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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청도 전설

운산 최의상 2018. 2. 20. 19:13



대청도
▒▒ Information

백령도의 신석기 유적출토로 미루어 이곳에도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고 있으으리라 추정할뿐, 아직 선사시대 유적이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섣불리 단정할수 없다. 932년(태조15)10월에 후백제 견훤이 대우도(大牛島)를 침공하자 백령도에 귀양와있던 유금필이 백령도와 포을도(包乙島:지금의 대청도)의 장정을 뽑아 자원출전하여 적을 패주시켰다고 하는데 김정호가 편찬한 "대동지"에는 '포을도'를 청도(靑島)라고 하였다.
작자미상의 "유산유수(有山有水)"란 책에는 대청도를 고려시대에 암도(岩島)라고하였는데 확실치는 않다. 고려시대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1091~1153)이 송나라에서 고려로 오는 노정을 적은 "고려도경(高麗圖經)"에 대청도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 대청서(大靑嶼)>

대청서는 멀리서 바라보면 울창한 것이 눈썹을 그리는 검푸른 먹과 같다고해서 고려인이 이름붙인 것이다. 이날 오각에 이곳을 지나갔다. 여기에서 대청도의 이름이 "청도"로서, 한자화(음차)하면 '포을도'즉 '푸른섬'이 된다.
1486년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 장연현편에 보면 대청도는 고을 남쪽 바다 가운데 있으며 소치는 목장이 있고 적혀있다. 고려 세종때 편찬된 "고려사"지리지에는 고려는 곡도를 백령으로 개명하여 진을설치하였고, 1018(현종9)에는 이곳에 진장을 배치하였으며 대청도와 소청도를 부속도서로 두었다고 하였다.
한글학회 발간 "한국지명총람" 대청면편에 고려 제27대 충숙왕 4년(1317)원나라 발랄태자(勃剌太子)가 이곳에 귀양와서 있다가 1323년(충숙왕10)에 돌아갔는데 그 다음에 정월에 다시 귀양와서 5년을 있다가 1329년(충숙왕16) 3월에 돌아 갔다고 하였다. 이 밖에도 고려시대에 있어서 대청도는 유배지로 널리 알려졌다. 인천에서 북서방면으로 202Km거리에 있는 대청면은 주민의 80%가 어업에 종사하며 일부는 농업과 겸업하고 있는 전형적인 어촌지역으로 현재에도 다양한 어종 수산물이 풍부한 지역으로 섬 전체가 낚시터로유명하다.
최근 초쾌속선의 취항으로 수도권과 일일 생활권이 되었으나 널리알려지지 않아 아릅답고 깨끗한 자연환경은 관광휴양객들이 피로를잊기에는 국내제일이라 할 수 있는 하늘이 내린 낙원이라 한다

<대청도의 전설>

♣대청도로 귀양 온 원순제(元順帝)
'원순제가 태자로서 유배되었던 곳이 대청도'라는 인근 여러 섬까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고려와 원나라 사이에 얽힌 실사(實史)에바탕을 둔 이야기의 내막은 다음과 같다.

