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詩論

[스크랩] 언어와 현실로 나아간 60년대 시

운산 최의상 2014. 12. 24. 15:47
 

 

언어와 현실로 나아간 60년대 시

― 박재삼, 이승훈, 신동엽 시를 중심으로



Ⅰ. 서론


 1960년대는 해방 5년 뒤 벌어진 6․25전쟁의 상흔이 국토 분단의 상처로 남아있던 시대이다. 분단의 영속화로 통일의 길은 점점 멀어지고 멸공통일과 반공을 부르짖던 어린이들이 야산(野山)에서 불발탄을 가지고 놀다가, 다치거나 죽는 일이 비일비재했던 60년대. 산골에는 전깃불이 채 들어오지 않았고, 웬만한 거리는 걸어서 다니는 것이 당연하였다. 초가집이 즐비하던 마을이 새마을 사업으로 알록달록한 양철 지붕으로 바뀌기 시작하고, 고속도로가 뚫리며, 집집마다 전깃불이 들어오고, 흑백 T․V가 보급되기 시작한 60년대는 조국 근대화와 자립경제가 온 국민의 화두였었다. 4․19 혁명으로 불어왔던 자유의 바람은 조국 근대화의 화두 앞에서 숨을 죽이고, 새마을운동과 경제개발계획에 따른 정부주도의 시책 아래서 민주주의는 냉전논리로 대체되었다.

  이러한 60년대의 시대정신은 당시 씌여진 문학작품 속에 투영되기 마련이다. 60년대를 살았던 현대시인들 또한 당대의 의식을 시 속에 용해시키거나, 시로써 현실의 아픔을 노래하거나, 혹은 인간다운 삶을 그리워하거나 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찾았다고 할 수 있다.

 60년대 시를 한국현대시사에서 조망해보자면 크게 참여시와 순수시로 나눌 수 있다. 흔히 말하는 순수/참여의 양분법은 60년대 뿐 아니라 전대나 후대에도 적용할 수 있는 도식이다. 이에 60년대 시의 흐름을 순수/참여 양분법에다, 언어에 의한 내면 의식지향의 모더니즘시의 한 흐름을 보태어 세 경향으로 살펴 보려한다. 한국 전통시의 맥을 잇는 서정시, 사물과 자아 사이의 소외의식을 언어의 추구로 극복하고자 하였던 모더니즘시, 사회현실에 대한 인식을 역사의식과 비판의식에서 시작한 참여시의 세 흐름을 60년대 시를 대표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에 60년대에 활동했던 여러 시인들 중에서 세 흐름을 대표할 만한 시인을 살펴봄으로써, 그들의 시가 다른 시대의 시와 어떤 변별성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 보겠다. 60년대 활동하던 시인들 중에서 고전주의적 서정시는 박재삼을, 내면의식 탐구의 모더니즘시는 이승훈을, 현실 참여시에서는 신동엽을 살펴 보기로 한다. 이들이 쓴 시는 60년대 발표된 것을 중심으로 찾아볼 것이며, 그 시를 설명할 수 있는 산문과 시론집도 참고할 것이다. 60년대 시의 흐름을 대표하는 세 시인의 시를 살펴본다는 것은 60년대 시의 전개 양상의 세 흐름을 표집하여 살펴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세 시인의 시와 60년대 시의 전개양상과 관련짓는 일이 이 글의 목적이라 할 수 있겠다. 60년대 시의 전개 양상을 살피는 작업을 통해 현대시사 속의 60년대 시의 위치를 조망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도한 60년대 시를 50년대와 70년대 시와 관련지어 60년대 만의 특성을 찾아내는 것은 한국 현대시의 사적(史的) 흐름에 대한 탐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한국 현대시의 존재(存在)는 전시대의 상황(狀況) 의식(意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과거 시(詩)의 사적(史的) 흐름을 현재의 거울로 삼고, 현대시(現代詩)는 미래의 디딤돌로 삼기 위하여 본 소고(小考)에서는 60년대 시의 시사적 의의를 알아 보려고 한다.


Ⅱ. 1960년대 시의 특성


 한국현대시사에서 50년대가 청록파와 서정주 등의 전통적인 한국적 서정시에 대한 과도기적인 반항기였다고 한다면, 60년대는 조용하면서도 비판적인 안정기라 본다.  60년대의 시단은 내용의 조용한 변화와 더불어 신인(新人) 200여명의 대량배출이라는 안정기적 현상을 보여주고 있으며1), 해방 후 한글 세대와 일본어 세대의 교체가 일어났던 시대라고 볼 수 있다. 또한 허영자․김후란 등의 『청미(靑眉)』와 강계순․유안진 등의 『여류시』, 김초혜․천양희 등의 등단(登壇)은 여류시단의 활성화를 가져왔다. 지면(誌面)으로는『60년대 사화집』(1961), 『현대시』(1962), 『시단』(1963), 『신춘시』(1963) 등 많은 동인지(同人誌)가 발간되었고, 계간지(季刊誌) 『창작과 비평』, 문학지 『월간문학』, 시전문지『현대문학』이 창간되는 등 문학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또한 60년대에는 한 시대의 획을 그었던 시인들이 작고하기도 하였다. 60년대에 작고(作故)한 시인으로는 변영로(61년), 오상순(63년), 유치환(67년), 김동명(68년 1월), 조지훈(68년 5월), 김수영(68년 6월)2), 신동엽(69년) 등이 있다.

