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작가와 문학

[스크랩] 박동규 교수가 바라 본 아버지 박목월 시인의 세계

운산 최의상 2015. 2. 4. 20:44

박동규 교수가 바라 본 아버지 박목월 시인의 세계

 

아버님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늘 가슴 한구석으로부터 진하게 우러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장남인 내가 아버님 살아 생전에 그분의 세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부끄러운 안타까움이다. 그래서 평소 아버님이 하셨던 말씀을 되새김하여 목월 시인의 시를 읽으면 모두 새롭게 와 닿는다.

내 기억 속에 살아 있는 아버님의 말씀들을 이야기함으로써 목월 시인의 시를 읽는 이들이 그분의 시 세계와 삶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우리의 고향은 경주에서 북쪽으로 30리 떨어진 모랑이다. 10여 호 남짓한 마을은 뒤로 야트막한 야산을 끼고 있어 이 야산에 포플러 나무들 사이로 구비구비 뚫려진 길이 신라 고도인 서라벌로 이어져 있고 눈을 북으로 돌리면 귀척이라는 마을 주변에 옛 능들이 놓여져 있다.

봄이면 태백산맥 줄기로 이어진 먼 뒷산으로 아이들은 참꽃을 꺾으러 가고 여름이면 조그마한 역사로 가는 철길 밑 굴을 벗어나 냇가로 가곤 한다.

할아버님이 돌아가신 것은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이다. 아버님과 나는 열 몇 시간에 걸쳐 할아버지를 철길 건너에 있는 선산에 모셨다. 할아버지의 장례를 지내고 올라오는 차안에서 아버님은 나그네라는 시를 지으실 때에 느꼈던 심정의 한가닥을 말씀해 주셨다.

아버님은 나그네문장지에 발표하시기 전해에 경주의 은행에 다니셨다고 한다. 내가 1939년 생이니까 내가 태어나기 한 해 전이었던가 보다.

그때 아버님은 할아버지께서 이공학을 전공하라고 강요하시는 것을 뿌리치고 일본에 유학하고자 은행에 다니고 계셨다.

그런던 어느 날 은행에서 금전 출납이 잘못되어 아버님이 물어내야 할 입장이 되었다. 그러니 월급에서 공제할 수밖에 없었고 또 할아버지는 문학을 하는 아들이라 도움도 주시지 않아 생활이 어렵기 짝이 없었다.

어느 여름날 아버님은 은행 업무를 끝내고 황혼이 물들 무렵 30리 길을 걸어서 퇴근하고 있었다. 여름이라 벼가 한창자라는 논길을 걸어오자니 논두렁을 덮은 미끈거리는 흙 위에 발자국이 남는 것을 보게 되었다. 분명히 운동화 -일제 때 지까다비라고 부르던 것-를 신었지만 그것은 발등만 덮을 뿐 밑창이 다 닳아서 발 무늬가 그대로 진흙 위에 남아 있었다.

발바닥이 그대로 찍혀진 진흙을 보면서 발금의 가느다란 선은 인간이 가고 싶어하는 마음의 실날처럼 펼쳐 있고 멀리 하늘에 붉게 타는 저녁은 언제나 영원히 살고 싶은 이상의 저편으로 나타나 보였다는 것이었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가는나그네의 마음은 땅에 발을 디디고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비세속적 세계에 대한 염원이 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나는 아버님의 이 자그마한 창작 동기를 들으면서 가난해서 마음대로 할 수 없었던 젊은 시인의 심정을 느끼고 그것이 승화되어 시가 마음대로 할 수 없었던 젊은 시인의 심정을 느끼고 그것이 승화되어 시가 되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참으로

인생이 무엇임을

누가 알진대

실패할수록

더욱 풍부할 수도 있는 인생을

나의 시에는

눈물이 얼어 눈으로 변하고

어린것은

눈물 자국이 마른 얼굴로

잠들었다.

이런 밤에

그가 꾸는 꿈의 내용을

나는 모르지만

또한 알지만

나의 시는

허전하게 서럽고

연필은

눈 오는 소리로 사각거리며

벌판을 달린다

<목판화> 중에서

 

나는 이 시를 읽을 때면 연필을 깎아서 시를 쓰시던 아버님을 떠올린다. 아버님은 정갈한 노트에 연필을 깎으셔서 시를 쓰셨다. 일반 산문은 만년필로 쓰셨지만 시만은 꼭 연필을 깎아 노트에 먼저 쓰시고 다시 원고지에 옮기시곤 하셨다.

