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작가와 문학

[스크랩] 서정주 문학관과 고창 기행

운산 최의상 2012. 11. 24. 19:34

시인 서정주와 고창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 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드는데
눈이 내리면 어이하리야
봄이 또 오면 어이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미당 서정주시인(1915~2000)의  시 ‘푸르른 날’을 읽으면 가슴 설렌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라는 싯구와 운율이 그리움으로 다가선다.  봄이 무르익고 있었다. 문득 지하철역에서 미당의 이 시를 발견하여 몇 번 읽는다. 전철소리는 곧 기차소리로 들리고 그의 고향, 고창의 질마재를 찾아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질마재신화에 등장하는 신부(新婦)의 애절한 이야기가 슬픔이 되어 어디론지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군사독재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민주화정부 이후에는 봄도 조용하다. 해마다 4,19혁명과 5,18광주민주화운동으로 이어지는 시기는 최루탄이 난사되던 시기다.  문민정부이후 민주화로 인해 역사의 뒤안길 이야기가 되고 있다. 사실 서정주시인의 문학기행을 쓰는 일은 쉽지 않다. 일제하 말기에 그의 행보와 군사독재시절 어용시인의 전력으로 인해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이유로 해서 그의 문학적인 모든 것을 다 삭제할 수 는 없는 일이 아닌가 말이다. 기성세대 중에서 그의 시를 읽지 않은 이가 없을 정도로 해방 후 문단에서 그의 입지는 돈독했다. 오래전 필자는 어느 학회 회원들과 함께 고창에 있는  선운사의 동백꽃을 보러 갔다가 절 입구에 서 있던 그 시비를 발견한 기억이 있다. 몇사람은 이미 그의 전력을 문제 삼아 시비조차 거들 떠 보지 않고 절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필자는 시비에 있는 <선운사 동구>란 시를 메모하였다.

선운사 고랑으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리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시방도 남았습디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니다.

그러나 서정주시인은 청소년 때는 사상적인 방황 속에서  이데올로기에 심취하기도 했던 사람이다. 필자가 서정주시인에게 그나마 인간적인 연민을 갖게 되는 것은 이런 방황에 기인된다. 시비조차 거들떠보지 않고 선운사로 바로 직행하던 사람들 중 오늘날 변절한 자들이 더 많다. 그들도 당시에는 진보주의에 심취해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그들 중 일부는 현실에 적응하기 위해 양심을 팔면서 부끄러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 누가 누구를 비판할 수 있겠는지 자괴감이 가슴을 짓누른다. 이런 판단의 혼돈 속에서 서정주시인의 고향 고창군을 향한다. 고창은 서해안고속도로가 완공된 후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서울에서 294KM, 결코 가깝지 않은 거리다. 서해안 고속도로가 개통되기 이전에는 호남고속도로를 이용하여 전주를 지나서 있는 정읍인터체인지로 진입하여 지루하게 국도를 타고 달려야 했던 곳이다. 고창의 발전은 특이하다. 공업화에 따른 발전이 아니라 역사문화관광지로서의 어느 정도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선운사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고인돌유적, 청보리밭 ,고창읍성, 미당시문학관으로 이어지는 고창의 역사 문화적 기반은 어느 곳 보다 그 폭이 넓고 깊다. 판소리를 집대성한 신재효의 판소리 고향이기도 하여  문화예술로서 손색이 없다. 고창의 인물들을 떠올려 본다. 고창의 인물로 동학혁명의 총 지휘자 전봉준이 있다. 사람들은 전봉준을 정읍사람이라고 하지만 그의 고향은 고창이다. 동학혁명의 영웅 전봉준의 생가터가 고창군 고창읍 당촌리 63번지에 있다. 고속도로변에 위치하고 있지만 찾아 가기가 쉽지 않다.  1894년 3월20일(음력) 고창군 공음면 구암리 구수리 마을에 분노한 무장 농민 4,000명의 함성소리는 간 곳없고, 늙은 노인들만 서성이고 있었다. 고창읍에는 신재효고택이 있다. 잘 보존된 고창읍성 아랫 마을에 누구에게든 신재효를 물으면 길을 안내한다. 일찍이 신재효선생을 두고 가람 이병기선생은 그의 국문학 업적중의 하나인 판소리 이론및 연출등의 업적을 ‘기적의 사업’이라 칭했다. 1812(순조12년) 11월6일 고창읍 읍내리에서 태어나 평생 판소리 하나에 목숨을 걸었던 분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22번 국도변에 있는 마을, 흥덕면에서 김소희 명창이 태어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는 서편제의 대명창 송만갑의 제자이기도 하거니와 춘향가및 심청가를 부를 때 목소리가 피를 토하는 듯 가냘프고 섬세하였다.

