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좋은 시(詩)

[스크랩] 밥 시 모음

운산 최의상 2013. 9. 15. 16:53

환한 대낮/나태주

 

 

잘 퍼진 쌀밥이 고봉으로 열렸다
이팝나무 가지, 가지 위
구수한 조밥이 대접으로 담겼다
조팝나무 가지, 가지 위


밥 먹지 않아도 배부른 것 같다, 그쟈?
누나가 말했다
우리는 아침도 안 먹고
점심도 아직 못 먹었잖아!


한참 만에 누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뭔 새들은 저렇게 울어쌓고
지랄하고 그런다냐? 그것은
꾀꼬리 쌍으로 우는 환한 대낮이었다.

  


 -시집『시인들의 나라』(서정시학, 2010) 

 

-----------------------------------------
이팝나무 꽃 피었다/김진경

 

 

1
촛불 연기처럼 꺼져가던 어머니


"바―압?"
마지막 눈길을 주며
또 밥 차려주러
부스럭부스럭 윗몸을 일으키시다


마지막 밥 한 그릇
끝내 못 차려주고 떠나는 게
서운한지
눈물 한 방울 떨어뜨리신다.

 

2
그 눈물
툭 떨어져 뿌리에 닿았는지
이팝나무 한 그루
먼 곳에서 몸 일으킨다.


먼 세상에서 이켠으로
가까스로 가지 뻗어

경계를 찢는지


밥알같이 하얀 꽃 가득 피었다. 
  

 
 -계간『창작과비평』(2001, 여름호)

 

------------------------------------ 

밥/장석주

 

 

귀 떨어진 개다리 소반 위에
밥 한 그릇 받아놓고 생각한다.
사람은 왜 밥을 먹는가.
살려고 먹는다면 왜 사는가
한 그릇의 더운 밥을 먹기 위하여
나는 몇 번이나 죄를 짓고
몇 번이나 자신을 속였는가.
밥 한 그릇의 사슬에 매달려 있는 목숨
나는 굽히고 싶지 않은 머리를 조아리고
마음에 없는 말을 지껄이고
가고 싶지 않은 고셍 발을 들여 놓고
잡고 싶지 않은 손을 잡고
정작 해야 할 말을 숨겼으며
가고 싶은 곳을 가지 못했으며
잡고 싶은 손을 잡지 못했다.
나는 왜 밥을 먹는가, 오늘
다시 생각하며 내가 마땅히
했어야 할 양심의 말들을
파기하고 또는 목구멍 속에 가두고
그 대가로 받았던 몇 번의 끼니에 대하여
부끄러워 한다. 밥 한 그릇 앞에 놓고, 아아
나는 가롯 유다가 되지 않기 위하여
기도한다. 밥 한 그릇에
나를 팔지 않기 위하여.

 

 

-시집『어둠에 바친다』(청하, 1987)

 

--------------------------------------

혼자 먹는 밥/송수권

 


혼자 먹는 밥은 쓸쓸하다


숟가락 하나
놋젓가락 둘
그 불빛 속
딸그락거리는 소리

그릇 씻어 엎다 보니
무덤과 밥그릇이 닮아 있다
우리 생에서 몇 번이나 이 빈 그릇
엎었다
되집을 수 있을까


창문으로 얼비쳐 드는 저 그믐달
방금 깨진 접시 하나.

 

 
- 계간『현대문학』(2006, 1월)

 

-------------------------------

쇠밥/송경동

 


흙먼지에 섞어 먹는 밥
싱거우면 녹가루에 비벼 먹고
석면가루도 흩뿌려 먹는 밥


체인블록으로 땡겨야 제 맛인 밥
찰진 맛 좋으면 오함마로 떡쳐 먹고
일 없으면 고층 빔 위에 혼자라도 서서 먹는 밥


시큼한 게 좋으면 오수관 때우며 먹고
새콤한 게 좋으면 가스관  때으며 먹고
연장이 모자라면 이빨로 물어뜯어서라도 먹어야 하는 밥


무엇보다 나눠 먹는 밥


1톤짜리 앵글 져다 공평하게 나눠 먹고
크레인 포클레인 지게차 기사도 불러
함께 비지땀 흘리며 먹는 밥


석양에 노을이 질 때면
아내와 아이도 모두 사이좋게 앉아 먹는
그 쇠밥

 


