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詩論

시는 왜 쓰는가? (유희봉)

운산 최의상 2013. 3. 19. 18:04

 

 

 

유희봉 시인

<시는 왜 쓰는가> 시민시창작법 제4회- 유희봉 시인( 한국가톨릭문인회 감사)

3. 시는 왜 쓰는가

1. 창조적인 자아

시를 쓰게 되는 것은 일상적 삶의 구조적 모순 혹은 부조리를 극복하고 보다 바람직한 세계를 찾기 위한 욕망 때문이다. 그렇다고 시인들이 일상적 삶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낭만주의 시대만 하더라도 시인은 일상인과 다른 독특한 삶의 세계를 영위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시인의 삶이 따로 있고, 일상인의 삶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시인이란 일상적 삶을 영위하면서 또 하나의 삶을 꿈꾸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시인은 두 개의 자아를 소유하는 자라고 말할 수 있다. 평범한 일상인들은 그날 그날의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소위 일상적 자아만을 소유한다. 그러나 시인들은 이러한 일상적 자아 외에 또 하나의 자아를 소유한다. 이 또 하나의 자아를 이 글에서는 시적 자아라고 부르기로 한다.

시적 자아가 따로 존재하는 이유는 실제로 시를 쓸 때의 자아가 일상생활을 할 때의 자아와 다르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시를 써 본 사람들을 실제로 체험했겠지만, 시를 쓰는 시간의 자아는 사무실에서 사무를 보던 때의 자아와는 다르다. 사무실에서 사무를 볼 때 우리가 일상의 논리에 지배된다면, 시를 쓸 때 우리는 그러한 논리에서 해방된다. 일상의 공간이 아닌 하나의 공간에서 헤맨다. 그 공간은 창조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러시아 형식주의자 쉬클로프스키의 표현에 의하면 모든 예술은 일상세계의 자동성을 낯설게 하여 우리들의 지각을 갱신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리고 이렇게 일상세계가 낯선 세계로 변형된 것을 창조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시인들은 시라는 공간을 창조하기 위해 시를 쓴다. 예술적 창조가 말 그대로 무엇인가를 창조한다는 개념을 중심으로 살피기로 한다. 무엇인가를 창조한다는 말은 어떤 사물을 처음으로 만든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처음으로 만들어진 사물이라고 해서 모두 예술작품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이 세상에는 처음으로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사물들이 많지만, 그것들은 크게 두가지 유형으로 구별된다. 하나는 인공적 생산물이며 다른 하나는 예술적 창조물이다. 전자와 후자는 모두가 새로 만들어진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이를테면 한 켤레의 구두가 새로 만들어지는 것이나, 무용가에 의해 한 편의 무용이 만들어지는 것이나, 표면적으로는 별다른 차이가 없다. 그러나 랭거도 지적하고 있듯이 어째서 사람들은 구두는 생산된다고 말하고 무용은 창조된다고 말하는 것일까. 랭거의 견해에 따르면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를테면 구두의 경우, 재료는 가죽이며, 이 가죽의 일상적 가치는 구두나 가방 등을 만드는 데에 있다. 따라서 가죽이 생산과정에서 변형되거나 파괴되기는 해도, 생산이후 가죽은 가죽으로서의 가치를 그대로 유지한다. 그렇지만 창조물의 경우에는 사정이 다르다. 창조물의 경우에는 창조이전의 재료가 창조이후에는 그대로 존재하지 않고 전혀 다른 것으로 변형되거나 파괴된다. 질적인 변화를 일으킨다고 할 수 있다. 창조이전의 재료적 가치, 곧 재료로서의 일상적 가치나 효용성이 생산이후에는 변형된다. 이를테면 무용의 경우 재료는 인간의 육체, 특히 발이 중심이 된다. 창조이전의 세계, 곧 발의 재료적 가치는 걷는 데에 있다. 곧 보행을 위한 도구이다. 그러나 창조이후, 그러니까 무용의 경우 발은 걷는 기능을 발휘하지 않는다. 무용의 경우에는 발의 일상성, 곧 보법이 변형되거나 파괴되어 독특한 기능을 발휘한다.

