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소설

[스크랩] -단편- 아름다운 마무리

운산 최의상 2012. 11. 10. 19:00

                                         아름다운 마무리

                                                                  (K선생의 일생)

                                                                                                                                     淸嵐       黃 晋 燮

2.000년 초겨울, 11월도 며칠 남기지 않은 그날은 겨울답지 않게 따뜻했다.

회화동 S병원에 입원 중인 K선생의 간병인 아주머니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K선생은 간암으로 이미 두 번 수술을 받았으며 이번에는 세 번째로, 전이된 다른 기관을 수술 받고는 항암치료를 하면서 3개월 째 입원 중이다. 의사는 거의 말기라는 사실을 지인들에게 암시 하였다.

여간 바쁜 일이 아니면 전화도 잘 쓰지 않는 K선생이 간병인을 시켜 그날 오후에 꼭 병원에 들려달라는 전갈을 해 온 것이다.

 

좋지 않은 예감으로 6인용인 병실에 들어서니 가까운 몇 사람이 먼저 와 있었다. 승가대학 시간강사 Y씨, K선생의 동향이고 국회의원을 지낸 B씨, 고향친구 B씨들이었다. 눈인사를 나눌 뿐 모두들 숙연하다.

K선생의 의식은 맑았고 얼굴 표정도 별로 구겨지지 않았다. 병상 가까이 가니 잘 잡히지도 않는 연약한 악력(握力)으로 내 손을 잡아 가까이 끌어 댕긴다.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그는 말한다.

“오래 못갈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보고 싶어 불렀어요. 내가 말한 몇 가지가 꼭 지켜지도록 공론해 줘요. 황공(黃公/그는 나를 그렇게 호칭했다)하고는 잊혀 지지 않는 것이 참 많은데....” 오늘을 넘길 수 있을까 하는 예감이 든다.

 

네 사람은 병실에서 서성거리다가 같이 나왔다. 찻집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오늘 밤을 넘기기 어렵겠다는 예상에 일치하였고 장례에 대한 걱정을 하다가 헤어졌다.

이튿날 이른 아침, 간병인 아주머니가 또 전화를 걸어왔다. 그 새벽에 K선생이 작고하였다는 비보다. 2000년 11월 27일이었다.

그는 평소의 생활에서처럼 그렇게 정확하게, 스스로의 죽음을 예측하고 친지들을 불러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는 불귀(不歸)의 길을 가버린 것이다. 그 정확성에 다시 한번 놀랐다.

결혼도 하지 않은 70대의 독신자는 고독했던 생애를 그렇게 매듭 지웠다. 눈물이 왈칵 쏟아지고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뜨겁지는 않았지만 은근히 깊게 맺어진 정분, 티 없이 정직하고 정갈했던 그의 생각과 삶, 그 고뇌와 외로움에 대한 한 인간으로서의 연민, 그런 것들이 뒤엉켜 격하게 치솟아 올랐다.

 

K선생의 고향은 경북 서북부 지역인 Y군 Y면 금당실이라는 동리다.

그는 운명적으로 가난을 타고 났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어렸을 때 작고 하셨고, 상당히 똑똑하여 마을 사람들의 기대를 모으고 있었던 그의 형님은 6.25사변 때 납북인지 월북인지 북쪽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K 선생의 어머니가 남은 3남매를 키워야 했다. K선생은 초등학교 4학년까지 다니고는 더 이상 학교에 다닐 수가 없었다. 그는 암담한 장래를 생각하다가 드디어 몰래 집을 나와 5-60리 떨어진 곳 어느 부잣집에서 머슴살이를 하게 되었다.

몇 해가 지나 스무 살을 훌쩍 넘기고는, 얼마간의 여비를 손에 쥐고 서울로 올라왔다.

이윽고 그는 용산구에 있는 어느 동사무소에 급사로 취직을 하게 되었다. 숙직실에서 숙식을 해결하였고 청소와 심부름, 그리고 막일도 하면서 나이가 들어갔다.

