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한시

中原高句麗碑文의 解讀과 吏讀的 性格(南豊鉉)

운산 최의상 2015. 12. 28. 12:53

中原高句麗碑文의 解讀과 吏讀的 性格

南 豊 鉉(檀國大)

1. 序 言

필자는 1978년 4월 檀國大學校 博物館 學術調査團의 일원으로 中原高句麗碑를 조사하는 일에 참가하여 이 비가 高句麗碑라는 사실을 밝히는 데 一助를 하였었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전후 문맥을 이어나갈 만큼 읽어낼 수가 없어서 더 이상 비문의 성격을 구명하는 작업을 진행시키지 못하였었다. 당시 이 비문에 吏讀가 있다는 주장을 한 견해들도 있었으나 문맥을 파악할 수 없는 상태에서 이두를 확인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 후 오랜 동안 이 비문을 검토할 기회를 갖지 못하다가 지난 2000년 2월 22일부터 高句麗 硏究會에서 주최한 釋文作業에 참여하여 4泊 5日 동안 여러 釋文委員들과 함께 새로 비문을 판독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이 작업에서 비문의 새로운 탁본, 컴퓨터 영상의 새로운 判讀技法, 여러 탁본의 대조, 이제까지 판독한 여러 사람의 견해를 종합하여 새로운 판독을 하게 되어 나 나름대로 전후 문맥을 이어 볼 수 있을 만큼 판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비문의 해독에 대하여서도 어느 정도는 안목을 갖게 되었고 吏讀的인 요소도 들어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 글은 이러한 내용을 엮어서 앞으로 이 비를 연구하는 데 기여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草하는 것이다.

종래부터 이두는 고구려에서 처음 발달한 것으로 논의되어 왔었다. 그러나 고구려의 이두 자료는 극히 적어서 후대의 이두에서 발견되는 형태는 찾아보기 어렵다. 조선시대의 문서들에서 ‘是/이-’나 ‘爲/-’ 계통의 여러 이두를 보고 이에 준하는 형태들이 삼국시대에도 쓰였을 것으로 추측하지만 그러한 본격적인 이두를 이 시대의 자료에서는 찾을 수가 없다. 이 시대의 이두는 이와는 다른 안목으로 이두의 발생단계를 추구하는 자세를 가지고 임해야만 파악할 수 있다.

고구려의 이두를 이해하기 위하여서는 이두의 개념을 명확히 하여야 한다. 필자는 吏讀의 定義를 ‘實用文에 쓰이는 우리말의 요소’라고 하였고 이 요소는 다시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고 하여 왔다. 하나는 語順이고 다른 하나는 形態이다. 語順은 漢字로 쓰여진 그 문장의 어순이 우리말의 어순으로 되어 있거나 한문의 어순과 우리말의 어순이 섞여 쓰이는 것이고 形態는 그 문장 안에 우리말을 나타내는 문법형태가 쓰였거나 우리말의 문법적 영향을 받은 형태가 쓰인 것을 말한다.

고구려의 이두 자료는 廣開土大王碑文, 平壤城壁刻書 4점, 瑞鳳塚銀盒杅銘 정도이다. 이들은 본격적인 이두라고 하긴 어렵고 變體漢文, 俗漢文, 또는 初期的인 吏讀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들 자료에는 그 어순과 문법형태에서 후세의 이두에 나타나는 요소가 쓰이고 있다. 일례로 廣開土大王碑文에는 漢文의 어순으로서는 어색하고 우리말의 어순으로 보아야 그 문맥이 통하는 예들이 있다고 한다. 홍기문(1957)에서는

王臨津言曰 我是皇天之子 母河伯女郞 鄒牟王 爲我連葭浮龜 / 왕이 물가에 臨해서 말하기를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요 어머니가 河伯의 딸이요 추모왕이다. 나를 위하여 葭를 連하고 거북을 띄우라.

에서 ‘鄒牟王’을 앞 句의 母河伯女郞에 연결시키거나 뒷 句인 爲我連葭浮龜에 연결시키거나 어느 편도 문리가 통하지 않고 어색하다. 우리말식으로 그대로 두고 해석해 나가야 전체의 뜻이 명료하게 드러난다고 하였다. 이는 이 비문에 우리말의 어순이 섞여 있음을 말한 것이다.

李基文(1981)에서는 이 비문의 맨끝에 나오는

其有違令賣者刑之 買人制令守墓之 / 令을 어기고 판 자는 형벌을 준다. 사들인 사람은 守墓 를 하도록 한다.

에서 앞구의 ‘刑之’에 나오는 之는 목적어로 中國 漢文에 어긋남이 없으나 뒤의 ‘守墓之’에 나오는 之는 목적어로 볼 수 없으니 中國 漢文의 文法에 어긋나는 것이고 이는 신라의 예들과 같이 문장의 終結形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之의 이러한 용법은 신라의 이두문에 그대로 계승되어 삼국시대 이후의 이두문에서 많은 용례가 발견되고 있다. 한편 之의 이러한 용법은 일본의 古代 記錄들에도 나타난다. 日本 古事記의 著者로 알려진 安萬侶의 墓誌文이 1970년대에 발견되었는데 거기에 다음과 같은 명문이 나온다.

