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詩論

[스크랩] 나의 비밀스런 시 창작 노트 / 양승준 - <스토리문학> 75호(2011년 여름호)

운산 최의상 2013. 7. 13. 18:29

나의 비밀스런 시 창작 노트

 

                      양 승 준(시인)

 

 

1.

  오늘도 나는 / 兜率天에 이르는 / 마음의 길을 찾아 / 민들레 홀씨 같은 / 나만의 집을 짓는다.

 

  첫시집(<이웃은 차라리 없는 게 좋았다>, 시와시학사, 1995)에 수록된 ‘시인의 말’이다. 1992년, 시인의 꿈을 키운 지 무려 20년 만에 간신히 문단 말석에 이름 석 자를 올려놓고, 몇 해가 더 지나 첫시집을 출간하였다. 대부분의 첫시집이 그렇듯이 내 경우도 그간의 오랜 세월 동안 습작했던 다양한 색채의 작품들을 첫시집에 수록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작품들을 관류하는 큰 흐름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시를 통한 존재의 구원’에 대한 간절한 희원이었다.

  나의 선친은 극작가 고동율(高東栗, 필명, 1966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희곡 당선)로, 46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셨다. 아버지의 죽음은 어린 우리 3형제를 자연스럽게 공부보다는 존재 문제에 관심 갖게 하였으며, 당시 고1이었던 나를 교내에서 유명 문학 소년으로 활약하고 있던 친구들의 뒤꽁무니를 좇게 만들었다. 박찬일 시인과 이낙봉 시인이 바로 그때 만나 우정을 나누던 문우들이었다. 그 후, 우리 3형제는 모두 문학을 전공하게 되었으며, 동생 양승국은 현재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적당한 군불이 없어도 좋았다 / 셋만 모이면 우리는 / 서로의 무릎을 맞대고 앉아 / 三冬의 깊은 어둠을 / 온몸으로 바라보며 / 술내기 화투판을 벌였다 / 이런 게 바로 / 사는 재미 아니겠냐며 / 빙그레 웃는 녀석의 말에 / 우리는 식은 라면 국물을 안주 삼아 / 술잔을 부딪쳐 맞장구를 치기도 했지만 / 젊음은 한순간에 가버리는 어둠임을 / 왜 그땐 알지 못했을까 //

그저 빨리 / 세월 흘러 주기만을 바라던 그 시절 / 밤이 되면 우리의 가슴은 / 더욱 허전하였고 / 사랑도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 방범대원의 집요한 불빛을 피해 / 녀석의 長髮처럼 길기만 했던 / 어두운 제방 길을 따라 / 집으로 돌아오다 고개를 들면 / 겨울밤의 별빛은 / 그녀의 하얀 목덜미만큼이나 아름다웠다 //

시를 쓴다며 / 제법 好氣를 부리던 녀석은 / 가을비 날리던 어느 날 아침 / 떨어지는 낙엽처럼 갑자기 / 山門으로 떠나갔고 / 결국 나만 낯선 시간 속에 남겨져 / 찬 밥덩이처럼 쓸쓸해 하다가 / 첫눈 내린 아침을 두 번씩 맞아들였다 //

지방 국립대학의 자랑스러운 / 문학사 학위증을 받아들고 / 잔설이 아직 많이 남아 있는 / 커다란 대학문을 나섰을 때 / 녀석은 꽤나 잘 어울리는 卓衣를 걸치고 / 특유의 웃음으로 나를 반겨 주었지만 / 내가 그에게 줄 것은 / 녀석의 어머니께서 인편에 알려 보내신 / 군 입대 날짜밖에는 없었다 //

거리엔 여전히 찬바람이 불었고 / 터널같이 어둡던 우리들의 젊은 날은 / 박정희 쿠테타 정권과 함께 / 그렇게 끝나고 있었다

  - ‘겨울 회상 2’ 전문

 

  이렇듯 내 젊음은 가난과 외로움에서 온종일 허우적거렸으며, 내 시는 이러한 내 삶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물려주신 문학이라는 유산은 온전히 내 것이 되기는커녕 자꾸 빗나가기만 하였다. 그럴수록 내 어리석음과 재주 없음을 탄식하는 시간들이 많아졌으며, 과연 무엇을 위해 내가 시를 쓰는 것인지, 목숨을 걸고 한판 진검 승부를 겨뤄볼 만한 가치가 있는 건지 점점 오리무중이 되어 가기만 했다. 숱한 좌절과 갈등 속에서도 내가 지금껏 시를 버리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2.

