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채1기 김기림 학예부장으로 활동 잘생긴 백석, 김동환은 '감격 시인' 이육사는 약령시 르포기사로 유명 민족사학자 문일평 칼럼·사설 집필 염상섭·심훈·노천명도 필명 날려
조선일보사 사료연구실이 인물로 보는 조선일보의 역사 ‘조선일보 사람들’(일제시대·광복 이후 전2권 램덤하우스중앙刊)을 펴냈다. 논설위원과 기자 등 9명의 연구자가 1년6개월 동안 발로 뛰며 자료수집과 가족 및 관련자들의 증언채록을 통해 복원한 이 책은 무려 1100쪽 분량. 231명의 행적과 육성을 생생하게 복원해낸 이 책은 1920년 조선일보 창간 이래 85년의 한국 사회와 역사를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현진건 박종화 염상섭 이광수 김동인 김기림 이원조 백석 한설야 김동환 이헌구 이은상 함대훈 윤석중 심훈 노천명 노자영 채만식 계용묵 안석주 최정희… 그리고 이육사 3형제. 20세기 전반기 한국문학사는 조선일보 인물사와 고스란히 겹친다. 문학사의 주요 장면을 기록하는 쟁쟁한 문인들이 조선일보라고 하는 한 회사에서 근무했다. 일제 치하 한글신문 조선일보에서 한국판 르네상스가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30년대가 가장 화려했다. 현진건은 제목 잘 뽑는 미남 사회부장이었다. 박종화는 입사 3일 만에 아래아(·)를 쓰지 말자고 주장했다가 편집국장이 받아들이지 않자 사퇴했다. 그러나 박종화는 50년대부터 70년대 말까지 자신의 대표작 ‘임진왜란’, ‘자고가는 저 구름아’, ‘세종대왕’ 등을 모두 조선일보에 연재했다. 영화배우들과 난투극을 벌이고 여류화가와 염문을 뿌리기도 했던 염상섭은 조선일보 학예부장이었다.
동아일보에 10년간 재직하면서 논설·사설·소설·횡설수설을 모두 써 ‘신문의 4설(說)을 도맡았다’는 평을 듣던 편집국장 이광수는 1933년 8월 조선일보로 스카우트됐다. 작가 김동인은 독설로 유명했다. 특히 작가가 기자가 되는 것에 대해서는 극단적인 혐오감을 갖고 있었다. 동아일보 편집국장 이광수에게 “비상한 노력 끝에 위선적 탈을 썼다”고, 또 동아일보 기자가 된 주요한에 대해서는 “요한이 사회인이 된다는 것은 시인으로서의 파멸을 뜻한다”고 지면을 통해 독설을 퍼부었다. 하지만 그런 그도 1933년 4월 조선일보 학예부장으로 입사했다. 하필이면 당시 조선일보 편집국장이 주요한이었다.
일본 유학을 다녀온 ‘모더니즘’ 시인 김기림은 1930년 4월 조선일보 공채 1기로 입사했다. 사회부 기자로 필명을 날리던 그는 다시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지만, 1940년 그가 학예부장으로 있을 때 조선일보는 폐간당했다. 김기림은 서정주에게 폐간시‘행진곡’을 쓰게했다. ‘상록수’의 심훈도 조선일보에서 일했다. 일제하 최고의 문학평론가로 꼽혔던 이원조는 시인 이육사의 친동생이다. 해방 후 월북하는 바람에 형보다 상대적으로 이름이 덜 알려졌지만, 그는 ‘귀족 품격 지닌 냉혹한 비평가’로 불렸다. 지식인들이 즐겨 낭송했던 ‘남 신의주 유동박시봉 방’의 시인 백석은 ‘순결한 미남, 떠도는 방랑벽’으로 이름 높았다. 시인 이육사는 대구 약령시 르포기사를 쓴 특파원이었고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이상화는 대구경북 조선일보 지국을 운영했다. 작가 한설야는 박헌영의 경기중학 친구로, 1933년을 전후해 조선일보 학예면 편집을 맡았다. 1927년부터 1939년까지 꾸준히 조선일보에 글을 싣던 고정필자이기도 했다. ‘국경의 밤’의 김동환은 사소한 일에도 쉽게 감격해 ‘감격 시인’으로 불렸다. 월간지 ‘삼천리’를 창간한 것도 조선일보 기자로 있을 때다. 조선일보에 주로 글을 썼던 한용운, 홍명희는 조선일보 기자 그 이상이었다. 조선일보에 ‘임꺽정’을 장기 연재했던 홍명희의 아들이자 한문학의 대가였던 홍기문은 조선일보 학예부장으로 한글에 관한 깊이 있는 논설로 이름을 날렸다. 해외문학파를 이끈 이헌구의 별명은 ‘가난한 로미오’였고 이은상은 폐간 직전까지 ‘조광’의 책임을 맡으며 조선일보에서 일했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로 시작되는 시 ‘사슴’의 시인 노천명도 조선일보 기자였다. 그의 도도함이 때로는 지나쳤는지 경제부 기자 김광섭은 “(그를)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는 증언을 남겼다. 수필가 조경희는 폐간 당시 학예부의 홍일점 막내기자였다.
조선일보 학예면은 문학분야에서뿐만 아니라 학술분야에서도 최고 인재를 자랑했다. 당대의 손꼽히는 사상가 안재홍이 사장을 지냈고 신간회 활동을 계기로 보성전문 등에서 마르크스 경제학을 강의하던 이관구도 조선일보에 합류했다. 국내 최초로 스위스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이관용은 1920년대 말 특파원으로 중국지역을 취재했다. 다롄감옥에 투옥돼 있던 단재 신채호를 면회하고 조선일보에 소식을 전한 것도 이관용이었다. 해방 후 국사학계의 기초를 다치는 데 크게 기여하게 되는 이선근 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장은 25세 때 조선일보 편집국장 대리를 지냈다. 신채호 박은식 등과 함께 역사논설을 통한 민족의식 고취를 해온 민족주의 사학자 문일평은 1933년 4월부터 1939년 4월 타계할 때까지 편집고문으로 일하며 역사칼럼과 사설을 집필했다. 미국농학박사출신 이훈구는 주필을 맡아 농업입국의 비전을 제시했다. 또 한글학자 외솔 최현배의 아들 최영해는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교정부’만을 고집했으며 방종현은 우리말과 글이 탄압을 받던 시절 조선일보를 통해 ‘정음발달사’ 등을 비롯해 5년간 한글관련 기사를 연재하고 1940년에는 ‘속담대사전’을 펴냈다.
[조선일보 이한우 기자] 조선일보,2004.12.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