결국 창조된 세계에서는 재료의 일상성, 혹은 일상적 기능이나 법칙이 변형되거나 파괴된다. 그렇다면 시의 경우는 어떠할까. 시의 재료는 언어이다. 이때의 언어는 일상적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그것은 일상적 어법에 따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시로 창조된 세계에서는 이러한 일상적 어법이 변형되거나 파괴된다. 일상적 어법에서는 언어가 대체로 객관적 사실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거나 듣는 사람의 행동을 유발하지만 시의 경우에는 언어가 다른 가치를 띤다. 시적 자아란 결국 언어의 일상상, 혹은 일상적 가치를 변형시키거나 파괴하여 새로운 언어질서를 빚는, 소위 창조적 자아를 뜻한다.

2. 동기와 주제

동기(motive)는 한 편의 시가 쓰여지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으로서, 어떤 경우에는 동기가 그대로 한 편의 주제가 되는 경우가 있다. 주제(theme 영⋅프)는 한 편의 시의 중심 사상이 되는 것이다.

18세기 낭만주의 시대까지는 동기와 주제가 거의 같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린다는 동기에 의해 씌어진 시는 예외 없이 사랑의 찬가를 주제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랑이라는 점에 있어서 이 두 가지는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20세기에 들어와서 동기와 주제가 차지하는 위치가 꼭 일치한 것만은 아니게 되었다. 문화 속에서의 시인의 자각이 높아지고 그 대상이 광범위해짐에 따라 시의 성립도 여러 가지 양상을 띠게 되었고, 하나의 동기에서 발상된 시가 중도에서 변질되는 경우도 생기게 된 것이다. 동기는 보다 큰 주제로 향하는 한 입구라 할 수 있다.

한 편의 시가 출발하는 것은 물론 어떤 동기에 의해서지만, 그 동기는 길에서 본 한 마리 비둘기라든가, 안개 속의 늑대라든가, 또는 어느 한 마디 말이라든가 하는 식으로 여러 가지 성질의 것이 있어도 무방하다. 그러나, 그 동기가 시인의 내부에 있는 아이디어와 주제에 결부되지 않는 한 그것이 한 편의 시로 되는 일은 없다. 때문에 하나의 동기는 시인의 내적 요청에 따라 나타나는 것으로서, 완전한 공백 상태 속에서 갑자기 출현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그와는 반대로 한 편의 시의 주제는 그 어떤 동기의 유발이 없이 주제로서 분명한 모습을 제시할 수 없다. 동기를 출구로 하여 그 주제는 시인의 내부로부터 외부로 개방되는 것이다. 동기와 주제는 항상 그러한 상관관계에 놓여 있는 것으로서, 어느 것이 먼저 시에 닿았는가 하는 것은 아무도 말할 수 없다.

C. D. 루이스는 시의 주제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시의 기본적인 주제는 아주 적다. 사랑, 죽음, 선악, 시간과 영원 등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이 30년 동안 변하지 않았다. 변한 것은 시의 언어이다.” 이 말의 마지막 부분을 다음과 같이 바꾸어도 좋을 것이다. “변한 것은 시의 동기이다.”

현대의 눈부신 현실의 변화에 따라 시의 대상과 제재는 더욱더 광범위해진다. 때문에 시의 동기도 보다 광범위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현실의 상(相)은 아무리 변화한다 하더라도 실재의 상은 변화하지 않는다. 단지 그 실재의 질서에 대응하는 ‘생’의 패턴이 여러 가지로 변해질 따름이다.

그리고 이런 생의 패턴이 변해 감에 따라서 우리는 우리와는 아무 관계가 없어 보이는 새로운 실재라는 것을 모두 다 ‘생’이라는 적극적인 의미 위에 통일할 수 있다.

모든 창조의 기본적인 동기는 일상세계의 부정적 측면을 비판하려는 데에 있다. 일상세계란 자동화된다는 특성을 지닌다. 자동화된다는 것은 우리들의 삶의 행위가 무의식적으로 영위됨을 뜻한다. 기계의 톱니바퀴가 돌아가듯이, 모든 삶의 행위가 행위에 대한 의식적 사고를 수반치 않고 영위된다. 따라서 자아는 현실에 대해서 기계처럼 반응한다. 현실을 지각함에 있어서도 신선한 감동을 상실한다. 현실에 대한 지각 자체도 자동화된다. 시의 동기는 이렇게 자동화된 지각을 갱신하려는 데에 있다. 그것은 현실이나 세계를 낯설게 인식하며, 따라서 탈 자동화한다. 러시아 형식주의 이론가 쉬클로프스키의 견해에 따르면 일상세계 단위(byt)와 예술의 양극적 대립은 아래 표처럼 제시된다.