백제 때 고창의 이름은 <모량부리현>이었으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인 경덕왕16년 고창현이란 이름을 갖게 된다. 1914년 일제에 의해 고창, 무장, 흥덕 세 고을이 행정개혁 개편이란 이름으로 고창군이 되었다. 한때 전라남도가 되기도 했다. 1955년 고창면이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읍 13면이 현재의 고창군의 행정체재다.

서해안고속도로는 당진의 서해대교를 넘어 군산을 지나고 나면, 이내 김제 만경평야다. 시야가 탁 트인 호남들녘을 지나다 보면 <선운사 나들목>이 나온다. 그해 봄 가로수의 벚꽃은 이미 저버리고 가지엔 새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서해안 고속도로 <선운사나들목>을 나와 22번국도로 접어들면 이곳이 선운사 가는 길이다. 이 길을 달리다 보면 부안면소재지를 지나게 되고, 용산저수지를 왼쪽으로 끼고서 삼거리에서 우회전 하면 고개가 나타나는데, 이고개가 유명한 ‘질마재’다. 물론 서정주  시인의 시 때문이고 직접 가서 보면 싱겁다.  멀리 줄포만이 보이고 왼쪽으로 서정주시문학관이 보인다.
이곳은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에 있었던 선운초등학교가 폐교 된 곳을 시문학관으로 리모델링하였다. 학교터를 그대로 문학관으로 개관하였기 때문에 부지면적이 2,862평이나 된다. 전시실, 세미나실, 전망대및 서재 재현실, 다용도실등으로 디자인 된 공간은 깔금하다. 전시동 콘크리트 건물에 페인트칠을 하지 않는 건축물로서 자연적이며 친환경적인 것이 특징이다.

서정주의 고향마을 선운리에 콘크리트 6층 건물을 새로 지어 만든 문학관은 사뭇 범상치 않게 서 있다. 서울 남현동 자택에 있던 미당의 유품이 2001년 11월3일 개관을 위해  이곳으로 옮겨 왔다. 한 작가의 유품이 다양하면서  많이 전시되고 있는 것이 미당문학의 특징이다. 사용하던 장롱까지 옮겨다 놓았으니 말이다. 아예 살림집을 옮겨다 놓은 듯하다. 이것은 그의 사후 1년 만에 문학관이 개관되었고 살아생전에 이미 서정주 시문학관을 만들자는 이야기가 이곳저곳에서 흘러 나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미당시문학관의 6층 전망대에 오르면  질마재 및 생가를 훤히 내려다 볼 수가 있다. 왼편에는 미당의 생가가 오롯이 누워 있으며, 오른편 양지바른 곳에 그의 묘소가 오고 가는 사람을 보면서 앉아 있다. 오랫동안 문학기행을 많이 다녔지만  작가의 생가와 인접해 문학관을 포함한 자신무덤이 존재하는 사람은 서정주 시인이 처음일 것이다.