원순제는 일찌기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의 품에서 자라게 되었는데, 황후인 계모에게 왕자가 태어나면서 비극은 시작된다. 계모는 자기가 낳은 아들을 장차 왕위에 앉혀 보려는 엄청난 음모를 꿈꾸고 있는 여인이었다. 그러나 적자인 태자가 엄연히 존재하는 터였으므로원순제를 내쫓을 묘안을 찾아야만 했다. 고심 끝에 좋은 계략을 생각해 낸 계모는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이때부터 계모는 적자인 태자를 더욱 사랑하는 척 갖은 애교를 다 부렸고,마침 때가 되었다고 생각할 때, 태자를 자기 처소로 은근히 불렀다. 계모는 태자가 들어오자 웃 저고리를 벗으며 '등이 몹시 가려우니 긁어달라'고 청했다. 동시에 계모는 '태자는 계모인 나를 겁탈하려 하느냐'며 큰소리로 외쳤다. 이때 근신들이 모여와서 현장을 살펴보니 황후가 웃옷이 벗겨진 채 있는지라 태자는 변명할 여유조차 없이 애꿎게 누명을 쓰게 되었다. 이 사실이 황제에게 보고 되고 마침내 태자는 대청도로 귀양가는 벌을받게 되었다. 그러나 태자의 무고함을 알게 되어 대청도까지 따라간 충신들의 숫자가 6백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태자 일행이 대청도에 처음 도착한 곳은 옥죽포였다. 안으로 깊숙히 들어가 지금의 양지동에 자리를 잡고 대궐을 지었는데, 당시 대청도에는나무가 어찌나 무성했던지 옥죽포에서 궁궐까지 오는 시일이 일주일이나 걸릴 정도였다고 한다. 비록 절해고도에서 귀양살이는 할 망정 신하들의 극진한 보살핌에 태자는 더없이 편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한편 계모는 태자를 귀양보내고 후환이 두려워 불안한 마음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태자의 근황을 알아내기 위해 대청도로 염탐을보냈다. 염탐꾼이 대청도에 당도하니 하늘을 가릴 정도로 울창한 산림과 해변가에 만발한 해당화의 그윽한 향기는 마치 선경을 이루는 듯 했다. 섬 깊숙히 들어가니 제법 위엄이 있는 높다란 궁궐에서 태자 일행이단란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고국을 떠나 외로움에 눈물짓는 전경이 애처로워 보였지만 서로를 믿고 살아가는 모습이 지상천국을 떠올리게 했다. 황급히 본국으로 돌아간 염탐꾼은 본대로 태자 일행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계모에게 전했다. 깜짝놀란 계모는 한 동안 정신이 아찔했으나 곧 수습하고 밤잠을 이루지 못하며 태자를 완전히 없애 버릴 계책을 꾸몄다. 계모의 밀사가 다녀간지도 모르는 태자는 얼마 후 뜻밖에 부왕의 편지를받았다. 내용인즉, '네 잘못이 있었겠느냐.보고 싶은 마음 금할 길 없어 우울한 나날을 보내던 중, 이 몸이 중병을 얻어 눈앞에 죽음을 앞두고있다. 용한 의사들을 모두 불러 병을 물었으나 중병이라 도리가 없다는구나. 다만 한가지 신약이 있기는 하다는데 이 신약이란 것이 다른 것이 아니고 맏아들의 눈을 하나 먹는 것이라 하니, 이로서 천년을 산다 한들 내가 어찌 너의 눈을 먹을 수야 있겠느냐. 애비는 너를 다시 못본 채속절없이 죽게 되었구나.'이러한 부왕의 편지를 읽고 난 태자는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한 없이흘렀다. '비록 계모의 음모를 모르고 나를 이곳에 보낸 부왕이지만 나에게는 둘도 없는 아버지가 아닌가?'라고 생각이 미치자 효심이 깊은 태자는 생사의 귀로에 서있는 아버지를 위해 눈을 기꺼이 뽑아 버리자고 결심했다. 한 눈을 빼어 부왕께 보낸 태자는 부처님께아버지의 완쾌를 기도하며 전과같이 평화로운 생활을 계속했다.
태자의 한쪽 눈을 받아든 계모는 기쁨을 참지 못하는 한편 이에 만족함이 없이 태자를 완전한 불구의 몸으로 만들기 위해 또 한 장의편지를 보냈다.
'너의 눈을 먹었더니 약간의 차도가 있어 기쁘구나. 그러나 한 눈을마저 먹어야 완쾌가 되겠다는데 이를 어쩌겠느냐.'라는 내용의 부왕 편지를 전해들은 태자는 남은 한 눈을 아낄 수가 없었다. 계모의 간교한 책략인줄 모르는 태자는 한 눈을 마저 빼고 부왕의쾌차를 간곡히 빌었다.그러던 중 태자는 부왕이 죽었으므로 급히본국으로 돌아오라는 전갈을 받았다. 불구의 몸으로 귀국길에 오른 그는 옹진반도를 거쳐 해주로 길을 재촉하였다. 해는 져서 캄캄한데 인가는 없어 노숙할 수 밖에 없는 없던 차에희미한 불빛을 발견하게 되었다. 당도하여 보니 아담하고 조그만 암자였다. 수양산 암자에서 하룻밤을 묵은 태자는 암자 주지스님의 인도로 해주 용당포에서 배편을 이용하여 무사히 본국까지 귀환하게 되었다. 다행히도 그동안 태자가 뽑아보낸 두 눈을 유모가 자신의 젖을 짜서 유리병에 안전히 보관하고있었고, 그가 도착하자마자 도로 두 눈을 넣어 주었다.
기적적으로 광명을 되찾은 태자는 자유의 몸이 되었고 곧 황제로즉위하였다. 순제는 귀국길에 도움을 주었던 해주 수양산 암자의 공을 기리기 위해웅장한 절을 짖기로 했는데, 그 절이 바로 유명한 신광사이다.