밤이면 통신강의록으로 중학과정을 독학했다고 한다. 20대 중반기가 되어서야 그는 왕십리에 있던 H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 때는 뒷문으로 들어가 앞문으로 나오는 사례도 없지 않은 것이 공공연한 비밀이었던 시절이다. 서른 살이 가까운 나이에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다음에는 안암동에 있는 K대학교 문리대 정치학과에 입학하고 졸업하였다. 이어서 대학원까지 수료하게 되었다.

고학을 통해서 석사가 된 것이다. 5.16군사정변이 일어났던 무렵이었고, 그의 나이는 30대 중반기를 넘어서고 있었다. 짧은 기간 모교에서 시간강사로 강의도 했다고 한다.

어떤 인연인지는 모르지만 군사정부의 어느 부처 공보관실에 근무하게 되었다. 불과 2,3년 만에 그는 직을 버리고 나와, 낭인생활에 접어들었다. 경직화된 조직의 규범에 억매이기에는 맞지 않을 그의 생래적(生來的)인 성격으로 보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무렵 그는 남가좌동 산 중턱에 있는 10평 정도의 방 2칸짜리 판잣집에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 자본도 기술도 없는 그의 낭인 생활은 극도의 가난 바로 그것이었다.

시집간 여동생이 조금씩 보태주는 것으로 겨우 끼니를 끓일 뿐이었다. K선생은 아무리 어려워도 남에게 손을 벌리는 것을 나는 한 번도 본 일이 없다. 버스비가 없으면 걸어서 간다. 하는 일이 없으니 시간 제약이 있을 리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가장 싫어하였고, 생활신조는 절대 정직이었다.

 

그는 거의 매일 무교동 기원에 나가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는 세월을 낚고 있었다. 점심을 거르는 일이 다반사였고 바둑을 두다가 밤늦게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는 일이 많았다. 무교동→광화문→서대문→신촌→연세대 앞→남가좌동. 만만찮은 거리를 걷는 것이다.

그렇게 유유자적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어느 주말 밤, 나와 둘이서 그 길을 걸어 그의 집으로 가 밤을 새워 바둑을 둔 일이 있었다. 그 날은 버스비가 없어서 걸은 것이 아니고 가을 밤, 기우는 달이 하도 좋아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더욱 외로운 생활이 시작 되었다.

고향 후배인 P군 남매가 외로운 선배를 모시겠다는 생각으로 어머니가 쓰던 빈 방에 들었다. P군은 D대학 경찰행정학과에 재학 중이었고 그 동생은 여고생이었다. 셋은 한 가족이 되어 숙식을 같이 하면서 살아갔다. P군은 그 방에서 학교를 다니고 공부하는 동안 K선생의 생각과 생활에서 많은 감화를 받아가며 열심히 공부하였다. 졸업 후에는 경찰에 투신하였는데 K선생이 작고할 무렵에는 유능하고 성실한 경찰 중견간부가 되어 있었다.

 

K선생은 늘 어려운 친지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펴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승가대학 Y강사가 처자식들을 데리고 거리로 내 쫓길 처지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선뜻 그의 집으로 불러들여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기도 하였다. 물론 집세 같은 것은 일체 없었다. 그 초라하고 작은 판잣집이 사람이 크는 요람이 되기도 하고, 추운 겨울, 집 없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아랫목이 되어주는 것을 보고 신통하게 생각하였다.

 

그의 젊은 날에도 사랑의 사연이 있었다. 부산 출신 아가시와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고 결혼을 논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결혼이라는 게 사랑만 가지고 되는 일이던가. 막상 그런 가난한 실업자의 아내가 되어 줄 용기 있는 여인은 아니었다. 그 연인과의 결별이 그로 하여금 평생 독신주의를 지키게 한 동기가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K선생의 나이가 40대 중반이었을 때 나는 아내와 상의하여 중매를 들겠다고 제의 하였더니, “남의 집 귀한 딸을 데려다가 고생시키지 않으려고 결혼을 안 한다”고 단호하게 거부하였다. K선생은 그런 기인이었다.

