과 희곡분야에 있어서는 다른 문화예술 분야와는 달리 관심과 무지의 결여, 그리고 여건의 불비로 거의 불모지나 다름 없었다. 이 점에 있어서는 당시의 경남과 부산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 경상남도에 속해있던 부산시의 연극적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남녀 학교 연극과 대
학 연극, 그리고 일반 극단의 지역 작가 창작희곡의 공연 목록7) 을 조사해 보면 다음과 같이 당시의 연극과 창작 희곡의 여명기적 상태를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다.
가. 남녀 중등학교 공연보
학 교 명 |
공 연 일 자 |
작 가 |
작 품 명 |
연 출 자 |
동래중학(동래고) |
1947 |
이 주 홍 |
청춘기(4막) |
김 수 돈 |
〃 |
1948 |
〃 |
호반의 집 |
남 상 협 |
〃 |
1949 |
〃 (각색) |
봄없는 마을 |
|
〃 |
〃 |
〃 |
탈선 춘향전(1막) |
|
〃 |
〃 |
〃 |
대 차 |
|
〃 |
1950 |
〃 |
탈선춘향전(2막) |
|
부산고녀(부여고) |
1946. 6 |
홍 달 |
조 국 |
|
〃 |
1949 |
김 이 수 |
황혼의 마을 |
|
〃 |
1950 |
이 주 홍 |
낙성의 달 |
남 상 협 |
〃 |
1954 |
김 종 성 |
탈 |
김 종 성 |
가정고녀 |
1949. 1 |
이 주 홍 |
낙랑공주 |
박 재 용 |
동래고녀 |
1950 |
〃 |
나비의 풍속 |
|
동래가정고녀 |
1949 |
〃 |
낙성의 달 |
박 재 용 |
〃 |
〃 |
〃 |
가 실 |
장 수 철 |
남선고녀 |
〃 |
〃 |
호반의 집 |
최인찬 작곡 |
부산여상 |
1956 |
〃 |
달빛은 이슬처럼 |
남 상 협 |
〃 |
1958 |
〃 |
임이 부르신다면 |
〃 |
〃 |
1959 |
〃 |
꾀꼬리 기다리는 집 |
〃 |
위의 표에서〈동래가정고녀>는 현 <학산여고>의 전신, <가정고녀>는 당시 좌천동에 소재하고 있었으나 현재는 없어졌으며, <동래고녀>는 현 <동래여고>의 전신, <남선고녀>는 현 <남성여고>의 전신이다. 그리고, 1949년 <남선고녀>의 공연인「호반의 집」은 뮤지컬이다. 1949년 1월 <가정고녀>의 공연작인「낙랑공주」는「조국과 사랑」이라는 제명으로 개제(改題)되어 공연되기도 한다.
나. 일반극 공연보
(가) 문인극회(1947년 창단, 대표 : 염주용)
1947. 염주용 「민족의 태양」 김수돈 연출
1948. 〃 「동래성 함락의 날」 〃
(나) 보련문화실(1950. 경상남도 문화실)
1950. 3 박영아 「유�대장」 김수돈 연출
(다) 해군정훈대(1950. 해군본부)
1950. 10. 이주홍 「탈선 춘향전」
(라) 육군정훈대(1950. 육군본부)
1950. 이주홍 「탈선 춘향전」
(마) 청문극회(1954. 이시우)
1954. 7 이주홍 「구원의 곡」 김수돈 연출
1954. 12. 〃 「청춘궤도」 송일만 연출
1955. 〃 「탈선 춘향전」 장수철 연출
위의 공연보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당시는 일반극보다는 오히려 학교극, 그중에서도 여학교의 연극 공연이 활성화되고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예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실업계보다는 인문계 학교의 연극 공연 횟수가 잦은 점으로, 요즈음의 인문계 고교보다는 실업계 고교의 연극 활성화와는 판이한 현상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대학극에서의 지역 작가의 창작극 공연은 아주 저조한 실적을 보이고 있는데, 다만 수산대학교에서 1953년 6월에 이주홍의 창작 희곡「신부추방」과 1954년 제3회 공연에 역시 이주홍의 희곡인「탈선 춘향전」을 공연하고 있으며, 교육대학이 1957년 제1회 공연으로 역시 이주홍의「뒷골목」을 공연하고 있을 뿐, 부산대학과 앞의 2개 대학의 여타 공연은 대부분이 셰익스피어, 유진 오닐의 익히 알려진 작품을 공연하고 있으며, 부산 지역 작가를 제외한 국내 작가의 창작 희곡8) 은 거의 대부분이 공연하지 않고 있다. 외국의 유명 극작가를 선호할 수밖에 없는 것은 아무래도 그들의 작품은 일단 연극사적으로 예술적 완성도와 연극미학적 구조가 뛰어날뿐더러, 국내와 외국에서의 잦은 공연으로 작품 해석에 필요한 선행 자료들을 구하기가 쉬웠으며, 또한 대학 극예술연구회의 지도교수들이 대부분 영문학 교수들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작품들을 선호할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추론된다.
당시의 부산지역 작가의 창작 희곡은 소설가 이주홍의 희곡 작품들이 레퍼터리의 대종을 이루고 있다. 이주홍 이외의 작가들인 홍달, 김이수, 김종성, 염주용 등은 대부분이 학교의 연극반 지도교사였거나 아니면 언론계의 인사들로, 이들은 첫 작품이 마지막 작품으로 그 이후에는 전혀 작품을 내놓지 못하고 있어 연극사적으로는 공연 기록의 한 부분만을 차지할뿐 희곡사적으로는 큰 의의를 갖지 못하고 있다. 이주홍은 해방 공간부터 50년대말까지 각색 작품을 포함하여 15개의 창작 희곡을 내놓고 있는데, 거의 일 년에 한편 꼴로 창작 희곡의 여명기였던 당시의 상황으로서는 다작으로서 이주홍의 연극적 감각과 문학적 상상력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탈선 춘향전」은 모든 학교의 단골 레퍼터리로 선정될 만큼 선호 대상이 되고 있는데, 이는 이 작품이 여타의 작품들보다는 연극적 재미와 구조가 무대화의 여건과 일치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1960년대 중반까지도 각 학교의 고정 레퍼터리로 선정되고 있는 점이 이를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언급해야 할 점이 있는데 이는 이주홍의 희곡「나비의 풍속」공연에 대한 시인 정진업(鄭鎭業)의 공연비평으로 인하여, 작가인 이주홍과 비평가인 정진업의 필전(筆戰)이 무척 흥미로운 사실을 일깨워 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진업은 당시의 공연에 관한 짧은 단평(短評)9)은ꡒ첫째, 현실생활의 단면을 주제로 하는 희곡명으로는「나비의 풍속」이란 제목이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 둘째, 학생극이란ꡐ핸디캡ꡑ을 부쳐가지고 각본을 고쳐쓰는 태도는 고쳐야겠다는 점, 셋째, 노래와 춤을 필요 이상으로 삽입, 넷째, 발성(發聲)에 문제가 있음, 다섯째, 분장과 장치는 실패, 마지막으로 부산고녀의 타학교 연극초청은 가상하다는 점ꡓ10) 등을 들어 비평한데 대해서, 작가인 이주홍은 같은 지면에 2회에 걸쳐 원고지 50~60매 분량으로 반박문을 싣고 있는데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동래여중의 연극「나비의 풍속」에 대하여 정진업 형이 단평을 쓴 일이 있는데(중략)한개의 작품이 상연되기까지의 행정(行程)만을 따져본다 치더라도(중략) 생산(生産)의 고통성(苦痛性)에 비례해서 얼마만한 비평의 고통성이 따르는가 하는 점에 있는 것이다. (중략) 말할 것도 없이 비평은 연극이 가진 취약점을 과학적으로 모색, 적발함과 동시에 그 발전적인ꡐ모멘트ꡑ를 제시하여 그 향로(向路)를 암시하는데 비평의 문화적 의의가 있는 것이고 독자적인 창의성도 있는 것이다. (중략) 자가(自家)의 편협한 성실성 없는 인상(印象)만으로서 하는 류(類)의 비평이란 이것이 하등의 발전적인 지향(志向)을 전제로 하지 않는 의미로서 파괴는 될지언정 비평도 건설(批評道 建設)에 있어서의 아무런ꡐ푸라스ꡑ도 가져올 수 없는 것.(하략)11)
위의 비평가의 공연 비평과 이에 대한 작가의 반박문은 둘 다 그 나름대로의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비평가의 의도는 아무리 여학교 학생들을 위한 공연의 작품이긴 하지만, 작품의 예술성과 연극적 완성도를 유지해야만 창작 희곡으로서의 가치를 지닌다는 점으로, 당시 같은 작품을 공연 여건에 맞추어 수시로 개작하는 풍토에 대해 일침을 놓고 있다. 그리고 작가의 의도는 비평의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시각의 유지와 비평의 윤리의식의 확보, 그리고 열악한 환경에 놓여있는 연극예술에 대한 관심과 애정의 요구로, 마치 50여년이 지난 오늘의 비평가와 작가(연출가)의 필전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위 두 사람의 필전을 통해 우리는 당시의 열악한 연극적 환경과 당시 발표되고 고연되는 창작 희곡의 연극미학적 완성도의 결여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당시의 외국 작품의 선호 경향에 대해서 허은은ꡒ번역물을 통해서 얻어지는 새로운 서구문명의 이해는 그들에게 있어서 피할 수 없는 과제였고, 특히 6.25를 통해서 유입된 영어권 문화에 대한 일종의 분석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ꡓ12)라고 기술하고 있는데, 이러한 현상이 창작 희곡 부진의 직․간접의 원인이 되었을 것이라는 점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김동규는 당시의 부산 연극의 부진에 대해서ꡒ성행되는 악극(樂劇)과 국극(國劇) 및ꡐ신협(新協)ꡑ의 회오리에서 좀처럼 헤어나지 못하는 부산 연극은 1954년에 이르러 그 힘을 한곳에 집결하는데 일단 성공을 한다. 그러나 자생력을 갖고 지속하지 못한 아쉬움뿐 아니라ꡐ예술소극장ꡑ을 제외한 선의의 경쟁 대상이 없어 50년대의 일반극은ꡐ청문극회ꡑ와ꡐ예술소극장ꡑ밖에 없는 상태에 이른다.ꡓ13)고 적절한 지적을 하고 있다. 이러한 연극적 상황과 상승 작용을 일으켜 부산 지역 작가의 창작 희곡 역시
부진을 면하지 못한 것이 당시의 상황이기도 하다. 해방공간부터 50년대 말까지는 한국 전역뿐만 아니라 부산 지역의 창작 희곡은 어둠이 걷히어 가는 여명기에 해당된다고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2) 창작 희곡의 맹아기(萌芽期)(1960~1969)
1960년대는 정치․사회적으로 격변기에 해당되는 시기이다. 이승만 독재 정권에 대항하여 자유화를 부르짖던 4.19 혁명의 감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군사정권의 된서리를 맞아 다시 한 번 자유와 인권을 유보당하는 사태에 직면하게 된다. 이러한 정치․사회적 격변과 1963년 1월 1일의 경남에서 분리되어 부산직할시로 승격되면서 부산 연극은 그 이전의 난맥상에서 벗어나 어느 정도의 조직력과 체계성을 갖추게 되면서 제자리 찾기를 시도하게 된다. 1962년 8월에 군사정부의 문화예술 통제의 의도로 결성된 예술단체총연합회(약칭 예총)의 출발로 부산에도 예청 산하의 연극협회 부산지부가 설립되어 관 주도의 합동공연과 직속극단이 생기게 되면서 극단들이 이후죽순처럼 얼굴을 내밀기 시작한다. 그리고 1965년 4월에 부산일보 주최로 <영남학생연극경연대회>14) 가 열리게 되고, 아동극도 활성화되기 시작하는데 1963년 7월의 아동극단「새들」의 창단을 시작으로 1967년 7월까지 무려 8개의 아동극단이 창단되어 수많은 실적15)을 올리기 시작한다. 아동극과 대학극이 활성화되는 것과는 반대로 고교 연극은 침체되기 시작하는데, 이는 대학입시라는 현실적 중압감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 일반극단도 역시 1963년 3월에 창단된「샛불극회」를 필두로 1969년 9월의「소극장 69」의 창단까지 무려 17개의 극단이 활동하게 되지만, 이들 극단 중에서 1970년대까지 꾸준한 활동을 하는 극단은 극단「전위무대」16), 극단「원형극장」17),「소극장 69」18) 등 세 개 극단뿐으로 거의 대부분의 극단들이 그 명맥을 오래 유지하지 못하고 스러져 버린다.
