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지 에이 피
[중앙일보] 입력 2014.01.03 00:05 / 수정 2014.01.03 00:10
지 에이 피 - 임채성(1967~ )
지나치듯 슬몃 본다,
백화점 의류매장
명조체로 박음질한 GAP상표 하얀 옷을
누구는 ‘갑’이라 읽고
누군 또 ‘갭’이라 읽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갑이 있고 갭이 있다
아무런 잘못 없어도 고개 숙일 원죄 위에
쉽사리 좁힐 수 없는 틈새까지 덤으로 입는,
하루에도 몇 번이고 갑의 앞에 서야 한다
야윈 목 죄어 오는 넥타이를 풀어버리고
오늘은
지, 에이, 피를
나도 한번 입고 싶다
어떻게 시인이 서점보다 백화점을 더 좋아하냐? 젊은 시절 남편이 제게 핀잔을 줬던 적이 있어요. 그건 한참 아이들을 키울 때 동네의 멋쟁이 엄마 한 사람이 어린 제 딸을 보고 ‘베스트 드레서’라고 말해 줬기 때문이었어요. 가슴이 벌렁거린 저는 갑자기 생겨난 강한 책임감과 사명감으로 백화점 셔틀버스를 타지 않을 수가 없었던 거였어요. 그때 전 매장에 들어가면 먼저 눈의 크기 조절과 눈빛 교정부터 했어요. 눈을 너무 크게 뜨거나 두리번거리면 얕잡아 보일 것 같았죠. 가격표를 봐도 입을 꽉 다물고 별거 아닌 표정을 지었지요. ‘갑’들이 하는 행동을 주로 했지요. 하지만 거기 매달려 있던 조그만 가격표는 사실 엄청난 갭을 느끼게 했어요. 그래서 저는 세팅해 놓았던 갑의 눈빛을 이내 풀어야만 했어요. 제 손은 어김없이 이벤트장 매대에서 이월상품들을 고르고 있었으니까요. 어쨌든 저는 ‘GAP’을 ‘갑’이라고 읽고 싶네요. ‘갭’으로 읽으면 ‘을’이 될 것 같네요. 그러고 보니 세상에는 갑과 을만 있군요. 개콘식으로 말하면 “하여간 우리나라 사람들 갑이든지 을이든지 둘 중 하나라니까요.” <강현덕·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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