일상세계 예술

자동화인과율재료이야기 낯설게 만들기목적론기법구성

위의 도표를 중심으로 시를 쓰는 동기를 다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우리가 시를 쓰는 것은 자동화된 일상세계를 낯설게 만들어, 일상적인 삶이 놓치고있는 싱싱한 지각을 회복하기 위해서이다. 낯설게 만들기의 개념은 쉬클로프스키가 1924년 「낱말의 회복」이라는 선언문에서 주장한 것으로 시나 예술은 새로운 형식을 창조함으로써 세계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환기하며, 사물에 대한 싱싱한 감각을 회복케 한다는 사실을 뜻한다.

둘째로, 우리가 시를 쓰는 것은, 좀더 부연하면, 일상세계를 지배하는 소위 인과율의 구속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이다. 인과율이란 인과성의 법칙, 곧 어떤 원인에는 어떤 결과가 반드시 따른다는 자연법칙을 뜻한다. 이러한 자연법칙에 따라 우리들의 일상생활은 영위된다. 그러나 이러한 법칙은 모든 삶의 국면에서 하나의 인습으로 받아드려진다. 인습적인 자연법칙에 따라 사물을 볼 때, 우리는 어떤 감동도 체험할 수 없다.

셋째로 우리가 시를 쓰는 것은 시적 형식을 창조하기 위해서이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시라는 독특한 공간을 창조하기 위하여 시를 쓴다. 위의 도표에서 일상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은 재료이며, 예술세계에서 그것들은 기법이 된다고 하는 말이 이러한 사정을 암시한다. 예술이란, 그리고 무엇보다 문학작품이란 그것에 사용된 모든 문체적 기법들의 총화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위의 도표에서 제시된 이야기 / 구성의 대립은 시가 아니라 소설의 이론에 해당된다.

3. 동기의 유형

우리가 시를 쓰게 되는 동기로는, 심리학적인 관점에서는,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드러난다. 하나는 의식적 동기요, 다른 하나는 무의식적 동기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인간의 행위는 언제나 하나 이상의 동기에 의해 수행된다. 시를 쓰는 행위 역시 그렇다. 물론 일상적으로 활동하거나 시를 쓸 때, 우리는 그 동기를 반드시 명료하게 자각하는 것은 아니다. 대체로 우리는 동기를 명료하게 자각하지 않으면서 많은 일상의 삶을 영위한다. 그러나 동기를 자각치 않는다고 해서 우리의 일상적 행위들이 어떤 동기도 머금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의식화되지 않고 있을 뿐이다.

의식화되지 않은 동기, 그것을 무의식적 동기 혹은 은폐된 동기라고 부를 수 있다. 시를 쓰는 행위에 있어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시를 쓰게 하는가, 왜 우리는 시를 쓰는가, 시를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은 모두가 시의 동기문제로 수렴된다. 그것은 시를 쓰기 전의 단계, 일종의 준비단계에 해당되지만, 좀처럼 객관적으로 논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의 동기에 대해서 살피는 것은 그 동기가 실현되는 과정을 우리는 시의 창조과정이라고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동기 motive에 대한 사전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가)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우리의 의지적 행위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본능이나 욕망으로, 그 어원은 라틴어 motus, 곧 move이다.

(나) 인간을 어떤 목적을 향하여 움직이게 하는 것으로, 내적 인자와 외적 인자의 분별이 없다. 굳이 분별한다면 본능은 내적 인자이며 자극은 외적 인자이다.

이미 이러한 정의에서 우리는 동기란 (1) 의식되거나 의식되지 않으며, (2) 목적을 지향하며, (3) 동기에는 내적 인자와 외적 인자가 분별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시의 동기 역시 마찬가지다. 시의 동기의 특성은 아래와 같이 나타난다.

(가) 의식되거나 의식되지 않는다.

(나) 하나의 목적을 지향한다.

(다) 내적 인자와 외적 인자가 있을 수 있다.