아버님이 왜 연필로만 쓰셨을까?’ 하고 생각할 때면 아버님이 시인이 되지 않을 수 없었던 운명적 계기를 생각하게 된다.

아버님은 대구의 계성학교를 다니셨다. 계성학교에 입학하셨으나 학비 마련이 힘들어 학교측의 주선으로 겨울에는 온실에서 잘 수 있게 되었다. 온실은 유리로 지붕을 하였기에 온실 한구석 짚단을 펴고 누우면 겨울 하늘의 별들이 모두 아버님 것이었으리라. 그리고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은 어느날, 계성학교 교정에 선 나무에 시인이라는 글자를 칼로 아로새기고, ‘나는 커서 시인이 될 것이다라고 스스로 맹세한 그것이 시인이 되게 한 것일까 하고 생각해 본다.

나는 어느 분야에서든지 무엇이 되겠다는 변함 없는 집념만이 그 분야의 인간이 되게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무엇이 되겠다 했을 때의 그 무엇에 따라 인간이 변하는 것도 알고 있다. 이 세상에서 시인이 되겠다는 사람은 시인이 겪어야 하는 고통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돈을 많이 버는 일, 남을 속이는 일, 거짓말을 해야 하는 일을 하고서 참다운 시를 쓸 수가 있겠는가. 집약된 몇 줄의 언어로 영원히 인간의 가슴에 남아 살아 있음의 의미를 깨우치게 하는 데에 이러한 세속적 욕구가 곁들여 있다면 닿을 수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아버님은 꼭 시만을 연필로 쓰시고 어렸을 때의 결심을 이루기 위해서 어린 것이 눈물 자국으로 얼룩진 얼굴로 자는앞에서 연필로 눈 오는 소리를 일으키셨던 것이다.

내가 대학에 다닐 때였다.

아버님의 젊은 제자들-내 또래로 기억된다- 이 찾아와서 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젊은 제자와 그날 밤을 꼬박 이야기를 나누시고 다음날 강의를 다녀오셔서 또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 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아버님이 시인과 밤새 달콤한 담론을 나누시는 것에 익숙한 편이었지만 내 또래의 시인들과도 밤새우고 하시는 것이 조금은 불만이라, 며칠 후 아버님께 건강을 생각하시더라고 그런 일을 좀 줄이시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여쭈였다가 정말 정신이 나가게 주의를 받은 적이 있다.

아버님에게는 시 이야기 그것이 삶의 전부인데 시인의 아들이 그런 것을 이해하지 못함은 아버님의 삶을 모르는 것이라는 가르침에 나는 얼굴이 뜨거워 어쩔 줄을 몰랐다.우리는 6·25 이전 부터 지금까지 원효로에 살고 있다. 서울 시내에서 한동네에 40년이 넘게 사는 사람이 드물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아버님이 왜 이곳을 떠나지 않으셨을까 생각해 본다.

 

1939년 경북 월성군에서 박목월 시인의 장남으로 태어나 서울대 문리대학과 동대학원을 졸업

1962<현대문학>에 평론 추천받음. 현재 서울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중

처음 우리 집은 옛날 원효로 전차 종점 근처였는데, 6·25 가 끝난 지 몇 해가 지나고 우리 형제들이 자라기 시작하자 아버님은 좀 큰 집으로 이사 가야 할 필요가 있으셨던지 어느 해 원효로의 고지인 산천동의 좀 큰 집을 사셨다. 산꼭대기 집이라 수돗물은 이틀에 한번씩 밤에 겨우 한두 시간 나올까말까한 사정이었다.

나와 어머니에게는 물지게를 지고 5백미터나 더 되는 아랫 동네로 물 길러 다니는 것이 가장 큰 고역이었다. 그런데 아버님은 왜 이런 집을 사셨느냐는 가족들의 물음에,

한강이 잘 보이지 않니?”

