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소설

[스크랩] 아름다운 미수연 / 박완서

운산 최의상 2012. 6. 7.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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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미수연 ♧
-박완서-
    근래에 있었던 일 중에 가장 즐거웠던 일은 피천득 선생님의 미수연(米壽宴)이였다. 때늦게 얻어걸린 감기가 나가지 않아 짜증스러웠었는데 그 잔치에 참석하고 있는 동안 한번도 그 놈의 고 약한 감기를 의식하지 못했다. 신기한 일이었다. 아마 그 안의 맑은 기운 때문이었을 것이다. 선생님이 미수니까 거기 참석한 후학들도 젊다 고는 할 수 없는 연세들이였다. 이미 정년을 넘긴 제자분들도 적지않았다. 요샌 손자들도 기를 빼앗 길까봐 같이 자기도 거린다는 늙은이들한테서 웬 맑은 기운? 하고 비웃을지도 모르나 확실히 그쪽 분위기는 숨통을 억누르는 이 세상의 혼탁한 잡스러움과는 판이한 단순하고도 초연한 무엇인가가 있었다. 선생님은 의자 속으로 가라앉을 듯 조용히 앉아 계셔서 거의 소년처럼 조그맣게 보였는데 그분한테 배운 제자들은 서로 그분의 열정적인 명강의를 기려 마지않았다. 나는 그분한테 직접배운 바가 없는 게 서운했지만 사람이 저렇게도 늙을 수 있구나 하고 그분의 늙음을 기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웠다. 나이들수록 자신의 말년에 대한 근심은 더해만 간다. 마땅한본을 보여주는 늙음의 선배가 귀하기 때 문일 것이다. 누구는 치매에 걸렸다느니 누구는 노망 이 들었다느니 하는 정도가 연로한 친척이나 사회적 인 공인들에 관해 들을 수 있는 근황인 것도 서글픈 일이지만 다 참을 수 없는 것은 정정한 노인들의 노 추이다. 연세가 들수록 확실해지는 아집, 독선, 물질 과 허명과 정력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집착 등은 차라리 치매가 나을것 같다는 생각이들 정도로 늙음 을 추잡하게 만든다. 그런 것들로부터 훌쩍 벗어난 그분은 연세와 상관 없이 소년처럼 무구하고 신선처럼 가벼워 보였다. 그 러나 그런 것들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이 어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인가? 그런 비결은 전수받을 수 있는 게 아니라 한가닥의 청풍처럼 잠시 쐴수 있을 뿐인 것을. 그분은 말씀도 잘 하셨는데 특히 가난하게 살던 얘기는 장내에 폭죽 같은 웃음을 자아냈다 자녀들을 가난하게 키운 얘기가 그렇게 재미있었던 것은 지난 날을 미화시키고 싶은 늙은이들 마음에서만은 아니 였을 것이다.가난 속에서 키운 자녀들중 하나라도 못됐거나 비뚤어지지 않고 다들 번듯하고 건강하고 번성하기 때문에 왕년의 가난을 그렇게 마음놓고 재 미나 할수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개인이나 한 나라이거나 부패로 멸망하면 했지, 가난으로 멸망하지는 않는다. 굶어죽을 정도의 가난 만 아니라면 말이다.그 재미난 잔치로부터 돌아온 밤 문득 그분의 글을 읽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아무 글 이나읽고 싶은 게 아니라, 시였었는지 산문이였는지 도 생각나지 않는 회갑을 넘긴 제자들의 방문을 받고 즐거워하시는 글이었다.아마 유난히 연세들은 제자 들이 많이 참석한 잔치의 여운 대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늘가지런하지 못한 내 서재에서 원하는 책은 쉽게 찾아지지 않았다. 원하는 책이 찾아지지 않을 정도로 책이 많다는 것이 갑자기 혐오스러워졌다. 많음이 지겨워지면서 곧 기분 나쁜 감기 기운이 도져서 책 찾기를 포기했다. 작은 서재지만 내가 관리할 수 있는 능력 밖의 책들 이라면 너무 많은 것이다 좋아하고 때때로 즐기는 책 만 간직하고 계신 그분의 절도가 부러웠다. 그분이 천 진하다고는 하나 소년의 그것과는 달리 의연하고 당당 한 것은 당신주변에 허욕을 조금도 용납하지 않는 명 징한 지혜로움 때문일 것이다. 늙음조차도 어떻게 늙 느냐에 따라 뒤에 오는 사람에게 그렇게되고 싶다는 꿈과 희망을 준다. 어느 바닥에나 귀감이 있다는 건 축복이다. 우리나라 정치판 특히 대통령 자리는 결코 밟으면 안될 전철만 있지 귀감은 없는 자리건만 때만 되면 하 고 싶어하는 사람이 그렇게도 많이 줄을 서는 현상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미 자신의 분야에 서 귀감이 돼온 분도 그 바닥에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헤어나지 못하는 걸 볼 때마다 그분들에 의해 혹시 달 라질 수 있을까 하는 기대보다는 곰삭은 부패의 함정 의 엄청난 흡인력을 보는 것 같아 안됐단 생각부터 든다.아무도 정치에 대한 국민의 이런 싸늘한 냉소를 바로 보지 못하고는 감히 부패의 함정을 뛰어넘을 수 없으리라. -박완서 에세이 에서-

-又 山-
출처 : 우대받는 세대
글쓴이 : 又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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