左京四條四坊 從四位下勳五等 太朝臣安萬侶 以癸亥年七月六日卒之 養老七年十二月十五日 乙巳(太安萬侶의 墓誌, 養老7年은 723年)

여기의 ‘以癸亥年七月六日卒之’에 나오는 ‘之’는 자동사 ‘卒’ 뒤에 쓰였으니 목적어로 볼 수 없고 문장의 종결형의 표시로 보아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廣開土大王碑文은 고구려의 대표적인 한문인데도 이두적인 요소가 나타나고 있어 이 시대의 文章意識에 이두적인 요소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이 신라뿐만 아니라 일본에까지도 전파된 것이니 당시 東亞細亞의 문화가 확산된 양상을 더듬어 볼 수 있게 하여 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中原高句麗碑文에도 이러한 이두적인 요소들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어 우리의 眼目을 새롭게 하여 주는 바가 있다.

2. 中原高句麗碑文의 性格

어떤 자료에서 이두적인 요소를 찾아내기 위하여서는 먼저 그 문장을 해석해 보아야 한다. 이 해석을 위하여서는 그 자료의 성격을 이해해야 한다. 中原高句麗碑文의 성격에 대하여는 歷史學界에서 적지 않은 論議가 이루어져 있다. 그 논의들은 수정되어야 할 문제들도 가지고 있지만 많은 문제들이 해명된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서는 이러한 논의들을 기초로 이 비문의 해독을 위하여 현재 필자가 이해하고 있는 내용을 정리하여 보기로 한다.

이 비에 대하여는

1) 3面碑인가 4面碑인가? 또 第1面이 어디인가?

2) 建立年代가 언제이고 그 내용이 어느 시대의 것인가?

3) 무엇을 위하여 세운 碑인가?

하는 문제들이 제기되어 있다. 첫 문제에 대하여는 李基白(1979)에서 4면비라는 설이 제기되어 任昌淳(1979), 金貞培(1979)에서 이에 동조하는 견해를 펴고 있다. 이에 대하여 邊太燮(1979)에서는 3면비라는 주장을 제기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필자는 4면비라는 설을 수용하고자 한다.

그 이류로는 현재 正面으로 보고 있는 면이 글자가 가장 많이 보존되어 있고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긴 하지만 그 첫머리가 단순히 五月中으로만 되어 있고 干支나 年號가 나오지 않는 점을 우선 있다. 或說에는 題額이 있어 여기에 建興四年이란 年記가 나온다 하나 이는 추정에 불과할 뿐 그런 文面이 판독된 것이 아니다. 설혹 題額이 있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연호를 써서 이것이 본문의 문맥에 이어져 내려오는 碑文의 形式은 이제까지는 없었던 일이어서 받아들일 수가 없다. 이 碑面의 ‘五月中’ 다음에는 ‘高麗太王祖王’이라 있는데 여기서부터 제10행의 ‘凶鬼蓋盧’까지는 하나의 사건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파악된다. ‘凶鬼蓋盧’는 그 표현이나 내용으로 보아 百濟의 蓋鹵王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이 면의 내용은 長壽王 때의 사실로 보아야 하는데 그 주체를 ‘高麗大王祖王’이라 하였다. 이는 長壽王의 손자인 文咨王 때에 그 할아버지를 지칭한 것이니 이 비는 文咨王 때에 세워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 面은 제1면이 되기가 어려울 것으로 생각된다. 이 면이 제1면이 아니라면 그 右側面을 제1면으로 고려해 볼 수 있는데 이 면은 좁아서 비의 正面으로 보기에 합당하지 않다. 즉 현재의 정면은 10행인데 그 左右의 兩側面은 6행이 들어갈 수 있는 넓이여서 좁은 면을 정면으로 삼는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리하여 파손이 심하여 한 글자도 판독할 수 없는 현재의 後面을 제1면으로 보고 현재의 정면을 제3면으로 보는 견해를 따르고자 하는 것이다. 이 비문을 해독해 본 결과도 이 앞면의 내용에 의지하지 않고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어 이를 뒷받침하여 준다.

이 碑의 건립연대는 李丙燾(1979)에서 文咨王 初年으로, 邊太燮(1979)에서는 長壽王 69년(481)으로, 申瀅植(1979)에서도 長壽王 69년(481)으로, 金貞培(1979)에서는 廣開土王 12년(403)이나 長壽王 37년(449)의 사실로 보아 論者에 따라 다 다른 견해를 펴고 있다. 이 가운데 나는 李丙燾(1979)의 견해에 찬동하고자 한다. 이는 이 비의 첫줄에 ‘高麗太王祖王’이 확인되고 ‘凶鬼蓋盧’가 百濟의 蓋鹵王임이 분명하다고 본 데 근거한 것이다. 다른 견해들이 長壽王 때에 건립된 것으로 본 것은 이 비에 나타난 사건의 연대를 건립연대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高麗大王祖王’ 때의 사건이니 비의 건립연대와 기록된 사건의 연대에는 차이가 있음을 파악해야 할 것이다.