♣대청도 신향이 이야기
대청도에 처음 들어와 살았던 사람이 신향이라 하니 그가 이 섬의시조인 것이다. 대체 신향이란 청년이 어떻게 대청도에 들어와 살게되었을까?
옛날 어느 고을에 신향이가 살고 있었다.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아버지는 첩을 얻어 그 사이에 자식도 여럿 두었다. 세월이 흘러 신향이가 스무살이 되자 욕심 많은 계모는 '장손인 그가 살아있으면 자기 뱃속에서 나온 자식들에게 돌아올 재산이 없겠구나'하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신향을 죽이기로 작정한 계모는 점쟁이와 작당을 하여, 마치자신이 죽을 병에 걸린 것처럼 행동을 했다. 점쟁이는 신향의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죽을 병에 걸렸는데 살리려면 장남의 간을 먹여야 한다'고 말했다. 장남인 신향이를 죽일 수 없어 전전긍긍해 하던 아버지는 개를 죽여 그 간을 아내에게 먹이기로 했다. 신향의 간인줄 착각한 계모는 먹지 않고 병이 다 낳았다고 했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미처 다른 데로 피신가지 못한 신향이는 계모의눈에 발각되었다. 계모는 또다른 계략을 세웠다. 신향에게 등이 몹시 가려우니 긁어달라고부탁한 것이다. 신향은 계모의 말대로 등을 긁자, 버럭 역정을 내며 새끼가 어미의 엉덩이를 만지며 능욕하려 했다'고 크게 떠들었다. 이에 아버지가 아들을 불러 자초지종을 묻자, 대성통곡하며 자신의결백을 털어놓은 신향, 결국 아버지는 '계모와 함께 있으면 아들의목숨이 언젠가는 위태로울 터,신향을 풀없는 고장으로 멀리 보내겠다'고 했다. 이에 아들도 아버지의 뜻을 따라 부모님께 정중히 하직인사를 올리고 먼길을 떠났다.
강가에 와서 나룻배를 탄 신향은 탄식하듯 '돌아가신 어머니! 넋이라고있으시다면 저를 아무 섬이라도 닿게 해주십시요'라 기도하고바람부는 대로 물결이 이는 대로 정처없이 뱃길에 올랐다. 며칠이 지났을까. 한참이 지나 눈을 떠보니 신향의 배는 어느덧 옥죽포 앞바다에 와 있는 것이었다. 먼저 양지동 뒷산에 집을 짓고 정착한 그는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는 큰 집에 하인까지 거느리며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되었다.
노인이 되어 죽음이 임박한 신향은 삼각산에 금부처를 세우고생전에 쓰던 물건을 묻어 그 위에 고인들을 세우도록 했다.그 후 일본사람들이 들어와 삼각산의 금부처와 고인돌 안에 묻힌 좋은 물건들을 모두 가져갔다고 한다. 훗날 사람들은 양지동 뒷산을 '신향당골'이라고 청했다. 신향당골에 가보면 신향이가살던집 기왓장과 먹던 우물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산신령 도깨비가 나온다는 삼각산
대청도의 기둥인 삼각산은 험준한 명산이다. 수려하고 원시초목이 잘 보존되어 있는 이 산은 예로부터 산삼의 산지로 유명하여 많은 심마니들이 모여 들었다고 한다. 1920년경 장산곶 청골에 산다는 곽주부라는 사람이 산삼을 캐러 대청도 사탄동에 왔다. 곽주부는 의술이 용하고 침을 잘 놓을뿐더러 유식하고 산수화, 동물화도 잘 그리는 재간꾼이었다. 그는 단신으로 삼각산 중턱에 초가삼간을 짖고 산삼캐기에 전념하였으나 산삼은 한 뿌리도 못캐고 있었다. 게다가 밤이면 밤마다 도깨비가 나타나 곽주부를 괴롭혔다고 한다. 그래서 한밤 중에 신발도 못 신은 채 동리로 도망가기가 일쑤였는데, 그 때마다 도깨비는 그의 발목을 끌어 잡으며 장난을 쳤다. 어느날 밤엔 도깨비가 곽주부를 온 산을 헤메게 하여 괴롭히다가 고주동까지 끌고 갔다는 것이다. 도깨비의 장난에 손을 들은 곽주부는 죽도록 고생만 하다가 일년 후고향으로 되돌아 갔다고 전해진다.