 1960년대는 6․25 전쟁의 후유증이 채 가시지 않은 가운데, 정치적인 어려운 일들이 일어났으며, 역사적으로 중요한 변혁을 겪으면서, 경제개발이 이루어 지기 시작한 시기이다. 4․19가 국민들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부르짖은 사건이라면, 5․16은 군사정권이 들어서서 산업 근대화의 빌미가 된 정치적인 사건이다. 1960년 4월 혁명3) 이후 더욱 커진 분단체제 우려의 목소리와 시민들의 의식이 5․16 군사 쿠테타로 한 때 주춤했지만, 반독재․반외세 민족 자주화 운동은 면면히 이어져 나갔다. 4․19가 일어나고 5․16의 회오리 바람이 불자 한국 시단은 커다란 고비를 맞이하였다. 민주질서에 대한 시련을 눈앞에 두고 시인들은 이에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던 현실 참여적인 상황시와 순수 비판적인 예술파를 지향하는 경향이 뚜렷하게 양분되어 2대 사조(思潮)를 이루게 된 것이다.4) 4․19는 현실 참여시의 동인(動因)이 되어, 현장시를 탄생시켰는데, 신동문의 「아 신화(神話)같이 다비데군(群)들」5) 과 박두진의 「우리는 아직 깃발을 내린 것이 아니다.」6) 등이 대표작이다. 현실참여의 문제는 순수시에 대한 비판을 불러 일으켜 순수/ 참여논쟁이 60년대를 뜨겁게 달구게 하였다.

 ‘세계상실 의식과 허무주의’라는 60년대 시의 경향들은 60년대 사회 문화적 상황에 의한 것이다. 60년대 문학을 논하는데 있어서 ‘반성적 주체’의 문제는 근대성의 문제를 해명하는 주요한 단서가 된다. 세계에 대한 부정과 비판, 내면을 향한 반성적 시선이 긴장을 이루는 지점에 주체의 자리가 형성된다.7) 따라서 60년대 시는 현실 상황에 대한 시적 응전 방식의 탐구이며, 예술로서의 시에 대한 언어 문제와 지성의 추구라는 세 가지 문제에 직면한다.8) 60년대 시는 해방 후 현대시의 기본 흐름을 사회시(참여시), 서정시(생명시), 언어시(예술시) 등으로 구분하여 보여준다.9)

  이성부는「60년대의 의식」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저는 4․19세대란 말에 상당한 핵이 있다고 봐요. 젊을 때 흔히 갖는 이상주의가 좌절되었다는 그 상황이 매우 중요한 것 같애요. 우리는 좌절의 상태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지요. 따라서 무언가 시가 예술성만을 생각하고 있을 수 있느냐는 비판을 받으면서 60년대의 시가 출발했다고 보여집니다. 가령 30년대의 김영랑이라든가 50년대의 모더니스트, 60년대의 박성룡씨 등도 그런 문제에서는 많이 비켜서 있다고 볼 수 있지요.10)


 4․19의 좌절에서 오는 갈등은 산업주의의 그늘에 치우치게 된 자아의 소외의식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 소외의식이야 말로 「시가 예술성만을 생각하고 있을 수 있겠느냐」라는 생각을 낳게 했고, 그 생각으로 시를 효용화 시켜갈 때 삶에 관한 시의 길이 열려지는 것이다.

 60년대 중반이후의 시는 ‘갈등의 시’, ‘내면의식’의 시라고 한다. 허다한 외연과 그 외연의 흐름에 끊임없이 연결되어 작용하는 내면의식의 시가 단순히 심상의 그림자만 좇는 오해로 참여/순수 논쟁에서 순수로 규정지어 버리는 경향까지 있다. 사물과 사건에 적극적으로 접근하여 진정한 것을 추구해내는 행위는 시인 자신의 내적 자유로, 목적과 효용과는 상관이 없다.11)

  60년대 후반기 시는 서민의식의 보편화적인 경향, 시의 형태적 문제와 실험성의 다양화, 한국적인 정서의 시정신의 개발이 점차 시도되고 있다는 점의 세 가지 특성으로 나타난다.

 첫째, 한국적인 정서의 시정신의 개발이 점차 시도되어, 60년대 역사학에서 한국학의 문제가 대두되면서 문학에도 그러한 관심의 표명이 접근되어 갔다. 우리의 한(恨)과 우리의 애(哀)와 우리의 멋과 우리의 악(樂)을 탐색하는 작업이 시작되었으며, 우리의 미(美)를 노래하는 시인이 많아지기 시작하였다.