이 시기의 부산 지역 극작가에 의한 창작 희곡의 발표와 공연은 오히려 해방 이후부터 50년대 말까지에 비해서 저조한 실적을 보여 퇴보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고 있는데, 이 시기의 대학극과 일반극을 중심으로 창작 희곡 공연 목록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960년대 부산지역 극작가의 창작 희곡 공연보
가. 대학극 공연보19)
(가) 부산대학교
1965. 강하영 「길목」 김석모 연출
(나) 동아대학교
1965. 강하영 「길목」 김사강 연출
1969. 김석호 「무덥고 불안한 여름」 조석효 연출
(다) 교육대학교
1964. 최해군 「종막」 정정화 연출
1965. 이주홍 「시궁창에도 꽃은 핀다」김영송 연출
(라) 부산여자대학
1965. 이주홍 「시궁창에도 꽃은 핀다」김옥희 연출
(마) 경성대학교
1966. 최해군 「그날의 그딸들」 이군자 연출
(바) 부산대학교 의과대학
1968. 정영태 「장미의 죽음」 정영태 연출
1969. 이병구 「겨울연가」 이병구 연출
(사) 부산공업대
1968. 이병선 「해고」 이병선 연출
나. 일반극 공연보20)
(가) 연극협회 경남지부
1962. 11. 이수영 「귀향」 여수중 연출
(나) 계절극회(대표 : 차재원)
1965. 7. 강하영 「길목」 차재원 연출
(다) 입체극장(1964. 6, 대표 : 이덕선)
1964. 12. 김관봉 「밤 12시」 설 령 연출
〃 이주홍 「연이야 울지마」 〃
(라) 동양극단
문기태 「카페로의 초대」 장고웅 연출
(마) 부산예술학원(1964. 11, 대표 : 이태헌)
1964. 11. 서국영 「오솔길」 김용기 연출
(바) 소극장 69(1969. 9. 6. 대표 : 김영송)
1969. 11. 김종달 「갈색 머리카락」 이광천 연출
앞의 대학극과 일반극의 공연보를 살펴보면 1970년대의 부산지역 작가들의 창작 희곡의 발표와 공연 상황을 짐작할 수 있는데, 오히려 전대보다는 퇴보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전대부터 활동해오고 있는 작가는 이주홍 한 사람으로 그는 60년대에 들어와서는「시궁창에도 꽃은 핀다」와「연이야 울지마」등 두 작품만을 내놓고 있어 활동이 부진한 편이고, 그 이외의 작가들은 새롭게 얼굴을 내미는 작가들로서 대부분 한두 작품을 끝으로 창작 활동을 마감하게 된다. 이들 중 강하영과 김종달은 방송극 전속작가로 라디오 드라마21) 를 쓰고 있던 작가들로, 방송극과 희곡은 같은 드라마라는 특성과 연관성을 가지고 있어 이들은 여타의 사람들보다는 창작 희곡을 쉽게 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 역시 부산을 떠나거나 활동을 중단하여 70년대까지 계속하여 희곡을 쓰지 못하게 된다.
현재 부산의 원로 소설가로 활동하고 있는 최해군도 당시에 두 편의 희곡을 내놓고 있는데, 그는 그즈음「종막」이라는 작품이 동아일보 신춘문예 희곡 부문에 당선되어 희곡 분야에도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다. 그 뒤에도「그날의 그딸들」이라는 신작 희곡을 발표하여 공연하게 되는데, 이는 당시 소설가로 활동하던 이주홍의 권유와 그와 친분이 있는 연극인들의 청탁에 의해서였을 것으로 추론된다. 그러나 그는 그 이후에는 전혀 새로운 희곡을 발표하지 않는데, 그것은 그가 연극에 참여하지 않았던 관계로 공연의 1차적 텍스트인 희곡이 갖는 특성에서 비롯되는 연극적 감각과 무대 메커니즘과의 소원함에서 오는 부담감과 희곡 창작이 곧바로 공연으로 연결되지 않는 공연 시스템, 그리고 현실적인 고료가 지급되지 못하는 연극계 관행 등의 여러 가지 요인으로 그 이후의 작품을 내놓지 못했지 않았나 싶은데, 발군의 창작력을 가진 한 사람의 희곡 작가를 확보하지 못한 부산 연극계로서는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대학극의 공연보에서 이주홍, 강하영, 최해군의 작품이 등장하는 것은 부산일보 주최로 1965년부터 다음 해까지 열린「영남학생 연극경연대회」의 출품작으로 선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대학극의 작가중 부산대학교 의과대학의 정영태와 이병구는 현재 부산에서 의사로 의료 활동을 전개하면서 시를 쓰고 있는 중견 시인들로, 그들 역시 대학 시절에는 예리한 문학적 감수성과 연극적 감각으로 창작 희곡을 쓰고 직접 연출하는 경력을 갖고 있는데, 이들과 같은 예비 극작가들이 부산의 연극계를 풍성하게 해줄 잠재력을 가지고 있으므로 부산의 연극인들은 앞으로 이들과의 연대를 한 번쯤 숙고해 볼 일이다. 또한 대학의 극예술연구회 활동을 하면서 작품을 쓰던 예비 극작가들은 한두 작품을 끝으로 지금까지 잊혀져 오고 있는데, 아마 이들은 졸업과 동시에 생업에 힘쓰게 되면서 연극계로 편입되지 못했거나, 아니면 부산의 연극인들과 작가들이 이들과 연대하지 못하고 물과 기름처럼 소원한 관계를 유지해 왔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을 창작 희곡 쪽으로 편입시키지 못한 것은 그들 자신의 내부적인 요인에 의해서든 아니면 연극인들의 무관심과 같은 외부적 요인이든 당시의 부산 연극계로서는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볼 때 1960년대의 10년 동안 부산지역의 창작 희곡은 열 편도 채 발표되지 못해 전대의 이주홍 한 사람의 창작에도 못 미칠 만큼 그 성과가 부진하다.
김동규의 지적대로ꡒ1960년대는 탐색기라고는 하나 부산대학 연극을 제외하고는 일반극도 여전히 방황하고 탐색하고 있었다는 편이 옳은 표현ꡓ22)일 것이다. 부산의 중견 연기자인 전성환은ꡒ60년대에 들어선 우리 고장 釜山劇界의 움직임은 연극에 이미 열을 올리고 있던 젊은이들이 연극이라는 예술형태를 바라보게 되었고, 현대연극이 제대로 시작된 연대23) 라고 하지만, 당시의 부산지역 창작 희곡은 겨우 여명기를 벗어나 싹을 틔우는 맹아기(萌芽期)에 접어들고 있던 시기였다.
3) 창작 희곡의 침체기(沈滯期)(1970~1979)
1970년대는 부산연극의 중흥기에 해당되는 시기이다. 시민회관이 생기기 전까지만 해도 연극인들은 공연장이 없다는 연극 환경의 열악성과 지원이 부족하다는 연극 행정의 부재를 탓했지만, 1973년 10월 10일 시민회관이 개관되면서는 작품 제작에 열성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해 12월 19일부터 12월 21일까지 시민회관 소강당에서 개관 기념 공연의 일환으로 재부 연극인 합동공연인「조급한 마음」(존 패트릭 작, 김영송 연출)의 막이 오르고, 뒤이어 1974년 2월에는 역시 소극장에서 연출가 김동규와 이동재가 주축이 되어 극단「원형극장」의 창립공연인「연인 안나」(A. 사스트르 작, 김동규 연출)의 막이 오르면서 각 극단들의 공연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또한 70년대는 동인제(同人制) 극단의 형태로 수많은 새로운 극단이 생기고 1973년에 발족한 문예진흥원의 지원책으로 연극 행정이 체계화를 이루어 가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 중의 하나가 예총부산지부 합동공연인「아! 동래성」(박두석 작, 전성환 연출)으로, 이 공연을 계기로 <부산무대예술제>24) 라는 관 주도 행사가 생기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공연 예술에 대한 행정의 지원은 연극인들의 나태와 무기력, 그리고 작품 제작에 대한 안일한 태도 등의 폐해를 낳기도 했다.
1970년대에는 각 극단들의 부침이 시작되는데, 1970년 9월 18일「드라마센터 부산극회」(대표 : 천재동)를 필두로 1978년 극단「부산레파토리시스템」(대표 : 신태범)25)이 창립할 때까지 무려 12개의 동인제 극단이 창립하는 난맥상을 보이게 된다. 부산지역 극작가의 창작 희곡의 공연 상황을 대학극과 일반극의 공연보를 통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데, 1970년대는 오히려 전대보다 창작 희곡이 부진하여 침체기를 맞고 있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번역극을 제외한 지역 창작극의 공연만 살펴보기로 한다.
