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좋은 시(詩)

[스크랩] 고독 시 모음

운산 최의상 2012. 8. 18. 20:24
          <고독 시 모음> 이생진의 '고독' 외

          + 고독

          고독은 성장한다
          슬픔을 이겨낸 것도
          섬벽에 둘러싸여 외로움을 지킨 것도
          나를 165㎝까지 키워낸 것도
          고독이다
          그러나 고독은 차돌처럼 희다
          (이생진·시인, 1929-)


          + 바다의 고독

          산이 없어지고
          도시인들이 해체되고
          동식물이 사라지고
          교회에서 신들이 철수하고
          텅 빈 지구가 태양 돌기를 그만두고 있을 때
          바다 저 혼자만 출렁인다면
          그 고독은 정말 참기 어렵겠다
          (이생진·시인, 1929-)


          + 고독과 공기

          결국 나를 견뎌 내는 사람은 없구나.
          하고 내가 긴 한숨을 쉬자
          공기가 하는 말이, 제가 있잖아요,
          언제 어디서나 저는 당신과 한 몸인 걸요.
          (박희진·시인, 1931-)


          + 고독

          넓은
          세상에
          갇혀 있는 마음

          사람들 속에
          외톨이로
          남은 모습

          스스로 만든 감옥
          (용혜원·목사 시인, 1952-)


          + 고독

          스멀스멀
          내 안으로 들어와
          나를 도적질한다

          부를 이름조차 없는
          외로움으로 비틀거리다
          쓰러지면

          슬픔을 위장한
          어설픈 미소로
          나를 향해 비웃듯 쏟아내는
          웃음, 웃음소리
          (이유리·시인)


          + 고독의 기원

          지금 그의 어깨는 고요하지만
          그가 잠들었다고 믿는 사람은 없다
          그를 둘러싼 입자들의 미세한 파동은
          어딘지 경건한 데가 있다
          귀 기울이면 낮게 살얼음이 잡힌다
          허나 위로받고 싶지 않아서 그는 돌아눕는다
          오른쪽 눈과 왼쪽 눈이 만나는 법
          눈물밖에는 없다
          (강연호·시인, 1962-)


          + 고독한 정오

          호박 넝쿨이
          스레트 지붕 위에서
          손들이 마르고 있다.

          바람 한 점 없다.
          검둥이 놈도
          오동나무 그늘에서
          낮잠을 잔다.

          주렴을 걷고
          순수이성비판을 읽다 덮어놓고
          다시 시경을 편다.
          그러나 글자가 눈에 멀다.

          낡은 시계가
          녹슨 음향으로
          오후 한 시를 친다.

          풀벌레를 찾던
          참새 두어 놈

          잠시 꿈길을 더듬어
          풀잎에 숨고

          정오를 나는 나비가
          날개의 중량을
          못 가누고 있다.
          (황금찬·시인, 1918-)


          + 고독

          시집을 열 다섯 번째 내고
          나는 더욱 고독함을 느꼈다.

          많은 말을 하고 돌아온 밤
          더욱 별들이 멀리 보이듯이

          왠지 나의 시집이
          나와 친구들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시를 쓴다는 것은
          나로부터 모든 것을 하나씩 떠나보내는 것
          마침내 발가벗은 외로운 자신을 만나는 일이다.

          열 다섯 번째 나를 벗겨냈지만
          아직도 내 몸엔 무수한 얼룩이 남아
          영혼의 고운 속살은 나타나지 않는다.

          시집을 문학가 및 동료들에게 기증하고서
          그날 밤 나는 더욱 고독해지고 말았다.

          서가 아무 데나 꽂혀 있을
          그 고독한 내 모습을 생각하며
          나는 혼자서 독배로 자축을 했다.

          나는 항상 나를 향하여
          끝없이 방황하는 고독의 되풀이.

          신문 광고 귀퉁이에 떨고 있는
          내 외로운 이름을 덮으면서
          나는 나에게 또 하나의 절교장을 쓴다.

