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2월 11일 김종필(JP) 자민련 명예총재(왼쪽 앞줄 다섯째)와 그 옆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이 베이징 중난하이에서 회담을 마친 뒤 양측 관계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뒤편에 대형 매화나무 그림이 걸려 있다. JP는 그림 속 ‘枯木逢春(고목봉춘)’ 글귀 풀이로 대화를 이끌었다.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예정 시간 30분을 훌쩍 넘긴 두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사진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103> 정치 인생과 유묵(遺墨)
이순신 ‘서해어룡동(誓海魚龍動)…’
백의종군한 영웅의 민족혼 상징
박정희, 충무공 존경 현충사 성역화

자민련 명예총재였던 나와 장쩌민 주석의 면담 장소는 중국 권부(權府)의 심장인 중난하이(中南海) 그의 집무실이었다. 그곳에 들어서자 벽에 걸린 커다란 매화나무 그림이 먼저 내 눈에 들어왔다. 굵은 고목의 매화나무 줄기에 붉은 매화꽃이 피어 있는 대형 그림이었다. 장 주석과 인사를 나눈 뒤 그 그림을 가리키며 그에게 물었다.
“그림 옆에 고목봉춘(枯木逢春)이라고 써 있습니다. 이는 공산주의 체제하에서 시장경제를 하자는 뜻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중국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던 등소평 지도자의 생각인 겁니까.”
‘마른 나무가 봄을 맞이한다-’. 고목봉춘을 내 나름대로 풀이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 말에 장쩌민 주석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여기에 수많은 사람이 왔지만 저 글귀를 해석한 사람은 김 명예총재뿐입니다”고 했다.

김구 선생이 1946년 쓴 이순신 장군의 시 ‘誓海魚龍動(서해어룡동) 盟山草木知(맹산초목지)’. 과거 김종필 전 총리가 소장했던 이순신 장군 친필 액자 속 구절과 같다. [중앙포토]
면담은 다양한 화제 속에 깔끔하고 의미 있게 정리됐다. 내가 대통령 당선자 DJ의 친서를 전달하면서 DJ의 ‘동북아 평화와 안정을 위한 6개국 선언’ 구상을 설명하자 장 주석은 “취지를 충분히 이해하고 찬동한다”며 긍정적 반응을 나타냈다. 매화 그림 속 고목봉춘의 네 글자가 만남을 의기투합하는 분위기로 이끌었다. 그림과 글씨에는 포착하기 힘든 묘한 힘이 담겨 있다.
서화(書畵)의 매력은 굳이 누군가와 함께가 아니더라도 작품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점이다. 50년 넘는 세월의 흔적이 내려앉은 나의 청구동 집에는 언제든 내 대화 상대가 되어 주는 작품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은 우리 선인들이 남긴 서화들이다. 작품 하나하나에 그들의 삶과 민족과 시대의 마음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예전 한때 거실 옆 작은방 벽에 걸려 있던 충무공(忠武公) 이순신 장군의 친필 소액자는 내가 소중히 여겼던 작품이었다.
임진·정유 국난을 막아냈던 민족의 영웅이 남긴 행서(行書)였다. ‘誓海魚龍動(서해어룡동) 盟山草木知(맹산초목지) -閑山座中汝諧書(한산좌중여해서)’. 풀이하자면 ‘바다에 호국(護國)의 충성을 서약하니 어룡조차 감동하여 꿈틀거리고 태산에 맹세하니 초목도 다 알아채더라’는 뜻이다. 왜적을 쳐부술 각오와 휘하 장병들의 기백을 고무케 하는 비장함이 서려 있다. 동시에 그 행간엔 고독한 영웅의 심정이 애달프게 퍼져 있다. 모함과 중상으로 자신을 괴롭히는 세력에 대해 피를 토하듯 한탄이 배어 있다.
오래전에 충무공 연구의 권위자인 노산(鷺山) 이은상 선생이 내게 이렇게 설명해 주었다. 글씨의 진가(眞假)는 알 수 없지만, 충무전서에 낙구(落句)로 전해지는 구절이라고 했다. 이승만 대통령과 김구 선생은 생전에 이 시구를 따라 써서 남기기도 했다. 격동의 해방공간에서 서로의 길은 달랐지만 두 애국자 모두 충무공의 글귀에 가슴이 뛰었으리라고 짐작한다.