  어쩌다 여기까지 흘러오게 되었다 / 앞으로 얼마를 더 흘러갈 수 있을지 / 神께선 알고 계시리라 /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 그렇게 흘러가는 내 자신에게 / 따스한 눈길 한번 던져 주는 것이다.

 

 두 번째 시집(<사랑, 내 그리운 최후>, 문학수첩, 1999)에 수록된 ‘시인의 말’이다. 평소 많지 않은 작품을 쓰는 체질임에도 작품이 하나둘 모이다 보니, 시집 출판에 대한 유혹을 물리칠 수 없었다.

문학의 피를 이어받고 태어난 것부터가 내겐 운명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일찍 돌아가시지 않고 오래도록 문학의 꿈을 펼치셨더라면 난 결코 문학을 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께서 생존해 계셨을 때, 난 단 한 번도 시를 쓰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으며, 아버지께 단 한 차례도 글재주 있다는 칭찬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러던 내가 감히 장례식에서 아버지께서 이루지 못하신 문학에 대한 열정을 잇겠다고 치기어린 마음을 먹은 것도, 첫시집을 들고 아버지 산소에 가서 펑펑 눈물을 쏟은 것도 이제 와 생각해 보면 내게 문학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 아니었나 싶다. 그렇지만 부족한 재능으로 밤새 원고와 씨름하는 내 자신을 돌아보면 그건 견딜 수 없는 부끄러움이요 슬픔이었다.

  작가 윤정선의 말대로 ‘글쓰기란 상처받은 짐승이 제 상처를 핥는 것과 같은 일’일지도 모른다. 내게도 문학은 외로움과 절망과 고통을 치유해주는 치료제의 역할을 담당해 온 듯하다. 그러나 그 부끄러움과 슬픔은 지금까지 조금도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벼랑 같은 세월에 떠밀려 / 내가 끝없이 헐떡일 때 / 너는 언제나 / 눈물 흘려 나를 닦아 주었고 / 한 잔 술로 나를 씻겨 주었으니 / 네가 비록 썩어 없어질 / 허망한 몸뚱이라 하더라도 / 사십 년간 한 끼도 거름 없이 / 내게 베푼 그 많은 밥들과 / 폭풍 같은 애욕의 밤들을 생각하면 / 이제 너를 위해 내가 해야 할 / 단 한 가지 일은 / 언젠가 초췌해진 네가 / 나를 떠나갈 때 / 그저 고통 없이 보내 주는 것, /

그리하여 네가 좀더 빨리 썩도록 / 네게 빌붙어 살아가는 / 지긋지긋한 무좀균마저도 / 모두 용서하는 것

- ‘몸을 위하여’ 전문

 

 

3.

  추억에 빌붙어 사는 삶은 / 얼마나 굴욕적인가 / 그럼에도 불구하고 / 해는 다시 바뀌었고 / 사막은 여전히 눈부시다 // 또 하루가 저문다

 

  세 번째 시집(<영혼의 서역>, 포엠토피아, 2002)에 수록되어 있는 ‘시인의 말’이다. <영혼의 서역>은 삶의 존재론적 성찰이자, 인생의 의미에 관한 끝없는 물음으로 일관된, 슬픔에 관한 대서사시이다. 67편의 작품들은 서로 독립적이면서도 강한 연계성과 극적 구조로 배열되어 있는 파노라마적 구성을 취하고 있다.