1970년대 부산지역 극작가의 창작 희곡 공연 목록
가. 대학극 공연보26)
(가) 부산대학교
1970 김차웅 「알섬」 문장석 연출
1974 〃 〃 최호식 연출
1979 정현곤 「선소리」 정현곤 연출
(나) 동아대학교
1971 김석호 「무덥고 불안한 여름」 변재용 연출
1979 박영민 「지국총 지국총」 조욱종 연출
(다) 수산대학교
1971 이주홍 「탈선 춘향전」 정정섭 연출
1972 김승규 「동굴」 정진건 연출
(라) 부산여자대학
1975 이하륜 「월식」
1979 정경미 「새야 새야」 김현자 연출
(마) 부산대학교 의과대학27)
구정희 「빈자리」 구정희 연출
박기도 「마술사」 이봉오 연출
최시현 「꿈꾸는 종달새」 이경윤 연출
〃 「성난 기계」 〃
〃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
(바) 지산간호전문대28)
1970 정숙영 「잔영」 조기수 연출
1971 〃 「아침에 나타난 신랑」 허영길 연출
1972 〃 「셰익스피어의 여인들」 〃
1979 조화준 「춘향전」 한미란 연출
나. 일반극 공연보29)
(가) 극단 전위무대
1978. 12. 김행호 「흑도(黑道)」 전승환 연출
(나) 극단 새누리(1974. 11. 대표 : 송성묵)
1974. 11. 14 조효승 「사람을 죽여 드립니다」 송성묵 연출
1974. 11. 28 김숙현 「참견 좀 해 줘요」 〃
(다) 극단 독립무대(1975. 11. 대표 : 설령)
1976. 2. 19 유한수 「올가미」 설 령 연출
위의 공연 실적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1970년대 부산지역 작가들에 의한 창작 희곡의 발표와 공연은 극히 저조하다. 우선 대학극 공연을 살펴보면 새롭게 얼굴을 내밀고 있는 예비 작가들이 무려 12명에 작품 수만 해도 16편이나 된다. 그런데 이들 중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은 박영민30) 한 사람뿐이고, 나머지의 예비 극작가들은 한두 작품만으로 활동을 중단한 채 지금까지 연극권 밖으로 밀려나 있는 상태이다. 이들이 부산 연극계에서 계속 극작 활동을 하지 않은 것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동안 생업에의 종사와 연극적 정열의 소진이라는 자신의 내부적 요인과 재학 시절부터 졸업할 때까지 부산의 기존 연극계와의 교류가 없었고 부산 연극계가 이들을 편입하지 못했다는 외부적 요인이 상승 작용을 일으켜 창작 희곡의 잠재적인 저력을 놓쳐버린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이 시기에 이들의 창작 희곡 활동이 두드러져 보이는 것은 1970년부터 1974년까지 5년 동안 부산대 극예술연구회 주최로 이루어진 <대학연극제>31)와 1978년부터 개최된 <전국대학 연극축전>의 부산지역 예선대회32)라는 연극 행사 때문일 것이다.
일반극단 공연에서의 지역 작가 창작 희곡의 공연 실적은 극히 저조하다. 10여년 동안에 단 네 작품만이, 그것도 1회성의 공연으로 끝나고 있어 많은 아쉬움을 남겨주고 있다. 이들 중에서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는 작가는 김숙현33) 한 사람뿐이나 그 역시 현재는 창작 희곡의 발표와 공연이 뜸한 편이다. 김행호는 부산 지역을 오래 전에 떠나 현재는 서울에서 방송극을 집필하고 있으며, 나머지 두 사람인 조효승과 유한수는 첫 작품이 마지막 작품이 된 사람들로 지금은 그 소재와 근황을 확인할 길이 없는 경우이다.
이 시기의 아동극의 활동에서 특기할만한 점은 1979년 7월에 서울에서 문예진흥원 주최로 개최된 <제19회 전국 아동극 경연대회>에서 수영국민학교가「겨울꽃」(박원돈 작, 연출)으로 단체최우수상과 개인 최우수상을 수상하여, 미래의 부산 연극의 잠재력을 전국에 과시한 바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1970년대의 연극에 대해서 김동규는ꡒ이 시기는 탐색기라고는 하나 부산대학 연극을 제외하고는 일반극도 여전히 탐색하고 있었다는 편이 옳은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황이나 탐색이 정착을 전제하는 것이라면 값진 것이 아닐 수 없다.ꡓ34)고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전성환 역시ꡒ70년대 부산연극은 1978년 10월 부산시민회관 준공과 함께, 일부에서는 전문화 내지는 직업화를 부르짖었으나 80년대에 이르기까지 성공을 보지 못했고, 다만 극단나름대로 학구적인 발전과 내실을 기한 시기라고 하겠다.ꡓ35)며, 이 시기를 발전의 터전을 닦은 시기로 보고 있으나, 창작 희곡의 발표와 공연에 있어서는 최악의 해로 심한 침체기로 몸살을 앓고 있던 시기였다. 그러나 그러한 침체는 1980년대의 중흥기를 위한 모색의 기간이었다는 것이 80년대 벽두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좋은 조짐을 보여주게 된다.
4) 창작 희곡의 중흥기(中興期)(1980~1989)
1980년대의 부산 연극과 창작 희곡은 비로소 호흡이 잘 맞아 떨어지는 중흥기를 맞게 된다. 이 시기에 들어오면서 부터는 부산의 각 극단들이 몇 개의 극단36) 창단과 침묵의 악순환을 거듭함이 없이 비로소 제 자리를 잡기 시작한다. 그러나 80년대에는 극단의 이합집산의 좋지 못한 관행이 일어나면서 동인제 극단의 취지를 무색하게 한다든지, 연극협회 부산지부의 불신임안으로 혐회가 1년 동안 양분되는 불상사도 일어나는 등 다사다난한 연대로 기록이 된다.
1980년대에 창작극을 활성화를 이룩하는 촉매제가 된 것은「전국지방연극제」37) 와 이 대회의 부산지역 대표 극단을 선발하는 예선 형식으로 만들어진「부산연극제」38)의 자극 때문이다. 지역 대표로 선발되는 출품작이 지역 작가의 신작 초연일 경우에는 전국연극제 수상에 관계없이 문예진흥원으로부터 충분한 고료를 지급받았기 때문에, 열악한 고료 때문에 창작의욕을 잃고 있던 지역 작가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1980년대에「부산연극제」에 출품된 지역 작가들의 창작 희곡 목록을 살펴보면 그 양적, 질적 변화에 대해 놀라움을 금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 공연 상황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1980년대 지역 창작극의 부산연극제 출품 현황
회 수 |
극 단 명 |
작 가 |
작 품 명 |
연 출 |
수상현황 |
제2회 |
예술극장 |
천재동 |
새똥골 장승 |
이영식 |
|
〃 |
전위무대 |
노혜경 |
성모의 기사 |
전승환 |
|
〃 |
한 새 벌 |
김문홍 |
악마들의잔치 |
주용욱 |
|
〃 |
처 용 |
이윤택 |
신모의 섬 |
이동재 |
희곡상 |
〃 |
현 장 |
이현대 |
몬테루타여름 |
이현대 |
|
제4회 |
전위무대 |
전동수 |
산지기네 |
전성환 |
|
〃 |
예술극장 |
박원돈 |
을숙도 |
이영식 |
희곡상 |
〃 |
한 새 벌 |
김문홍 |
가시덤불 |
한상한 |
|
제5회 |
예술극장 |
신태범 |
노인, 새되어 날다 |
김경화 |
|
〃 |
부두극장 |
이성규, 이윤태,이정허 |
잡귀 잡신은 물알로 |
이성규 |
희곡상 |
〃 |
예 랑 |
이종근 |
갯마을 |
이종근 |
|
제6회 |
〃 |
김문홍 |
안개주의보 |
하종찬 |
희곡상 |
제7회 |
〃 |
하창길 |
눈, 더러운 신의 발자국 |
하종찬 |
|
〃 |
현 장 |
이현대 |
견습아이들 |
이현대 |
|
〃 |
전위무대 |
전동수 |
갯막 |
서광석 |
희곡상 |
〃 |
예술극장 |
천재동 |
새똥골장승 |
이영식 |
|
위의 표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제2회 대회부터 제7회 대회까지 6년 동안「부산연극제」에 출품된 부산지역 작가의 창작 희곡 작품 수는 무려 16 편39)이나 되며, 새롭게 얼굴을 내밀고 있는 작가의 수도 12명40)이나 되어 부산 연극계와 창작 희곡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이들 중에서 현재 극작 활동을 중단하고 있는 사람은 천재동과 노혜경 두 사람뿐이고, 나머지 10명은 90년대를 훨씬 넘어선 지금까지도 창작 희곡을 쓰고 있다. 이들 중에서 신태범은 제5회 대회에「노인, 새되어 날다」를 전국연극제에 출품하여 단체 대상으로 대통령상을 수상한 바가 있다. 김문홍은 제7회 대회까지 세 작품을 출품하여 제6회 대회에서「안개주의보」로 희곡상을 수상한 바가 있다. 이들 작가들은 거의 대부분이 일선 연극 현장에 참여하지 않고 희곡만을 창작하는 것이 아니고 연기나 연출 등의 경력을 지닌 채 직접 연극에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희곡은 공연예술인 연극의 1차적 텍스트이기 때문에 연극의 특성과 무대 메커니즘을 전혀 모르고서는 창작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시사해 주고 있다. 이렇듯 1983년부터 개최된「전국연극제」와 지역 예선대회로 치루어지는「부산연극제」가 지역 작가의 창작 희곡을 활성화시켰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가 없다.
1980년대에는 그 이전부터 활동을 지속해온 기존의 5개 극단 이외에도 1981년 8월에 창단 공연을 가지고 출발한 극단「처용」외에 무려 10개 극단이 창단되어 활동하게 되는데, 이 시기에 각 극단별로 공연된 지역 작가의 창작 희곡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가. 각 극단별 부산지역 작가의 창작희곡 공연보
아래의 공연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부산지역 작가의 창작 희곡은 대부분이 1회성의 공연으로 끝나버리고 만다. 희곡은 작가와 연출자의 협의에 따라 공연 때마다 개작(改作)될 때만이 완성된 희곡으로 남을 수 있으며, 연극적 경험과 감각이 부족한 작가들은 그러한 수정․보완의 작업을 통하여 공연예술인 연극의 특성과 메커니즘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부산의 여러 극단들이 창작 희곡의 재공연을 꺼리는 것은 그 작품의 연극미학적 완성도와 문학성이 저하되어 서울 지역의 유명 작가에 비해 질적인 차이를 드러내기 때문에 공연의 상품성을 고려하여 꺼리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악순환은 1970년대부터 계속되어 온 공연의 관행으로 1990년대의 중반을 넘어선 현재까지도 께속되고 있어 안타까움을 주고 있다.