이 비가 文咨王 때에 건립되었다면 그 연대를 언제로 잡을 것인가. 이에 대하여 李丙燾(1979)에서는 三國史記 文咨王 4年 7月條에 ‘南巡狩 望海而還’이라 한 것에 근거하여 이 때 왕이 이 곳을 순수하고 비를 세웠던 것으로 볼 것을 경계하고 있다. 그 이유로 ‘비 자체의 序頭가 순수비와 같은 격식으로 되어 있지 아니하고 望海(海神에게 望祭)란 것이 이 곳의 입지적 조건과는 맞지 않는 까닭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비의 제1면이 현재의 전면이 아니라면 그 서두가 순수비의 격식을 띠지 않았다고 볼 근거는 되지 않는다. 望海라는 기사도 삼국사기의 기사가 단순한 점을 감안하면 그것이 南巡의 목적의 전부라고 보기 어렵다. 이 비가 文咨王 때에 건립되었다고 보면 이 때에 中原地域에 비를 세웠을 만한 記事는 왕의 南巡記錄이 가장 가까운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나는 이 비의 건립연대를 文咨王이 南巡한 그 4年(495)으로 보고자 한다. 이 해는 長壽王이 백제의 蓋鹵王을 사로잡아 살해한 후(474) 21년이 되는 해이다.

碑의 건립 목적은 앞에서 대체로 언급된 셈이다. 文咨王의 南巡時에 세워진 비라면 이는 그의 巡幸碑나 巡狩碑를 想定하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이미 申瀅植(1979)에서 이를 巡狩碑, 拓境碑, 會盟碑, 頌德碑의 복합적인 뜻이 있다고 본 바 있으나 나는 이를 巡幸碑나 巡狩碑로 보고 논의를 진행하고자 한다.

3. 碑文의 判讀과 段落

이 비문의 이두적 성격을 밝히기 위하여는 비문의 解讀이 우선하여야 한다. 이 비문 가운데 문맥을 연결시켜 볼 수 있는 곳은 현재 正面으로 보고 있는 五月中高麗大王祖王으로 시작되는 제3면이다. 그러나 이 면도 판독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어 완전한 해독을 하기는 쉽지 않다. 高句麗硏究會에서 지난 2월에 판독한 결과를 ‘新釋文’이란 이름으로 제시하였는데 이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최선의 방법으로 생각된다. 이 釋文 역시 문맥의 소통에는 어려움이 있으므로 필자가 가지고 있는 초기의 탁본과 문맥의 맥락을 고려하여 약간의 수정을 가한 다음 단락을 나누고 해석을 시도해 보면서 이두적 성격을 찾아보기로 한다.

다음은 高句麗硏究會에서 제시한 新釋文이다.

<Ⅰ: 前面>

 

5

4

3

2

1

向*

1

(壂),(望)

2

簿

3

貴*

和*

4

(德)

5

細,佃*

?+田

6

(類)

7

萬,禹,寧

8

(安)

9

「聰」

(耳台)

令*

10

(敎),(受)

「那,鄒,部」

「是,忠,惠, 還,遷」

11

(去)

「還」

(忌)

12

(在)

13

東*

14

夷*

15

16

17

官,宮,營

18

天,大,夭

使

19

깨진부분

20

21

22

「諾,諸,語」

言+?

23

 

 

3-3과 8-22 簿의 좌변은 삼수변(氵)가 아니라 재방변(扌)임

 

10

9

8

7

6

(夷)

1

(疏)**

2

3

扌+?

(境)

4

5

( 凶)

6

「兎,鬼」

7

8

9

10

?+甚

(來)

11

12

營,宮

(官)

13

(大)

14

使

(衆)

15

16

17

(拔)

廿

18

(五)

19

(踐)

足+主**

使

깨짐

(日)

깨짐

20

(動)

(王)

21

簿

22

23

 

 

(※ 각 행의 左側行은 候補로 보는 글자임)

이를 기준으로 하여 필자의 견해를 가지고 選擇 내지 修正과 推定을 하면 다음과 같다.

제2행의 제8자는 ‘來’자로 읽고 ‘夷’를 후보로 보았으나 문맥상 ‘夷’로 읽는 것이 좋을 것으로 본다.

제2행의 제12자는 ‘忌’를 취한다.

제3행에서 제13자는 ‘弟’일 가능성을 제시한다. 제3행의 제18자는 ‘營’을 취하고, 제19자는 ‘天’을 취한다.

제4행에서 제2자는 ‘壂’을 취한다. 그 제9자의 ‘霍’은 ‘藿’으로 수정한다. 제11자는 受를 취한다. 제13자는 字典에는 없지만 ‘艹+丏’자로 수정한다. 艹의 쓰임을 중시하는 것이다.

제5행에서 제6자의 □는 ‘者’로 본다. 제13자의 □는 輩로 본다. 깨어진 부분인 제20자는 ‘衣’자로 추정한다.

제7행의 제13자는 ‘官’을 버리고 ‘營’을 취한다.

제9행에서 제1자는 문맥을 근거로 하여 ‘德’으로 추정한다. 제3자는 ‘夷’로 보고 그 앞의 제2자는 ‘東’으로 추정한다. 제5자는 ‘內’로 추정한다.

제10행의 제6자는 ‘凶’으로 읽고 제7자는 ‘鬼’를 취한다. 제10자는 ‘供’으로 수정한다.

이상의 판독을 근거로 문맥을 끊어 단락을 지어 보면 다음과 같다.