광막한 사막을 여행하는 순례자처럼 시적 화자는 삶의 오아시스를 찾아 끊임없이 사막을 유영한다. 결국 화자가 그곳에서 만난 것은 슬픔뿐이며, 그가 깨달은 것은 단지 ‘사는 게 내 뜻이 아니’(‘서역 길’)라는 사실뿐이지만, 그래도 ‘도솔천’을 찾아 또다시 떠날 수밖에 없는 게 우리네 인생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내 영혼의 서역엔 / 타클라마칸 사막 같은 폐허가 / 온종일 강물처럼 누워 있다 / 찌르레기 한 마리 날지 않고 / 측백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고 / 이따금 황사 바람만이 / 내 영혼의 빈 곳간을 채우는 곳, / 어둠 속 그 어디인가 있을 / 너를 향한 사랑이 / 새벽 무렵 한바탕 / 방울뱀처럼 울고 나면 / 내 온몸으로 만들어낸 / 蛇行의 무늬 진 흔적에는 / 슬픔이 눈처럼 내려 쌓이고 / 비로소 나는 어둠이 된다 //

오늘도 나는 그곳으로 가는 / 마지막 열차를 기다린다

- ‘영혼의 서역 1’ 전문

 

  한 마리 늙은 낙타에 의지하여 ‘설산’으로 표상된 이상세계를 향하여 끝없는 사막을 건너가는 ‘나’의 비극적 모습을 통해 인간의 존재론적 한계에 대한 슬픔을 노래하고 있는 이 시집에서 지배적 이미지로 등장하고 있는 ‘낙타’는 곧 나의 육신이며, ‘나’는 나의 영혼이다.[그런 까닭에 내 ID는 ‘늙은 낙타(oldcamel)’이다.] 사막을 건너는 것은 곧 고통이며, 그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하루라도 빨리 사막을 건너 ‘설산’에 가 닿아야 하겠지만, ‘설산’에 도달한다는 것은 결국 죽음을 의미한다는, 우리네 삶의 비극적 모순을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그 슬픔은 존재론적 비애로 끝나는 게 아니라, 존재론적 운명을 인정하고 승인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식해 가는 하나의 과정이 곧 삶이라는 것을 이 시집을 통해 말하고 싶었다.

 

4.

   한 그릇의 밥이 나를 / 菩提로 이끌 것이라 믿었던 / 어리석은 때가 있었다 / 오늘 아침, / 이 한 알의 藥物이 나를 / 菩提로 이끌 것이라는 / 새로운 믿음으로 / 슬픈 공양을 받아들인다 / 아, 내가 나를 / 추스르지 못하는 것은 / 얼마나 역겨운 일인가

- ‘미카르디스 플러스 錠’ 전문

 

 

  ‘미카르디스 플러스’는 내가 십여 년 간 복용하고 있는 혈압 강하제 이름이다. 죽을 때까지 매일 혈압약을 먹어야 하는 것도 내겐 또 다른 슬픔이자 깨달음의 과정이다. ‘菩提(보리)’는 산스크리트어로 수행자가 최종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깨달음’ 또는 ‘앎의 경지’를 의미한다. 부처께 재물을 바치는 선남선녀처럼 내 몸에게 내가 바치는 알약 한 알의 숭고함. 늙고 병든 내 몸을 내 의지대로 통어함으로써 언젠가는 ‘보리’가 되거나 ‘도솔천’에 도달할 수 있기를 꿈꾸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내가 나를 추스르지 못하는’ 일은 점점 허다해질 것이고, 그에 따라 내 자신에 대한 모멸감 역시 늘어날 것을 생각하면 그건 분명 견딜 수 없는 ‘역겨운 일’이리라.

그렇다고 해서 어찌 내 삶이 슬픔뿐이겠는가? 생과 소멸 사이 숭고함도 아름다움도, 서정적 동감의 순간도 있게 마련이며, 그것은 자신을 완전히 지움으로써 육화될 수 있을 것이다.

단풍이 아름답게 물든 춘천과 화천 사이의 407번 지방도, ‘안개가 울창한 숲을 이루고 검푸른 호수를 이루는’ ‘물의 나라’(강원도 화천을 이르는 말)의 경이로운 풍광에 이끌려 나도 모르게 자기 망각에 이른 절대 경지의 순간, 비록 ‘뼈만 남은 발굽’으로 그곳에서 ‘온종일 혼자 놀’게 될지라도, 그 순간만은 온갖 시름과 근심을 ‘안개의 축연’ 속에 내려놓고 ‘넋을 잃’음으로써 ‘핏물 대신 단풍물이 흥건’해지는 생의 희열을 맛보기도 한다.