그는 한때, 정치에도 관심을 보였으나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하였다.

민주사회주의 노선인 듯하였다. 말하자면 혁신정당이었다. 우연히 그가 영어학원에 열심히 다니는 것을 알고, 가로 늦게 어학을 공부하느냐고 물었더니 머지않아 국제회의에 나가서 연설을 한다는 것이다. 그 정당의 당수 겸 대통령 후보였던 분과 같이 싱가포르에서 개최되는 국제민주사회주의 정당끼리의 회의에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다. 출국할 때 나의 시계와 함께 약간의 용채를 보태드렸다. 그가 돌아온 지 약 3주 후, 저녁식사를 하면서 여행담을 들었다. 회의가 끝나고 마지막 날 관광 일정이 잡혀 있었는데 피곤해 쉬겠다고 하면서 빠졌다는 것이다. K선생은 전화번호부에서 찾아 북한 대사관에 전화를 걸었었다. 대사를 만나고 싶다고 했더니, 좋다고 하여 택시를 타고 갔었다고 한다. 출입문까지 영접 나온 직원의 정중한 안내를 받아 대사 집무실에 들어가 대사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일행이 회의 차 싱가포르에 와 있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고 했다. 수인사가 끝난 다음 K선생은 표정을 가다듬어 다음과 같은 요지의 이야기를 하였다는 것이다.

첫째, 남쪽 국민은 6.25전쟁을 일으킨 북에 대하여 불신과 거부의 심경이 깊다는 것.

둘째, 1.21사태(김신조 일당 청와대 습격기도 사건), 삼척 강릉 무장공비 남파와 같은 반 평화적인 도발은 중단하기를 바란다는 것.

셋째, 남북이 대화를 통해 평화적으로 통일을 이루는 문제와 민족의 장래문제에 관하여 진지하게 논의하기를 바란다는 것.

그랬더니 북한 대사는, 6.25는 북침이었고, 무장공비는 남쪽 자작극이며, 민족문제에 관한 논의는 좋은 이야기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약 1시간 가까이 야기를 나누는 동안에 커피를 2잔이나 마셨다고 했다. 무섭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민족문제를 당당하게 논의하는데 두려울 것이 무엇이냐고 했다.

귀로에 일본 하네다 공항에서 당수가 東京에 들어가 한 이틀 쉬다가 가자는 제의를 하였는데, 일본에서 써줄 달러가 어디 있느냐고 하면서 혼자 들어왔다는 것이다.

귀국한지 1주일 후, 중앙정보부 요원이 찾아와 남산으로 연행 되었다고 했다. 싱가포르에서 북한 대사를 만났던 것을 알고, 그 경위를 신문하더라는 것이다. 3일 동안 지하에 갇혔는데 배터(Batter)도 몇 대 맞았다는 것. 마지막 날 높은 사람인 듯한 사람이 나오더니, 미안하다고 하면서 목욕이나 하라고 봉투를 하나 주는데 목욕 값 치고는 꽤 많이 들었더라고 하면서 한국의 정보부도 참 정확하고 빠르더라고 했다.

저녁 식사 후 헤어지기 직전, K선생은 나에게 봉투 한 장을 내밀었다. 돈을 쓰다가 남았다면서 출국 시 내가 들였던 금액의 약 1/3을 되돌려 주는 것이다.

그 얼마 후, 그 당수와 뜻이 맞지 않아 책상을 둘러엎고 결별했다는 이야기를 직접 나에게 했다.

 

K선생은 주말마다 산에 가는데 전국의 알만한 산은 가보지 않은 곳이 거의 없었다.