 둘째, 시의 형태적 문제와 실험성의 다양화로, 60년대 후반기에 들면서 시 형태가 급격히 변하였다. 작품이 단형(單形)적 요소를 지니면서 산문(散文)적인 형태가 급격히 불어났으며, 시행과 연의 구분이 많은 시인에 의해서 무시되고 있었다. 행과 연의 구분은 시 자체의 내용과 관련은 물론 그것을 이루는 이미지의 처리에도 관련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셋째, 서민의식이 보편화 되어가는 경향을 보인다. 서민의식은 민족문화의 내면적인 한 부분이다. 60년대 전반의 참여적인 양상은 차차 서민감정의 저변(底邊)으로 흡수되어갔다. 좌절과 절망의 순간은 감정의 순수한 문체가 될 수도 있다. 그 좌절이나 절망은 애수(哀愁)가 될 수도 있고, 고독(孤獨)이 될 수도 있다.12) 

 이에 위에서 논(論)한 60년대 시의 세 가지 흐름을 바탕으로 하여, 60년대 시의 전개 양상을 살펴 보기로 한다. 우리의 미(美)를 계승하는 한국적인 정서의 맥을 잇는 고전주의적 서정시, 시의 형태와 언어의 실험성을 중요시한 사물인식의 모더니즘시, 민중의 좌절과 절망을 민족이라는 시각으로 바라보는 현실 참여시의 세 가지 양상이 60년대 시를 대표하는 전개양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Ⅲ. 60년대 시의 전개 양상


 60년대 시는 순수/참여 논쟁의 한 쪽에서 한국시가의 주류였던 전통시의 주정(主情)적 몰입에서 벗어나 자신의 내면세계를 지향하는 서정시가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김준오 교수는 참여시 또는 민중시는 김수영, 신동엽을 중심으로 당시의 신세대인 이성부, 조태일, 최하림, 김준태 등이 전개하고, 순수시 혹은 언어실험은 김춘수, 전봉건, 김구용, 김종삼, 김광림 등을 중심으로 당시의 신세대인 『현대시』동인이 전개한다고 하였다. 그의 분류에 의하면 60년대 우리 시는 이른바 순수/참여의 흐름 외에 제3의 흐름으로 전통시가 놓인다. 그가 말하는 전통13)시는 시대의 지배적인 경향이나 미래지향적 경향보다는 영속적인 것에 관심을 두는데, 대표 시인으로는 서정주, 박목월, 이동주, 박재삼, 이형기, 박용래 등이 지적된다.14)

 1930년대 우리 시가 보여주는 커다란 흐름은 순수시, 카프시, 모더니즘 시라는 세가지 경향이었다. 순수시는 박용철, 김영랑 등에 의해, 카프시는 임화, 권환, 이용악 등에 의해, 모더니즘 시는 이상, 김기림, 정지용, 김광균 등에 의해 전개되었다. 해방공간에서 우리 시는 우파/좌파로 양분되는데, 우파는 순수를 주장하고 좌파는 이데올로기를 주장한다. 해방공간의 시에 순수/참여의 도식을 소급해 적용해보면 모더니즘시는 제3의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15)

 60년대 우리 시의 흐름을 30년대와 해방공간의 시와 관련지어 본다면, 김준오 교수가 지적한 전통시는 순수시로, 카프시는 참여시로, 모더니즘 시는 제3의 흐름으로 대입된다. 이에 60년대 시의 전개 양상을 고전주의적 서정시, 시적 확대로서의 사물인식의 시, 역사주의적 현실 참여시의 세 양상으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1. 고전주의적 서정시 - 박재삼


 60년대 중반에 이르러 젊은 시인들은 모더니즘시나 참여시와는 다른 새로운 시를 모색하였다. 이들은 비(非)서정주화, 비(非)청록파화를 추구하며, 자신의 시세계에서 주정(主情)적인 흔적을 씻어 내려고 노력하였으며, 전통이나 실험적인 운동을 모두 가볍게 처리하였다. 그들은 자신의 가치관과 사회관을 공동체 의식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시작(詩作)을 하였다.16)

 서정주의 아류17)(亞流)라고 일컬었던 박재삼에 대하여 「해방문학 20년」에서 서정주 자신이 반박한 내용에서 이러한 경향이 나타난다


 박재삼에 대해서 서정주의 아류다 운운하는 사람도 왕왕 있는 것을 보지만, 그건 그의 눈이 거의 없는 사람의 소리다.  박재삼은 시인으로서의 자기 첫째 값을 아주 높이 치부하고 있는 것이 미더웁다. 여느 시인에게 흔히 있기 쉬운 각종의 허영, 가태(假態)를 면한 듯이 보이는 점도 미더웁다. 그는 내용과 병행하는 시의 형식의 상승이라는 것을 안다. 그는 인간 생활의 진실의 제일 친우(親友)이려하는 언어를 가지려 할 뿐 여하한 페탄틱한 언어의 자태도 안가지는 것이 귀하다.

아마 심리적 심오처(深奧處)의 표현을 시에서 하고 있으면서도 박재삼처럼 시로서의 성공을 보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철학적 의미로서가 아니라 시문학의 전통에서 그것을 하는 - 늘 잘 깨어있는 지혜가 그에게 있기 때문이다.


 서정주는 위 글에서 박재삼은 물론 자기 자신의 후배들이 자기의 아류(亞流)가 아니며, 주정(主情)의 세계를 너머 새로운 시세계로 이미 나아가고 있음을 말해준다. 심리적 심오처(深奧處)의 표현이란 주정(主情)에 젖은 서정주 시의 자기부정이다.

 리리시즘(lyricism)은 우리 시가(詩歌)의 전통이면서, 50년대 전쟁의 폐허에서 인간적 체온을 갈구하며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이것은 정한모․조병화․김남조 등의 인간주의(人間主義)적 서정과 이동주․이원섭․박재삼․박성용 등 고전주의(古典主義) 또는 전원(田園)주의적 서정이라는 두 흐름으로 나눌 수 있다. 이에 고전주의적 서정을 추구하였던 박재삼의 시를 중점적으로 살펴 보기로 한다.