♣울지않는 삼각산의 닭
옛날 '정감록'을 신봉하던 이지태라는 사람이 이곳 대청도 사탄동으로 난을 피하여 찾아 왔다. 옹진군 용천면에 살다가 부인과 아들을 데리고 식량을넉넉히 준비하여 이 곳을 찾은 그는 삼각산 중턱에 곽주부가 살던 자리에 집을 짓고 살았다. 황무지를 개간하고 가축도 길렀다. 그때 만주사변이 터지자 이지태는 생기지방(生氣地方)인 이 곳에 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 후 그는 식량준비차 1년에 두 세 차례 고향을 내왕하기도 하며 별탈없이 살았는데 기르는 닭마저 울지 않는 괴이한 일을 겪게 되었다. 사탄동으로 내려와 닭을 교환해 가도 3일 후면 영락없이 벙어리 신세가되었고, 반면 부락으로 가져온 닭들은 새벽이면 정확히 울었다. 곽주부가 겪은 도깨비 소동과 똑같은 일을 매일 밤마다 겪게된 이지태는닭사건도 도깨비 짓이라 생가하여 3년 후 할 수 없이 옹진군 기린도로이사가 버렸다고 한다.

< 볼거리>

♣옥주동 모래사막
대청도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대청 3리 해안은 옥죽포 앞에서부터대진동을 지나 두리장수리쪽 해안까지 약 1Km거리의 은빛 백사장을 이룬다. 사리때의 썰물에는 큰 평원을 이루는 백사장이 남쪽의 대청 2리와 경계를 하고 있는 검은낭산줄기 등성이까지 이어져 있다. 많은 눈에 덮인 것처럼 하얀 모래산이 푸른산 줄기 중간에 쌓여져 절경을 이루는 명물 중의 명물이다. 오랜 세월 동안 쌓이고 쌓여 이루어진 100m이상의 사막을 이룬이 모래산은 바람에 따라 이동을 한다. 산등성이까지 바람에 불려 올라온 모래는 다시 등성이를 넘어 선진동북쪽 검은낭 해안인 논꼴까지 넘어와 쌓였다가 다시 동남풍에 의하여 산등성이로 불려 날아 올라간다. 이와같은 모래는 바람에 따라 높은 산줄기를 넘어왔다 갔다하며 물결과도 같이 다른 형태로 변하고 있다.

< 가는 길>

(온바다▶데모크라시5호)오전 07 : 40 分 . 오후 12 : 40 分 (진도해운▶아일렌드,퀀티넨탈호)오전 08 : 10 分 . 오후 12 : 10 分

◈경인고속도로(종착점) → 인천항 사거리(좌회전) → 백주년기념탑(우회전) → 해양경찰청 사거리 (좌회전) → 인천 연안부두 여객터미널

◈제2경인고속도로(종착점) → 백주년기념탑(직전) → 해양경찰청 사거리(좌회전) → 인천 연안부두 여객터미널

◆전철 이용시 동인천역에 하차 → 인천 연안부두행 버스(24번외다수) 이용 → 인천 연안부두 여객터미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