어느 해 초겨울 같이 무주구천동의 덕유산을 오르는데 여러 해 후배인 나보다 훨씬 빨리, 그리고 지치지도 않고 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만큼 산에 오르는 훈련과 경험이 쌓여 있었다. 그때 같이 1박하면서 알게 된 일이지만 그는 세수를 하고 로션 같은 화장품을 일체 바르지 않는다. 그래도 언제나 얼굴색이 맑고 동안(童顔)이다. 모발도 쉬지 않았다.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는 늘 웃는 상이었고 말소리는 조용하였다.

 

K선생은 어느 한때 무교동 뒷골목에 한 평 반쯤 되는 아주 작은 맥주 집을 내 놓고 종업원도 없이 직접 생맥주를 서빙 하기도 하면서 소일하고 있었다. 그 옥호가 ⌜冬扇의 房⌟이었다. 가히 속을 알만하다. 얼마나 답답했으면 겨울 부채질을 하였을까?

70년대 말경, 서울시청 건너편 영국대사관 입구에 제법 규모를 갖춘 C레스토랑이 생겼다.

K대학 동문 다섯 사람이 출자하여 이루어진 업체였다. 선량한 관리책임자를 물색하다 보니, 정직하고 정확할 뿐 아니라 그 성실성에서 더할 나위 없는 K선생이 가장 믿을 수 있는 적격자라는 결론이었다.

 

그리하여 K선생은 C레스토랑의 관리자가 되었다. 말하자면 지배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근 20년, 성실하게 레스토랑을 운영하였고 경영실적도 좋았다.

그 안에서 숙식하면서 24시간 거기에만 종사하는 것이었다. 이른 새벽이면 수레를 끌고 남대문 시장에 나가 장보기를 해 온다. 직접 커피를 끓이면서 종업원들과 고락을 같이 했다. 종업원들은 그를 어버이처럼 존경하고 따랐다. 당연히 출자자들의 신임이 두터워졌고 응분의 월급을 받았을 것이다.

K선생은 여기에서 난생 처음으로 재산형성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술 담배도 하지 않고 불필요한 외출을 하지 않으니 일체 돈 쓸 일이 없는 것이다. 목동에 있는 32평짜리 임대 아파트에 들었다가 그걸 분양 받게 되었다. 그 다음에는 여유 돈으로 주식에 투자하였고 운 좋게도 상당한 증식이 이루어져 나갔다고 하였다. 그리고 적지 않은 현금이 통장에 들어 있었다.

 

K선생의 형제들은 어려움 속에서 자라나고 각자 자기 나름대로 숨 가쁜 삶을 살아왔다.

남동생은 소장수들의 소몰이를 하면서 살아왔고 경기도 어느 군(郡)에 거주한다고 했다.

형제간에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형이 살만하게 되었는데 남들은 잘 도우면서 동생은 도와주지 않는다고 불평이 대단했다는 것이다.

K선생이 어려웠을 때 끼니를 잇게 해 주었던 여동생은 이미 할머니가 되어 있었다.

끔찍이 사랑한 4촌 동생이 있었는데 경남 창원에 있는 어느 대학교 교수였다.

그리고 고향에 먼 족하 뻘 되는 종손이 개인택시를 하면서 집안 제사를 맡고 있었다.

 

K선생은 세 번째 수술을 받기 전, 동생들과 종손, 그리고 고향 동리 이장(里長)을 불러 놓고 유언을 하였으며, 나를 포함한 몇몇 친지들에게 그 유언이 지켜지도록 조언해 달라는 부탁을 자주하였다. 유언의 내용은,

 

첫째, 장례는 고향 선산(先山) 양지 바른 언덕에 자리를 잡아 깊이 파서 묻고, 봉분 없이 향나무 한 그루를 심어 줄 것.