1) 五月中 高麗太王祖王 令□新羅寐錦世世爲願 如兄如弟 上下相和 守天

2) 東夷之寐錦 忌太子共

3) 前部大使者多亏桓奴 主簿貴德 細(類)□(等)(聆)(鄒)(去)弟□到至 跪營天

4) 太子共語 向壂上 共看 節賜太藿鄒 受食[艹+丏] 東夷寐錦之衣服

5) 建立處 用者 賜之

6) 隨者 節□□奴人輩 敎諸位 賜上下衣服

7) 敎東夷寐錦 遝還來

8) 節敎賜 寐錦土內 諸衆人 □□□□□國土 太位 諸位上下衣服 來受 敎 跪營之

9) 十二月廾三□甲寅 東夷寐錦上下 至于伐城

10) 敎來 前部大使者多于桓奴 主簿貴□ □夷境□ 募人三百

11) 新羅土內幢主 下部拔位使者 補奴 □疏奴□□

12) 凶鬼蓋盧 供□募人 新羅土內 衆人跓動······

이상 모두 12단락으로 나누어 보았으나 정확한 판독과 해독이 되지 않는 곳이 있어 부분적인 수정은 할 수 있을 것이다. 대체로 한 단락을 한 문장으로 보았으나 단락에 따라서는 더 세분할 수도 있을 것이다.

4. 碑文의 解讀과 吏讀的 性格

위의 단락을 바탕으로 각 단락을 해독해 보면서 이두적 성격을 고구해 보기로 한다.

1) 五月中 高麗太王祖王 令□新羅寐錦世世爲願 如兄如弟 上下相和 守天

이 단락은 令자 다음의 글자가 판독되지 않아 해독에 어려움이 있다. 令이 옳은 판독이라면 이는 동사가 되어야 하고 그 뒤에는 명사가 오는 것이 일반적이다. 연구회의 판독에서 이 缺字에 대한 의견들로 ‘惠, 忠, 是, 遷, 還’ 등의 견해들이 있음을 제시하였는데 그 가운데 문법적으로 令자 뒤에 올 만한 것은 ‘是’이다. 그러나 新羅寐錦을 是로 지시하는 것은 禮遇에 맞지 않으므로 취하기가 어렵다. 이 缺字를 ‘使’로 보아 복합어 ‘令使’를 상정하면 문맥의 해석이 자연스러울 것으로 생각되지만 碑面에 남아 있는 획의 흐름이 ‘使’로 보기에는 애매하여 어려움이 있다. 이 결자를 ‘使’와 같은 성격의 것으로 보아 消去하고 ‘令新羅寐錦 世世爲願’으로 놓고 해석하여도 그 내용의 宗旨를 파악하는 데는 어긋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이 놓고 해석하면 ‘新羅寐錦으로 하여금 世世로 願하게 하였다’와 같이 해석된다. ‘如兄如弟 上下相和’는 ‘兄弟와 같이 上下가 서로 화목한다’가 된다. ‘守天’은 ‘하늘을 지키다’이니 ‘하늘의 道理를 지킨다’는 의미로 보아 하늘에 대하여 맹세하라는 뜻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 단락을 해석하면

5월 중에 高麗大王의 祖王이 新羅寐錦으로 하여금 誓願을 하되 世世로 형제와 같이 上下가 和 睦하고 하늘의 도리를 지키도록 하라고 令하였다(令을 내렸다).

가 된다.

여기서의 願은 단순한 所願이 아니라 뒤의 守天과 맥락이 이어져 신라의 삼국시대 금석문에 흔히 보이는 ‘天前誓(壬申誓記石)’, ‘誓事之(南山新城碑)’와 같은 ‘誓願’의 뜻으로 쓰인 것으로 생각된다. 현대어의 盟誓의 뜻이다. ‘如兄如弟’는 高句麗와 新羅의 관계를 말한 것이니 兄이 高句麗이고 弟가 新羅임은 논의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五月中의 中은 月까지만 분명하고 그 날짜가 분명치 않아서 사용된 것이다. 이 일이 있은 지가 오래되어 그 날짜를 정확히 기록할 수 없어서, 다시 말하면 高麗太王의 祖王인 長壽王 때 있었던 일의 날짜를 그 손자인 高麗太王(文咨王) 때는 정확히 알 수가 없어서 中자만으로 기록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令□新羅寐錦世世爲願 如兄如弟 上下相和 守天’도 한문의 어순으로는 어색하게 보인다. 최소한 ‘令□新羅寐錦 世世 願爲如兄如弟 上下相和 守天’으로 하여 願자와 爲자의 순서를 바꿔 놓아야 한문으로서는 문법에 맞는다. ‘······爲願’으로 끊으면 ‘如兄如弟 上下相和 守天’이란 표현은 우리말의 순서에 따른 이두적 표현으로 생각된다.

‘寐錦’은 ‘麻立干’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인데 ‘尼師今’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음을 제시한 견해도 있다. 전자는 ‘寐’와 ‘麻立’의 음이 유사하고 후자는 ‘錦’과 ‘今’의 음이 유사하여 音韻上으로는 어느 것이 옳다고 하기 어렵다. 다만 이 칭호는 당시의 신라 통치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2) 東夷之寐錦 忌太子共

이 문장은

東夷의 寐錦이 太子 共을 꺼리었다(忌避하였다).

로 해석된다.

