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좋은 시(詩)

[스크랩] 박경리 선생님의 마지막 詩

운산 최의상 2012. 9. 10. 19:06


    옛날의 그 집 / 박경리


    비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휑뎅그렁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쑥새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이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살았다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 세상의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 박경리 선생님이 마지막으로 남긴 시 한편(2008년 4월 '현대문학' 발표) 입니다.
따사로운 5월의 봄, '토지'의 품으로 돌아간 소설가 박경리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출처 : 경기문학인협회
글쓴이 : 진순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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