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천국이야기

이강 성경강해 (1) 창세기 : 인식의 도래

운산 최의상 2018. 6. 23. 09:39



이강 성경강해 (1) 창세기 : 인식의 도래 | LK글방

이강 | 조회 616 |추천 0 | 2011.02.25. 16:06


 

저는 20살 때 영어 바이블로 창세기를 암송하였습니다.
나이 30살 때 한자 금강경을 암송하였구요.

 

창세기를 바라보는 관점은 다양한데, 크게 전통적 방식. 상징과 비유로 보는 방식.
저는 후자에 속하고 후자 쪽에서도 주로 심리학적 분석으로 해석하는 편입니다.
(이건 아마도 나만의 해석방법인 것 같습니다)

 

창세기가 암송하고 싶을 정도로 아름답다고 여긴 것은 그것이 이론적으로 복잡한
유식불교의 체계와 달리 인간의 인지(cognition) 발달 과정을 문학적 비유로 절묘하게
표현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해심밀경 같은 책 보면 골치 아파요)

 

감각계에서 사물은 형체가 없고 텅 빈 것이나 마찬가지 입니다. (without form, and void)
그것을 한 마디로 흑암이라 표현 합니다. (darkness)

 

인간의 최초 의식계는 그런 것입니다.

 

여기에 성령이 마치 검은 액체의 바다위를 불꽃처럼 부유 합니다. (hovering on the deep water)
즉 성령이란 "최초의 인식(정신)" 같은 존재 입니다.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더라. (Let there be light: and there was light)
인식은 바로 명명함으로써(naming) 그 존재가 드러나지요. 그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
한 것이고. 언어화 과정이 필연적으로 끼어들지요. 꽃이라 불러 줄 때 꽃이 되는 것 처럼.

 

사물의 생성과 존재는 그것을 최초로 인식함에 따라 구성됩니다.
그리고 매번 이런 인식과정은 아름답다는 뒤따르는 인식으로 댓구를 이룹니다.(looks beautiful)

 

그게 왜 아름답지 않겠어요. 신기하고 기적같고 형언할 수 없는 전율이지요.

 

이렇게 하나씩 빛과 어둠을 낮과 밤 등으로 세상을 창조해 나갑니다.
창조해 나간다는 뜻은 인식상에서 창조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에 고대인의 하늘과 물의 개념이 나옵니다. 그걸 밑에 있는 물, 위에 있는 물이라고 보는 것은

고대인의 원시적 관념입니다. (firmament) 즉 하늘은 공중의 바다인 셈이지요. 고대인에게 그렇게

하늘과 땅이 둘 다 물로 인식적으로 보이는 것이겠죠.

 

마지막 인간의 탄생이 나오는데, 유대교의 여러 경전을 보면 하나님이 인간을 홀로 만드시지
않았어요. 하나님과 유사할 정도의 신적인 존재들과 의논하여 만들었기에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fter our likeness)
복수 형태가 나옵니다. 이걸 로얄 복수격의 형태적 존중으로 보는 사람도 있지만
원래 복수격이라는 학설도 있습니다. 암튼 고대인도 전지전능한 존재로서의 홀로 신을 만들기 보다는....단체로.

  

그런데 아담과 이브는 벌거 벗었는데 부끄러움을 모릅니다 (both naked were not ashamed)

 

순수한 인식적 존재로서 인간은 순진무구 그 자체였고, 어떻게 순진무구가 부끄러움을 알겠어요.

감각계와 인식계가 결합된 인간의 탄생은 그만큰 순결, 성결한 것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사과를 먹지 말라고 당부 합니다. 하나님이 그 이유를 말합니다. "너희도
우리들과 같이 두 눈이 열리고, 선악을 알게 되고, 결국에는 우리처럼 신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성경의 가장 래디컬한 사상이 있습니다. "너희도 우리와 같이 신이 되리라."
(and ye shall be as gods)

 

결국 사과는 지식, 문명, 또 다른 자의식이란 새로운 인식계 또는 상징계가 출범 한다는 것이지요.