하셨다. 얼음길을 걸어서 물 길러 가는 나의 입장에서는 한강이 보일 리 없지마는 아버님 눈에는 한강이 보이셨던 것이다.

그곳에서 몇 년을 살다가 다시 원효로 전찻길 근처에 지금의 집을 지어 나오게 되었다. 지금의 집도 건축업자를 잘못 만나서 한겨울에 창문도 달지 못하고 입주하였다. 그것은 건축업자가 아버님의 제자라는 것을 너무 믿었기 때문이었다.

아버님은 서울에서 원효로를 벗어나 사신 적이 없다. 그것은 아버님이 보수적이었다기 보다 원효로를 중심으로 한 한강의 표정을 읽고 계셨기 때문이었지 않았나 생각된다.

아버님의 시에 가정이 있다.

 

 

 

지상에는

아홉 컬레의 신발,

아니 현관에는 아니 들판에는

아니 어느 시인의 가정에는

알전등이 켜질 무렵을

문수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

......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니 십구문 반의 신발이 왔다.

아니 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가정> 중에서

 

나는 이 시를 맑은 눈으로 읽을 수가 없다. 이 시를 읽을 때면 항상 눈물이 어른거린다. 그것은 아버님이 우리 가족을 위해 어렵게 살아오신 것을 누구보다도 우리가 잘 알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아버님이 오실 때쯤 전차 종점에서 나가 놀고 있으며 아버님은 큰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시고 큰 손으로 내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그리고 나의 손을 잡고 군고구마라도 한 개 들려 주시는 것이었다.

내가 잊지 못하는 일의 하나로, 국민학교 시절 아이스케키파는 집 앞에 서 있는 것을 아버님이 퇴근하시다가 보시곤 내 뒤에 서 계셨는데, 몇 시간이고 내가 코를 훌쩍거리며 소금물에 넣었다가 빼내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아이스케키만 쳐다보고 있는 것을 집으로 끌고 오셨던 적이 있다. 그날 나는 오줌을 쌀 정도로 야단을 맞았다.

그후 아버님은 내가 무엇을 하겠으니 얼마를 주십시오라고 했을 때 한번도 거절하신 적이 없다. 아침부터 밤까지 시간 강사를 마흔 시간 이상 다녀야 얼마 되지 않게 벌어 오실 수 있었으나 철없는 내가 공연히 무엇이 먹고 싶어 요구하는 푼돈까지도 거절하시자 않은 것이다.

굴욕과 굶주림을 스스로 당하면서도 자식에게는 이 아픔을 주지 않으시고자 했던 아버님이셨기에 가정이라는 시를 읽을 때면 나는 참회의 눈물을 막을 길이 없는 것이다. 가끔 내 아들이 나에게 무엇을 요구할 때면 나는 아버님을 생각하고 어쩔 수 없이 아들의 말을 들어주게 된다.

누구나 다 그런 것이지만 너무나 가까이 살아왔기에 객관적이고 공정한 안목으로 목월 시인의 전체를 볼 수 없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오히려 뜨거운 핏줄을 이어받았기에 잊혀지지 않는 일들이 절실하게 남아 있는 것이다.

60년대 어느 해, 어머님이 갑상선 수술을 하게 되어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신 적이 있다. 수술이 하도 위험해서 수술이 실패할 경우를 대비하여 의사가 아버님께 각서를 쓰시게 하였다.

수술이 10시간 넘게 진행되는 동안 아버님은 어머님을 위해 빨간 장미 한송이를 들고 수술실 밖을 서성이고 계셨다. 철없는 우리 형제는 아버님이 들고 계신 장미 한송이의 뜻을 알 길이 없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시인이기에 잡을 수 있었던 꽃 한송이었던 것이다.

아버님이 지어 주신 집에 살면서 마당에 감이 주렁주렁 열릴 때면, 이층 베란다에 나오셔서 잘 익은 홍시를 모아 놓으시던 아버님이 지금 당장 오실 것 같고, 어느 날 밤 꿈에 아버님이 오시면 나는 어렸을 때 학교 간다고 속이고 삼청 공원에서 놀며 그림을 그리다가 늦게 집에 돌아와 아버님 앞에 섰을 때의 순간을 맛보게 된다.@ - -

출처 : 하하문화센터
글쓴이 : 이계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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