(가) 교사극단 한새벌
공 연 일 자 |
작 가 |
작 품 명 |
연 출 자 |
비 고 |
1880. 6 |
김 문 홍 |
수직환상 |
이 충 섭 |
첫 데뷔작품 |
1981. 10 |
〃 |
새가 되어라 새가 되어라 |
주 용 욱 |
|
1983. 10 |
〃 |
호우주의보 |
〃 |
|
1984. 3 |
〃 |
악마들의 잔치 |
〃 |
부산연극제 출품 |
1986. 4 |
〃 |
가시덤불 |
한 상 한 |
〃 |
1987. 11 |
〃 |
한포기 풀꽃 |
이 충 섭 |
|
(나) 극단 현장
공 연 일 자 |
작 가 |
작 품 명 |
연 출 자 |
비 고 |
1983. 10 |
박 영 민 |
지국총 지국총 |
최 명 진 |
|
1984. 4 |
이 현 대 |
몬테루타의 여름 |
이 현 대 |
부산연극제 출품 |
1989. 3 |
〃 |
견습 아이들 |
〃 |
〃 |
(다) 극단 전위무대
공 연 일 자 |
작 가 |
작 품 명 |
연 출 자 |
비 고 |
1980. 6 |
강 하 영 |
길목 |
전 승 환 |
|
1980. 8 |
오 영 수 |
새 |
〃 |
모노드라마 |
1981. 9 |
임 인 애 |
땅으로 가는 사람들 |
전 근 섭 |
첫 데뷔작 |
1981. 10 |
양 왕 용 |
사랑 1961 |
전 승 환 |
〃 |
1982. 3 |
임 인 애 |
그늘 |
임 인 애 |
|
1982. 10 |
양 왕 용 |
유다의 배신 |
전 승 환 |
|
1983. 10 |
전 동 수 |
산지기네 |
〃 |
부산연극제 출품 |
1984. 3 |
노 혜 경 |
성모의 기사 |
〃 |
〃 |
1984. 10 |
윤 진 상 |
꽃게의 울음 |
〃 |
첫 데뷔작 |
1985. 10 |
민 웅 기 |
딩동댕 |
〃 |
〃 |
1986. 3 |
전 동 수 |
산지기네 |
〃 |
재공연 |
1989. 4 |
〃 |
갯막 |
서 광 석 |
〃 |
(라) 극단 처용
공 연 일 자 |
작 가 |
작 품 명 |
연 출 자 |
비 고 |
1984. 4. 2 |
이 윤 택 |
신모의 섬 |
이 동 재 |
부산연극제 출품 |
(마) 극단 예술극장
공 연 일 자 |
작 가 |
작 품 명 |
연 출 자 |
비 고 |
1982. 9 |
김 문 홍 |
닭잡아 먹고 오리발 |
윤 석 |
모노 드라마 |
1984. 3 |
천 재 동 |
새똥골 장승 |
이 영 식 |
부산연극제 출품 |
1985. 7 |
박 원 돈 |
을숙도 |
〃 |
〃 |
1987. 3 |
신 태 범 |
노인새되어 날다 |
김 경 화 |
〃 |
1989. 4 |
천 재 동 |
새똥골 장승 |
이 영 식 |
〃 |
1989. 9 |
박 종 철 |
슬픈 로라 |
이 영 식 |
|
(바) 극단 예랑
공 연 일 자 |
작 가 |
작 품 명 |
연 출 자 |
비 고 |
1987. 3 |
이 종 근 |
갯마을 |
이 종 근 |
부산연극제 출품 |
1988. 4 |
김 문 홍 |
안개주의보 |
하 종 찬 |
〃 |
1989. 3 |
하 창 길 |
눈, 혹은 신의 더러운 발자국 |
〃 |
〃 |
|
|
|
|
|
|
|
|
|
|
(사) 극단 부두극장
공 연 일 자 |
작 가 |
작 품 명 |
연 출 자 |
비 고 |
1987. 12 |
이윤택 외 2명 |
잡귀잡신 물알로 |
이 성 규 |
|
(아) 극단 여명
공 연 일 자 |
작 가 |
작 품 명 |
연 출 자 |
비 고 |
1988. 1 |
장 창 호 |
해상 아우슈비츠 |
권 영 만 |
|
(자) 극단 연희단 거리패
공 연 일 자 |
작 가 |
작 품 명 |
연 출 자 |
비 고 |
1989. 4 |
이 윤 택 |
시민- K |
이 윤 택 |
첫 데뷔작 |
(차) 극단 부산레파토리시스템
공 연 일 자 |
작 가 |
작 품 명 |
연 출 자 |
비 고 |
1980. 6. 19 |
노 수 관 |
속죄놀이 |
이 기 원 |
|
1981. 5. 30 |
김경화 |
왕자의 꿈 |
〃 |
첫 데뷔작 |
1982. 6. 11 |
〃 |
할매 욕봤심더 |
〃 |
|
1982. 10. 5 |
노수관 |
까치울음 |
〃 |
|
1983. 10. 7 |
김경화 |
농무 |
〃 |
|
1984. 10. 14 |
전동수 |
흙, 소리 |
〃 |
|
1989. 9. 29 |
노수관 |
속죄놀이 |
김 영 환 |
|
(카) 극단 부산무대
공 연 일 자 |
작 가 |
작 품 명 |
연 출 자 |
비 고 |
1982. 9 |
김 현 국 |
신판 심청전 |
김 현 국 |
|
1982. 12 |
〃 |
기러기 형제 |
〃 |
|
1987. 3 |
〃 |
춤추는 아이들 |
〃 |
|
1987. 4 |
〃 |
엄마 듣거라 |
〃 |
|
1987. 5 |
김 용 수 |
우리조국 대한민국 |
김 용 수 |
|
1988. 2 |
손 동 열 |
내사랑 그댈 위한 세레나데 |
김 현 국 |
|
1988. 5 |
김 용 수 |
그라운드 그룹 드라마 |
김 용 수 |
|
1988. 7 |
김 현 국 |
별들의 이야기 |
박 미 향 |
|
1988. 8 |
〃 |
ET와 개구장이 |
김 현 국 |
|
1988. 11 |
〃 |
그건 너무 했잖아요 |
이 효 원 |
|
1989. 1 |
〃 |
ET와 개구장이 |
〃 |
|
(타) 극단 도깨비
공 연 일 자 |
작 가 |
작 품 명 |
연 출 자 |
비 고 |
1988. 3 |
공동창작 |
천당 중매쟁이 |
이 근 우 |
|
1989. 10 |
〃 |
잃어버린 이름 |
김 익 현 |
|
앞에 열거된 각 극단별 지역 작가의 창작극 공연보를 살펴보면 몇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지역 극작가의 창작 희곡을 가장 많이 공연한 극단은「전위무대」와「부산무대」이지만,「부산무대」의 공연은 새로운 작가를 발굴하고 소개하는 것보다는 연출자와 극단의 단원이 직접 창작하고 있다는 점과 그 극적 완성도에 있어서 신뢰가 가기 어렵다는 점이다. 둘째, 극단「한새벌」,「도깨비」,「부산레파토리시스템」도 역시 신인 작가의 발굴보다는 극단의 기존 단원이 창작하고 있다는 점이다. 넷째, 극단「한새벌」은 한 작가를 꾸준히 지원하여 계속 다른 작품을 내놓고 있는데,「전위무대」는 오히려 신인 작가를 수차례 발굴을 하지만 한두 작품의 공연으로 끝나고 있다는 점이다. 다섯째, 극단「부두극장」은 창작 희곡보다는 번역 희곡의 공연에 치중하고, 극단「처용」은 지역의 작가보다는 서울 작가의 작품을 선호하고 있다는 점이다.
1980년대 부산연극의 두드러진 성과 중의 하나는 <가마골 소극장>의 개관과 극단「연희단 거리패」의 창단으로 인한 이윤택의 극작 활동이다. 그는 1986년 7월 광복동 용두산 공원 입구에 <가마골 소극장>41) 을 개관하고「죽음의 푸가」를 창단 공연으로 대장정을 하게 된다. 그 이후에 그는 1980년 《국제신문》의 언론 통폐합을 극적 소재로 한 상황극 계열의「시민-K」를 쓰고 연출하여 서울 <동숭연극제> 초청 참가작으로 서울에 입성하게 된다. 다시 1989년 10월에 극단「쎄실」(채윤일 연출)의「오구-죽음의 형식」으로 서울연극제에 참가하면서 그 작품으로 한국평론가협의회 최우수 예술가상을 수상하면서 80년대를 마감하게 된다.
1980년대 창작 희곡의 획기적인 업적 가운데의 하나는 창작 희곡집의 발간으로, 김문홍은 1987년 7월 첫 번째 창작 희곡집『안개주의보』(1987. 7. 5, 광문출판사)를 상재하게 된다. 이 작품집은 창작 희곡집으로서는 부산 최초이고, 또한 그 이후에 여러 작가들의 창작 희곡집42) 을 발간하는데 자극제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의 창작 희곡집에 수록되어 있는 <저자후기>의 다음과 같은 언급은 공연의 1차적텍스트인 희곡의 연극성과 문학성의 상호연관성에 대한 보편적 진리를 깨닫게 해준다.
희곡을 쓴다는 일이 이처럼 어려운 일인가를 뼈저리게 느낀 적은 없었다. 現場(舞臺)에 깊이 발을 들여놓은 상태에서 창작된 희곡은 연출자와 배우의 創造的 想像力과 여유를 싹둑 잘라 놓는 결과를 초래했고, 이와는 달리 현장의 空間을 모르고 책상머리에서 창작된 희곡은 그들을 난감하게 만들었다. 이 둘을 조화한 상태에서 창작된 희곡이 가장 이상적인데, 나는 그 둘다 옳게 해내지 못했으니 演劇人들에게서 욕을 얻어 먹어도 마땅한 사람이다. (후략)43)
그의 작품집에는 표제작인「안개주의보」를 비롯하여「가시덤불」,「악마들의 잔치」,「악마들의 잔치」,「새가 되어라, 새가 되어라」,「수직환상」등 6편의 희곡이 수록되어 있는데「안개주의보」를 제외한 5편의 희곡은 모두 그가 속해 있는 극단 「한새벌」에 의해 공연된 작품들이다. 그의 뒤를 이어 하창길44) 이 첫 희곡집『죽음에 관한 보고서』(1988. 12. 도서출판 지평)를 상재하게 되는데, 이 작품집 속에는 표제작을 비롯하여 「옥상에서」,「끈」,「눈, 더러운 神의 발자국」,「울음소리」,「반신반수」,「생일파티 혹은 파리떼」,「노아의 홍수」등 모두 8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80년대에 발간된 이 두 권의 희곡집은 부산 창작 희곡 50년사에서 매우 의미 있는 작업으로 기록된다.