 

  춘천에서 화천으로 이어지는 그 아득한 물굽이마다 아침이면 안개가 울창한 숲을 이루고 검푸른 호수를 이루어 날마다 이곳에는 새로운 물의 나라가 세워집니다 난 그 나라의 가난한 백성이 되어 아침마다 군왕이 베푸는 안개의 축연에서 넋을 잃기 일쑤입니다

요즘 이곳에는 단풍이 한창입니다 단풍이란 모름지기 북으로 올라갈수록 더 곱고 진한 법, 난 안개의 숲에서 간신히 추스른 정신을 결국 단풍의 바다에다 속절없이 내려놓고 맙니다 407번 지방도를 따라 올라가는 아침 출근길이 행복한 것도 바로 이맘때입니다

난 오늘도 물의 나라에 와서 온종일 혼자 놉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갈 때면 파로호 물빛을 닮은 내 외로움도 단풍에 물들어 버린 듯 발걸음을 옮길 때면 뼈만 남은 내 발굽에선 핏물 대신 단풍물이 흥건합니다

-‘물의 나라’ 전문

 

  어느덧 어둠이 오고 있었네 / 꽁지가 노란 새들이 봄날 내내 와 놀던 / 뒤란 측백나무 숲에선 / 머리채 긴 바람들이 / 이따금 가지 끝에 머물곤 했지만 / 장마전선이 북상하고 있다는 기상특보와는 달리 / 비는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네 / 오늘은 일년 중 낮이 가장 길다는 하지, / 그 긴긴 낮 시간처럼 나는 / 기일게 누마루에 누워 / 隱者들이 남긴 絶緣 시편을 읽었네 / 그들이 세상을 버렸든 / 세상이 그들을 버렸든 / 그들이 정작 말하고 싶었던 것은 / 세상을 향한 끝없는 욕망, / 결국 욕망을 덜어내기 위한 글쓰기였네 / 어둠이 쌓이기 시작하는 이곳 오미나루, / 물안개 속을 천천히 떠가며 그물을 내리는 / 고기잡이 풍경 위로 반짝, / 초저녁별 하나 눈부시게 깨어나고 있었네 / 내일 아침엔 텃밭에 나가 / 주먹만큼씩 자라났을 감자나 몇 알 캐야겠네

-‘하지(夏至)’ 전문

 

  결국은 욕망이 문제이다. 인간 문명을 발전시킨 동력도 욕망이고, 인간 세상을 타락시키는 원인도 욕망이다. 삶이 있기에 욕망도 있고, 욕망이 있기에 삶도 존재한다. 욕망은 모든 생성의 원천이다.

  은자들의 절연 시편도 궁극적으로는 ‘세상을 향한 끝없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 ‘욕망을 덜어내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글쓰기’였음을 간파한 화자 역시 은자의 꿈을 꾼다. 그러나 그 꿈도 욕망의 다른 모습일 뿐이다. 욕망하지 않음을 욕망하는 것도 욕망이다. ‘도솔천’에 가고 싶은 것도, ‘보리’가 되고 싶은 것도, ‘욕망을 덜어내기 위한 글쓰기’를 하는 것도, 시집을 출간하는 것도, ‘텃밭에 나가 / 주먹만큼씩 자라났을 감자 몇 알 캐’는 것도 결국은 욕망이다. 이 글을 쓰는 것까지도. 결코 욕망을 버릴 수 없는 내 존재의 숙명적 한계를 알면서도 욕망을 버리겠다고 발버둥치는 이 무량한 슬픔을 나는 어찌 해야 하는가.

  시집을 출간한 지 어느새 8년이 지났다. 그동안 글 쓰는 일에 얼마나 게을렀었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네 번째 시집에 수록할 ‘시인의 말’은 뭐라고 써야 할까? 오늘도 나는 ‘도솔천’에 이르는 마음의 길을 찾아 한 마리 늙은 낙타 데리고 사막을 걷는다. 타박타박, 마치 운명을 타박하듯.

 

              - <스토리문학> 75호(2011년 여름호)

   

출처 : 원주문학
글쓴이 : 별들이 툭툭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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