字形上으로는 ‘東夷’를 ‘東來’로도 볼 수 있으나, ‘東來’라 하면 ‘東쪽으로 오다’의 뜻으로 풀이하는 것이 원칙인데 寐錦은 ‘동쪽에서 충주 지역으로 온 것’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에 해석에 어려움이 있다. 이 비문에서 ‘東夷’가 신라를 가리킴은 여러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共’은 太子의 이름으로 본다. 삼국사기에는 文咨王의 아버지를 助多라 하였으나 共이란 이름도 사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일례로 文咨王의 이름은 史書에서 ‘羅運’, ‘明理好’, ‘高雲’, ‘雲’으로 나타나서 서로 유사성을 찾을 수 없는 이름이 사용된 점이 참고된다.

太子 共은 長壽王의 令을 받들고 이를 실천하기 위하여 이 지역으로 내려 왔던 것이다. 이 뒤의 사건들은 모두 이 太子 共이 중심이 되어 진행된 것이다.

3) 前部大使者多亏桓奴 主簿貴德 細(類)□(等)(聆)(鄒)(去)(弟)□ 到至 跪營天

이 단락은 主簿貴德 이하의 판독이 어려워 구체적인 내용을 파악하기가 힘들다. 앞의 2)에서 말한 ‘東夷의 寐錦이 太子 共을 꺼리었다’는 일에 대한 後續措置로 보아

前部大使者인 多亏桓奴와 主簿인 貴德이 (어떤 조치를 하여) 某人(弟)으로 하여금 이 곳에 이 르러 營天에 꿇어앉았다.

로 풀이될 것이다. ‘弟’가 판독상 애매한 면이 있지만 이것이 某人에 해당되고 그 뒤의 缺字는 人名으로 생각된다. ‘到至 跪營天’의 판독이 분명하다면 이 앞에 반드시 인명이 나올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 인물은 東夷寐錦과 매우 가까운 사람일 것으로 생각된다.

多亏桓奴는 大使者의 이름으로 보고 主簿는 그보다 下位에 있는 사람으로 본다. 前部大使者 多亏桓奴를 앞의 2)에 이어지는 것으로도 생각해 보았으나 太子와 大使者를 同格으로 놓는 것도 무리가 있고 뒤의 단락 10)에서도 前部大使者 多亏桓奴와 主簿 貴德이 함께 나오므로 이들을 하나의 단위로 묶었다.

營天은 營을 높여서 칭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하늘과 같이 높으신 이가 있는 營’의 뜻으로 해석하여 太子의 營으로 보거나 그렇지 않으면 단락 1)의 ‘守天’과 맥락을 지어 ‘天神을 모셔 놓은 營’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여기서는 후자일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보면 ‘到至 跪營天’도 ‘到至’의 목적어나 보어가 없어 한문으로서는 어색한 것이다. 우리말 순서대로 ‘到至하여 營天에 꿇어앉았다’로 해석해야 뜻이 통한다.

4) 太子共語 向壂上 共看 節賜太藿鄒 受食[艹+丏] 東夷寐錦之衣服

이 단락을 직역하면

太子 共이 말하기를 壂上을 향하여 함께 보자고 하고 이 때에 太藿鄒를 賜하고 食[艹+丏]과 東夷寐錦의 衣服을 授與하였다.

가 된다.

‘向壂上 共看’은 단락 1)의 守天을 위하여 행한 儀式으로 생각된다. 太藿鄒와 食[艹+丏]은 植物로서 고대사회에서는 部族이나 國家間의 親睦을 상징하는 徵表로 祭儀式에 따라 주고받던 것이 아닌가 한다. 東夷寐錦之衣服은 寐錦에게 직접 준 것이 아니라 단락 3)에서 왔다고 한 사람(弟)을 통하여 전달한 것이다.

受食[艹+丏]의 受는 이두에서 흔히 授의 뜻으로 사용된다.

節은 후대의 이두에서 ‘디위, 지위’로 읽고 ‘이 때에’, ‘이 臨時해서’의 뜻으로 사용하였다. 이제까지 고구려의 이두에서는 節자의 용례가 平壤城壁刻書에 쓰인 것만이 알려져 왔다. 즉

己丑年五月二十一日 自此下向東十二里 物省(苟)小兄 俳須百頭□ 節矣

에 쓰인 ‘節矣’가 그것인데 이 節은 ‘지휘하다’의 뜻으로 쓰인 것이다. 節이 ‘이 때에’의 뜻으로 쓰인 것은 신라의 삼국시대 금석문에 자주 나타나는 것이어서 나는 양국의 節의 용법이 서로 달랐던 것으로 생각하여 왔었다. 이제 삼국시대의 신라보다 앞서는 시기에 고구려의 비문에서 ‘이 때에’로 쓰이는 節의 예들이 발견됨은 자못 의미가 크다. 이 역시 신라의 이두가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발달한 사실을 말하여 주는 중요한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5) 建立處 用者 賜之

이 단락은 ‘建立處는 使用者에게 주었다’로 해석된다. 建立處는 어떤 建物일 것으로 생각되는데 어떤 목적으로 建立한 것인지는 이 碑面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현재 판독이 안 되는 앞의 碑面에서 언급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賜之의 之는 指示代詞로 한문의 용법에 따라 사용된 것이다. 그러나 이 구의 어순은 우리말의 어순에 그대로 들어맞는다.

6) 隨者 節□□奴人輩 敎諸位 賜上下衣服

이 단락은

따라온 者들인 이 때의 □□奴人輩들에게도 諸位에게 명하여 上下에 따라 衣服을 賜하도록 하 였다.