  1) 멋과 꿈이 있는 전통 서정시


 1933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난 박재삼은 3천원이 없어서 삼천포 중학교 진학을 못하고, 삼천포 여자중학교 사환으로 들어갔다. 거기에서 김상옥 선생을 만나 감화를 받고 시를 쓸 결심을 굳혔다. 1957년 「춘향이 마음」을 발표하고 현대문학상 수상하였으며, 1961년 『60년대 사화집』동인으로 구자운, 박성룡, 박희진, 성찬경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1995년 백일장 심사도중 신부전증으로 쓰러져, 1997년에 사망하였다.

 박재삼은 1953년 「문예」에 모윤숙에 의해 시조 「강물에서」로 첫 추천을 받고, 1955년에는 「현대문학」에서 유치환에 의해 시조 「섭리(攝理)」를 , 서정주에 의해 시 「정적(靜寂)」을 추천 받아 등단하였다. 1997년 타계하기까지 15권의 시집과 12권의 시선집 등 방대한 양의 작품을 남겼고, 한(恨)을 주조로 한 한국적 정조(情調)의 재현이라는 평가와 함께 전통 서정시의 계보를 이어받아 누구에게나 쉽게 읽히고 공감하게 하는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한 시인이었다. 그는 현대시조, 시조 생활, 시조문학 등의 문예지나 동인지를 통해 시조 창작을 해왔고 일간지 신춘문예의 단골 심사위원이었다. 또한 9권의 수필집을 남겼다.18)

 박재삼의 문학관은 늘 성실한 가운데 순수와 진실을 벗삼고 시를 써야하며, 독자에게 아름다움과 멋과 꿈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시는 누구나 쉽게 공감하고 쉽게 다가갈 수 있으며, 세상 만물의 형상이나 생활자체에서 늘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정의를 좇아 감동적인 작품세계를 보여주었다.19) 

 박재삼의 시는 어렵지 않다. 어려운 말이 나오지도 않고 문맥이 굳이 어렵게 짜여져 있지도 않다. 어려운 비유나 상징이 잘 씌여지지 않으면서도 그의 시는 의외로 단단하다. 초기 시집 『춘향이 마음』에서부터 그의 문체는 <-이다> 식 종결어미의 과감한 변형, 고어 및 방언의 도입, <그러면>, <그때마다>, <-더니> 따위 산문체 등을 사용하여 현대 자유시인들 사이에서 돋보이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시는 타령조로써 전통시와 현대시 사이의 문체상 단절을 극복하는 정서를 보인다. 직설법을 회피함으로써 이 시인은 자신의 감정이 강렬하게 직접적으로 노출되는 것을 극복하면서, 얼굴을 감춘다. 그것은 박재삼에게 있어 곧 자연과 설화 속으로의 투신과 이용을 뜻하는 것이 된다.20)


 2) 한(恨)과 울음의 정서(情緖)


 『춘향이 마음』전편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사랑의 한(恨)이다. 그 한(恨)은 울음으로 정화된다. 울음이라는 낱말은 시인의 한(恨) 처리 방법이다. 한(恨)에는 서러움이라는 정조가 흐느끼듯이 느껴진다.

한(恨)


감나무쯤 되랴.

서러운 노을빛으로 익어가는

내 마음 사랑의 열매가 달린 나무는


이것이 제대로 벋을 데는 저승밖에 없는 것 같고

그것도 내 생각하던 사람의 등뒤로 벋어가서

그 사람의 머리 위에서나 마지막으로 휘드려질까본데.


그러나 그 사람이

그 사람의 안마당에 심고 싶던

느껴운 열매가 될는지 몰라


새로 말하면 그 열매 빛깔이

전생의 내 전 설움이요 전 소망인 것을

알아내기는 알아낼는지 몰라

아니, 그 살마도 이 세상을

설움으로 살았던지 어쨌던지

그것을 몰라, 그것을 몰라21)



 「울음이 타는 가을강」은 제목 처럼 시 전편이 울음이 강물되어 흐르다가 바다에 다다르게 된다. 해지는 가을강 가에 와서 눈물을 가슴 속으로 삼키며 소리 죽여 노래하는 시인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진다. 1962년에 나온 박재삼의 시집 『춘향의 마음』 에는 이처럼 한(恨)과 서러움과 눈물이 활자(活字)가 되어 맑은 물 처럼 흐르고 있다.


울음이 타는 가을강


마음도 한자리 못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강으로 보것네.


