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좋은 시(詩)

[스크랩] 라일락 시 모음

운산 최의상 2012. 8. 18. 20:26

 <라일락 시 모음> 김시종의 '라일락' 외

+ 라일락

라일락, 나는
너의 향기를 먼저 알았다.
네 이름보다…

사 반세기 전, 젊은 날
문경중 교정에서
너의 향기에 끌려,
가까이 가서 너를 처음 만났다.
숨겨진 여학생 이름표 같은
네 가슴의 명찰을 확인했다.

아늑한 봄 나절,
조그만 미물인 벌들도
향기론 네 꽃 그늘 아래서,
삶의 송가(頌歌)를 복에 겨워 부른다.
나도 좋이 네 향기에 취해, 진복(眞福)을 누린다.
라일락!
나의 樂!
(김시종·시인, 1942-)


+ 라일락꽃

꽃은 진종일 비에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
빗방울 무게도 가누기 힘들어
출렁 허리가 휘는
꽃의 오후
꽃은 하루종일 비에 젖어도
빛깔은 지워지지 않는다
빗물에 연보라 여린 빛이
창백하게 흘러내릴 듯
순한 얼굴

꽃은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
꽃은 젖어도 빛깔은 지워지지 않는다
(도종환·시인, 1955-)


+ 라일락

돋을볕에 기대어 뾰족뾰족 연둣빛 잎들을 토해내는
너의 자태가 수줍어 보인다.

무수히 돋는 잎새마다 킁, 킁, 코를 대 보다가
천 개의 눈과 손을 가졌다는
천수관음보살을 떠올렸다.

하지만 세상의 어떤 지극한 보살이 있어
천 개의 눈과 손마다
향낭(香囊)을
움켜쥐고 나와
천지를 그윽하게 물들이는
너의 공양을 따를 수 있으랴.
(고진하·목사 시인, 1953-)


+ 라일락

봄이 두터운 외투 속에 움츠리고만 있던 그 오월
줄 수 있었던 아름다움은 오직 그것뿐이었을 때의,
눈감고 업은 내 아이와 오래도록 서있던
친정으로 가는 샛길 라일락 나무
구겨진 마음 풀어내 햇살 풀먹여 푸우우 품어내던 향분
옥양목 같은 생(生)의 강가 사금처럼 반짝이는
(강은령·시인, 1930-1993)


+ 라일락꽃 그늘을 지나며

스칠 때마다
오래 전 잊었다고 생각한
내밀한 열정
제자리에 서있어도
멀리 가는 향기

라일락,
이미 누군가의 연인 같은
너의 이름 속을 들어가면
전설보다 아름다울까

라일락하고 부르면
라일랄라 음표가 튀어나오고
라일락하고 부르면
하얀 꽃관을 쓴 그녀가
꽃가루를 뿌리며 나타날 거야

이윽고 다시 널 부르면
거짓말처럼 다시
바람이 불어와
숨막힌 사랑을 던지고 가리라
(도혜숙·시인, 1969-)


+ 라일락 향기

달빛은
온 밤 길에
라일락 향을 뿌려 놓았다

골목 옆 집집마다
불꺼진 창 틈에도
향기를 밀어 넣는다

라일락 향은
내 머리카락에 배어
골목 어귀까지 따라 오다
달의 손에 끌려갔다

나는
사월의 밤아, 밤아, 하고
눈부신 라일락나무 아래서
그리움을 부른다
(장미숙·시인)


+ 늙은 라일락을 위하여

내가 그녀를 알게 된 것은 한 스물 두어 해 전이다
나도 그녀도 파랗던 시절이었다
꽃사과나무 곁에 늘 수줍은 듯 서 있어 온 그녀
이제는 등도 굽고 다리도 휘어져 어느 땐 내가
나의 등으로 그녀의 등을
가만히 받쳐보기도 하는데
그녀가 엽서 같은 푸른 잎들을 매달고 보란 듯이
꽃향기 뿜어낼 때면
그녀의 봄밤은
여전히 황홀하기만 하여
그 밑에서 취하고 또 취하고
그러면
그녀는 달보다 더 환한 얼굴로 걸어와
내 목덜미를 쓸어 내리는 것이다
숨이 하얘지도록
하얘지도록
(김정희·시인)


+ 라일락 꽃

사랑의 시련을 가슴에 안고
애절한 눈빛으로
연한 바람에도 하늘거리며
눈물을 펑펑 쏟는 여인아.

아무에게도 말 할 수 없는 고통이
머리끝까지 차올라도
위로해 줄 사람이 없어
처연한 몸짓이 더욱 가엽구나.

시퍼렇게 멍든 가슴이
숨 쉴 때마다 呻吟이 되어
보랏빛 아픔을 토하며
옷깃을 물들이고 있구나.

툭 치면 스러질 것만 같아
붙들어 주고 싶게 하는
애처로운 네 모양에
어느새 내 마음은 무너지고 있다.
(박인걸·목사 시인)


+ 라일락 그물

우리 함께 무심히
봄볕을 따라 걷다가
길가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라일락꽃 그물에 덜컥
걸려들고 말았지

다 제쳐놓고 지체하면서
입에 물기도 하고
행복에 겨워
파묻히기도 하다가
정원 가득 라일락을 심어
늘 취해보자 약속도 했었지

헤아릴 수 없고
헤아리기도 버거운
젊은 날의 소망이라기엔
너무도 진한 향기 다발이었지

허나 나는 아직
그 그물 속에서 미처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너는 그 향기를 뿌리치고
너울너울 속절없이
날아가 버리고 말았지

세상 곳곳을 물들이고
발길을 잡아끄는 라일락에
왜 우린 그냥 순일하게
한평생 어우러질 수 없었을까
(임영준·시인, 부산 출생)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출처 : 대한항공 정우회 카페
글쓴이 : 보라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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