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 2016.01.21 14:25
[문갑식 기자의 기인이사(奇人異士)(38):이광사와 송시열과 우리 산하(中)]
지리산에는 유서깊은 3대 사찰이 있지요. 구례쪽 화엄사, 하동쪽 쌍계사와 어깨를 나란히하는 구례 천은사(泉隱寺)는 신라 덕흥왕 3년(828년) 인도 승려 덕운조사가 창건했습니다. ‘샘을 숨기고 있다’는 이름처럼 처음에 이 절의 이름은 감로사(甘露寺)였습니다. 절에 ‘샘’이란 말이 붙은 것은 전설 때문입니다.
천은사는 조선 숙종 5년때인 1679년 단유선사에 의해 중건됐는데 샘 주변에 구렁이가 자주 나타났습니다. 한 스님이 무심코 그 뱀을 죽여버리고 말았습니다. 절에서 살생을 한 여파는 컸습니다. 그후 샘이 말라버려 ‘샘이 숨었다’는 뜻으로 천은사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더욱 이상한 것은 샘이 마르자 이유를 알 수 없는 화재도 자주 발생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원교 이광사가 ‘지리산 천은사(智異山泉隱寺)’라는 글씨를 써주었습니다.
원교는 글씨를 물흐르는 것 같은 수체(水體)로 썼다고 합니다. 그후 이 절에는 불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천은사에는 절의 입구격인 일주문에 붙은 ‘지리산 천은사’부터 극락보전(極樂寶殿), 명부전(冥府殿) 등 세곳에 원교의 글씨가 남아 있습니다. 특이한 것은 극락보전에 모두 13마리의 용(龍) 장식이 있으며 좌우에 황룡과 청룡의 머리가 조각돼 있는데, 이것은 풍수지리와 관계가 있다고 합니다.
극락보전 앞에 있는 보제루(普濟樓)는 원교의 제자인 창암 이상만이 썼는데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재주가 뛰어난 창암은 하루에 1000자 쓰기를 꼭 채웠는데 그로 인해 벼루가 세개나 구멍이 났고 붓은 1000자루가 닳아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지리산 천은사를 둘러볼 가치가 충분하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오랜 유배를 끝내고 풀려난 추사는 대흥사에 들러 초의선사를 만나 이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제주도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네. 유배되지 않았으면 내 자신을 돌아볼 시간을 갖지 못했을거야. 사물과 치열하게 대결하며 현상을 좇다보면 자신이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쫓기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법일세. 제주도가 그걸 가르쳐줬네.”
이 말에 초의선사는 빙그레 웃으며 답했습니다. “추사께서 성불(成佛)하려나보오.”
그러자 추사는 이렇게 묻는 것이었습니다. “여보게 초의. 내가 지난번 제주도로 가기 전에 떼어내라고 한 원교의 대웅보전 현판이 혹시 지금도 있나?”
초의선사는 “그거 어딘가 헛간 구석에 있겠지. 나는 잘 버리지않는 성미니까”라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추사는 “그 현판을 다시 달고 내 글씨를 떼어내게. 그땐 내가 잘못보았네”라고 말했습니다. 이게 헛간에 있던 원교의 글씨가 살아난 과정입니다.
원교의 글씨는 강진 백련사 대웅보전, 명부전, 만경루(萬景樓) 현판에도 남아있습니다. 그러고보면 전남의 유서깊은 두 사찰인 대흥사와 백련사가 모두 원교의 글씨를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고창 선운사의 천왕문(天王門), 선운사 성보(聖寶)박물관에 보관 중인 ‘정와(靜窩)’라는 글씨도 원교의 것입니다. 정와는 ‘조용한 작은 집’이라는 뜻입니다. 변산반도 부안 내소사의 대웅보전과 설선당(說禪堂)도 원교의 작품이지요.
그런데 기인이사 시리즈를 취재하며 전국을 다니다보니 원교못지않게 글을 남긴 인물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1607~1689) 선생이었습니다. 지금 이 부분을 쓰면서 저는 경이롭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원교가 살아 생전 고초를 겪은 것이 노론과의 불화한 집안 내역 때문인데 그 노론의 영수가 송시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당쟁사가 복잡하기 짝이 없어 며칠을 공부하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렵지만 여기서 잠시 사색당파의 분화과정을 요약해봅니다. <下편에 계속>
Photo by 이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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