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詩論

[스크랩] 이 시, 나는 이렇게 썼다 2 / 양승준 - <우리시> 277호(2011년 7월호)

운산 최의상 2013. 7. 13. 18:27

길 없는 곳에서 길 찾기

 

양 승 준(시인)

 

 

 

내 영혼의 서역엔

타클라마칸 사막 같은 폐허가

온종일 강물처럼 누워 있다

찌르레기 한 마리 날지 않고

측백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고

이따금 황사 바람만이

내 영혼의 빈 곳간을 채우는 곳,

어둠 속 그 어디인가 있을

너를 향한 사랑이

새벽 무렵 한바탕

방울뱀처럼 울고 나면

내 온몸으로 만들어낸

사행(蛇行)의 무늬 진 흔적에는

슬픔이 눈처럼 내려 쌓이고

비로소 나는 어둠이 된다

 

오늘도 나는 그곳으로 가는

마지막 열차를 기다린다

 

「영혼의 서역(西域) 1」 전문

 

  이 작품은 2002년 봄, 뜨거웠던 월드컵의 열기 속에서 간행된 3시집 『영혼의 서역』(포엠토피아, 2002)의 표제시이다. 전국민이 축구로 하나가 되어‘오 필승 코리아’를 목청껏 부르짖고 있던 그때, 나는 왜 슬픔 속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것일까. 40대 후반에 올라선 그때, 나는 왜 그토록‘존재’의 문제에 매달려 있었던 것일까.

 

  사실 우리네 삶이란 죽음을 향한 제로섬 게임에 지나지 않는다. 시간의 사슬 속에서 필패(必敗)의 국면으로 치닫는 슬픈 운명이 바로 인간 삶의 적나라한 모습이다. 죽음이라는 삶의 종착지를 향해 정신없이 달려 나가는 인간 군상(群像)들의 모습, 가치관이 어떠하든, 종교가 무엇이든, 부(富)와 지위를 얼마나 이루었든 결국에는 죽음이라는 허방다리(함정)로 떨어지고 마는 것이 인간의 인간다운 모습이다. 물론 언제 떨어질 것인가 하는‘When’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떨어질 것인가 하는‘How’의 문제가 중요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렇게 본다면 인간 존재에 대한 탐구와 천착이야말로 죽을 때까지 짊어지고 가야 할 평생의 업이 아니겠는가. 물론 나 같은 중생들이야 구년면벽이 아니라 구십년면벽을 한다 해도 그 어떤 답도 얻을 수 없겠지만 말이다.

 

  사는 것이 왜 이리 슬프고 고통스러울까. 어찌 보면 나는 태생적으로 슬픔에 민감한 체질인 듯하다.‘슬픔 또는 깨달음의 과정’(『우리시』 2010년 11월호 ‘이 시, 나는 이렇게 썼다’)에서 밝힌 것처럼 내 젊음은 가난과 외로움에서 온종일 허우적거렸으며, 내 시 또한 이러한 삶을 쉽게 벗어날 수 없었다. 가난하고 외롭지 않은 시인이 과연 있을까마는, 나도 가난이 싫어서, 지독한 가난을 대물림해준 세상이 싫어서, 그리고 낭떠러지 같은 세상에 나 혼자 내동댕이쳐진 외로움이 싫어서 나는 시를 썼다. 하지만 문학이 내 삶의 구원이 될 수 있으리란 기대와 소망이 무너지는 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시를 쓰면 쓸수록 내 존재의 감옥에 갇혀 나는 더욱 외로울 수밖에 없었다.

  내가 문단 말석에 이름 석자를 올린 것은 처음 시인의 꿈을 꾼 고1 때로부터 자그마치 20년의 세월이 흐른 1992년『시와 시학』여름호에서였다. 그런데 그때 밝힌 당선 소감도 기쁨보다는 존재의 근원적 슬픔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작시론 또는 당선 소감’이라 명명한 그 소감문은 다분히 감상적(感傷的)이긴 했어도 내 시의 출발점을 되짚어 보기 위해 이따금씩 읽어보곤 한다.