1980년대의 대학극은 70년대와는 달리 지역 작가의 창작 희곡 공연에 소홀하고 있다. 부산대학교가 장창호의「해상 아우슈비츠」(1986) 1편, 수산대학교는 정우숙의「쌍곡선」(1989. 11.) 1편, 부산여자대학교가 박범의「청산리 벽계수야」(1983) 1편, 부산대학교 의과대학이 이명분의「창밖의 사람들」(1984)과 김경승의「부정」(1986) 등 2편, 부산공업대가 윤일광의「스핑크스의 미소」(1987) 1편, 지산간호전문대는 전동수의「산지기네」(1985.5, 1989. 5) 1편, 해양대학교는 조충환의「붕어와 생선회」(1985)과 진주현의「탈출」(1989) 등의 2편, 부산여전은 이주홍의「탈선 춘향전」(1981) 1편, 고신대는 박우택의 「모의총회」(1982), 강대영의「사인사회」, 하창길의「반신반수」(1989) 등 3편, 동래여전은 최영찬의「까마귀떼」(1983), 하창길의「반신반수」(1987) 등 2편, 부산외대는 석우철의「8169」(1985), 이창현의「봄」(1988) 등 재공연을 포함하여 총 17편을 공연하고 있지만, 이들 중에서 현재까지 극작 활동을 계속 하고있는 작가는 하창길, 윤일광 두 사람뿐이다. 대학에서의 지역 작가의 창작 희곡 발표가 부진한 것은 1980년대의 정치․사회적 격변의 와중에서 순수 희곡보다는 그들의 이념과 운동성을 잘 드러내는 마당극을 선호한데서 오는 침체 때문일 것으로 추론된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1980년대의 창작 희곡 현황에 있어서 새로운 작가들의 등장과 많은 작품이 발표되지만, 여러 번의 공연을 통한 완성된 희곡의 추구보다는 단발성의 공연으로 끝나고 있어 아쉬움을 주고 있다. 80년대의 창작 희곡 공연 상황에 대해서 허은은ꡒ작품의 공연과 공연후의 몇 번의 개작을 통해서 완전한 한편의 희곡이 탄생되어지며, 이 과정을 통해서 작가는 작품을 보다 완전하게 완성시킬 수 있을 것이다.ꡓ45)라고 지적하며 부산 극단들의 창작 희곡의 좋지 못한 공연 관행을 비판하고 있는 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러나 1980년대의 부산지역 창작 희곡은 전대와는 다르게 오히려 연극의 발전보다 앞서가는 중흥기를 맞고 있었다는 데에는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80년대의 이러한 중흥을 밑바탕으로 부산의 창작 희곡은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획기적인 발전의 여건과 계기를 마련하여 드디어 르네상스기를 맞게 되는 것이다.
5) 창작 희곡의 르네상스기(1990~1997)
1990년대에는 창작 희곡의 르네상기를 맞는다. 이러한 창작 희곡의 활성화는 1989년의 <부산극작가협회> 창립46), 1994년에 발족을 본 <부산창작극연구회>47), 부산문화연구회와 부산극작가협회의 공동 주최로 개최한 <드라마창작교실>48) 등의 행사로 인한 희곡 창작에 대한 관심과 열기가 크게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드라마창작교실>의 수강 인원이 100여 명이 되었다는 것은 1970년대의 소설문학의 독자에 비해서 크게 증가한 것인데, 이는 80년대를 접어들면서 젊은층들이 영상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면서 자연스럽게 영화와 연극 쪽으로 몰리면서 일어나는 자연스런 현상일 것이다. 희곡에 대한 관심은 우선 대학의 국문과 강좌 개설에서도 그 관심의 열도가 현저히 드러나, 70년대까지는 거의 황무지에 가까웠던 희곡문학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고 관심을 표명하면서 80년대를 접어들면서 희곡문학 강좌가 대학의 국문과에 속속 개설되기 시작한다.
1990년대의 부산지역 작가의 창작 희곡 현황을 알아보기 위하여 1990년의 제10회부터 1997년의 제15회 <부산연극제> 의 공연보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1990년대 부산지역 작가의 부산연극제 참가 현황
회 수 |
작 가 |
작 품 명 |
연 출 자 |
비 고 |
10회 |
이창복/권남희 |
오끼나와에서 온 편지 |
이창복 |
소설 각색 |
“ |
김 경 화 |
종이꽃 |
김경화 |
|
“ |
이 윤 택 |
혀 |
이기원 |
재공연 |
“ |
이 현 대 |
자갈치 |
김영주 |
최우수작품상 |
“ |
공동창작 |
지하철 애가 |
하종찬 |
|
“ |
하 창 길 |
반신 반수 |
김익현 |
우수 작품상 |
11회 |
김 경 화 |
가지 끝에 부는 바람 |
김경화 |
|
“ |
하 창 길 |
숨은 신 |
김익현 |
|
“ |
하 정 애 |
핏줄 |
하종찬 |
|
“ |
이 창 복 |
완전한 만남 |
이창복 |
소설 각색 |
“ |
이 동 재 |
깊은 밤까지 |
이동재 |
|
12회 |
이 창 복 |
하늬 |
이창복 |
최우수 작품상 |
“ |
이 현 대 |
달빛 신화 |
최재영 |
|
13회 |
이 현 대 |
유리 버스 |
김영주 |
|
“ |
이 은 정 |
무지개 강 |
김익현 |
희곡상 수상 |
14회 |
이 은 정 |
우산을 쓴 천사상 |
김익현 |
|
“ |
김 경 화 |
샛바람 부는 날에 |
이정남 |
최우수 작품상 |
“ |
김 문 홍 |
산천에 봄은 다시 오고 |
한상한 |
우수 작품상 희곡상 |
15회 |
김 경 화 |
어무이 어무이요 |
김경화 |
우수 작품상 |
“ |
공동 창작 |
민들레 노래 |
황성현 |
|
“ |
이 은 정 |
아버지는 죽어서 뭘 남겼나 |
김익현 |
|
“ |
하 창 길 |
그 여자의 숲속에는 올빼미가 산다 |
허영길 |
최우수 작품상 |
제10회부터 제15회까지의 기간 중에는 부산지역 작가의 창작 희곡이 총 22편이 출품되고 있는데, 이 중에서 신작 초연이 14편, 소설의 각색이 2편, 극단 공동 구성이 2편, 나머지는 서울의 다른 극단이나 부산의 극단에서 이미 공연했던 작품들이다. 이 기간 중에 새롭게 얼굴을 내미는 작가로는 극단「열린무대」의 이창복과 권남희, 극단「도깨비」의 이은정, 극단「예랑」의 하정애, 극단「처용」의 이동재 등으로, 하정애를 제외한 작가들은 지금까지도 창작 희곡을 꾸준히 써오고 있다. 특이한 것은 연출가 이동재 1년여의 일본 연극 연수룰 끝내고 와서 새로운 희곡을 썼다는 점이다. 그리고 제12회와 제13회의 출품작이 부진한 것은 제12회부터 새로이 도입된「부산연극제」 예선대회에 대한 부담이 작용한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80년대 초부터 개최된「전국연극제」와「부산연극제」는 부산 지역 극작가들의 창작의식을 고무시켜 창작 희곡을 활성화시켰다는 점은 부산연극사에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현재까지 각 극단별로 공연된 지역 작가의 창작 희곡 공연 현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90년대 부산지역 극작가의 창작 희곡 공연 현황
가. 극단「도깨비」
공 연 일 자 |
작 가 |
작 품 명 |
연 출 자 |
비 고 |
1991. 4 |
김 익 현 |
누이의 노래 |
김 익 현 |
부산연극제 |
1991. 10 |
천 재 동 |
새똥골 장승 |
〃 |
|
1992. 4 |
하 창 길 |
반신반수 |
〃 |
부산연극제 |
1992. 9 |
〃 |
S/Z |
하 창 길 |
|
1992. 11 |
김 익 현 |
서울 간 할미 |
김 익 현 |
|
1993. 4 |
천 재 동 |
중매소동 |
〃 |
|
1993. 12 |
김 익 현 |
무심이와 한심이 |
〃 |
|
1994. 8 |
이 은 정 |
우산 쓴 천사상 |
〃 |
첫 데뷔작 |
1995. 2 |
〃 |
찡긴 여자 |
〃 |
|
1995. 4 |
〃 |
무지개 강 |
〃 |
부산연극제 |
1995. 11 |
김 경 화 |
염소와 비단 |
〃 |
|
1997. 3 |
이 은 정 |
아버지는 죽어 서 뭘 남겼나 |
〃 |
부산연극제 |
나. 극단 무대예술「맥」
공 연 일 자 |
작 가 |
작 품 명 |
연 출 자 |
비 고 |
1990 |
김 경 화 |
종 이 꽃 |
김 경 화 |
부산연극제 |
1992 |
〃 |
꼭 두 |
〃 |
|
〃 |
〃 |
타 령 |
〃 |
|
1993 |
〃 |
개잘량傳 |
〃 |
|
〃 |
〃 |
가지끝부는 바람 |
〃 |
부산연극제 |
〃 |
〃 |
환상의 섬 |
〃 |
|
〃 |
박 원 돈 |
자식이 뭔지1 |
고 인 범 |
|
1994 |
김 경 화 |
영웅광대 |
김 경 화 |
모노드라마 |
〃 |
신 태 범 |
울고넘는 애오개 |
〃 |
|
1995 |
김 경 화 |
어무이 어무이요 |
〃 |
|
1996 |
〃 |
샛바람부는 날에 |
이 정 남 |
부산연극제 |
1997 |
〃 |
어무이 어무이요 |
김 경 화 |
부산연극제 |
공 연 일 자 |
작 가 |
작 품 명 |
연 출 자 |
비 고 |
1990 |
김 승 일 |
바람을찾는 사내 |
김 승 일 |
부산연극제 |
라. 극단「부산레파토리시스템」
공 연 일 자 |
작 가 |
작 품 명 |
연 출 자 |
비 고 |
1991 |
이 윤 택 |
불의 가면 |
이 기 원 |
부산연극제 |
마. 극단「SAY」
공 연 일 자 |
작 가 |
작 품 명 |
연 출 자 |
비 고 |
1997 |
하 창 길 |
그 여자의 숲속 에는 올빼미가 산다 |
허 영 길 |
부산연극제 |
바. 극단「여명」
공 연 일 자 |
작 가 |
작 품 명 |
연 출 자 |
비 고 |
1991 |
오 은 희 |