저것봐, 저것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소리죽은 가을 강을 처음 보것네.22)


 그의 시적 관심은 한(恨)이라는 전통적인 정서의 수용에서 출발하고 있고, 이는 우리 문학의 주요한 미학적 명제이다. 그의 주요 소재인 햇빛, 바람, 나무, 바다 등이 보다 깊은 함축을 얻게 된다면 박재삼 혼자만의 행복을 넘어 한국의 자연시는 보다 분명하고 우수한 성격과 만나게 될 것이다.23)


  3) 고전주의적 서정시의 시사적 의의


 전통시는 시대의 흐름에도 변하지 않는 영속적(永續的)인 것에 관심을 가진 시로, 서정주․박목월․조지훈 등의 시를 들을 수 있다. 이들 전통시는 시인의 주정(主情)적인 흐름이 강하며, 행간에서 도학(道學)적 향취를 맡을 수 있다. 이들은 한국 풍토의 전형적인 선비들로서 8․15와 6․25 전쟁에 이르기 까지 예술지상주의의 청록(靑鹿)같은 순수(純粹)감성(感性)을 추구하며 살아왔다. 어떤 의미에서 한국 전통의 정통파적 위치에 놓여있다고 할 수 있는 이들은 노장(老莊)적인 체취(體臭)를 풍기는 맑고 깨끗한 한국 순수정신을 추구한다. 이들의 정신적 고향은 농촌과 변모하지 않는 전원 풍취이다.24)

 이들은 한국 현대시단의 주류(主流)적 위치에서 후배 시인들의 등단을 도왔으며, 60년대 참여․순수 논쟁 속에서 묵묵히 제 길을 걸어갔다. 우리 시가전통의 대표격인 서정성은 이들의 시에 의해 맥이 이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전통은 과거성을 지니면서도 미래를 건설하는 힘으로, 가변성과 수용성이라는 속성을 가지고, 과거와 현재를 계승한다. 형식면에서 전통은 4구 2행의 형식[향가, 가사]과 6구 3행[고려 속요, 시조]으로 계승되며,25) ‘임’으로 표상(表象)되는 한국문학의 전통적 요소는 고대시가에서 한용운, 김소월을 거쳐 서정주에게 이어진다.26)

 따라서 서정주에 의해 등단하여 『60년대 사화집』 동인 활동을 한 박재삼은 서정주를 넘어선 위치에서, 한국의 전통적인 서정시의 맥을 이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2. 시적 확대(擴大)로서의 사물인식(事物認識) 시 - 이승훈


 1960년대에는 감각을 서정적(抒情的)으로 순화하는데 힘을 기울인 서정(抒情)주의 시인들과 달리, 은유(隱喩)와 상징(象徵)의 구사로써 현대시의 지성적 영역을 개척하려는 일군의 시인이 등장하였다. 이들은 현대시가 씌여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며, 이 점에서 현대시는 언어(言語)의 문제에 집중적인 관심이 놓여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점에서 이들을 주지(主知)파 혹은 언어(言語)파라고 부른다. 이들 주지(主知)파의 태도는 기본적으로 시의 지적탐구에 관심이 집중돼야 하며, ‘의미의 울림’이나 ‘언어미의 구조적 뒤틀림’에 의지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50년대 주지주의 시인 중에서 모더니즘과 언어 실험파27) 등의 일부는 현실참여로 나아갔고, 주지주의 시인들은 예술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갔다. 내용은 점차 상징주의적인 방향으로 기울어, 비유나 암시를 강조하고 설명이나 직설을 배제하였다. 그리고 시의 대상을 되도록 현실보다는 개인의 내적인 심리, 심층(深層)심저(心底) 속에 흐르는 잠재의식 세계에서 공간적인 심상을 추구했다.

 이 계열의 시인들로는 김춘수․전봉건․신동집․김구용․송욱․문덕수․김종삼․김광림․박희진 등 50년대의 주지주의, 서정파들이 있다. 60년대의 신인들로는 박홍원․박근영․최원규․박리도․장윤우․마종기․김영태․황동규․정현종․이승훈․오규원․김형영․강은교 등이 있다. 이들은 새로운 형태의 순수시의 재현(再現)을 위해, 감각적인 표현으로 내면적인 비유․암시를 하고 있다. 50년대가 실험적인 기교에 치중했다고 한다면, 60년대 젊은 신인들은 실험적인 단계를 넘어서 기교적인 예술에 파고 들어가고 있다고 본다.28)

 60년대에 약 10년 간에 걸쳐 전개된 이들의 활동은 해방 후 이 땅의 현대시가 시의 자율성과 예술성을 확보하는데 대한 치열한 모색과 성찰을 보여 주었다는 데서 의미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이에 1962년 『현대문학』추천으로 등단하여 60년대『현대시』동인으로 활동하였으며,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시세계를 꾸준히 천착(穿鑿)하고 있는 이승훈의 시에 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1) 『현대시』 동인

 

 이승훈은 1962년 『현대문학』의 추천으로 등단한 이래 언어와의 싸움을 가장 지속적으로 전개해 온 언어파의 한 사람이다. 이 시인이 관심을 갖는 것은 객관적인 외부의 현실세계가 아니다. 그것은 내면의식의 상징화 작업이며 동시에 새로운 언어구조 질서의 모색이고 상상체계의 변용에 가깝다. 『현대시』동인은 1962년 처음 발행된 시지 『현대시』1집부터 1972년 마지막 발행된 26집 까지 10년동안 26권의 동인지를 펴내면서 60년대 우리 모더니즘 시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한다. 『현대시』1집은 당시 50년대 시인들인 전봉건, 김광림, 김종삼, 임진수 등이 중심이 되어 펴냈다. 전봉건, 김광림, 김종삼 등은 앞에서도 말했지만 50년대 모더니스트로 출발하고 60년대에 오면서 전봉건은 초현실주의적 경향을 보이고, 김광림은 이미지즘 혹은 주지적 서정시를 지향하고, 김종삼은 추상적 이미지의 세계를 보여준다. 따라서 이들이 중심이 되어 펴낸 『현대시』는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모더니즘을 지향한다.