 

  시집『영혼의 서역』은 나의 존재론적 성찰이자 삶의 의미에 관한 물음으로 일관된‘슬픔'에 관한 대서사시이며, 표제시인「영혼의 서역」은 아래에 게재한 자서(自序)에서 출발하여 파노라마식으로 전개된 66편 시의 최종 종착지에 해당한다.

 

  추억에 빌붙어 사는 삶은 / 얼마나 굴욕적인가 / 그럼에도 불구하고 / 해는 다시 바뀌었고 / 사막은 여전히 눈부시다 // 또 하루가 저문다

(시집『영혼의 서역』의 自序)

 

  청년은 꿈을 먹고 살고, 노인은 추억을 먹고 산다던가. 언제부터인가 나도 추억에 빌붙어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닥쳐올 미래와 당당히 맞설 용기도 없이 그저 추억의 너른 그늘 속에 침잠하는 횟수가 많아질수록 현실로부터 도피하려는 내 자신이 역겨워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늘 앞만 보고 내달리며, 세상은 여전히 눈부시도록 아름답다.

이 작품은 이상세계인‘설산’을 향해 ‘나’를 태우고 사막을 건너가는‘늙은 낙타’를 통해 죽음과 고독을 운명처럼 짊어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네 인생의 존재론적 한계를 노래하였다. 고단한 현실로 표상된 ‘사막’을 벗어나기 위해 때론 자신의 운명을 타박하기도 하지만, 사막 저편의‘설산’은 곧 죽음이라는 삶의 모순을 깨닫는 데서 짙은 허무와 우수를 드러내기도 한다.

‘서역(西域)’이란 역사적으로 중국의 서쪽에 있던 여러 나라를 통틀어 이르는 말로, 넓게는 중앙아시아, 서부 아시아, 인도를 포함하지만, 좁게는 지금의 신강성(新彊省) 천산남로(天山南路)에 해당하는 타림분지를 가리킨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이러한 지리적 개념이 아닌 죽음의 세계, 또는 극락이나 이상 세계를 상징한다.

  일반적으로 동쪽은 해가 뜨는 곳으로 밝음과 생성을 상징하고, 서쪽은 해가 지는 곳으로 어둠과 소멸을 상징한다. 이 같은 상징적 이원론에 따르면 서쪽의 하늘을 의미하는‘서천(西天)’은 인간이 죽어서 가는 저승의 세계로 ‘서천 서역국’으로도 일컬어진다. 사실 방위(方位)의 개념이란 어디를 기점으로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기에 여기서 말하는‘서’라는 방향 역시 일반적인 방위 개념으로 생각해서는 안 될 듯싶다. “서쪽으로 10만억 불국토를 지나가면 극락이 있다.”는 『아미타경』의 말씀도 단순히 극락의 지리적 위치를 말한 것이 아니다. 서쪽은 동양의 오행사상(五行思想)으로 볼 때 금(金)에 해당하고 흰색(白色)을 상징한다. 그러기에 “욕심과 분별 때문에 나쁜 업을 짓고 원한을 품는 이 땅에서부터 바르고 착하고 깨끗한 쪽으로 나아가야 한다.”라는 뜻으로 ‘서쪽’의 의미를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또한 타클라마칸 사막은 중국 신강 위구르 자치구에 있는 사막으로,‘타클라마칸’은‘들어가면 당신은 나오지 못하리라’라는 의미의 투르크어(語)라 한다. 들어가 나올 수 없는 곳은 단 하나, 바로 죽음의 세계인 바, 타클라마칸은 모든 사막의 대유로 결국 죽음이 존재하는 우리 삶을 상징한다.