첫째로 의식되든 의식되지 않든지 모든 시의 동기는 하나의 목적을 지향한다고 할 때, 그 하나의 목적은 무엇일까. 흔히 실제적인 목적과 심미적인 목적으로 나누어 논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그것은 시의 세계라고 할 수밖에 없다. 모든 시의 동기가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그러한 동기의 실현, 곧 시의 형상화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나 혹은 그 이상의 동기가 어떤 행위를 실현할 때, 그 과정을 우리는 동기화작용 motivation이라고 부른다. 시의 경우 동기화작용은 언어적 양식에 의해 발전되며, 따라서 그것은 시를 쓰는 과정, 곧 시의 창조과정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모든 시의 동기는 시의 동기화과정, 곧 시의 창조과정과 밀접히 관련된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둘째로 시의 동기가 한결같이 하나의 목적, 곧 시적 공간의 형상화라는 목적을 지향한다고는 해도, 우리는 시의 동기를 의식할 때가 있으며 의식하지 못할 때가 있다는 사실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시의 동기를 의식하는 것과 의식하지 못하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먼저 동기가 의식되는 것을 의식적 동기, 의식되지 않는 것을 무의식적 동기라고 부르도록 하자. 그러면 의식적 동기는 의식의 논리를 따르며, 무의식적 동기는 무의식의 논리를 따르는 것으로 분별된다.

의식의 논리를 따르는 동기는 시인이 (1) 어떤 사물을 지각하고 그 사물에 대한 느낌을 시적으로 표현하고 싶다는 욕망을 명백히 체험하거나, (2) 어떤 관념을 정리하고 그 관념을 시적으로 표현하고 싶다는 욕망을 명백히 체험할 때 나타난다. (1)의 경우는 다시 세분될 수 있다. 사물이란 외적인 사물과 내적인 사물로 양분된다. 외적인 사물은 시인의 밖에 존재하며, 내적인 사물은 시인의 속에 존재한다. 좀더 분명하게 말하면 전자는 감각적 지각의 대상들이며, 후자는 그러한 대상들에 대한 기억들이다.

동기를 의식하지 못한다는 것은 시의 동기가 (1) 자연발생적인 양상을 띠게 되는 경우와, (2) 무의식적 양상을 띠게 되는 경우로 나뉘어 고찰된다. 시의 동기가 자연발생적이라는 것은 즉흥적으로 시를 쓰는 경우 나타나며, 시의 동기가 무의식적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무의식적 실체 혹은 에너지의 영향을 받는 경우 나타난다. (1)과 (2)는 모두 근대시론에서는 영감 inspiration의 논리로 해명되었지만, (1)이 소박한 시작행위에서 발견된다면, (2)는 한결 의식적인 시작행위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1)에서는 시의 동기가 무의식적이지만 그것이 무의식적인 세계임을 자각하지 못한다면, (2) 에서는 그것을 어느 정도 자각한다고 할 수 있다. (1)이 근대적인 낭만주의적 이념을 토대로 한다면, (2)는 한결 현대적인 이념을 토대로 한다고 할 수 있다.

무의식적 동기에 의해서 시를 쓸 때 그것은 심층심리학 혹은 정신 분석학적 개념을 수반한다. 프로이드의 원망충족의 이론이나 융의 집단무의식의 이론을 상정할 때 무의식적 동기의 개념은 한결 명료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정신적 행위의 본질이 의식성에 있다는 것을 최초로 분명히 한 사람은 데카르트이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정신은 의식 혹은 자각으로 정의된다.

그러나 프로이드는 최초로 우리의 정신적 행위가 의식과는 관계없이 수행됨에 유의하고 그것을 자연과학적 체계 속에서 해명한다. 무의식에 대한 프로이드의 태도는 한마디로 생물학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에 의하면 모든 정신과정은 자연법칙, 궁극적으로는 화학적 물리학적 현상의 영향을 받는다. 자연법칙의 영향을 받는 이러한 정신과정은 조화와 균형을 지향하는 심리적 에너지와 결합된다. 이러한 심리적 에너지 가운데 가장 강력한 에너지가 본능적 에너지, 소위 성충동 libido이며 그것은 때때로 우리의 무의식적 원망을 표현하며, 쾌락원리에 지배된다.

우리의 문명생활은 성적 활동을 억압함으로써 가능하며 이 억압된 본능적 에너지가 무의식을 구성하며, 이러한 무의식은 우리의 의식적 이성에 작용하여 무의식적 억압을 형성한다. 문명 생활을 하는 많은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이러한 무의식적 억압의 결과로 일종의 신경증, 정신질환에 시달린다. 꿈과 자유연상은 이러한 신경증을 해석하고 치료할 수 있는 영역이다. 꿈은 우리의 무의식적 원망이 충족되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꿈은 개인적인 것이며 신화는 집단적인 것이다.

