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세지감(隔世之感)입니다.
운산
나의 책장을 둘러 보다 누런 책을 구석에서 꺼내서 보니
[철학적 단상]이었습니다. 케이스 속 책을 빼었습니다.
케이스 속에 있어 색깔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표지를 열자 [파고다]담배 표지에
노산 이은상 시 [한 그루 나무를]를 적어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이 때 노산 이은상 선생에 매료되어 시와 시조 수필과
금강산 기행문등을 많이 읽었습니다.
한 그루 나무를
노산 이은상
나는
오늘 아침
한 그루 나무를 심었다.
쉴 곳 없어
꿈을 잃어버린
산새 들새에게
보금자리를 주었다.
창공을 나르던 산새 들새
지친 날개 고이 접고
이 나무가지 위에서
노래를 부르네
어제까지도 쓸쓸하던 이 마을에
정녕 봄이 왔구나
구슬 굴리는 노래 속에
나는
오늘 아침
그대 와서 깃드시라
내 마음 언덕위에도
한 그루 나무를 심었다.
- 식목일을 맞으며-
책갈피에 누런 신문을 오려 넣은 쪽들이 있어 조심스럽게 하나하나 펴 보았습니다.
철학책 속에는 철인의 모습이 표현된 글 들이 누렇게 퇴색되어 누워 있었습니다.
[동국대학보]를 오려 둔 것 같습니다. 그 시절 동국대학보 기자로 있던 친구가
보내 주는 신문을 보았던 생각이 납니다.
그 친구는 나와 고교 동창이었고 나중에 문학평론가로 활동하며
[초금][제3의 물결]등 번역과 전집 편찬에 주력하다 오래 전에 후두암으로 작고하였습니다.
담배를 많이 피워댔습니다. 이 누런 신문지를 보니 멀리 간 친구가 그립습니다.
오려둔 신문 쪽지에는 아래와 같이 그 당시 인구에 회자되던 철학자의 이름이 많이 보이고 있습니다.
60년대는 대학생들이나 문학을 지망하는 청년들 사이에서는 쏘크라테스, 푸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칸트, 헤겔, 쇼팬하우어, 니체, 하이데커의 이름이 빈번하게 논의되며 무신론적 실존주의에
격앙되기도 했습니다. 하이데커의 니힐리즘에 빠져 죽음과 고독 사이를 배회하기도 하였습니다.
누런 신문지 쪽에는 이 시대를 반영하듯 이런 타이틀이 많이 보였습니다
철학사상과 인물 [칸트의 비판]-조우현
키에르케고르의 한 단편-민병산
철학도 사랑의 한 표현[쏘크라테스]의 사상을 중심으로[이데아론]을 완성-푸라톤-
이상주의 불멸의 기수[노예시장에 팔리기도한] -푸라톤-
AbuSimbel의 벽화[람스]왕의 영화를 묘사한 사원과 나일하와 구출운동
신을 고발한 사상적 풍운아-편지마다[나는 고민한다]고-니체
희대의염세주의철학자-공포증으로 이발소에선 면도도 거부-쇼펜하우엘-
이 책은 푸라톤을 시작으로 하여 싸르트르를 끝으로 28명의 철학적 단상을 나타낸 책이었습니다.
맨 뒤쪽을 열자 [1963년8월11일 김화에서]라 써 있었습니다. 김화 어느 책방에서 구입한 책입니다.
김화에서 5사단 36연대 의무지대에서 정연리 최전방(DMZ 남방한계선] 철조망에서 위생병으로
근무할 때 사서 읽은 책이라는 기억이납니다. 그 때 어느 장교가 하는 소리가 떠 오릅니다.
[쫄병이 군대서 철학책을 읽네] 스쳐 지나가는 소리였습니다.
이런 소리가 나올 수 있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부터 53년전 만 하여도 문맹자가 전 국민의 80%이상이었다고 봅니다.
군대에서 행정을 볼 만한 사람이 없어 신병이 들어오면 중졸, 고졸 있으면 앞으로 나와 하고
그들이 한 두명 나오면 기뻐하던 시절이었습니다.
5.16혁명이 일어난 후 군대에 다녀오지 않으면 취직을 할 수 없어 배웠다는 사람들이
요리 조리 피하다 한꺼번에 군대에 입대하게 되어 군대는 순식간에 학벌이 높아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나는 1961년도에 대학 졸업을 하고 징병영장을 받고 군대에 가게 되었습니다. 청와대 까러 왔다는
김신조 일당 간첩사건으로 복무기간이 연장되어 에누리 없는 36개월 병영생활을 하고
만기 제대를 하였습니다.
마산군의학교 226기로 군의학교 창설이래 이렇게 학벌 좋기로는 처음이라고 하던 중대장은
우리 졸업 때는 역시 배운 놈들이 다르다고 하며 헤여지는 것을 서운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처 박혀 있는 헌 책 한 권 속에 이런 이야기들이 숨어 있었습니다.
책을 넘기며 군복 왼 팔에 적십자 완장을 차고 남방한계선 철조망 앞에 앉아
[철학적 단상]을 읽으며 철의 삼각지대인 평강과 철원 뜰을 바라보며 한가한 오후를 보내던
그 군대 시절이 주마등처럼 지나감을 느끼며 잠시 격세지감에 빠져 보았습니다.
이리하여 자식들은 오래된 옛날 책은 버리라고 성화이지만 못 버리는 심정 속에는
그 오랜 벗과 같은 이야기가 있는 책들이기 때문에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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