  타클라마칸 사막 같은 폐허만이 있을 뿐 어떠한 생명체도 존재하지 않는 내 영혼의 서역, 그 텅 빈 영혼의 곳간에는 이따금 황사 바람이 불어올 뿐이다. 그곳에서 나는 밤새도록 내 삶을 구원해 줄 그 무엇인가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새벽이면 그 기다림은 모래밭에 방울뱀이 지나간 흔적처럼 내게 깊은 상처가 되기도 하지만, 어둠과 하나가 되는 희열도 맛보게 된다. 오늘도 나는 마지막 열차를 기다리는 심정으로 그곳을 꿈꾼다.

 

내 그늘진 영혼의 쉼터엔 / 순례자들의 빈자리를 / 어둠으로 채워 주는 / 사막 하나 있었네 / 아득한 일몰의 끝, / 길은 보이지 않아도 / 밤이면 늘 / 물푸레나무 같은 / 달빛 한 자락 떠올라 / 늙은 낙타를 어루만져 주었네 / 알 알이슬람 / 알라께 나를 맡기고 / 또다시 메카를 향해 / 무릎 꿇는 이 시간, / 사는 게 내 뜻이 아님을 / 이제야 알겠네

- 「서역 길」전문

 

  광막한 사막을 여행하는 순례자처럼 삶의 오아시스를 찾아 끊임없이 사막을 유영하는 한 사내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시적 화자는 늙은 낙타 한 마리에 의지하여 타박타박 열사(熱沙)를 걷지만, 그가 찾는‘메카’는 좀처럼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리하여 순례의 도정에서 그는‘사는 게 내 뜻이 아님을’깨닫고는 자신의 존재 의미와 생의 의미의 길을 절대자 쪽으로 열어 놓는다.‘알 알이슬람’이라는 말은‘유일 절대의 신 알라의 가르침에 몸을 맡긴다’는 뜻으로‘귀의(歸依)’를 의미한다.

  여기서 사막은 그가 꿈꾸는 이상향의 세계이자 그가 살아가고 있는 삭막한 삶의 공간이라는 모순의 공간으로, 죽음이 삶의 종말이자 극락을 의미하는 것과 같은 이중적 의미로 쓰이고 있다. 그러기에 화자는 시집 전편에서 ‘슬픔’을 밥 먹듯 노래하지만, 그다지 처절하거나 고통스럽지 않다. 왜냐하면 많은 슬픔으로 인해 오히려 그 슬픔에 무감해졌다는 의미보다는 이 슬픔이 모든 생명체가 숙명적으로 감당해야만 하는 존재론적 슬픔이기 때문이다. 또한 극락이 죽음을 통해서만 갈 수 있는 곳이라면, 죽음도 결코 두려워 할 대상은 아니지 않겠는가.

 

  아라베스크 무늬의 양탄자를 볼 때마다 / 나는 낙타의 슬픔을 엮어 / 아름다운 사막 하나를 짜고 싶었네 / 한올 한올 움직이는 내 손끝에서 / 낙타의 슬픔은 종려나무숲으로 피어났다가 / 딱따구리로 태어나 천상을 날으다가 / 마침내 반라의 무희가 되어 / 밤새도록 나를 어둠으로 출렁이게 하고 싶었네 / 그러다 문득 / 신께 머리 조아리는 기도 시간이 돌아오면 / 그곳에 무릎 꿇고 앉아 / 낙타의 슬픔을 위로해 주고도 싶었네 / 어쩌면 사막이란 것도 / 낙타 스스로 제 가슴에 쌓아올린 / 작은 모래언덕에 지나지 않는다고, /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되뇌어 보았지만 / 낙타의 슬픔과는 상관없이 / 또다시 해는 이울고 있었네 / 나는 결국 / 안누시* 한 접시를 낙타에게 갖다주며 / 슬픔은 네가 서역까지 짊어지고 가야 할 / 또 다른 사막이라 말할 수밖에 없었네 * 안누시 : 낙타가 가장 즐겨 먹는 벼과 식물