시의 무의식적 동기라는 문제에 국한할 때 우리는 그 동기가 (1) 억압된 무의식의 폭로, (2) 유아시의 성적 경험, (3) 공격적 본능, 곧 죽음을 지향하는 본능적 에너지, (4) 자기방어의 메카니즘, (4) 본능적 에너지의 간접화, 곧 승화라는 의미를 내포한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아들러, 융, 랭크는 프로이드의 동료였지만 프로이드와는 다른 관점에서 정신이나 무의식이 나타내는 잠재적 통합 및 자기조직능력을 강조한다. 말하자면 프로이드가 본능적 에너지, 특히 성적 에너지를 강조함에 반하여 이들은 무의식에서 통합성이나 조직성을 읽는다. 아들러는 인간을 하나의 통일성의 세계로 취급한다. 따라서 그는 의식 ― 무의식의 2원론을 기본적인 것으로 간주하지 않고, 우리가 지각할 수 없는 무의식이라고 하더라도 거기에는 억압되지 않는 요소들이 내포된다고 본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소박하게 이해할 수 없을 뿐이다.

무의식에서 잠재적 통일성을 읽으려는 이러한 노력은 융에 의하여 심화된다. 융은 집단무의식이라는 개념을 고안하며, 그것은 집단적 정신 (group mind)이 아니라, 개인적 정신의 심층을 의미하며, 모든 인간들이 공유하는 사고방식의 토대를 구성한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들은 발생학적으로 그 구성성분이 매우 유사하며, 가족과 사회적 경험들은 보편적인 양상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사회에 있어서 이러한 집단무의식은 그 사회의 특수한 전통적 상징 혹은 원형을 함유하며, 이 전통적 상징이나 원형이 우리의 사고와 행위를 조직하는 무의식에 대한 융의 견해가 노리는 것은 진리의 발견이 아니라, 오늘날의 역사적 상황 속에 심층심리학이 해야 할 정신력의 강화에 있다. 곧 융은 인간의 강력한 정신력이 약화되는 과학시대에 그 정신력의 근원을 소생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랭크는 무의식의 형성에 있어서 우리의 종교적 미적 전통이 떠맡는 몫을 강조한다. 그는 생명의 지속에서 통합을 가능케 하는 하나의 인자를 읽는다. 말하자면 그의 경우 무의식은 생명의지와 결합되며, 동시에 그 의지는 분리가 아니라 통합을 추구하는 본능의 세계가 된다.

시의 무의식적 동기는 이러한 후기 프로이드주의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1) 잠재적 통일성 지향, (2) 집단무의식의 기능, (3) 차별적 통일성 지향, (4) 정신력의 강화, (5) 생명의 통합적 의지로 해석된다. 시의 무의식적 동기에 대한 이러한 성찰은 물론 시인들에 대한 정신분석을 전제로 할 때 실증성을 띠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제까지의 논의는 하나의 가설적 성격을 띤다. 그러나 시의 무의식적 동기를 프로이드 적 개념과 후기 프로이드 적 개념으로 고찰함으로써 우리는 소위 무의식적 동기라는 말의 참된 의미를 한결 생생하게 읽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시의 동기를 논하는 셋째의 관점은 시의 동기에는 내적 인자와 외적 인자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인자란 동기의 조건, 동기유발의 조건, 한마디로 발생자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대체로 우리는 (1) 하나의 사물을 지각할 때, (2) 흘러간 시절을 회상할 때, (3) 삶에 대해서 명상할 때, (4) 미묘한 심리적 분위기 mood에 빠질 때 시를 쓰고 싶은 욕망을 체험한다. 다시 말하면 (1) 사물의 지각, (2) 과거의 기억, (3) 관념의 명상, (4) 심리의 동요 속에서 시의 동기가 포착된다. 인자라는 것은 이때 (1) 지각의 대상인 사물, (2) 기억의 대상인 과거, (3) 명상의 대상인 관념, (4) 심리의 동요 자체가 되며, 좀더 부연하면 그것은 한 그루의 나무, 어린 시절, 삶의 의미를 환기하는 심리적 분위기가 된다.

그러나 이상의 (1) (2) (3) (4)는 동기유발의 인자라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다시 (1)(2)는 외적 인자, (3)(4)는 내적 인자에 해당된다. 외적 인자와 내적 인자란 결국 시의 동기를 유발하는 두 가지 범주에 지나지 않는다.

