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태주 시인과 함께 떠나는 명시여행(6)
그 사람을 가졌는가
함석헌
만 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운 때에도
‘저 마음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여도 너희 세상 빛 위해
저만은 살려 두거라‘ 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 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시의 지은이는 함석헌 선생이다. 함석헌(咸錫憲, 1901~1989) 선생은 한 시대를 풍미한 우리나라의 사상가요 민권운동가 겸 문필가였으며 평생을 일관된 사상과 신념으로 항일·반독재 운동에 선봉 역할을 자임했던 분이다. 일반인들에게는 <사상계>의 대표 집필자요 <씨알의 소리> 발행인이거나 『뜻으로 본 한국역사』, 『인간혁명』과 같은 책의 저자로 더 알려진 분이다. 그러나 이분은 또한 탁월한 시인이기도 해서 『수평선 넘어』란 창작시집이 있고 칼릴 지브란의 시집 『예언자』를 최초로 번역한 분이기도 하다.
위의 시는 시집 『수평선 넘어』에 수록된 시인데 보통의 시가 아니다. 비장감이 드는 시이다. 처음부터 우리더러 들이대듯이 묻고 있다. 그대는 가졌는가? 그대는 가졌는가? 한 가지 항목이 아니다. 첫째 연에 나오는 내용만 해도 그렇다. <만 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도대체 그런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불가능한 물음이시다. 이런 사람 하나 갖기에도 어려운 것이 우리들 모두의 처지다. 사정이 그러한데 그 다음의 주문은 더욱 난감한 노릇이다. 아예 두 손 들고 항복하는 수밖에 없는 노릇이겠다.
평생을 올곧고 바르게 부끄럼 없이 살아온 선생도 한 동안은 세상의 일과 오해에 얽혀 곤란한 처지에 빠진 시절이 있었다 한다. 그 때 선생은 스스로 집안에 관을 하나 들여놓고 그 속에 들어가 자신이 죽은 사람이거니 생각하고 심각하게 자성의 시간을 가진 적이 있다고 한다. 어쩌면 그 때 이런 시를 생각했지 싶다. 어쨌든 다시금 보통의 시가 아니다. 바늘로 가슴을 찌르듯 충격을 주는 시이다. 서울에는 이 시를 새긴 선생의 시비가 세워진 곳이 있다. 종로구 명륜동 혜화동 1번지. 지하철 혜화역 1번 출구로 나와 흥사단 건물 앞 어디쯤이다.
-출처:http://cafe.daum.net/KEAA(재미수필문학가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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