- 「다시 저녁 무렵」전문

 

 사막은 길이 없다. 바람의 결에 따라 수시로 길은 생겨나고 사라진다. 길이 없는 그곳에 길을 내거나 사라진 길을 찾아내는 존재는 낙타뿐이다. 따라서 화자가 광막한 사막을 건너‘설산(雪山)’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낙타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화자인‘나’는 나의 영혼이고,‘낙타’는 나의 육신이다.‘낙타’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나’의 숙명이지만, 문제는 점점 ‘낙타’가 늙어간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늙은 낙타’를 버리고 ‘젊은 낙타’로 바꿔 탈 수는 없지 않은가. ‘나’와 ‘낙타’는 내가‘서역’에 이를 때까지, 즉 내가 죽을 때까지 함께해야 하는, 아니 함께할 수밖에 없는 자웅동체의 운명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ID를 ‘oldcamel(늙은 낙타)’로 정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시를 발표하던 무렵, 내가 근무하던 어느 여자고등학교의 몇몇 예쁜 악동 안티팬들이 자신들을 ‘젊은 낙타’라고 하여 나와 맞서려 한 적이 있었다.(웃음)

  독일의 철학자 니체(Nietzsche, Friedrich)는 낙타를 노예 도덕의 상징물로 보았다. 도전하지 않고 숙명에 굴종하는 존재의 상징물로 인식하였기에 낙타는 그에게 경멸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내게 낙타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상징한다. 낙타는 내 자신이자, 내가 살아가는 세상이며, 모든 인간의 운명성으로 변주되며 삶의 표징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기에 낙타는 내게 사랑과 슬픔, 고통의 대상으로, 존재 일반에 관한 운명을 성찰하게 해주는 매개체이다.

 

  한 접시 사막을 끌고 / 낙타가 노을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 사막에선 여전히 / 바다 냄새가 났으며 / 나는 낙타의 뒷모습에서 / 추레하고 늙은 / 한 사내를 보았다 / 사원으로 가는 길목에는 / 랍비들이 즐비했지만 / 낙타의 운명을 점쳐 주는 이는 / 아무도 없었다 - 「또다시 봄날 저녁」전문

 

  그때 하늘에선 저녁놀이 / 열꽃처럼 피어나고 있었지만 / 길게 누운 사막만이 / 낙타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 / 서역은 아직 요원하였네 / 내 일과의 끝은 언제나 / 낙타의 발굽에다 입 맞추는 일 / 그리곤 어둠을 따라 꿈을 꾸는 일, / 그리하여 사막 가득 어둠이 덮일 즈음 / 내 꿈은 푸른 달빛으로 떠올라 / 설산 가는 길을 환히 밝혀 주곤 하였네 / 그럴 때면 나는 으레 / 잠든 낙타를 바라보며 / 낙타의 슬픔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네

- 「또다시 저녁 무렵」전문

 

  세월이 흐른다는 건 / 슬픔이 모가지를 점점 더 옥죈다는 것, / 결국 내가 사막을 건너갈 때 / 버릴 수도 없고 버려서도 안 되는 / 저 낙타 같은 눈물 한 접시(「슬픔에 대하여」부분), 오늘도 나는 서역으로 가는 마지막 열차를 기다린다. 사는 건 언제나 이렇게 슬픔일 뿐이다.

                             - <우리시> 277호(2011년 7월호)

 

<약력>

1992년 《시와 시학》 및 1998년 《열린 시조》로 등단

시집 : 『이웃은 차라리 없는 게 좋았다』, 『사랑, 내 그리운 최후』, 『영혼의 서역』,『위스키를 마시고 저녁산책을 나가다』

연구서 : 『한국 현대시 500선 - 이해와 감상』 상 ․ 중 ․ 하 등

E-mail : oldcamel@hanmail.net

 

출처 : 원주문학
글쓴이 : 별들이 툭툭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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