 

둘째, 재산 처리에 관하여는

⑴장래가 촉망되는 학자인 4촌 동생, K교수에게 학문 연구비로 3.000만원 지원,

⑵나 때문에 공부도 제대로 못하고 고생한 여동생에게 3.000만원,

⑶고향의 종손에게 계속 조상 제사를 잘 모시도록 3.000만원과 과천에 있는 상가 20평 상 속

⑷고향 마을인 금당실 동리 발전 기금으로 3.000만원 성금

⑸간병인에게 300만원 수고비(정해진 간병 비 이외) 지급

⑹남가좌동 판자 집은 미혼인 질녀(동생의 딸)에게 주고, 곧 재개발하게 되면 아파트 분양 권을 얻게 할 것.

⑺목동 아파트는 동생에게 상속

⑻얼마간의 남은 현금은 병원비를 정산하고 장례비로 쓸 것 등이다

 

그날 오후, 고인의 형제들, 재산분배의 수혜자들, 그리고 나와 P 경정을 포함한 몇 사람의 친지들이 빈소에 자리를 함께하고 장례절차와 유언실행에 관하여 의견을 나누었다.

재산 처리는 이미 공증을 해 두었으므로 친지들이 조언할 필요도 없이, 지켜질 수밖에 없도록 못을 박아 놓은 상태다.

나와 P경정은 고인의 희망에 따라 고향 선산에 봉분 없는 평장(平葬)을 하도록 권고하였다.

이 자리에서 소몰이 동생은 술이 그나하게 취해 있었고, 격한 어조로 고인에 대한 불만, 특히 재산 분산에 대해 강한 원망을 공개적으로 털어 놓았다. 그의 몫이 가장 컸는데도.....

장례에 있어서도 유언이나 다른 사람들의 의견은 거의 무시되었다.

 

이튿날 새벽 장례는 벽제에서 단출하게 화장으로 치루어 졌다. 영안실에서 같이 밤을 새우고 벽제까지 갔던 사람은 고인의 형제와 친척 대여섯 사람, 그리고 타성은 P경정과 나뿐이었다. 한줌 재로 변한 유해는 납골당에 봉안되고 모든 것이 끝났다.

1년이 흘러갔다. 2001년 11월 27일, K선생의 1주기가 되던 날, 나는 평소 K선생과 가깝게 지내던 몇몇 사람과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를 마련 하였었다. 임종 전날 병실에서 만났던, Y강사, B씨, 그리고 P경감과 창원의 K교수도 왔다. 깨끗하고 단정하게 살다가 간 고인을 기리기 위한 모임을 주선한 것이다. 그 자리에서 K교수에게 납골당에 모셔둔 유해를 고인의 유언대로 고향의 선산에 봉분 없이 묻어 주도록 당부하였다. K교수도 적극 노력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후일, 들려오는 바로는 고인의 동생이 앞장서 유해를 산골(散骨) 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철들고는 마치 이방인처럼 객지로 떠돌다가 죽어 양지바른 선산에 묻히고 싶었던 고인의 소박한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재산분배는 공증을 해둔대로 나누어졌다고 들렸다.

 

그는 인내자(忍耐者)였다. 가난과 고독을 온 몸으로 인내하고 극복하는 생애를 살았다.

그는 초월자(超越者)였다. 손에 잡으면 놓지 않으려는 이기심과 자질구레한 욕심에 억매이지 않고 초월했다.

그는 보시자(布施者)였다. 사람들에게 마음과 물질을 고루 나누고 베풀었다.

K선생의 일생은 그만하면 의연한 생애, 아름다운 마무리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사흘이 지나면 K선생의 10주기를 맞이한다. 언젠가는 그에 대한 자그마한 기록이라도 남기는 것이 나의 도리(道理)라고 생각해 왔는데, 이 글은 그 도리를 지키는 글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도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하여 아름답게 살아야 되겠다는 마음으로 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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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문예계간지 <시와 수상문학>
글쓴이 : 淸嵐 黃晋燮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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