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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도저히 이해가 안된다. 왜 이렇게도 초동 대처를 안 했는지

운산 최의상 2014. 4. 28.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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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도저히 이해가 안된다… 왜 이렇게도 초동 대처를 안 했는지"

  • 최보식
    편집국
    E-mail : congchi@chosun.com
    선임기자

  • 지난 금요일 진도 팽목항에 갔다. 황대영(62) 한국수중환경협회장을 만난 것은 밤 10시가 넘어서였다. 작은 체구에 소년(少年) 같은 용모가 남아 있었다.

    "오늘 잠수사들이 학생들이 가장 많이 있었다는 4층 선실로 내려가려고 했지만 스티로폼·담요·냉장고 등 부유물이 꽉 차 앞을 가로막았다고 한다. 밀쳐도 부력에 의해 다시 떠오르고 해서 작업 진행이 안 됐다."

    이날 그는 민간 잠수사 12명을 이끌고 선체 수색에 투입됐다. 민간 잠수사들이 팀을 이뤄 수중에 들어간 것은 처음이었다. 그동안 이들에게는 기회가 없었다.

    ―직접 선체 속에는 안 들어갔나?

    "들어가고 싶어도 그럴 처지가 안 된다. 배 위에서 관리를 해야 한다. 잠수팀을 짜주고, 이들이 선체 안으로 잘 들어가고 있는지 확인하고, 줄 신호를 보내면 줄을 더 내려 보내야 하고, 교신도 해야 한다. 이는 노련한 전문가가 아니면 할 수가 없다."

    황대영씨는“잠수 인력이 더 요구될 수밖에 없고 결국 우리에게 도움을 청할 것”이라고 말했다.
    황대영씨는“잠수 인력이 더 요구될 수밖에 없고 결국 우리에게 도움을 청할 것”이라고 말했다. /진도=오종찬 기자
    ―남은 실종자(27일 현재 114명)들을 찾는 데 얼마나 걸릴까?

    "지금부터가 더 어려운 작업이다. 몇 달이 걸릴 것이다."

    ―인근 바다 수색을 말하는가?

    "선체 속에서 찾는 데만 그렇다."

    ―선체 내부 수색에 그렇게 오래 걸리나?

    "동해라면 며칠이면 끝낸다. 서해는 조금(조수가 가장 낮은 때)이 보름마다 돌아온다. 정조(停潮·밀물과 썰물이 교차돼 물 흐름이 멈추는 시간)는 하루에 네 번밖에 없다. 아마 몇 달이 가도 끝장이 안 날 것이다. 이쯤 되면 배를 끌어올리는 게 맞다. 인양 작업하는 데도 두세 달 걸린다."

    ―진도 팽목항에는 언제 왔나?

    "사고 다음 날인 17일 오후 5시쯤이다. 이번에는 좀 늦었다. 그날 속초에서 스쿠버를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사무실로 와서 SNS와 페이스북으로 '뜻있는 다이버는 동참하라'며 회원들에게 전파한 뒤 나는 다음 날 출발했다."

    ―정부의 요청이 있었나?

    "아니다. 뉴스를 보고 왔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우리는 늘 그렇다. 자기 돈을 들여가면서 온다."

    ―처음 도착했을 때 구조할 수 있을 거라고 봤나?

    "그렇다. 이처럼 한 명도 구조 못 하는 상황이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사고 당일 174명 빠져나온 것 외에는 구조 실적이 0이다. 해경은 그날 바닷물에 뛰어들거나 갑판에 나와 있는 승객과 선원들을 태우는 데 그쳤다.

    "그때 잠수부들을 빨리 동원해 선체로 들어갔어야 했다. 그랬다면 많이 살았다. 초동 대처가 너무 어처구니가 없었다."

    ―사고 당일에는 날씨가 괜찮았지만 다음 날부터 기상 상황 악화로 어쩔 수 없었다는데.

    "날씨가 안 좋았지만 6시간마다 정조 타이밍이 돌아오니까. 또 수면에 보이는 것과 수심의 물 흐름이 다르다. 무엇보다 이런 대형 사고가 나면 선체 주위로 '세팅(setting) 바지선'부터 먼저 붙인다. 잠수사들이 그 위에서 숙식하고 공기통 대신 '후카 장비'(선상에서 호스를 통해 잠수사에게 공기를 공급)를 쓸 수 있게 갖춰진 바지선 말이다. 그게 기본 ABC다."