로 해석된다. 한편 隨者를 접속어로 보아 ‘따라서’, ‘이어서’로 해석하고 단락 5)의 ‘下賜한 것에 뒤이어’의 뜻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게 보는 것이 문맥의 흐름은 자연스러울 것으로 생각되지만 이러한 隨者의 용례가 하나뿐이어서 단언하긴 어렵다. 奴人輩는 앞의 단락 3)에서 ‘到至 跪營天’하였다고 한 東夷人의 隨行者일 것이다. 諸位는 고구려의 官職者로 본다. 여기서의 衣服은 官服의 성격을 띠는 옷으로 고구려에 親和的임을 나타내는 옷일 것으로 생각된다.

7) 敎東夷寐錦 遝還來

이 단락은 ‘東夷寐錦이 뒤따라 돌아올 것을 敎(지시, 명)하였다’로 해석된다. 敎는 ‘왕이나 제후가 명하다’로 해석하여 뜻이 통하지만 본래는 ‘가르치다’의 의미이므로 보통의 ‘명하다’보다는 부드러운 뜻일 것으로 생각된다. 遝은 ‘뒤미처 따라오다’의 뜻이니 3)의 단락에서 먼저 온 신하의 뒤를 따라옴을 말하는 것이다. 還來는 ‘돌아오다’의 뜻이니 이로써 전에 東夷의 寐錦이 고구려의 首腦와 만나기 위하여 왔다가 만나지 않고 돌아간 일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8) 節敎賜 寐錦土內 諸衆人 □□□□□國土 太位 諸位上下衣服 來受 敎 跪營之

이 단락은

이 때에 寐錦土內의 여러 사람들에게도 □□을 주도록 명하고 □□國土의 太位와 諸位의 上下 들은 衣服을 와서 받으라고 명하여 營에 (와서) 꿇어앉았다.

로 해석된다.

‘寐錦土內 諸衆人’은 이 때에 이 곳에 오지 않고 신라의 국내에 있던 사람들을 가리킨다. 앞에서는 이 곳에 출두한 사람들에게 下賜品을 준 것인데 이 8)의 단락은 출두하지 않은 신라인들에게도 下賜品을 주도록 지시한 것이다. ‘□□國土 太位 諸位上下’에게는 衣服을 와서 받아가도록 지시한 것인데 앞의 ‘諸衆人’들에게 下賜한 물품은 衣服보다는 격이 떨어지는 것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구에서 ‘太位 諸位上下衣服 來受 敎’는 우리말의 어순이다. 그 끝의 敎는 해석하기에 애매한 점이 있다. 위와 같이 ‘來受 敎’로 끊으면 ‘來受하도록 명한 것’이 되고 ‘敎 跪營之’로 끊으면 ‘와서 營에 꿇어앉도록 명한 것’이 된다. 후자로 보면 한문의 어순에는 맞는 것이 되나 그 해석은 고구려의 태자가 ‘신라의 귀족들에게 꿇도록 명한 것’이니 매우 高壓的으로 新羅人을 대한 결과가 되어 懷柔하기 위한 대우로는 지나친 처사가 아닐까 한다.

跪營之의 之는 명사 營의 뒤에 연결되어 문장의 終結辭로 쓰인 것이다. 이는 廣開土大王비의 ‘守墓之’의 용법과 같은 吏讀 表現이어서 매우 중요한 사실을 말해 주는 용례이다. 단락 5)의 ‘賜之’의 之와는 성격이 다른 語助辭이다. 대체로 之로 문장을 종결하면 한 단락이 끝남을 나타낸다.

9) 十二月廾三日甲寅 東夷寐錦上下 至于伐城

이 단락은

12월 23일(甲寅)에 東夷寐錦의 上下가 于伐城에 이르렀다.

로 해석된다. 지난 5月에서부터 고구려가 신라를 懷柔한 결과가 드디어 이 때에 성취된 것이다. 12월 23일이라고 그 날짜를 정확하게 기록한 것도 이 사건이 역사상 중요한 의미가 있어 기록하여 놓았기 때문에 이 비문에도 새길 수 있었을 것이다. 于伐城은 이 비가 세워진 곳이거나 가까운 곳에 있는 城일 것이다.

10) 敎來前部大使者多于桓奴·主簿貴德 □夷境□ 募人三百

이 단락의 缺字는 ‘主簿貴德 東夷境內’로 추정할 수 있다. 이렇게 추정하고 해석하면,

前部大使者 多于桓奴와 主簿 貴德을 오게 하여 東夷의 境內에서 300명을 모집하도록 명하였다.

가 된다. 여기서 300명을 모집한 목적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뒤의 12단락에도 ‘募人’의 기록이 나오는데 이와 대조되는 사건으로 보인다. ‘敎來前部大使者多于桓奴·主簿貴德’의 어순은 한문으로서는 어색하여 ‘敎前部大使者多于桓奴·主簿貴德來’라고 하여야 할 것으로 생각되고 ‘東夷境內 募人三百’도 한문의 어순이기보다는 우리말의 어순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11) 新羅土內 幢主 下部拔位使者 補奴 □疏奴□□

이 단락은 ‘新羅土內의 幢主인 下部 拔位使者 補奴가 奴□□을 □疏하였다’로 해석될 것인데 缺字부분을 추정할 수가 없어 그 내용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결자 부분은 뒤의 단락에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新羅土內幢主 下部拔位使者는 고구려의 관리로 拔位使者의 官階는 翰苑에서 제8등으로 보고 있다.