 

 시문학관 비 http://cafe.daum.net/memorymeet 연희의 행복노트 사진발췌


서정주시인은 1915년 5월18일 전북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에서 태어났다. 동네 서당에서 한문수업을 받고, 서울의 중앙고보에 입학하여 광주학생운동에 가담한 후 구속되었다. 고창고보에 편입학 한 후 이후 자퇴하여 계속적인 방황을 한다. 이 시기에 그는 공산주의 사상에 빠져들기도 하였다. 그는 민족문제와 가난하고 천대받는 현상의 극복을 위해서 칼막스와 레닌의 사상에 도취되어 가죽구두도 벗어버리고  지까다비를 신고 다녔으며, 가난한 사람들과 어울리다가 장티푸스에 걸려 죽음직전에 직면하기에 이른다. 이후 톨스토이의 “공정한 물질의 분배가 행복을 주겠는가?”라는 선언에 감동을 받아 사상의 자유로움을 강구할 수 있게 된다. 

이런 번민과 방황을 통해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벽?이 당선되어 문단에 화려하게 데뷔한다. 같은 해 김달진 김동리 김광균등과 더불어 ‘시인부락’이란 동인지를 만들어 시작활동을 활발하게 진행한다. 1938년 첫 번째 시집 ‘화사집’을 발간하여 원색적이며 악마적인 시풍으로 문단에서 주목받는 작가로 부상한다. 이런 관심의 일환으로  한국의 보들레르로 불려 지기도 했다. 해방직후 보수문단인 조선청년문학가협회를 결성하여 자신의 일제하 친일문학행위를 포장하려고 하였으며, 70년대 말 문인협회 이사장을 역임한다.

생전에 1000여편의 시를 15권의 시집에 담아 출간했으며, 그의 유품은 모두 1만5천 여점에 이른다. 노벨문학상 후보에 5차례 추천되기도 했지만, 결국 2000년 세상을 떠난다. 일제말기 징병을 종용하는 글과 친일시를 발표하는 등의 친일행적으로 군부 독재자 선출과 정에서 전두환 찬조연설, 대통령당선축하의 축시헌사, 전두환지지 발언등 독재권력 주변을 맴돌았다. 이런 그의 행적에도 불구하고 그는 토속어와 질펀하고 흥미진진한 언어구사와  신화적인 담시를 썼다. 그의 시는 초기에는 원색적인 관능미로 출발하였으며 오십대 이후에는 전통적인 미학탐구적인 시를 쓰기 시작하였다.

1992년 <시와시학>에 “국민총동원령의 강제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징용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친일문학을 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변명에 불가하다고 판단하였지만 노인이 된 그가 어쩐지 가련해 보이기도 했었다.  “일제가 100년 이내에는 결코 망하지 않을 줄 알았다”는 고백적인 글도 어디에선가 읽은 기억이 있다. 민족의식의 결여와 역사철학의 빈곤을 드러낸 글이었다.

1980년 2월쯤이라 기억된다. 필자는 서울 관악구 남현동 자택을 방문한 기억이 있다. 그 때 필자는 그의 시 ‘자화상’을 암송하고 다녔다. 어떤 문예지를 읽고 주소를 확인하여 인사를 하러 갔는데 마침 빈 집 이었다. 후에 다시 찾아 가 시집에 싸인을 받을 계획이었다. 아마도 문학청년 정도로 생각되었는지  “어느 대학을 다니는가? 문학을 전공하나?” 생각보다 친절했다. 더 이상 말을 잊기가 어려워 ‘질마재신화’라는 시집을 보여주면서 싸인을 부탁하였다. 그것이 전부다.  80년 광주와 민주화 운동과정에서 그가 친일작가로 알려지면서 큰 실망을 했다.  사람의 정서가 그토록 무섭게 변할 수 있음을 그 때 알았다. 이후 필자는 미당의 집 근처를 얼씬거리지 않았다. 자화상이라는 시도 암송하지 않았다. 그래도 늘 자화상의 첫 구절 ‘애비는 종이었다.’의 시작은 내게 어떤 비장함을 심어 주곤 했다.
            
서정주시인의 고향마을 질마재에서 멀지 않은 곳인 부안면 인촌리에, 호남 갑부중의 한명이었으며 부통령을 지내기도 했던, 인촌 김성수 고택이 있다. 이 집에서 시인의 아버지는 한때 마름 노릇을 했다는 설이 있다. 결코 김성수집안의 머슴은 아니었다.