    [최보식이 만난 사람]
    ―이번에는 그렇게 안 돼 있었나?

    "잠수사들이 팽목항에서 해경 함정을 타고 사고 해역을 가는 데만 1시간 반 이상 걸린다. 그러고는 해군 군함 위에서 잠수사 100여명이 기다리고 있다가 '다이빙하러 오라'고 하면, 선발된 10여명이 다시 단정(보트)을 타고 접근한다. 나머지는 무거운 잠수 장비를 들고 군함에서 스탠바이만 하다가 그냥 되돌아오는 것이다. 그 짓거리를 하니 무슨 능률이 있었겠나. 나는 숱한 해난 사고 현장에 참여했지만 이번 같은 경우는 처음이다."

    ―왜 이런 미숙한 초기 대응이 있었나?

    "내가 모르니까 답답한 것이다. 구조 작업에는 민간 업체인 '언딘 마린 인더스트리(이하 언딘)'가 해경·해군과 같이 독점적으로 했다. 이 업체는 '세월호' 선주(船主)인 청해진해운과 선체 인양 계약을 맺었던 것으로 안다. 그러니 처음 현장에 투입됐을 때는 인명 구조에 대한 인식이 없지 않았나 싶다."

    ―'언딘'의 대표는 해양경찰청 산하 한국해양구조협회 부총재직을 맡고 있는데?

    "글쎄, 서로 어떤 야로가 있는지. 어쨌든 이 업체는 민간 잠수사들의 참여에 대해 귀찮아하는 것을 느꼈다. 나는 TV에 나와 바지선 설치를 여러 번 주장했다."

    ―바지선 설치는 언제 이뤄졌나?

    "사고 다섯째날인 20일에야 '언딘' 측에서 엉성한 바지선이 왔다. 그 바지선에서 언딘 소속 잠수팀과 해군·해경팀이 작업을 했다. 바지선의 수용 능력이 모자라니까 우리 같은 민간 잠수사들의 접근을 막았다. 그래서 민간 잠수사들의 항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며칠 지나서야 '언딘' 쪽에서 대형 바지선을 다시 몰고 왔다."

    ―팽목항에 모인 민간 잠수사들은 얼마나 됐나?

    "전국에는 잠수와 관련된 단체가 동아리, 잠수 동호회, 스킨스쿠버 교육단체, 비영리사단법인까지 합치면 100여개 된다. 여기에는 300명쯤 모였을 것이다. 대부분 자기 생업이 있어 왔다가 가고 또 오는 식이다."

    ―해경에서는 민간 잠수사들의 실력을 낮게 평가했는데?

    "이런 구조 잠수는 레크리에이션으로 하는 스쿠버 다이빙과는 다르다. 산업잠수기능사 자격증이 있다. 이들은 대부분 특수부대 출신이거나 최고 엘리트 잠수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다. 여기에 온 잠수 관련 단체 중에는 이런 구조를 할 수 있는 단체는 17개쯤 된다."

    ―민간 잠수사들의 입장은 이해하지만, 모두 현장에 들어오면 구조·수색 작업에 오히려 지장만 초래하지 않았을까?

    "안 그래도 해경에서 '이 많은 잠수사를 어떻게 수용하나. 17개 단체가 협의체를 구성하라'고 했다. 거기서 내가 협의체 대표로 뽑혔다. 내가 '잠수 단체마다 베테랑 한두 명씩 선정하라'고 했다. 그렇게 선발한 18명과 함께 내가 바지선으로 들어갔는데, 해경 관계자가 '야 인마, 여기가 누구나 다 오는 데인 줄 아느냐'고 했다. 그래서 난리가 났다. 민간 잠수사들이 팽목항에서 기자회견을 하느니 마느니 하다가 가버린 것이다."

    실종자 가족이 모여있는 진도 실내체육관에서.
    실종자 가족이 모여있는 진도 실내체육관에서.
    ―하루쯤 지나서야 민간 잠수사들 철수 사실이 알려졌는데.

    "이 난리통에 기자회견 하는 것은 민폐다. 우리가 조용히 가주는 것도 자원봉사라고 말렸다. 그래서 군말 없이 갔다. 다들 인격이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돈 벌러 온 것도 아니고 자기 돈을 들여가며 재능 봉사 하러 왔는데 이러니 속이 상해 떠난 것이다."

    ―자원봉사 하러 온 민간 잠수사들은 아예 바닷속으로 못 들어간 것인가?