아바돈을 위한 조곡(弔曲) |
조 준 현 |
부산연극제 |
사. 극단「열린무대」
공 연 일 자 |
작 가 |
작 품 명 |
연 출 자 |
비 고 |
1990. 3 |
이 여 화 |
금강 1894 |
이 창 복 |
|
1990. 9 |
이창복․권남희 |
오끼나와에서 온 편지(김정한원작) |
〃 |
|
1992. 12 |
권 남 희 |
파우스트를 만드는 사람들 |
〃 |
|
1993. 6 |
이창복(각색) |
완전한 만남 |
〃 |
부산연극제 |
1994. 4 |
이 창 복 |
하늬 |
〃 |
〃 |
1995. 3 |
권 남 희 |
종이뱅기 |
권 남 희 |
올해의 연극상 |
1996. 3 |
공동창작 |
우리들의 이야기 |
황 성 현 |
|
1997. 3 |
〃 |
민들레 노래 |
〃 |
부산연극제 |
아. 극단「예랑」
공 연 일 자 |
작 가 |
작 품 명 |
연 출 자 |
비 고 |
1991 |
김 문 홍 |
불쌍하신 우리 망제 |
하 종 찬 |
부산연극제 |
1992 |
공동창작 |
지하철 애가 |
〃 |
|
1993 |
하 정 애 |
핏줄 |
하 종 진 |
|
자. 극단「예술극장」
공 연 일 자 |
작 가 |
작 품 명 |
연 출 자 |
비 고 |
1990 |
이 영 식 |
조마이섬 |
이 영 식 |
|
차. 극단「전위무대」
공 연 일 자 |
작 가 |
작 품 명 |
연 출 자 |
비 고 |
1991 |
전 동 수 |
얼룩 향수 |
전 승 환 |
부산연극제 |
카. 극단「처용」
공 연 일 자 |
작 가 |
작 품 명 |
연 출 자 |
비 고 |
1993. 4 |
이 동 재 |
깊은 밤까지 |
이 동 재 |
부산연극제 |
1993. 7 |
〃 |
〃 |
〃 |
재공연 |
타. 극단「한새벌」
공 연 일 자 |
작 가 |
작 품 명 |
연 출 자 |
비 고 |
1996. 3 |
김 문 홍 |
산천에 봄은 다시 오고 |
한 상 한 |
부산연극제 |
파. 극단「현장」
공 연 일 자 |
작 가 |
작 품 명 |
연 출 자 |
비 고 |
1990 |
이 현 대 |
하늘로 간 고래 |
홍 성 모 |
부산연극제 |
1991 |
〃 |
덜구소리 |
김 영 주 |
〃 |
1993 |
〃 |
자 갈 치 |
〃 |
〃 |
1994 |
〃 |
달빛 신화 |
최 재 영 |
〃 |
1995 |
“ |
유리 버스 |
김 영 주 |
“ |
하. 극단「새벽」
공 연 일 자 |
작 가 |
작 품 명 |
연 출 자 |
비 고 |
1990. 4 |
이 성 민 |
다시서는 사람들 |
이 성 민 |
|
1990. 5 |
〃 |
5월 별신굿 |
〃 |
|
1990. 8 |
〃 |
나랏님 말씀이 |
〃 |
|
1991. 11 |
〃 |
지금 이곳 |
〃 |
|
1992. 11 |
〃 |
오끼시마호는 부산항으로 못 간다 |
〃 |
|
1993. 7 |
〃 |
산재(産災)와 살으리랏다 |
〃 |
|
1995 |
〃(각색) |
B사감과러브레터 |
〃 |
|
〃 |
〃(각색) |
새 허생 이야기 |
〃 |
|
1996 |
이 성 민 |
어머니 날 낳으시고 |
〃 |
올해의 연극상 |
1997 |
〃 |
〃 |
〃 |
재공연 |
부산연극제를 제외한 부산지역 극단에 의한 부산지역 극작가의 창작 희곡 공연은 극단「한새벌」이「일식」(1990. 10),「산천에 봄은 다시 오고」등 김문홍의 희곡 2편49)을, 극단「현장」이「하늘로 간 고래」(1990),「덜구소리」(1991),「자갈치」(1992),「달빛 신화」(1994),「유리버스」(1995) 등 이현대의 작품 4편을, 극단「처용」이 이동재의 신작「깊은 밤까지」(1993) 1편을, 극단「부산무대」가 김문홍의 희곡「가시덤불」을「1950」으로 개제하여 공연하고, 극단「여명」이 오은희의 신춘문예 당선 희곡인「아바돈을 위한 弔曲」을, 극단「도깨비」가 김익현의 희곡 4편, 하창길의 희곡 2편, 이은정의 희곡 4편, 천재동의 희곡 2편, 김경화의 희곡 1편 등 부산지역 극작가의 창작 희곡 13편을 공연하고 있으며, 극단「맥」은 김경화의 희곡 9편, 신태범의 희곡 1편, 박원돈의 희곡 1편 등 모두 11편을 공연했으며, 극단「열린무대」는 이창복의 각색 작품 3편, 권남희의 희곡 2편 등 5편을, 극단「SAY」는 하창길의 희곡 2편을 이 기간 중(1990~1997. 8 까지)에 공연하고 있어, 가히 지역 창작 희곡의 르네상스가 도래한 느낌을 주고 있다. 극단「새벽」은 지금까지 비제도권으로 민족극 계열의 작품을 공연해 왔던 관계로 제도권 쪽에서는 소외되어 온 느낌이 없지 않다, 그러나 두 번의 <아시아 연극인 페스티벌>(제1회는 1995년, 제2회는 1997년 8월 14일~24일까지 열림)의 주최로 한국연극의 위상을 널리 알리고 높인 바 있으며, 특히 1996년에 공연된 윤명숙의 모노드라마인「어머니 날 낳으시고」는 그 작품의 문학성과 연극적 완성도가 뛰어나 부산의 <국제연극비평가그룹>50)이 주는 <제2회 올해의 좋은 연극상>51)을 수상한 바가 있다. 이들 극단들 중에서 지역 창작극 공연에 가장 활발한 활동을 벌인 것은 극단 자체 내에 극작가를 회원으로 보유하고 있는 극단「한새벌」,극단「현장」,극단「맥」 등의 극단이고, 새로운 극작가의 작품을 계속 공연하고 있는 극단「도깨비」이다.
1997년의 특이할만한 연극적 사건은 <가마골 신춘단막극제>이다. 가마골 소극장의 주최로 1997년 3월 20일부터 4월 6일까지 극단「연희단거리패」에 의해서 1997년 부산의 《국제신문》과《부산일보》의 신춘문예 당선 희곡들을「연희단거리패」의 신예연출가들에 의해 공연되었는데,「파행」(국제신문 당선작, 손재완 작, 이민아 연출),「목소리를 죽이라니깐」(부산일보, 윤지형 작, 조영진 연출),「세기말 비너스」(부산일보, 장병훈 작, 유수미 연출) 등의 세 작품들의 공연은 신인 극작가의 작품에 공연의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그들의 창작의욕을 고무시켜 주었다.
1990년대에 들어와서는 부산 작가의 창작희곡집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는데, 부산지역의 작가들은 <부산극작가협회>의 회원 합동작품집이 3권을, 이윤택이『웃다, 북치다, 죽다』(1993. 12, 평민사)52),『문제적 인간』(1995. 8, 공간미디어)53) 등 2권을, 김경화가『꼭두』(1992. 7, 해성)54)55) 와『영웅광대』(1995. 10, 해성)56) 등 2권을, 이현대가 첫 희곡집『자갈치』(1994. 3, 해성)57)를, 하창길이 두 번째 희곡집『누가 장미에 수갑을 채웠나』(1994. 12, 해성)58) 를 상재하는 등 창작희곡집을 앞 다투어 상재하고 있다. 그리고 이현대의「자갈치」가 제10회 부산연극제(1992)에서 단체 대상과 전국연극제에서 단체 우수상과 희곡상을 수상하고, 김경화의 희곡「샛바람 부는 날에」는 제14회 부산연극제(1996) 단체 대상과 전국연극제의 단체 장려상과 희곡상을, 하창길의「그 여자의 숲속에는 올빼미가 산다」로 제15회 부산연극제(1997) 단체 대상과 전국연극제 단체 장려상을 수상하는 등 기염을 토하며 창작 희곡의 르네상스가 도래했음을 알리고 있다. 특히 그증에서 이윤택의 희곡중 「오구-죽음의 형식」은 한국평론가협의회 최우수 예술가상 수상(1989. 12), 제2회 동경 국제연극제 참가(1990. 9), 독일 에센 세계연극제 참가(1991. 6) 등의 업적을, 또한「시민-K」는 영희연극상(1990. 4)을 수상하고,「바보각시」의 후꾸오카 유니버시아드 프레 문화축전 공연(1993. 9),「歌人」의 제2회 아시아 연극인 페스트발 행사의 <한국의 연출가전>에 초대(1997. 8) 되는 등 세계적인 인물로 부상하여 부산 연극의 위상을 높여주고 있어 창작 희곡의 르네상스기에 한층 어울려 보인다.
6) 신인 극작가의 약진으로 인한 극작의 세대교체(1998~2005)
1998년에 접어들면서 부산연극계에 새로운 판도가 형성되기 시작한다. 현재 부산연극협회 소속 19개 극단 중 최장수 극단은「전위무대」(1964년 창단)이며, 그 다음으로 연륜이 오랜 극단은 교사극단「한새벌」(1973), 극단「현장」(1974), 극단「부산레퍼토리시스템」(1978)이다. 1980년대 중반 이후에 창단한 극단은 극단「부두연극단」(1984.10),극단「맥」(1987.3),극단「예사당」(1987.10),극단「하늘개인날」(1988.11) 등이고, 나머지 대부분의 극단은 1990년대 이후에 창단한 신생 극단들이다. 1970년대에 창단한 극단들 중 교사극단「한새벌」은 부산교육대학교 극예술연구회 출신의 현직 초등학교 교사들로 구성된 극단으로, 여름 방학과 겨울 방학 중에 연습하여 공연하기 때문에 1년에 한두 차례의 공연 실적을 채우기에 급급한 형편이다. 극단「현장」은 창단 이후 지금까지 126회의 공연 실적을 갖추고 있지만, 1998년 이후로는 거의 공연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 개점휴업 상태에 있다.59) 그리고 극단「부산레퍼토리시스템」역시 단원들의 이합집산60)으로 거의 공연 활동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1980년대 중반 이후에 창단한 극단들 중에도 극단「도깨비」는 기장 바다 축제를 중심으로 한 공연 활동에 치중하고 있으며, 극단「예사당」역시 1999년 이후에는 1년에 한 작품 정도만을 공연해 오다가 극단의 대표였던 연출자 손기룡이 2004년 부산시립극단 상임연출로 자리를 옮기면서 거의 공연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1980년대 중반 이후에 창단한 극단들 중 극단「맥」,「하늘개인날」,「부드연극단」정도만이 1년에 2, 3회의 공연 활동을 펼치고 있을 뿐이다.