이걸 20세기에서 학술적으로 어렵고 골치 아프게 말한 사람이 자크 라깡인데 그 양반은 사과를

'남근'이라는 개념으로 에둘러 말합니다.

 

자의식이란 규범, 지식, 체계가 순수한 인간의식에 삽입되고 나면 그때부터 아주 골치 아파집니다.

"해야 할 것, 하지 말아야 할 것" "좋은 것, 나쁜 것" "선한 것, 악한 것" "자랑하고 싶은 것, 쪽 팔리는 것"......

이런 관념 체계가 들어 올 수 밖에 없다는 것이죠.

 

어쨌든 아담과 이브는 사과를 먹어 버리기 때문에 다시 에덴이란 낙원으로 돌아가지 못할 운명을

그 스스로 선택하고 말았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인간의 인식적, 존재론적 숙명이란 것이지요.

고통이 필연적으로 따르는.....

 

묘한 것은, 하나님과 언약을 저버린 인간을 고통 받도록 그냥 냅두면 되는데 하나님이 자꾸 후손을

따라 다니며 "이래라 저래라" 합니다. 그게 구약 입니다. 왜 포기 하지 못하냐 하면 "너무도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자식들에게 맨날 잔소리하고 때로는 다투기도 하며 '니 맘대로 해라"고 말하고 나서도 부모가 자식을

완전히 포기하는 부모가 있습니까? 없죠. 왜냐. 포기 하기엔 너무 사랑스럽고 귀중한 자신 또는 자식이기 때문에"

 

문제는 사람들이 에덴 낙원으로 자꾸 돌아가려고 합니다. 그기엔 고통도, 걱정도, 고뇌도 없는 원형 세계 이거든요.

(그 무의식적 환원을 완전히 지울 수 없는 게 인간의 운명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것이 인식적으로 인간에게 불가능해요. 여러 분이 2~3세 이전 아기의 의식 세계로 돌아갈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순간적이라면 몰라도.

 

그러니까 성경에는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 다시 돌아가지 못하도록 주변에 불의 검을 왕창 박아 놓았다는 것이지요.

즉. 게임의 시작 점으로는 돌아가면 게임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마지막 안배는 "인과율 : the causality" 입니다. 너희가 선택하고 결정하라.
단, 그것에 따른 결과(consequences)는 나도 어쩔 수 없다. 길에는 두 길이 있다.
삶과 죽음의 길. 사랑과 미움의 길. 딱 두 가지 뿐이다. 나는 그 결과만을 주재하겠다.

 

신약부터 하나님은 부재(absense)로서 완전히 무대 뒤로 사라집니다. 그때부터 인간에게
직접적으로 한 마디도 말씀하시지 않는 것이지요. 그래도 우야튼 예수님 같은 사람을
메신저로 보내어 자신의 언약을 잊지 말도록 주지 시켜 주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인지, 인식 발달 과정을 대입하여 보아도 훌륭한 문헌 입니다.

그리고 이건 나만의 생각 또는 해석이기에 다른 사람에게 '옳다'고 할 근거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나는 성경을 이런 식으로 읽었다.

 

그리고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 대부분은 정신분석학적으로도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시간 나면 욥, 요나의 정신적 멘탈리티에 대해서 한 번 해석해 보겠습니다.

 

너무 엉터리라고 하면, 연재 그만 두고.

 

** 결국 하나님이란 존재의 유무와는 별도로 우리의 의식/무의식적으로 투사하는
   하나님은 결국 부모 相 입니다. 아기에겐 엄마와 아빠가 신처럼 인식되거든요.
   글코 누구나 엄마, 아빠가 되잖아요. 결국 부모가 되고 나서 보니 창조자 심정을
   느끼는 것이지요. 그때부터 효도 하게 되고 ^^;

 

   <옮겨온 글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