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하운 시인 수양딸 이복실 여사와 남편 최성철씨에게서 들어보는
한하운 시인의 사랑이야기
이복실 여사는 15살 당시 명동에서 낮에는 일하고 야간 고등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한하운 시인과 절친한 박거영 시인이 거리에 시집을 펴놓고 팔았다고 한다. 이때 이복실 여사는 그 앞을 오고갈 때마다 그곳에서 책을 펼쳐 읽곤 하였는데, 이곳에서 박거영 시인과 함께 있던 한하운 시인이 시집을 집에 가지고 가서 읽고 나중에 갖다 놓으면 된다고 하셨다고 한다. 돈을 내지 않는데도 책을 가져가라고 하는 것은 한하운 시인이 이복실 여사를 믿고 있었다고 우리가 추측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렇게 한하운 시인을 만나게 되었고 그때부터 이복실 여사는 유네스코 건물 뒷골목에 위치한 한하운 시인의 3층 건물의 맨 위층 3층 사무실에 다니게 되었다고 하며 거기서 서정주 시인, 노천명 시인 등 당대의 유명한 시인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이복실 여사는 자연스럽게 한하운 시인을 만나는 중에 한하운 시인의 따뜻한 인격을 접하게 되었고 어느 때부터인가 한하운 시인을 아버님으로 부르게 되었고 한하운 시인도 ‘그래 우리 딸 하자’며 좋아하셨다고 한다. 피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실제적으로 부녀지간이 되었으며 서로의 일을 여느 부녀지간 못지않게 서로 돌보아주는 관계가 되었다는 것이 이복실 여사와 최성철(이복실 여사의 남편) 정음연구회 회장의 이야기였다.
특히, 최성철 정음연구회장은 한하운 시인이 이복실 여사의 아버님이셨기 때문에 한하운 시인의 옥탑 사무실에서 이복실 여사와 함께 만나 뵙고 결혼허락을 받았다고 한다. 이복실 여사와 최성철 씨가 한하운 시인을 뵈려고 갔을 때 한하운 시인은 이복실 여사에게 한하운 시인이 좋아했던 술인 ‘빼갈’과 안주 등을 사오도록 밖으로 내보낸 뒤에 최성철 씨에게 “내 부탁을 들어줄 수 있겠나”라고 물어보시고 “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면 어떤 일이든 하겠습니다.”라고 답하니 “우리 딸을 글쟁이로 만들지 않겠다고만 약속한다면 결혼을 허락해 주겠다.”고 말씀하셔서 “네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하여 결혼 허락을 받아낸 사실을 이야기하였다. 한하운 시인이 이복실 여사를 얼마나 애틋하게 생각하셨나 하는 부분이다. 본인이 눈물로 쓰는 시를 자신의 딸인 이복실 여사가 이어가면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든 것인가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글쟁이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아버지 한하운의 간절한 심정이었던 것이다.
이복실 여사와 한하운 시인은 부녀지간의 관계로서 한 시대를 같이 살았다. 최근에 발행된 한하운 시인의 시집 ‘황톳길’도 이복실 여사가 한하운 시인으로부터 물려받아 보관하던 시집 원본을 책으로 묶어 세상의 빛을 보게 한 것이다. 이복실 여사가 한하운 시인의 수양딸이 맞느냐 아니냐하는 문제는 이제 문단에서 접어두어야 한다. 그렇게 이야기하면 한하운 시인의 가슴에 또 아픔을 주는 것이 되는 것이다. 한하운 시인과 이복실 여사는 한 시대를 아픔으로 살았던 부녀지간이다. 이는 법적으로 서류가 완비된 부부가 있는 것과 법적인 서류는 갖추지 않았지만 실제적으로 같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사실혼으로 법적으로 인정하는 경우와 같다.
이복실 여사는 “아버지는 참 따뜻한 분이셨어요. 아버지는 부평의 신명보육원과 서울 상도동의 청운보육원을 설립했고, 젖먹이도 병이 옮길까봐 억지로라도 떼어내 보육원에서 키우셨으며, 아버지는 영어와 일어를 잘 하셔서 미군부대와 소통을 하시게 되었고 미군부대에서는 먹고 남은 식량들을 보육원에 매주 갖다 주었어요. 아이들이 공부를 하겠다는 의지만 있으면 대학까지 공부를 꼭 할 수 있도록 보살펴 주었어요. 저 역시 한하운 장학금으로 성균관대학교를 졸업할 수 있게 되었어요. 시인이면서 훌륭한 교육자였어요.”라고 말하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또한 이복실 여사는 결혼하고 첫아이를 낳아 한하운 아버지께 보여드리고 싶어 아이를 업고 옥탑 방에 갔었는데 아버지는 “여기가 어디라고 아이를 업고 왔느냐”며 “돌아가라”고 천둥처럼 소리를 쳐 너무 속이 상해 되돌아오면서 울고 또 울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혹시나 아이에게 나병이 옮길까봐 한하운 시인의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하신 말씀이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그때는 너무나 가슴이 아팠는데 그것은 어린 아이와 이복실 여사를 사랑하시는 깊은 뜻이 있었던 것이었음을 후에 알게 되었다고 말하며 이복실 여사는 과거를 깊게 회상하였다. 어른들은 옮길 확률이 거의 없지만 나병이 면역력이 약한 어린아이에게는 치명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복실 여사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한국의 문단에 나서면 아버지를 팔아 이득을 보려고 한다는 오해가 있을까봐 그냥 살아왔다고 한다. 그러나 10여 년 전 어떤 사람이 문학상을 제정하며 한하운 시인의 이름을 도용하여 돈을 모으는 등 문제를 일으키는 사건이 있어서 다시는 한하운 시인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여 직접 표면에 나타나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이복실 여사가 아버지인 한하운 시인을 얼마나 존경하고 사랑했는지를 알 수 있다. 다른 사람 같으면 벌써부터 한하운 시인의 이름을 내세우고 많은 일들을 했을 것이다. 한하운 시집인 ‘황톳길’을 이제야 발표하는 것도 이제는 그분의 이름이 욕되게 하는 일들을 방지하기 위함이며 이 판매수익금 또한 불우한 이웃들에게 바친다고 하니 이 얼마나 한하운 시인을 닮은 이웃사랑의 시심인가.
이복실 여사는 아버지인 한하운 시인이 이복실 여사가 문학을 좋아하는 걸 알면서도 절대로 문학을 하지 못하게 했다고 고백한다. 이러한 말은 최성철 씨의 결혼 허락 당시에 최성철 씨에게 말했다는 한하운 시인의 이야기와 맞는 부분이다.
한하운 시인은 말년에 병이 심해 잘 걷지를 못해 먼 곳에 거주하지 않고 주로 서울의 명동에 있는 3층 사무실에서 거주하며 거기서 저술활동을 펼치고 많은 문인들과 교류하셨다고 한다.
박인과 문학평론가 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