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詩論

마츠오 바쇼(송미파초)의 시(하이쿠)

운산 최의상 2017. 5. 18. 10:30


마츠오 바쇼(송미파초)의 시(하이쿠)


한국의 시하면 시조가 떠오르고, 일본의 시하면 하이쿠가 먼저 떠오른다. 하이쿠는 우리나라의 시조보다 훨씬 짧은 음절로 된 시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하이쿠를 보고 선시와 비교하기도 한다. 하이쿠는 짧은데도 여운이 긴 시들이 많다.

하이쿠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시인은 일본 에도 전기 시대의 마쓰오 바쇼(松尾芭蕉)이다. 물론 바쇼는 호이다. 본명은 무네후사(宗房)이다. 그는 일본 구석구석을 방랑하며 많은 하이쿠를 남겼다. 많은 사람들은 그로부터 하이쿠가 문학성을 담보하며 한 단계 더 높은 경지로 올라섰다고 보고 있다.

바쇼는 1694년 나가사키로 가던 도중에 노사카에서 객사하였다. 죽기 사흘 전에 쓴 시 역시 방랑을 노래하고 있다.

읽으면 읽을수록 여운이 남는 시이다. 이 짧은 몇 마디 말 속에 이렇게 깊은 의미를 모두 담다니... 역시 대가임에는 틀림이 없다.

바쇼는 중국의 시에서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리고 그의 자연사상 역시 중국의 장자의 영향이 크다고 한다. 물론 바쇼의 시는 단순히 자연에 동화된 자연을 노래하는 시가 아니다. 그의 시에는 인간의 내면 깊이 잠재해 있는 고독과 우수가 담겨 있다. 위의 시만 보더라도 이러한 여정(餘情)을 금방 느낄 수 있다. 즉 그의 하이쿠는 자연 속에서 인간을 노래하면서 우리네 삶의 이치를 노래하는 이중구조를 보여준다.



어쨌든 "방랑에 병들어"라는 말은 시와 방랑에 대한 그의 집착을 잘 보여주는 표현이다. 그리고 방랑하는 우리네 삶은 어쩌면 영원한 꿈의 연속인지도 모른다. 이루지 못할 꿈. 영원히 "시든 들판을 헤매고 도는" 꿈.



바쇼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해와 달은 영원한 과객이고
오가는 세월 또한 나그네이다

바쇼에게 자연도 시간도 과객이고 우리네 삶 또한 나그네이다. 삶은 여기저기 떠도는 방랑의 길이다. 바쇼는 자연 속에서, 방랑 속에서 낯선 사물들을 만나 그것들을 관조하며 인생의 의미를 추출해 내었다.



바쇼의 방랑은 현실도피일까 아니면 그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으려는 자유로운 영혼의 발로일까? 그런데 이러한 질문은 정말이지 우문일 수 있다. 왜? 이 질문 속에는 현실적 삶과 시의 세계를 이분화하는 구조가 숨어 있다.

나는 조금 전에 바쇼의 시가 자연 속에서 인간을 노래하면서 우리네 삶의 이치를 보여주는 이중구조를 보여준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 말은 바쇼의 경우 부언 설명이 필요하다. 

많은 시인들이, 많은 작가들이 바로 이 현실과 예술 세계의 이분적 구조 속에서 갈등하며 그것을 작품화한다. 하지만 바쇼는 삶을 아니 생활 전체가 하나의 예술이었다. 이 말은 생활과 예술이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였음을 말한다.  

즉 그가 방랑하며 걸어간 발자국, 그것이 바로 시이다. 



짧고 짧은 싯구에 자연에서 발견한 삶의 경험과 삶의 의미를, 그리고 삶 속에서 묻어나오는 정감을 크나 큰 여백 속에 표현한 시인 마쓰오 바쇼, 그는 정말 큰 시인이다. 

일본의 회화는 프랑스의 모네에게 영향을 미쳤고, 바쇼의 하이쿠는 프랑스의 초현실주의 시에 영향을 미쳤다. 근래에 우리나라의 몇몇 시인들이 모여서 요즘의 시가 너무 토로를 한다고 안타까워한다는 신문 기사를 본 적이 있다. 하지만 어쩌랴! 요즘의 시인들이 시를 그렇게 쓰는 것은 현대적 삶이 토로를 요구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시가 토로에 그친다면.... 그것을 뛰어넘어야 비로소 세계를 향할 수 있지 않을까?

시란 길이의 길고 짧음으로 좋고 나쁨을 논할 수는 없다. 하지만 토로를 하다보면 불피한 요소들이 끼어들 여지도 많다. 물론 필요하다면 불필요한 요소도 시 속에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시는 산문이 아니다. 시는 시다워야 시로서 가치가 있다.  

봄이 오려는지 오늘은 꽃샘 추위가 차갑다. 봄을 기다리며 다시 바쇼의 시 한 편을 떠올린다.

오래된 연못 개구리 뛰어드는 첨벙 물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