12) 凶鬼蓋盧 供□募人 新羅土內 衆人跓動······

이 단락은

凶鬼 蓋盧가 新羅 땅 안에서 □을 供與하면서 사람들을 모집하니 衆人이 머뭇거리면서 움직이 어······.

로 해석된다. ‘供□’은 ‘應募하는 대가로 어떤 물건을 제공한 것’을 말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 단락은 백제의 蓋盧王이 단락 10)에서 행한 고구려 측의 처사와 유사한 행동을 하였음을 나타낸 것인데 이는 백제도 이 지역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募人’의 목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지역에 대한 고구려와 백제의 영향력이 서로 대립하고 있음을 나타내고자 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 일들이 있은 지 얼마 안 되어서 백제의 蓋盧(蓋鹵)王이 長壽王에게 패하여 살해된 것은 역사상 잘 알려진 일이다.

5. 結 語

이제까지의 검토로 이 中原高句麗碑의 제3면의 비문을 해독하고 아울러 그 이두적인 성격을 찾아 보았다. 이로써 이 비문의 내용과 성격이 어느 정도는 드러난 것으로 생각된다. 다음에 이제까지 고구한 것을 정리하여 보기로 한다.

우선 이 비는 4面碑이고 현재의 正面으로 보이는 면은 실은 제3면인 것으로 보았다. 이 비는 文咨王이 그 4년(495)에 南巡하였을 때 세운 巡幸碑나 巡狩碑일 것으로 보았다.

현재의 정면으로 보는 면의 첫머리에 나오는 ‘高麗太王祖王’은 文咨王의 할아버지인 長壽王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비의 끝행인 제10행에 나오는 ‘凶鬼蓋盧’는 백제의 蓋鹵王을 고구려 측에서 부른 것으로 보았다.

이 제3면의 비문을 모두 12 단락으로 나누어 해석하였는데 다음에 각 단락의 해석을 종합해 보기로 한다.

1) 5월 중에 高麗大王의 祖王이 新羅寐錦으로 하여금 誓願하여 世世로 형제와 같이 上下가 和睦 하여 하늘의 도리를 지키게 하라고 令을 내렸다.

2) 東夷의 寐錦이 太子 共을 꺼리었다(忌避하였다).

3) 前部大使者인 多亏桓奴와 主簿인 貴德이 (어떤 조치를 하여) 某人(弟)으로 하여금 이 곳에 이 르러 營天에 꿇어앉게 하였다

4) 太子 共이 말하기를 壂上을 향하여 함께 보자고 하고 이 때에 太藿鄒를 賜하고 食[艹+丏]과 東夷寐錦의 衣服을 授與하였다.

5) 建立處는 使用者에게 주었다.

6) 따라온 者들인 이 때의 □□奴人輩들에게도 諸位에게 명하여 上下에 따라 衣服을 賜하도록 하였다.

7) 東夷寐錦이 뒤따라 돌아올 것을 敎(지시)하였다.

8) 이 때에 寐錦土內의 여러 사람들에게도 □□을 주도록 명하고 □□國土의 太位와 諸位의 上 下들은 衣服을 와서 받으라고 명하여 營에 (와서) 꿇어앉았다.

9) 12월 23일(甲寅)에 東夷寐錦의 上下가 于伐城에 이르렀다.

10) 前部大使者 多于桓奴와 主簿 貴德을 오게 하여 東夷의 境內에서 300명을 모집하도록 명하였 다.

11) 新羅土內에 있는 幢主인 下部 拔位使者 補奴가 奴□□을 □疏하였다.

12) 凶鬼 蓋盧가 新羅 땅 안에서 □을 供與하면서 사람들을 모집하니 衆人이 머뭇거리면서 움직 이어······

이 내용을 종합하면 長壽王의 명을 받은 太子 共이 이 지역에 내려와서 신라를 懷柔하였고 이 지역에 백제의 영향력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고구려가 신라를 대하는 태도를 엿볼 수 있는데 전반적으로는 그 표현이 高壓的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끝내는 신라왕이 회유에 따라 옴으로써 고구려의 목표는 성취된 것이라 하겠다. 이 회유가 5월에 시작하여 12월에 신라의 寐錦이 왔으니 7개월이나 걸린 셈이다. 이는 신라의 자세도 만만치 않았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工作이 고구려가 백제의 蓋鹵王을 치기 이전에 있었음을 감안하면 이 지역의 정치·군사적인 형편이 어떠하였던가도 짐작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비문에 나타나는 이두적인 성격은 어순과 형태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이두적인 어순으로 보이는 것을 들면 다음과 같다.