 -시집『꿀잠』(삶이보이는 창, 2006)

 

---------------------------------------

다시 밥이다/표성배

 


당당하던 크레인
괼괼거리던 지게차들
왁작거리던 사람들
쓸쓸함이 한꺼번에 밀려드는 공장,
녹슨 철망을 타고 오른
넝쿨장미 꽃은 어김없이 붉기함 한데
오늘은 혼자 너를 본다
꽃이 아니라서
꽃처럼 활짝 웃어보지 못했다면
말이 될까
지난 시간이 되돌아 와도
가만히 생각해 보면
무슨 애절함 같은 것을 느껴보지 못했다
무슨 무슨 계급의 문제는 더 더욱 아니었다
단순히 그래,
단순히 밥의 문제였다
울을  타고 꽃을 피운 네 자태도
슬쩍슬쩍 훔치기만 했던 내 마음도
그리운 사람에게 편지 한 장 쓸 여유마저
앗아가 버리는 밥,
여전히 밥이 문제지만
오늘은 잠시, 잠시만 잊기고 한다
툭 꽃잎을 떨군 다음에야
찾아오는 편안함 같은 것,
그런 마음으로
빈 공장이 오히려 다정하게 느껴지는

 


-시집『개나리 꽃눈』(삶이보이는 창, 2006)

 

--------------------------------------------

밥과자본주의

 

밥은 모든 밥상에 놓인 게 아니란다/고정희

                             

 


아침이 찬란하게 빨래줄에 걸려 있구나
한국산 범패 소리가 너도밤나무 숲을
멱감기는 골짜기쯤에서 우리는
너도밤나무 잎사귀 같은 웃음소리를 내며
둥그런 밥상 앞에 둘러 앉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쌀밥 옆에
김치, 들깻잎, 오이무침이 아직 푸르다
멀고먼 바다에서 건져 올린 왕새우 요리가
붉을 빛을 내며 접시 위에 엎드려 있다
아이야 너는 기쁨의 탄성을 지르며
쌀밥보다 먼저 왕새우 요리에 손이 가고
밥 대신 햄버거, 숭늉 대신 코카콜라를 찾는구나
왕새우 요리가 밥상 위에 올려지기까지
주부들이 흘린 땀방울과
이 쌀밥 한 접시에 서려 있는
보다 많는 사람들의 곡절은 몰라도 되는구나
되도록 녹말은 조금만
담백질은 많이많이 섭취하는 아이야
네 웃음소리를 스스로 낮추련?

밥은 모든 밥상에 놓인 게 아니란다
네가 햄버거를 선택하고
왕새우 요리를 즐기기까지 이 흰
쌀밥은 애초부터 공평하지 않았구나
너는 이제 알아야 한다
밥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나누는 것이란다
네가 밥을 함께 나눌 친구를 갖지 못했다면
누군가는 지금 밥그릇이 비어 있단다
네가 함께 웃을 친구를 아직 갖지 않았다면
누군가는 지금 울고 있는 거란다
이 밥그릇 속에 이 밥 한 그릇 속에
이 세상 모든 슬픔의 비밀이 들어 있단다
우리가 밥상 앞에 겸손히 고개 숙이는 것은
배부름보다 먼저 이 세상 절반의
밥그릇이 비어 있기 때문이란다
하늘은 어디서나 푸르구나 그러나
밥은 모든 밥상에 놓인 게 아니란다
네 웃음소리를 스스로 낯추련?

 


 

-고정희 유고시집 시집『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창비, 1992)


 

출처 : 너에게 편지를
글쓴이 : 흐르는 물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