1998년 2월에 부산시립극단이 창단되는 것을 기점으로 하여 1970년대와 1980년대 중반 이후에 창단된 연륜이 오래 된 극단과 신생 극단 사이에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특히 눈에 띄게 변모되는 것은 신인 극작가들이 대거 약진하여 부산 지역의 창작극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부산시립극단이 창단되면서 기획한 소극장 페스티벌로 여류극작가 이흔주와 고연옥61)이 괄목할만한 성장을 보이고, 경성대학교 연극영화과 출신들로 조직되어 창단된 극단「동녘」(1999.8 창단)의 구성원인 오치운, 심문섭, 박성진62) 등이 창작극을 연이어 발표하기 시작하고, 1997년 극단「열린무대」를 통하여 극작 겸 연출자인 구현철이 장정일 희곡 시리즈1인「실내극. 어머니. 실크 커튼은 말한다」를 선보이면서 부산연극계에 무서운 돌풍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그리고 1993년 극단「자유바다」를 창단한 극작 겸 연출자인 정경환이 등장하여 한국 현대사의 쟁점을 희곡화하여 발표하기 시작한다. 1998년 이후의 부산 지역 극작가의 창작희곡 공연 현황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1998년 이후 부산지역 극작가의 창작희곡 공연 현황
가. 극단「도깨비」63)
회수 |
공연일 |
작 품 명 |
작가 |
연출 |
1 |
1999. 4 |
집으로 가는 길에 |
박성철 |
김익현 |
2 |
2003. 4 |
이시미 |
김익현 |
김익현 |
3 |
2003. 12 |
모자여행 |
김익현 |
김익현 |
4 |
2006. 4 |
꿈에 |
김익현 |
김익현 |
나. 극단「동녘」64)
회수 |
공연일 |
작품명 |
작가 |
연출 |
1 |
1999. 8 |
메두사쿠스 |
오치운 |
오치운 |
2 |
2000. 4 |
복어 알 |
박성진. 전수일 |
박성진 |
3 |
2000. 12 |
사랑, 첫 이미지-꿈 |
오치운 |
오치운 |
4 |
2001. 10 |
바리데기 |
공동창작 |
심문섭 |
5 |
2001. 10 |
콘텍트렌즈 |
오치운 |
오치운 |
6 |
2002. 5 |
가락국기 |
심문섭 |
심문섭 |
7 |
2002. 9 |
안돼라고 외쳐봐 |
심문섭 |
심문섭 |
8 |
2006. 7 |
선택, 그리고 일곱 번째 날 |
오치운 |
오치운 |
다. 극단「맥」65)
회수 |
공연일 |
작품명 |
작가 |
연출 |
1 |
1998. 1 |
어무이, 어무이요 |
김경화 |
김경화 |
2 |
1999. 8 |
할매 욕 봤심더 |
김경화 |
김익현 |
3 |
2000. 10 |
민초의 꿈 |
김경화 |
이정남 |
4 |
2000. 11 |
뮤지컬 횃불 |
김경화 |
이정남 |
5 |
2001. 10 |
안용복 장군 |
김경화 |
이정남 |
6 |
2004. 4 |
세한도에 봄이 드니 |
김문홍 |
이정남 |
7 |
2004. 7 |
홍백아 놀자 |
이정남 |
이정남 |
8 |
2004. 10 |
똥아! 똥아! 개똥아! |
이정남 |
이정남 |
9 |
2005. 4 |
|
이정남 |
이정남 |
10 |
2006. 4 |
곡독 |
김경화 |
김경화 |
라. 극단「새벽」66)
회수 |
공연일 |
작품명 |
작가 |
연출 |
1 |
1998 |
어느 골짜기에 관한 논쟁 |
이성민 |
이성민 |
2 |
2000 |
어머니 날 낳으시고 |
이성민 |
이성민 |
3 |
2002 |
역전 블루스 |
이성민 |
이성민 |
4 |
2003 |
이의 있습니다 |
이성민 |
이성민 |
5 |
2004 |
서른 세대의 하늘 |
이성민 |
이성민 |
마. 극단「세이」
회수 |
공연일 |
작품명 |
작가 |
연출 |
1 |
1999. 7 |
꿈이라면 좋았겠지 |
고연옥 |
김만중 |
2 |
2000. 9 |
떠도는 섬 |
김문홍 |
김문홍 |
3 |
2005 |
검사와 여선생 |
김문홍 |
김만중 |
바. 극단「열린무대」67)
회수 |
공연일 |
작품명 |
작가 |
연출 |
1 |
1999. 6 |
쇼타임 꽃들은 모두 어디로 갔나 |
구현철. 유재명 |
구현철. 유재명 |
2 |
2001. 11 |
트라우마 |
구현철. 김인섭 |
구현철 |
3 |
2002. 3 |
어두운 태양 |
허한범 |
허한범 |
사. 극단「자유바다」68)
회수 |
공연일 |
작품명 |
작가 |
연출 |
1 |
2000. 4 |
난난 |
정경환 |
정경환 |
2 |
2000. 10 |
클래식아 놀자 |
정경환 |
정경환 |
3 |
2001. 5 |
카바레에서 만납시다 |
정경환 |
정경환 |
4 |
2001. 9 |
꽃 2 |
정경환 |
정경환 |
5 |
2002. 4 |
이씨전기 |
정경환 |
정경환 |
6 |
2002. 8 |
나, 테러리스트 |
정경환 |
정경환 |
7 |
2003. 4 |
이름다운 이곳에 살리라 |
정경환 |
정경환 |
8 |
2003. 6 |
태몽 |
정경환 |
정경환 |
9 |
|
|
정경환 |
정경환 |
아. 극단「하늘개인날」69)
회수 |
공연일 |
작품명 |
작가 |
연출 |
1 |
1998. 7 |
아버지 |
이정허 |
곽종필 |
자. 극단「현장」70)
회수 |
공연일 |
작품명 |
작가 |
연출 |
1 |
1998. 8 |
유리창이 흐리면 그림을 그리자 |
이현대 |
김영주 |
차. 극단「부산광역시립극단」
회수 |
공연일 |
작품명 |
작가 |
연출 |
1 |
1999. 7 |
꿈이라면 좋았겠지 |
고연옥 |
김만중 |
2 |
1999. 8 |
천국으로 배달해 드립니다 |
이흔주 |
정순지 |
3 |
1999. 12 |
용두산 엘레지 |
김경화 |
김경화 |
4 |
2000. 6 |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
이태윤 |
박상하 |
5 |
2001. 10 |
콘텍트렌즈 |
오치운 |
오치운 |
6 |
2001. 10 |
트라우마 |
구현철. 김인섭 |
구현철 |
7 |
2002. 4 |
폭력의 세기 |
노혜경 |
전성환 |
8 |
2002. 8 |
나, 테러리스트 |
정경환 |
정경환 |
카. 극단「가마골」71)
회수 |
공연일 |
작품명 |
작가 |
연출 |
1 |
2004. 3 |
숙희 정희 |
박현철 |
이윤주 |
2 |
2004. 4 |
장미빌라 살인사건 |
박현철 |
이윤주 |
3 |
2004. 5 |
맨발의 청춘 이찬 전 |
박현철 |
이윤주 |
4 |
2004. 6 |
쌍생 |
박현철 |
이윤주 |
5 |
2004. 7 |
로미오를 사랑한 줄리엣의 하녀 |
박현철 |
이윤주 |
타. 극단「갤러리 씨어터」72)
회수 |
공연일 |
작품명 |
작가 |
연출 |
1 |
|
|
허한범 |
허한범 |
2 |
|
|
허한범 |
허한범 |
3 |
|
|
허한범 |
허한범 |
4 |
|
|
허한범 |
허한범 |
파. 극단「여백」73)
회수 |
공연일 |
작품명 |
작가 |
연출 |
1 |
2001. 7 |
아니 그게 아니라 |
최복남 |
최복남 |
하. 극단「부산레퍼토리시스템」74)
회수 |
공연일 |
작품명 |
작가 |
연출 |
1 |
2003. 7 |
노인 새 되어 날다 |
신태범 |
이정남 |
지역 신문의 신춘문예 희곡 부문 공모는 창작 희곡 활성화에 한 몫을 한 것으로 보인다. 부산지역의 양대 일간지인《부산일보》와《국제신문》은 신춘문예 희곡 부문을 신설하여 작품을 모집했으나, 그 중《국제신문》은 응모자 수가 적다는 현실적인 숫자 논리에 의해 신설했던 희곡 부문을 실시 몇 해만에 폐지해 버리고, 현재《부산일보》75)만 지금까지 계속 공모해 오고 있다.
1998년에는 중앙동 시대를 마감하고 광안리로 옮긴 가마골 소극장에서《98. 가마골 신춘 단막극제》를 개최하여, 부산 지역의 극작가인 홍윤희의「광안리를 쏘아라」를 연희단거리패의 연기자 겸 연출자인 김경익에 의해 공연되었다. 그러나 재기발랄한 신인 극작가 홍윤희는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비극적 최후로 지역 창작극 활성화에 찬물을 끼얹기도 했다. 같은 해 12월에는 비 제도권 극단인《새벽》에 의해 윤명숙의 1인극「어머니 날 낳으시고」가 공연되어 연극계의 비평계의 주목을 받기에 이른다. 이 작품은 줄기차게 창작극만을 고집해오고 있던 연출자 겸 극작가인 이성민의 여타 작품과는 그 궤를 달리하는 작품 세계로, 문학성과 연극성의 두 측면에서 성공작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한 1998년 1월 23일 부산시립극단 창단을 시발로 그 해 4월에는 이현대의 창작희곡「자갈치」가 시립극단 창단 공연의 레퍼토리로 확정되었다. 이 작품은 부산 지역의 서민의 애환이 서린 ‘자갈치’ 시장과 어판장을 중심으로 강인한 생명력으로 현실의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서민들의 애환과 페이소스를 그린 극작가 이현대의 대표 작품이다. 창단 공연을 둘러싸고 연극비평가 정봉석의 비평과 시립극단 예술감독76) 중의 한 사람인 극작가 겸 연출자인 김경화의 이에 대한 반론, 그리고 당시《국제신문》연극 담당 기자였던 유창우의 재반론으로, 연극 비평과 현장 공연 예술계의 껄끄러운 관계가 형성되기도 했다.
1999년 제17회 부산연극제에서 극단《도깨비》는 그 해《서울신문》신춘문예 희곡 부문 당선자인 신인 박성철의「집으로 가는 길에」를 공연한다. 박성철은 이 작품 이후에는 후속 작품을 내놓지 않고 있다.77) 같은 극단을 통해 세 작품을 발표한 바가 있는 신인 여류 극작가인 이은정도 한 때는 작품을 통해 재기발랄한 문학적 감수성을 선보였으나, 그 역시 이후에는 후속 작품을 발표하지 못하고 있다.
2000년에는 1월의 새천년맞이로 공연된 이윤택의「해야 해야 나오너라」78)
를 시발로 연극과 미술을 비롯한 인접 예술 장르와의 접목을 시도한 실험적 양식으로 주목을 받아오고 있던 극작가 겸 연출자인 허한범의「시선과 응시의 분열」, 신인 극작가인 오치운이 다대포 해수욕장에서 야외극으로 첫 선을 보인「메두사쿠스」와 부산연극제 희곡상 수상작인「사랑, 첫 이미지-꿈」79)을 발표하고, 그리고 여류 극작가인 김숙경의「또 다른 시작은 없다」, 경성대 연극영화과 4학년 졸업 워크샵 공연 작품인「바리데기」80)가 공연되어 연극계의 주목을 받기에 이른다. 극단《PG 신우》에 의해 공연된 김숙경의 창작희곡「또 다른 시작은 없다」는 희곡적 측면으로서의 서사 구조와 무대적 표현 형식에 있어서 단막극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 작품은 도시 중산층 가정이라는 극적 공간과 저마다 모두 나름대로의 불행한 일상을 간직하고 있는 데에서 야기되는 극적 갈등, 그리고 이들 세 딸과 어머니의 일상에서 빚어지는 반목과 대립, 충돌과 화해라는 극적 상황을 중심으로 극이 진행되고 있다. 즉, 논리적 인과 관계에 의한 서사 구조로서의 극적 전개보다는, 극적 상황을 중심으로 그 상황에 놓여진 인물들의 현실에 대한 반응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일종의 상황극이다. 이 작품은 문학성과 연극성에 있어서 고른 수준을 유지하여 평단의 주목을 받은 바가 있다.
