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도
쪽물 들이는 날
박옥위
스님, 초여름 하늘이 쪽빛입니다
오래 삭여온 쪽물에 비단을 담그시고
그늘도 반그늘쯤엔 바지랑대 세웁니다
바다도 심층 깊은 바다를 불러내어
쪽물 들인 비단에 금다라니경을 쓰시는 날
햇살도 주렴 밖에서 잠시 쉬었다 갑니다
이런 날 청대 숲은 마디 하나 짓습니다
천년 깊은 연지에선 백련이 눈을 뜨고
수인의 깊은 뉘우침이 하늘에 닿겠습니다
누가 솟대 위에 깊은 원을 내걸었기에
못 박고 뽑은 흔적 흠투성이의 몸을 벗고
영축산 푸른 솔 위에 열사흘 달은 뜨겠네요
스님, 남은 쪽물로는 모시 필을 물들여서
어머님의 옛 아취를 다듬어 보렵니다
한 필지 그리움도 에돌아 쪽빛물이 듭니다
잠행(潛行)
박 옥 위
회전그네 그림자를 유유히 가로질러
풍경을 흔들며 잠행하는 물오리
석양이 일군 동화를 한참동안 섭렵한다
유연히 잠적한 그를 지긋이 응시하는
감성의 수신기가 하얀 물을 뿜어낸다
파문은 중심에서 일어 둥글게 퍼져간다
언뜻 나타나 변두리서 자맥질하는
날렵한 곡예마저 한 순간의 착시인가
중심을 벗어나서야 새 길이 보인다.
<서정과 현실, 2009, 하반기호>
모찰트와 고등어찌개
박옥위
모찰트를 들으며 고등어찌개를 끓인다
고전과 마주하는 저녁 한때의 설레임
노을이 엘비라 마디간*의 사랑처럼 스러진다
실로 담백하게 맛 드는 부드러운 화음
가슴 속 먼 먼 강이 푸르게 돌아오고
저 안개 풀잎에 닿아 찬이슬을 내린다
지금 걷고 있는 이 지상은 햇빛 구간
그리운 내 비등점은 참맛을 끓이는가
가난한 기도를 바치는 저녁이 평화롭다.
*스웨덴의 영화 '엘비라 마디간' 주제곡으로 더 잘 알려진
모짜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1번
<우리시 2009, 11월호>
구서동 수수꽃다리
박옥위
구서역 3번 출구 수수꽃다린 일찍 폈다
흰 김 덩실 올리며 국밥 끓던 겨우내내
봄 왔나 잘못 짚은 꽃이 지레 먼저 눈떴다
어느 절인지 보살님은 국밥을 끓이는데
지레 먼저 눈뜬 꽃은 이 한파에 어쩌누
어쩌누 꽃구름 피우면서 국밥을 끓이면서
한때 꽃처럼 산 건 아무 일도 아니라고
눈물 국밥 젓수시는 할머니의 발치께로
배고픈 비둘기들이 어깃장걸음 모여든다
물 마른 나뭇잎은 웃음소리도 힘없어
낡은 필름 속을 가만가만 돌려보며
봄은 또 수수꽃다리를 하얗도록 피운다.
-<시조 21> 하반기호
길이 있다
박옥위
꽃은 말없어도 나비들은 날아오고
나무는 말없이도 열매를 키워낸다
말없는 세상에 오면 고요마저 길이다
초록인 세상은 초록의 맥박이 있어
벽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의 덩굴손
줄기 끝 느낌표들이 벽화를 그려낸다
홰나무 큰 가지에 맨발로 얹혀사는
겨우 붙어 눈치 받는 겨우살이 한살이도
뉘게는 길이 되는 것, 제 길이 다 있다
-박옥위(시조시학, 09 가을호)
모자
박옥위
슬픔을 가리려고 모자를 쓰는 여자
어깨가 그리움 쪽으로 살포시 기울었다
가섭의 연꽃은 웃는다 말없는 웃음이다
모자를 눌러 쓰고 슬픔을 가려봐도
슬픔은 가릴 수 없다 가섭의 연꽃이다
소금 독 소금은 희다 둘수록 하얗다
<우리 시 2009. 11>
안압지 연꽃
박옥위
임해전 안압지에 내리는 이슬비는
연잎 위를 싸락싸락 소색이듯 내려도
연꽃을 꽃피우기엔 그때가 아니다
돌 밑을 흐르는 소리 없는 샘이 있어
산은 살을 깎아서 물길을 내어주고
그 물길 흐르는 득음에 안압지에 연꽃 번다
바람과 햇살과 흙의 지문을 불러내어
어느 뒤안길의 물무늬를 더듬어 보면
연잎도 너울 귀를 열고 기다리는 날이 있어
고요도 적막한 고요 속에 눈을 뜨는
서라벌 달빛 길을 걸어오는 저 여인
열 두 폭 스란치마에 깨끼적삼이 봉곳하다
<시조시학 2009, 31호>
오래 신은 구두
박옥위
길의 이력을 질펀하게 풀어내며
여린 마음 한쪽이 구두 뒤를 따라 간다
모퉁이 닳은 그 만큼 어깨 기울어진 채로
차례를 기다리는 구두의 표정들
발을 안아 모은 채 묵묵히 걸어온
구비 진 길의 지경이 넌짓넌짓 보인다
힘든 삶도 족적은 진실하게 남겨라
닳아빠진 저 밑창 상처 난 자국까지
겪어온 길의 아픔을 다 기울 순 없다해도
미지(未知)의 세계를 바람은 돌아오고
길은 끝닿을 듯 시작으로 이어진다
오래된 구두를 고치며 길의 굴곡을 본다
<유심, 2009>
전자오르간과 수인
박옥위
수인의 건반에서 아버지가 젖고 있다
벽에 꽂은 비수를 스스로 뽑으며
아들은 건반위에 누운
아버지를 연주한다
<부산가톨릭문학, 2009>
모시나비 날아간다
-시누님을 보내다
박옥위
한 필지 명(命)도 제 것이 아니라고
모시나비 깃을 접고 먼 산보는 봄 저녁
초연히 감다 뜬 눈에 한생이 얼비친다
속울음 파르스럼 강물에 띄워놓고
설움도 희게 바래 낮달처럼 띄워두고
윤기도 다 반납하고 돌아누운 저 기별
분홍빛 젊은 날은 근심조차 꽃이더니
깃 펼쳐 날아보던 하늘도 벗어 놓고
초췌한 한 벌의 남루 등신(等身)으로 누울 것을
사푼히 나래 치며 오던 길을 돌아가듯
빌어 올린 하늘 길을 모시나비 날아간다
복사꽃 고운 봄철도 무거운 듯 다 벗고.
<부산시조,26호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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