    "해경에서 13명이 들어갔다고 하는데, 대략 그런 숫자일 것이다. 다들 잠수 장비 들고 왔다가 그냥 되돌아간 것이다. 매스컴에 나오는 민간 잠수사들은 대부분 청해진해운과 계약된 '언딘' 소속일 것이다."

    ―그런 마찰로 다른 잠수 단체들은 떠났는데 왜 남았나?

    "수색이 쉽게 끝날 일이 아니다. 실종자들을 더 찾아야 하고 장기적으로 간다. 잠수는 하루에 한두 번밖에 할 수가 없다. 매일 잠수사들을 집어넣으면 체력의 한계가 오고 잠수병에 걸린다. 지금 잠수사들이 쓰러지거나 마비를 겪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잠수 인력이 더 요구될 수밖에 없다. 결국 우리에게 도움을 청할 것이다. 내가 '바쁜 사람은 가고 시간 있는 사람은 남아라'고 했다. 그래서 20명이 남았고, 오늘 처음으로 현장 구조에 들어간 것이다(하지만 이들은 다음 날부터 또 배제됐음)."

    ―일각에서는 시신 한 구 수습할 때마다 뭔가 금전적 보상이 있지 않겠나 보는 사람들도 있다.

    "누구에게 무슨 대가를 받겠나. '언딘' 측은 청해진해운과 계약돼 있지만, 우리는 긍지(矜持) 때문에 한다."

    ―인명 구조의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것은 어느 시점인가?

    "사고 사흘째(18일 낮 12시 46분쯤) 선체가 바닷속으로 완전히 들어가면서다. 이제는 늦었구나 싶었다."

    ―이미 선체에 생존자가 없다고 봤나?

    "선실에 '에어포켓'이 있다고 해도 어렵다고 봤다. 에어포켓에는 대기압보다 압축된 공기가 있다. 에어포켓이 얼마나 큰가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그 속에 있는 것은 마치 잠수 환경 속에 놓여 있는 것과 비슷하다. 거기서 몇 시간을 지내고 나오는 것은 몇 시간 잠수하고 나오는 것과 같다. 구조해 나오더라도 생사가 불투명했을 것이다."

    ―그때 이미 구조 희망은 없었던 것인가?

    "욕 얻어먹을까 봐 아무도 말을 못 하는 것이다. 당초 크레인으로 선체에 걸어 수면 아래로 침몰하는 것을 막았으면 좀 희망을 가졌을 텐데…."

    ―일단 선체가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것을 막아야 했는가?

    "물 바깥으로 나와 있는 선수(船首)에서는 로프를 매고 바로 선체에 들어갈 수 있다. 지금은 물속으로 25m를 더 들어가야 선체의 상부에 닿는다. 선체 바닥은 거기서 22m를 더 내려가야 한다. 바닷속에서 이런 깊이는 잠수 환경에 엄청난 차이가 있다. 왜 이런 초동 대처를 하지 않았는지 나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당시 불가피한 상황과 여건이 있었지 않았을까?

    "오늘 해군 함정 위에서 해경청장, 해군제독, 민간구조업체 대표 등과 회의가 있었다. 내가 '왜 첫날에 바지선을 대고 크레인을 걸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다 아시겠지만 그게 쉽게 할 수 있는 거냐'라고 했다. 내가 '어렵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못할 것도 없지 않았느냐'고 말했다."

    ―왜 이런 해난 구조 봉사를 하게 됐나?

    "해병대 시절 잠수와 인연을 맺었다. 그 뒤 중동에 나가 일하다가 돌아와서 다시 잠수 관련 교육을 받았다. 사실 우리 부부 사이에는 자녀가 없다. 그러니 돈을 모은들 무슨 의미가 있겠나. 사회 봉사하면서 살다 가자고 마음먹었다. 나는 물에 빠진 시신 인양을 많이 했다고 해서 1991년 청룡봉사상을 받았다. 우리 단체 회원들은 충주호(湖) 유람선 사고, 서해훼리호 사고, 천안함 폭침 등 사고 수습 현장에 나갔다."

    ―생업이 있나?

    "스킨스쿠버 교육과 수중 공사를 하고 있다. 간호장교로 예편한 아내에게서 연금이 나온다. 생활의 여유가 있는 편이다."

    ―팽목항에서는 어떻게 지내나?

    "내 차 뒷자리에서 자거나 팽목항의 천막에서 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