          아, 별이 유난히 많은 밤
          세상과 나 사이를 가로막고 선
          또 하나의 이 어둠은 무엇인가.
          (문병란·시인, 1935-)


          + 고독이 앉은 의자

          한동안 비워두었던 의자에 앉았습니다
          멀리 안개를 두른 초여름 숲이 웃음을 보냅니다
          이렇게 조용히 마주보기도 얼마 만인지
          오래 내 마음속 소란한 동안
          비워두었던 의자에 고독이 저 혼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고독이 앉았던 그 자리에 오늘은 내가 앉았습니다
          고독으로 가는 길에
          나에게로 가는 길이 있으니까요
          나에게로 가는 길에
          당신께로 가는 길이 있으니까요
          나 이렇게 서둘러 당신께로 돌아온 것은
          당신께로 가는 길에 세상으로 통하는
          환한 길이 있기 때문
          가진 이와 가지지 못한 이
          힘있는 이와 힘이 없는 이
          기뻐하는 이와 슬픔 중에 있는 이
          더불어 어울려 살아가는 살맛 나는 세상
          오직 당신께 해답이 있기 때문
          마음은 소란한 도시를 배회하고 돌아오는 날
          나 끊임없이 당신께로 돌아섭니다
          (홍수희·시인)


          + 고독한 사람

          죽어서도 결코
          제 힘으로 쓰러지지 않는
          사람이 있다
          제가 일으켜 세운 뜻을
          바로 그 자리에서 지키며
          오직 하늘과 겨루며 살았던
          그는 누구일까
          벼락을 맞은 채로
          성장을 멈춘,
          썩으면서도 향기로운
          대청봉 부근
          고사목!
          다른 용도로 쓰이지 못해
          늘 외로운
          이 시대의 영웅은
          (나호열·시인, 1953-)


          + 고독에 관한 간략한 정의

          공원길을 함께 걸었어요
          나뭇잎의 색깔이 점점 엷어지면서
          햇살이 우릴 쫓아왔죠
          눈이 부시어 마주보았죠
          이야기했죠
          그대 눈 속의 이파리는 현실보다 환하다고

          그댈 사랑한다고 말하기가 어려워
          나뭇잎이 아름답다고 했죠
          세상 모든 만물아 나 대신
          이야기하렴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그러나 길은 끝나가고
          문을 닫을 시간이 왔죠
          그대를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기 위하여
          나뭇잎이 아름답다고 했죠
          (노혜경·시인, 1958-)


          + 고독 속의 행복

          좋은 책도 아니에요
          두세 권 윗목에 놓고
          쉬엄쉬엄 읽으며 살고 싶어요

          많은 음식도 아니에요
          상추 쑥갓 호미질하며
          조용 조용히 살고 싶어요

          옷이야 아무려면 어떻겠어요
          크면 줄이고
          작으면 늘려 입지요

          제가 참으로 원하는 것은
          유리알처럼 영롱한 마음
          죄 없이 저무는 하루이지요

          그리고, 그리고 많은 노래도
          뛰어난 노래도 아니랍니다
          다만 꾸준히 부르면 그뿐

          풀꽃 하나 새로이 피고
          낙엽들 우수수 몰리는 저녁
          행복도 쉬엄쉬엄 찾고 싶어요.
          (정숙자·시인, 1952-)


          + 고독

          태초부터 지금까지
          허공을 달리는 태양아
          어슴푸레한 밤하늘에
          외롭게 떠가는 달아

          억겁의 세월을
          바다에 떠 있는 섬들아
          홀로 지내는 고독을
          내 어찌 모르랴.

          무거운 짐을 지고
          사막을 걷는 낙타와
          둥지서 기른 새끼를 보내고
          구슬프게 우는 비둘기야

          석양을 바라보는
          주름살 깊은 노신사
          우리는 모두
          동류(同類)가 아니더냐.
          (박인걸·목사 시인)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출처 : 대한항공 정우회 카페
    글쓴이 : 보라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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