1) ······爲願 如兄如弟 上下相和 守天

3) 到至 跪營天

5) 建立處 用者 賜之

8) 太位 諸位上下衣服 來受 敎 跪營之

10) 敎來前部大使者多于桓奴·主簿貴德

東夷境內 募人三百

이두적인 형태는 ‘節’과 ‘之’가 있다. ‘節’은 ‘이 때에’, ‘이 臨時에’로 해석되는 것으로 후대의 이두에서 ‘디위’, ‘지위’로 읽힌 것이다. ‘之’는 ‘跪營之’에 쓰인 것인데 이는 ‘也’나 ‘矣’와 같은 어조사로 쓰이어 신라시대의 이두에선 ‘-다’로 읽힌 것이다. 이들은 한문의 용법에서 벗어난 문법을 보여주는 것인데 신라의 이두에도 그대로 쓰이고 있다. 이는 고구려의 이두가 신라의 이두에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節’은 이 비문에 처음 나타나는 것으로 高句麗 吏讀의 새로운 용례를 보여 주는 것이다. ‘敎’도 이두가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보았으나 한문의 용법에서 크게 벗어난 용례는 아니어서 이를 이두로까지는 보기 힘들 것으로 생각된다. 이 비문에는 文末의 語氣詞가 비교적 적게 쓰였는데 이도 이두적인 표현의 결과가 아닌가 한다.

參 考 文 獻

金貞培(1979), 中原高句麗碑의 몇 가지 問題點, 「史學誌」13, 檀國大史學科.

邊太燮(1979), 中原高句麗碑의 內容과 年代에 대한 檢討, 「史學誌」13, 檀國大史學科.

申瀅植(1979), 中原高句麗碑에 대한 一考察, 「史學誌」13, 檀國大史學科.

李基文(1981), 吏讀의 起源에 대한 一考察, 「震檀學報」52, 震檀學會.

李基白(1979), 中原高句麗碑의 몇 가지 問題, 「史學誌」13, 檀國大史學科.

李丙燾(1979), 中原高句麗碑에 대하여, 「史學誌」13, 檀國大史學科.

任昌淳*1979), 中原高句麗碑 小考,「史學誌」13, 檀國大史學科.

鄭永鎬(1979), 中原高句麗碑의 發見調査와 硏究展望, 「史學誌」13, 檀國大史學科.

홍기문著(1957), 「리두연구」, 과학원출판사.

小川環樹(1980), 稻荷山古墳의 鐵劍銘과 太安萬侶墓誌의 漢文에 있어서의 Koreanism에 대하여, 「京都産業大學 國際言語科學硏究所所報」1.3.

  

履 歷 書

姓名; 남 풍 현 ( 南 豊 鉉 ) 生年月日; 1935년 3월 3日

本籍; 서울特別市 瑞草區 瑞草洞 1709-3

現住所; 上 仝

學 歷

1955. - 1960. 서울大學校 文理科大學 國語國文學科 文學士.

1961. - 1965. 서울大學校 大學院 國語學專攻 文學碩士.

1975. - 1981. 서울大學校 大學院 國語學專攻 文學博士.

經 歷

1968, 3. - 1972, 8. 漢陽大學校 專任講師, 助敎授.

1972, 9. - 2000, 8. 檀國大學校 文科大學 國語國文學科, 助敎授, 副敎授, 敎授.

1985, 9. - 1987, 5. 檀國大學校 文理科大學 學長.

1990, 9. - 1992, 8. 仝 大學院長.

1994, 3. - 1995, 2.. 國語學會 副會長, 會長.

1997, 4. - 1999, 4. 韓國古文書學會 會長.

2000, 3. - 2000, 10. 현재. 口訣學會 會長.

2000, 9. - 현재. 檀國大學校 名譽敎授.

硏 究 業 績

< 著 書 >

1981, 8. 「借字表記法 硏究」, 檀大出版部.

1999, 8. 「國語史를 위한 口訣硏究」, 太學社.

1999, 12. 「瑜伽師地論 釋讀口訣의 硏究」. 太學社.

2000, 10. 「吏讀硏究」, 太學社.

< 論 文 >

1974. 12. 13世紀 奴婢文書와 吏讀, 「檀國大論文集」 8.

1982. 10. 借字表記法の`?'字について, 「朝鮮學報」 105, 朝鮮學會.

1983. 1. 昌寧仁陽寺碑의 吏讀文 考察, 「國文學論集」 11, 檀國大.

1989. 12. 明活山城 作城碑文의 語學的 考察, 「國語國文學論叢」, 二靜鄭然粲先生回甲紀念

論叢 塔出版社.

1990. 5. 迎日冷水里 新羅碑의 語學的 考察, 「基谷姜信沆先生華甲紀念論文集」, 太學社.

1991. 10. 新羅 禪林院鐘銘의 吏讀文 考察, 「徐在克先生 回甲紀念論叢」, 계명대학교.

1991. 10. 新羅華嚴經寫經造成記에 대한 語學的 考察, 「東洋學」 21, 檀國大東洋學硏究所.

1991. 12. 无盡寺鐘銘의 吏讀文 考察, 「李承旭先生 回甲紀念論叢」.

1992. 7. 正倉院 所藏 新羅帳籍의 吏讀 硏究, 「中齋張忠植博士華甲紀念論叢」, 단국대출판부.

1993. 3. 新羅時代 吏讀文의 解讀, 「季刊書誌學報」 9號, 韓國書誌學會.

1994. 5. 高麗初期의 帖文과 그 吏讀에 대하여, 「古文書硏究」 5.

1996. 10. 古代國語의 吏讀, 「古文書硏究」 9·10, 韓國古文書學會.

1997. 12. 淨兜寺造塔形止記의 解讀, 「古文書硏究」 12, 韓國古文書學會.

이밖에 논문 100여편.

 

                                                       [옮겨온 글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