 『현대시』가 본격적인 동인지로 출발하는 것은 1964년 11월에 간행되는 6집부터이다. 『현대시』는 6집부터 당시의 신세대인 주문돈, 김영태, 이수익, 정진규, 이승훈, 민웅식, 허만하, 황운헌을 동인으로 본격적인 동인운동을 전개한다. 이 중에서 이수익, 이승훈, 이유경, 주문돈 4명이 26집까지 참여하고, 72년 동인운동을 해체한다. 이들은 그후 1994년 『현대시 94』라는 사화집(詞華集)을 내면서 다시 모이고 95년 부터는 ‘현대시 동인회’라는 이름으로 매년 6월 25일을 전후해 동인상을 수여하고 있다.

 『현대시』 동인은 60년대에 등단한 신세대가 중심이 되어 우리 모더니즘시를 발전적으로 계승한다. 그런 점에서 현대시 동인은 이상, 김기림, 정지용 등이 중심이 된 30년대 식민지 모더니즘, ‘후반기’ 동인과 김수영29), 김춘수, 전봉건 등이 중심이 된 50년대 전후 모더니즘을 비판적으로 극복하는 근대화 초기 혹은 산업화 초기 모더니즘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식민지 모더니즘이 제1세대, 전후 모더니즘이 제2세대라면 ‘현대시’ 동인은 제3세대 모더니즘에 해당한다.30)

 『현대시』 동인은 이른바 내면 탐구를 지향함으로써 그동안 우리 모더니즘 시가 보여주던 한계를 극복한다. 내면성, 추상성, 난해성, 반현실성, 혹은 비현실성 문제는 60년대 신세대 모더니즘의 한계이면서 동시에 개성이고 긍정적인 점이다. 우리 현대시사에서 이런 추상의 문제가 60년대에 본격적으로 제기됨으로써 70년대 이후 새로운 현대성이 나타날 수 있었고, ‘대상의 극복’이라는 개념을 정립할 수 있었다.31)


  2) 불안한 영혼과 가벼운 언어


 이승훈은 1942년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나, 한양대학교 섬유공학과 입학하였다. 1962년 『현대문학』지에 「낮」, 「바다」 등으로 박목월 선생의 추천을 받았으며,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3년으로 전과를 한 뒤, 현대시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1969년 제1시집 『사물A』를 펴내고, 춘천교육대학 국어과 전임강사를 하였다. 1980년 한양대 인문대 국문과로 옮긴 뒤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이상 시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대시사에서 이승훈을 모더니즘 시인이 되게 한 것은 인식론적 회의인 「자기 탐구를 지탱하는 그의 시적 사유(思惟)」이다. 그는 ‘나는 어디에도 없다’고 했는데, 이것은 절망이 아니라 인식론(認識論)적 회의(懷疑)의 해체(解體)주의로 보아야 한다. 이승훈 시는 ‘나는 타자(他者)다. 그리고 그 타자(他者)는 그 어느 것도 나로서 확정되지 않는 타자(他者)들이다’ 라는 해체주의에 입각해있다.32)


 한 사내가 있다. 한 사내는 지금 �어가고 있다. 아라발 식으로 얘기하자면 그는 40대인데도 10대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말하자면 사춘기에 지나지 않는다. 사내의 의식이, 하고있는 짓이, 사내가 갇혀있는 사방이, 꿈의 도치가 그렇다는 얘기다. 한 사내, 어떻게 보면 향기도 빛깔도 숨결도 정맥도 없는 시인 이승훈은 한국시단의 몇 개의 유형 가운데 너무 강한 개성 때문에 혼자 동떨어진 특이한 존재다.

 나는 20년간 이 사내를 줄곧 지켜보아 왔다. 20년간을 지며보면서 혐오감을 느낄때도 있었다. 좀처럼 그는 자기 자신의 물(이승훈의 언어)을 뎁힐 줄 몰랐다. 차가은 뼈 같은 거, 그게 그의 기질이었다. 그리고 그다운 면모였다. 혐오감은 그래서 하나의 이물질, 어떻게 보면 신비로운 그의 존재, 혹은 시문학사에 자기 목소리를 남긴 가치에 대해 사랑의 시선을 보내게 되었다. 33)


 그의 시는 난해(難解)34)하며,  비극적인 자아를 초현실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60년대 전반 이승훈시『사물A』의 Ⅳ에는 사물들이 ‘흰색’의 이미지를 띠고 있다. 그의 내면 속에서 ‘참신한 대상’을 발견함으로써 구체적 현실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에로스적 욕망’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흰색은 부재의 추상세계, 근원적 세계, 이상세계 등을 나타내며, 대상에서 해방된 자유를 환기시키는데 동원된다.35)

 그의 시는 자기 구원의 형식으로만 기능할 뿐 당대현실의 재난을 고지(告知)하지 않으며, 그 속에서 그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현실(現實)이 아니라 언어(言語)36)일 따름이다. 그의 아픔은 주체와 언어의 괴리에서 오는 것으로, 구체적 현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승훈의 60년대 시는 언어의 포박(捕縛)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내면적 아픔을 고난도 언어실험으로 통해 보여주었다는 데서 그 성과가 인정된다.37) 이승훈 시집 『사물A』에서 내면의식의 극단화는 사물에의 재편성의 모습을 파악할 수 있게 했다.