‘스물세해 동안 나를 키운 것은 바람이었다.’ 는 싯구절로  인해 당시 나는 온통 시인이 되고 싶다는 마음에 가슴 벅찼다. 그러나 늘 가슴을 후벼 파던 ‘나를 키운 것은 팔할이 바람이었다.’라는 기막힌 은유였다. 그러나 1985년 여름 그가 친일작가였다는 결정적인 증거를 접하고 신경림의 시 <갈대>를 암송하면서 위안을 찾으려 애썼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끝 구절이 큰 위안 이었다. 사람의 배신과 변절은 증오를 낳지만 곧 슬픔으로 변하고 울고 싶어진다. 결국 사람이 사는 일자체가 이런 과정의 연속성이란 해석으로 위안을 삼고 싶었다. 얼마 전 신경림 시인은 어느 문학 강연 자리에서  ‘미당은 나쁜 시인 이었다’라고 못을 박았다.

노벨문학상 수상후보자로 몇 번씩이나 거론되고 있는 고은시인도 그를 비판했다. 자신의 시집 <신 언어 최후의마을>(1967년도출간)에서 “삼가 이 책을 서정주 스승께 바치나이다”라고 서문에 한 줄로 썼었다.
세상 인심은 세월이 따라 변질되는 것인가? 서정주 시인이 세상을 떠나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  고은시인도 자신의 스승을 비판하였다. 스스로 스승을 비판하면서 자신이 높아질 수 있는 이 땅의 파행적인 문단의 현실이 슬픔으로 다가선다. 하지만 역사속에서 누가 누구를 심판할 수 있는 것인지, 필자는 서정주시인의 생가주변을 서성이면서 몇 번이고 되물어 보았다. 해 아래 변하지 않는 것은 오직 푸른 하늘이아니겠는가?

‘선운사 동구’라는 시를 쓴  서정주시인의 낭만을 읽으면서 선운사 뒷산에 군락을 이룬 500년 된 동백꽃나무숲을 거닐었다.  오래전의 봄으로 기억한다. 동백꽃이 만발한 후 이미 꽃이 떨어지고 있었다.  꽃송이 전체가 목이 잘려지듯 무참히 떨어지는 장면이 섬뜩했다. 내 젊음도 꽃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떨어진 꽃들은 핏빛이었다.  서정주 시인이 유년의 방황을 이곳에서 젊은 스님들의 선문을 들으면서 시인으로 거듭나게 되었음을 깨닫고, 그를 부러워하기도 했다.

선운사는 백제 27대 위덕왕24년(577) 검단 선사가 신라 진흥왕의 시주를 얻어 개창했다. 도솔암으로 올라가는 오른쪽 산자락에 진흥굴이 있다. 그의 아내 도솔과 딸 중애가 진흥굴안에서 수도생활을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신라 24대 진흥왕이 왕의 지위를 버리고 멀리 백제 땅 선운사까지 찾아와서 불공으로 정진했던 곳을 더듬거리는 일은 흥미롭다. 필자는 미당의 시집 <신라초新羅抄>(1961년)을 가지고 있는데, 늘 서정주시인이 왜 시집의제목을 <신라초>라 했을까 궁금해 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선운사에 가서 그 해답을 얻었다.

서정주 시인에게 있어 진흥왕과 신라는 먼 곳에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1400년의 역사를 뛰어 넘어 고개를 하나 넘으면 만나는 사람이었다. 백제와 신라를 대립적인 구조로 볼 수 없었던 것은 서정주 시인으로서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계절이 바뀔 때 고창 땅 선운사를 찾기 전 미당 서정주시인의 <동천>이란 시를 읊조리면서 그의 생가와 무덤가를 거닐어 보자.

동천(冬天)

내 마음 속 우리 임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나르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누군가를 이 시 같은 마음으로 사랑해 보자.
연민으로 서정주 시인을 이해하게 될 것이며, 결국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글 | 김경식 (시인)/http://www.iloveletter.or.kr/?_page=33 사색의 향기

 

 

출처 : 들꽃따라 문학향기
글쓴이 : 솔체꽃{모티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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