경성대 연극영화과 4학년 졸업 워크샵 공연을 위해 공동 창작된 희곡「바리데기」공연은 창작극 생산이 부진한 부산 지역의 창작 희곡계에 새 바람을 불러일으킨 바가 있다. 이 작품은 몇 부분에 대한 수정과 보완이 가해진다면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완벽한 주제의식과 연극적 틀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이 작품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정통 사실주의 희곡이 아니라, 신화와 현실의 길트기 작업의 일환81)으로 이루어진 실험적 텍스트라는데 그 특징이 있다. 이 작품은 무대 후면 중앙에 위치한 교통 신호대라는 연극적 오브제를 매개로 하여, 신화와 현실이 연극적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서로 넘나들어 스며들고 있으며, 여러 가지 천을 통한 극적 상황과 배경의 이미지화, 다양한 마임을 통한 인물의 심리적 정황의 표현, 다양한 조명과 음악을 통한 연극적 이미지의 구현이라는 점에서 다분히 실험적인 작품이다. 특히, 이러한 작업은 공동 창작이라는 작업을 통하여 대학과 일선 연극 현장의 교류적인 측면에서 큰 의의를 지니고 있다. 신인 극작가 겸 연출자인 심문섭은 이 작품을 시발로 하여 부산연극제에 창작희곡「가락국기」82)를 선보이는 한편, 2004년 11월에는 부산배우협의회의 정기 공연 작품으로 아이스킬로스의 고대 희랍 비극인「오레스테이아」를 우리 현실과 상황에 맞게 재창작한「오레스테스 죽이기」를 재구성 창작하고 연출하여, 같은 극단의 오치운과 함께 지역 창작 희곡계의 기린아로 급성장하기에 이른다.
2001년의 주목할만한 지역 극작가의 창작희곡으로는 극단《열린무대》의 고정 레퍼토리로 정착된 여류 극작가 권남희의「종이뱅기」이다. 이 작품은 1995년의 초연(총 24회 공연)과 1998년의 앵콜 공연, 그리고 2001년 9월 20일부터 10월 14일까지 공연되는 등 꾸준하게 공연되어 그 문학성과 연극성을 인정받아, 부산연극비평가 그룹이 주는《올해의 좋은 연극상》을 수상하여, 희곡 텍스트는 공연을 통해서만 완성된다는 좋은 본보기를 보여 주었다. 2001년 11월에는 극작가 김문홍이 본격적인 연극평론집으로서는 최초로『공연과 비평』83)을 상재하여 일선 연극 현장과 학계에 좋은 자극제가 되기도 했다.
현재 부산지역의 극작가는 김문홍, 김경화, 이현대(2004년 작고), 양왕용, 장세종, 이성민, 허한범, 윤지형, 오치운, 심문섭, 조용석, 김숙경, 이흔주, 김지용, 주혜자. 김익현, 구현철, 박용헌, 최재민, 양지웅, 박현철84), 이정남, 심상교, 이철우 등 20여 명이 활동하고 있는데, 이들 중 극작만을 전업으로 하고 있는 작가는 김문홍과 시인인 양왕용85), 그리고 이철우와 심상교86) 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연출과 극작을 겸하고 있다. 이같은 현상은 바로 극작은 연극의 특성과 무대 메커니즘을 인식하지 못하고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단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연출과 극작을 겸하고 있는 작가들 중에서는 구현철, 오치운, 심문섭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가 작품의 문학적 수준이 부족하다는 결함을 지니고 있다. 현재 부산에는 이러한 극작가들만의 모임인 부산극작가협회87)가 있으나, 몇 년 동안은 개점휴업 상태에 있다.
2005년 부산연극제부터는 경연 작품의 참가 규정을 대폭 수정 발표했는데, 이는 부산 지역 극작가의 창작 희곡을 활성화하겠다는 취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제도는 부산연극제 경연 부문에 참가하는 희곡 텍스트에 제한 규정을 둔 것인데, 부산 지역 이외의 극작가의 희곡은 무조건 창작 초연이어야만 하고, 부산 지역 극작가의 작품은 2년 이내의 재 공연 작품은 가능하다는 조항이었다. 이러한 폐쇄적 조치는 부산 지역 극작가의 창작 희곡 활성화를 우선 순위에 두겠다는 고육지책이나 다름이 없다. 이런 제한 조치가 없다면 거의 대부분의 극단들이 이미 검증된 서울 지역 유명 작가의 작품만을 선호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제도가 시행되기 전에는 경연 부분 참가 극단이 제법 많았으나, 이 제도를 시행하고부터는 5〜6 개 극단으로 줄어들었다. 현재 이 제도를 시행한지 2년이 지났지만 여러 가지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 즉, 극단의 연출자들이 희곡 텍스트를 창작하는 현상이 보편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지역 창작희곡이 증가한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희곡 텍스트의 문학성이 떨어진다는 부정적인 측면이 더 강하게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2006년 제24회 부산연극제에서는 극단《바다와 문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PLAY 5 Mankind History」(김지용 작, 연출)라는 작품이 10개 수상 부문에서 두 부문을 제외한 8개 부문을 수상하는 이변을 낳기도 했다. 이 극단은 단체상인 최우수 작품상을 비롯하여 개인상 부문을 거의 모두 독차지하는 기현상을 연출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 제도의 긍정적인 면 또한 무시할 수 없다. 2005년에는 신인 극작가 강태욱의 창작 희곡인「B.C 2430」이 전극연극제에서 은상을 수상하여 작품의 문학적 수준을 검증받았고, 또한 올해 부산연극제에서는 신인 극작가 김지용의 창작 희곡이 희곡상과 연출상을 동시에 수상하여 희곡 텍스트의 문학성과 연극성을 동시에 검증받은 일이 이를 잘 예시해 주고 있다.
지금 부산 지역에는 문예창작학과를 둔 대학이 세 군데88)나 있지만, 이들 문예창작학과에서 희곡을 전공하는 학생수는 별로 많지 않고 등단한 사람도 거의 없는 실정이다. 지금 부산지역의 창작 희곡계는 90년대 중반 이후에 젊은 연출가 겸 극작가들이 주도하고 있으며,《부산창작극연구회》89) 를 중심으로 신인 작품 발굴과, 기성 작가의 신작 희곡을 일선 연극 현장에 공급하려는 노력을 활성화하고 있어, 앞으로 부산 지역 극작가의 창작 희곡은 날로 증가 추세를 보일 것으로 기대된다.
3. 결론(結論)
지금까지 1945년의 해방 공간부터 2005년까지 부산지역 작가의 창작 희곡을 중심으로 부산 창작희곡 60년사를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부산 지역의 창작 희곡은 연극의 발전과 비례하여 그 질적, 양적 성장을 이룩해 왔는데, 여기에는 대학극의 활성화가한 몫을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창작 희곡의 중흥은 1980년대에 개최된「전국연극제」와 이의 예선대회 형식으로 존재하는 「부산연극제」가 그 기폭제가 되었으며, 80년대의 중흥기를 거쳐 1990년대에는 희곡집이 봇물처럼 쏟아지는 등 가히 창작 희곡의 르네상스기가 도래했음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아직도 부산지역의 창작 희곡은 400만이라는 인구 비례와 문화적 환경, 그리고 연극의 발전과 비교해 볼 때 부산희곡사의 분수령을 이룰 만큼의 발전을 이룩하지는 못하고 있다. 지역 창작극 부재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요약하면 첫째, 지역 창작극의 극적 완성도 미흡, 둘째 지역 극단들에 의한 지역 창작극의 냉대와 무관심, 셋째, 희곡 원고료의 현실적인 수준 미흡, 넷째 부산 관객의 서울지역 연극에 대한 문화적 사대의식, 연극계 밖의 문학을 비롯한 문화예술 종사자와의 연대관계 소홀, 대학연극인들과의 교류 부족 등을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이러한 지역 창작극의 활성화 방안으로는 극작가와 극단의 교류 활성화, 신인 발굴제도의 확충, 창작극 개발 금고 운영, 대학의 희곡문학에 대한 관심과 노력 등을 들 수 있다. 끝으로 1990년대의 부산지역 작가의 창작 희곡의 발전 상황은 2000년대에나 가서야 정당한 자리매김이 될 것으로 안다. 해방 공간부터 현재까지의 부산지역 작가들의 창작 희곡에 대한 희곡문학적 접근과 분석, 그리고 공연된 희곡에 대한 비평문과 그러한 작품들에 대한 내용 및 형식적 접근, 타 지역 작가들로 부산지역에서 공연된 창작 희곡 목록의 정리는 훗일의 연구 과제로 남긴다. 부산의 연극사에 대한 자료 정리는 해방공간부터 1980년대까지 경성대 <공연예술연구소>의 관심과 노력에 의해서 어느 정도 체계가 잡혀가고 있지만, 부산의 희곡사에 대한 정리는 부산의 각 신문사의 연감에 해마다 단편적으로 실리고 있을뿐, 어느 누구 한 사람 정리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 연구는 부산희곡사의 황무지에 작은 씨앗 한 톨을 심는 정도의 의미는 있으리라고 자위해 본다.
이상의 글은 다음의 문헌을 참고하여 이루어졌음을 밝힌다. 특히, 김동규 교수의『부산연극사 자료집』제1집(1994)은 이 글을 쓰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1997년 8월)
김동규,『부산연극사 자료집』제1집(경성대학교 공연예술연구소, 1994), 전승환,「時代에 따른 우리 演劇의 흐름」,『白鯨』제22집(수산대학교 교지, 1982), 김문홍,「지역 創作劇 활성화를 위한 전략」,『희곡과 공연비평』(태학사, 1997), 민병욱,『현대희곡론』(삼영사, 1997),김문홍의 창작희곡집 2권, 김경화의 창작희곡집 2권, 이윤택의 희곡집 2권, 이현대의 희곡집 1권, 하창길의 희곡집 2권, 허은,「부산연극 그 발자취」,『토박이』제1집(동보서적, 1984. 봄호), 극단「전위무대」를 비롯한 각 극단의 공연보, 부산지역 각 극단 대표의 자료 제공, 박두석, 서국영, 전성환, 전승환, 허영길 등 부산지역 원로 연극인들과 중견 연극인들의 자료 제공 및 증언. 기타 참고자료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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