 사나이의 팔이 달아나고 한 마리 흰닭이 구 구 구 잃어버린 목을 좇아 달린다. 오 나를 부르는 깊은 명령의 지하실에선 더욱 진지하기 위하여 등불을 켜놓고 우린 따스한 생각의 닭을 키운다. 닭들을 키운다. 새벽마다 쓰라리게 정신의 땅을 판다. 완강한 시간의 사슬이 끊어진 새벽 문지방에서 소리들은 피를 흘린다. 그리고 그것은 하아얀 액체로 변하더니 이윽고 목이없는 한마리 흰닭이 되어 저렇게 많은 아침햇빛 속을 귀우뚱 거리며 뛰기 시작한다. <사물A, 1966. 전문>38)


 「사물A」라는 시에서는 내면의 혼돈과 신경질적인 사고의 단면이 나타난다. 「사물A」는 이승훈의 초기시가 독백의 회로로 구성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 시는 실재하는 대상보다는 시인의 마음속에서 무형의 상태로 일렁이는 무의식 상태를 보여준다. 이를 <비대상의 시>라고 부르는데, 이승훈의 시는 직관으로 느끼는 무정형(無定型)의 내면세계를 상상(想像)의 언어(言語)로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그의 초기시는 구체적으로 그 느낌이 무엇인지를 명료한 언어로 재생하기는 어렵지만, 독자들로 하여금 환상적인 여행을 황홀하게 따날 때의 느낌을 체감하게 만든다.39)


어휘(語彙)



그는 

의식의 가장 어두운 헛간에

부는 바람이다.


당나귀가 돌아오는

호밀밭에선

한 되 가량의 달빛이 익는다.


한 되 가량의 달빛이

기울어진 헛간을 물들인다.

안 보이던 시간이

총에 맞아

떨어지는 새의 머리인 것을


보았다 그때 나는

가느다란 배암이 되어

신의 헛간을 빠져나가고


오 빠져나가고

나는 손이 없는 손으로 어루만졌다


안보이던 시간이

울고 있었다40)


 위 시에서는 나와 어휘의 관계가 생경한 이미지로 펼쳐진다. 어휘는 의식의 헛간에 부는 바람이며, 내가 시를 쓰고, 어휘에서 달아나는 동안 흐른 시간의 부피에서 느껴지는 허무함을 고도의 상징과 은유를 통해 표현하였다.



갈매기 하나 유리창에 부딪쳐 피를 흘린다. 비오는 날엔 술을 파는 상점에서도 술 대신 비를 팔고, 비오는 날 거리로 나가는 건 나가지 않는 거나 같다. 벌판에 서 있는 정신병원만 유독 비에 젖는다. 비 오는 날엔 누가 찾아와도 이내 떠나 버린다. 그가 떠나 버린 자리엔 그의 레인코트만 비에 젖을 뿐 아아 육체는 어디 갔는가 정신은 기아는 빵은, 모르겠다. 비오는 날의 빵은 비, 술도 비이다.41)


 비오는 날 그가 서있던 바닷가에 사람은 없고 그가 입었던 레인코트만 상징적으로 남는다. 비오는 날에 먹는 빵과 술이 모두 비이며, 눈 어둔 갈매기도 유리창에 머리를 부딪치는 장면은 눈물에 젖은 빵과 술의 이미지이다.


가을


하아얀 해안이 나타난다. 어떤 투명도 보다 투명하지 않다. 떠도는 투명에 이윽고 불이 당겨진다. 그 일대(一帶)에 가을이 와 머문다. 늘어진 창자로 나는 눕는다. 헤매는 투명, 바람, 보이지 않는 꽃이 하나 시든다. (꺼질 줄 모르며 타오르는 가을.)42)


 하얀 가을햇살의 투명함은 백색 이미지를 보여준다. 가을의 투명한 햇살과 시드는 꽃과 가을 바람은 시인을 눕게 만든다. 하얀 가을에 당겨진 꺼질 줄 모르고 타오르는 불은 붉게 물든 단풍의 상징이다.

 이승훈의 시를 읽을 때에는 그의 시에 적합한 독법을 동원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현대를 살아가는 한 개인의 불가사의한 내면 또는 정체불명의 불안한 영혼을, 뒤틀릴 대로 뒤틀리고 가벼워질 대로 가벼워진 그의 언어를 만날 준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분명한 단어로 발음되고 표기될 수 없는 이 내면과 영혼을 그의 언어로부터 만나고 이해하는 데서, 우리는 이승훈의 초기시가 지닌 참 의미를 비로소 체득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43)

 

  3) 사물인식 시의 시사적 의의 


 김준오는 『현대시』동인을 언어에 대한 성실한 천착(穿鑿)과 개성적 실험으로 시의 방법의식을 심화․확대시켜 순수시를 60년대의 주류가 되게한 점에서 시사적 의의가 있다고 하였다. 이들의 시는 감미로운 서정이나 파토스(pathos)가 아닌 인식(認識)․내면(內面) 탐구이며, 언어와 시적 실험은 그 상관물이다. 이들은 난해시, 수수께끼시, 가짜의 모호성, 부정직함이라는 점에서 70년대에 극복의 대상이 된다.44)