석파 이하응(1820~1898)
충무공의 글씨가 걸려 있던 벽면 맞은편에 조선 말기의 기걸(奇傑) 흥선대원군의 난초병풍을 둘러쳐 놓은 것이 70년대 나의 청구동 풍경이었다. 병풍은 여섯 폭의 난초 그림을 12곡으로 접은 모양새였다. 낭인생활에서 절대권력을 쥐면서 대원군 자리에까지 올랐던 석파(石坡) 이하응. 그는 ‘10년 세도’가 꺾인 뒤 실의와 좌절의 생을 보냈다. 대원군의 특이한 성격과 봉건·권위주의적 경륜은 자신의 고초를 자초했었다. 며느리 민비(명성황후)에게 내몰려 청나라에 끌려가 유폐되기를 3년여, 환국 후엔 별장인 아소정(我笑亭)에서 난초를 그리며 외로이 칩거했다. 가파른 돌 벽에 붙어 향기 그윽한 꽃을 피워내는 난초는 기품 있고 고고한 선비의 표상이다. 석파의 난초병풍엔 특징이 있었다. 난초 그림 중 두 장에선 난초의 잎사귀를 기역(ㄱ)자로 꺾어 놨다. 자신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 세상, 고난을 맞닥뜨려 뜻이 꺾이고만 좌절을 난엽(蘭葉)으로 표현한 것이리라.
김종필(JP) 전 총리의 청구동 집에 걸려 있는 김옥균의 ‘如環之無端(여환지무단)’ 서액. ‘옥가락지의 끝이 없음과 같은 원만’이란 뜻을 담고 있다. 김옥균이 갑신정변에 실패한 뒤 일본으로 망명했을 때 썼다. 거실에 걸린 ‘笑而不答(소이부답)’과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조문규 기자]
대원군은 병풍에 쓴 자필 화제(畵題)에 “내가 난을 그림은 천상에서 부귀를 누리는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요, 오직 천하에서 고뇌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함이니라”고 하고 ‘석파 칠십수’란 서명을 붙였다.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대원군의 만년 작품이었다. 석파는 그 글 그대로 갖은 고뇌를 되씹으며 불우한 말년의 자신을 위로하고 타이르며 붓을 잡았을 것이다. 나 또한 자의반 타의반(自意半 他意半)의 외유 시절, 5·17사태 뒤 칩거 시절에 캔버스를 꺼내 들고 화필을 잡곤 했던 때가 있다.
내가 고이 간직했던 이순신 장군과 흥선대원군 두 사람의 유묵(遺墨)은 오래전에 사라져 그 행방을 알 수 없게 됐다. 80년 5·17 때 신군부 세력에 의해 나는 보안사 서빙고 분실에 구금됐고, 청구동 집에 들이닥친 군인들이 수십 점의 서화를 강제로 빼앗아 가지고 갔다. 어디엔가는 남아 있을 그 작품들과 다시 대면할 날이 오기를 소망해온 지도 어느덧 35년이 지났다.
그런 와중에도 여전히 내 곁에 남아 마주하는 글씨로는 고균(古筠) 김옥균의 서액(書額)이 있다. ‘如環之無端(여환지무단)’- 혁명가답지 않게 또박또박 단정한 글씨다. 그가 갑신혁명에 실패한 뒤 일본에 건너가 울분을 달래며 쓴 글이다. ‘옥가락지의 끝이 없음과 같은 원만’에 대한 바람이 담겨 있다. 혁명이 삼일천하로 막을 내린 뒤 그는 모난 자신의 천성을 의식하고 이러한 경구를 좌우명으로 삼았을 것이다. 김옥균의 갑신혁명 계획은 무모했다. 지나치게 타력(일본)에 의존했기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는 차근차근 국내 엘리트 세력을 조직해서 자주적인 혁신을 기했어야 한다. 그랬다면 우리의 근대화가 반세기쯤 앞당겨질 수 있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김옥균과 흥선대원군은 동시대인이었으나 인연을 맺지 못했다. 고균은 대원군이 배척한 안동 김씨의 일문이었고 그가 두각을 나타낸 그때 대원군은 중국에서 유배생활 중이었다. 만약 이들이 서로 이해하고 합심했다면, 그리하여 조선을 개화와 근대화의 길로 이끌었다면, 하는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해 본다.
1층 작은방에 걸린 김옥균의 ‘여환지무단’은 바로 옆 거실 위에 붙어 있는 편액 속 ‘笑而不答(소이부답)’과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60년대 중반쯤 내가 어머니처럼 따랐던 박현숙 의원께서 가져다 주신 글씨다. 일제시대 독립운동에 투신해 고난을 겪으셨던 박현숙 의원은 후진들을 자식처럼 아껴 주셨다. 그분은 옆구리에 끼고 온 액자를 내게 보이며 “이거 읽어봐요”라고 하셨다. 내가 “소이부답. 어디서 본 듯합니다”고 답하자 웃으면서 이렇게 당부하셨다. “추사(秋史)의 서체를 닮았지요. 이것을 생활에 둘도 없는 다듬어진 자세로 유지하도록 해요.” 나는 “예,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고 답하고 거실에서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편액을 걸었다.
‘미소 지을 뿐 대답하지 않는다’는 소이부답. 불꽃같은 혁명의 저돌성으로 가득 찼던 5·16 때의 나였다면 그 글귀가 와 닿지 않았을 것이다. 액자를 받은 그 무렵 나는 이미 거친 풍파에 시달리며 많은 일을 겪었고 마음속 불덩어리가 조금씩 식어 가고 있었다. 그 대신 직설보다는 함축, 단선과 단정(斷定)보다는 은유와 절제의 묘미에 의존하고 있었다. 40년 넘게 정치를 하면서 받은 많은 질문에 내가 가장 많이 내놓은 답이 아마도 소이부답이었을 게다. 나는 선인들의 유묵(遺墨)이 주는 교훈을 되새기며 사념에 잠겨 왔다. 그 글씨들에 담긴 철리(哲理)를 음미하면서 세상의 이치와 지혜를 얻으려 했고, 때로는 비감(悲感)과 분노를 달랬다. 오늘도 나는 소이부답과 여환지무단을 마주하고 있다.
정리=전영기·한애란 기자 chun.yongggi@joongang.co.kr
사진=조문규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