외적 현실이 시의 동기를 유발하든 내적 현실이 유발하든 중요한 것은 그들이 동기가 되어 어떻게 시의 세계로 형상화되는가 하는 소위 동기화작용이다. 그러니까 인자 → 동기 → 동기화작용은 매우 유기적인 상관성을 띠게 된다.

외적 현실이 동기가 될 때 우리는 흔히 모방의 이론을 떠 올리며,내적 현실이 동기가 될 때는 표현의 이론을 떠올린다. 모방의 이론에 입각하면 시는 현실의 모방이며, 표현의 이론에 입각하면 시는 현실의 모방이 아니라 시인의 내면세계가 밖으로 드러난 것이 된다. 물론 모방이란 용어는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지만 여기서는 옮겨 적다. 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그것은 복사의 개념이다. 따라서 시는 외적 현실이 동기가 될 때는 일단 외적 현실의 복사가 된다.

언어를 매재로 하는 시의 경우는 외적 현실을 동기로 한다는 것은 그 현실을 그대로 작품에 옮긴다는 것보다는 일단 시작과정에서 재조정된다는 사실, 곧 변형된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으면 안된다. 그때 시는 외적 현실의 변형이 된다. 이 변형의 문제는 벌써 동기의 문제를 벗어난다.

다음 내적 현실을 동기로 한다고 할 때는 어떻까. 내적 현실을 동기로 한다는 것은 시인의 내면세계, 이를테면 기억이나 무의식적 욕망이 동기를 유발하는 경우를 뜻한다. 따라서 시로 옮겨 적거나 복사한다는 말은 기억의 경우에는 어느 정도 해당되지만, 무의식적 욕망의 경우에는 거의 불가능하다. 무의식적 욕망이란 의식되지 않는 삶의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이때 그것은 복사가 아니라 밖으로 투사된다고 할 수 있다. 밖으로 투사된다는 것, 그것이 표현 expression이란 말의 뜻이다. 내면적 덩어리가 시의 동기를 유발하고 어느 순간에 그 덩어리가 밖으로 투사된다. 그러나 이때 그 투사는 언어에 의한 투사이며, 언어가 개입된다는 것은 이미 일종의 추상행위가 수행됨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때 역시 있는 그대로의 투사는 불가능하다. 언어에 의한 투사의 문제는 벌써 동기의 문제를 벗어난다.

결국 외적 현실이 동기를 유발하든 내적 현실이 동기를 유발하든 중요한 것은 동기의 인자로서의 그러한 현실이 아니라는 점, 그러나 시에 있어서 동기는 중요하다는 점이다. 이것은 역설인 것 같다. 동기란 시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또한 모든 훌륭한 시를 태어나게 한 것은 어떤 지배적 동기를 힘입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그것은 시의 비밀이기도 하다. 이제까지 우리가 더듬어 본 시의 동기문제는 결국

(가) 동기는 하나의 목적을 지향한다. 그것은 시라는 목적이다.

(나) 동기는 의식되거나 의식되지 않는다. 그것은 의식될 때는 의식적 동기, 의식되지 않을 때는 무의식적 동기라 할 수 있다. 무의식적 동기는 심층심리학적 개념에 의하여 해명된다.

(다) 외적 현실로 나타나는 동기의 인자는 모방의 한계, 내적 현실로 나타나는 동기의 인자는 표현의 한계와 만난다. 전자에선 변형의 논리, 후자에선 언어의 논리가 나타난다. 그러나 변형과 언어의 논리는 실제 시작과정에서 다루어 질 문제이다.

동기란 윤리적 측면과 심리적 측면을 동시에 거느리는 개념이지만 동기에 대한 설명은 원망의 문제로 귀착되기 때문이다. 동기가 목적을 지향하는 것, 그 목적을 향하여 움직이게 하는 것이라고 할 때, 그것은 행위자의 원망의 매카니즘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시의 경우, 동기는 시를 쓰고 싶다는 원망 및 그 원망의 메카니즘에 지나지 않으며 이러한 메카니즘의 구체적 양상들이 소위 사회적⋅정치적⋅경제적⋅종교적⋅미학적 목적들이다. 그러므로 시를 쓰는 행위, 곧 동기화작용으로서의 시작과정은 이러한 동기에 대한 설명이 제시하는 가장 현저한 양상들을 환기하고 특수화하는 일이 된다.

[문학뉴스= 홍윤기 기자] raputa@munhak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