 1960년대 모더니즘은 작가들의 미학적(美學的) 자의식(自意識)의 변화를 초점으로 삼을 수 있다. 아픔의 기원이 불분명하다는 점은 1960년대 모더니즘 문학의 성격을 규정할 수 있는 가장 핵심적인 범주이다. 유년기의 6․25 체험에 의한 세계에 대한 환멸, 4․19의 좌절 및 산업화에 다른 소외의식의 심화 등을 이들의 허무주의적 세계 인식의 근원으로 파악한다.45) 그들은 구체적 현실과는 다른 어떤 추상의 세계를 창조함으로써 “깨어진 거울처럼 산산조각이 나 있는” 주체 붕괴의 위기를 벗어나려고 노력한다. 그 세계가 바로 60년 대 모더니즘시를 특징 짓는 추상(抽象)의 세계, 무의식(無意識)의 내면(內面) 세계, 사물(私物)이 주체가 되는 세계이다. 이런 세계는 모든 존재(存在)가 총체적으로 부인(否認)되고, 모든 현실적 관념(觀念) 체계와 시공간(視空間)이 폐기되는 세계이다.46)

  60년대 시가 그 이전의 시와 다른 것은 ‘사물에 대한 정확한 인식의 시’이다. 60년대 초 역사의식의 시와 사물인식의 시는 60년대에 얻은 시적 성과라 하지 않을 수 없다.47) 60년대의 우리 시사 속에서 젊은 시인들은 주지적 서정시의 창작과 언어의 본질을 예각(銳角)적으로 탐구하기 시작하여, ‘시의 지성(知性)화 작업’과 ‘언어(言語)의 탐구’라는 현대시의 과제를 이루어 내었다는 데에 시사적 의의가 있다.48)


 3. 역사주의적 현실 참여시 - 신동엽


 김수영을 비롯한 신동문․신동엽․강인섭․신경림․이성부․조태일․김재원․문병란․황명걸․김광협․이가림․박열아 등은 사회의 부패현상에 대하여 신랄한 비판의 시를 썼다. 그들은 모더니스트가 남긴 언어의 현대적인 감각을 살리면서 역사적 시대의 암담함과 부패한 사회를 정직하게 들추어 내고 있다. 그들은 농민과 민중 속에 깊이 파고 들어가는가 하면 억압된 시민들의 고난과 울분 그리고 좌절과 불안을 대중 의식적인 측면에서 서정을 추구하고 있다. 1969년 김병걸을 중심으로 창간된 『상황』동인들은 창간사에서 ‘구문화에 대한 눈먼 수용문화와 이에 앞장서는 매판 문화의 발호를 막고 짓밟힌 토착정신의 원형을 찾으며 도둑 맞은 민족의 얼을 끈기있게 되찾는 고된 작업을 계속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이들은 민족문학과 신항일문학 등 60년대 말에서 70년대에 걸친 참여문학 시비논쟁에서 상황동인들은 끝까지 상황의식을 통한 이론을 전개해 나간 것이 특징이다. 그들은 리얼리즘을 끝까지 옹호 내지는 수호하면서 예술성의 망각, 살벌한 고발의식, 소시민적 영웅주의라는 비난도 받았으나 시종 문학예술의 형상화를 통한 역사의식 내지는 사회의식을 강조하였다.49)


  1) 현실인식과 실천의 시


 195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장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大地)」로 한국문단에 첫발을 내딛은 신동엽 시인은 등단한 지 불과 10년 만인 1969년, 39세를 일기로 요절하였다. 신동엽 시인은 이 땅의 역사적 전환기였던 1960년대를 어느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살다간 한국인이었다.50) 그는 한 사람의 시인임을 자부했으며, 시인이란 언제나 수도자(修道者)의 자세를 지녀야 된다고 믿었는데, "수도자의 길이란 단지 하늘로 올라가는 길이 아니라, 두루 돌아와서 다시 지상을 가는 길"이라면서 현실적인 삶 속에서의 실천적인 문학인의 자세를 중시했다.

 신동엽 시인은 1930년 8월 18일, 충남 부여읍 동남리에서 태어났다. 1937년 부여국민학교에 입학하게 된 그는 모든 면에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그는 6학년 담임 선생님이던 김종익(전 국회의원)의 남다른 총애와 영향을 받아, 전주사범에 들어갔다. 전주사범을 다니던 그는 이와나미, 사회 문화서적, 엘리어트의 시와 시론, 뚜르게네프와 크로포트킨, 성경을 가까이하며 많은 책을 섭렵하였다. 1948년 전주사범을 졸업한 그는 우리의 역사로 시선을 돌려 부여 읍내, 공주의 <우금치>, <동혈산>, 해남, 정읍 등을 두루 다녔다. 1949년 단국대 사학과에 입학하여 못다한 학구열을 채우려 하였으나, 다음 해 겪은 6․25 전쟁에서 국민방위군으로서 배가 고파 날게를 잡아먹은 뒤로, 간과 폐에 이상이 생기게 되었다. 서울에 올라온 동엽은 친구와 헌 책방을 차렸는데, 이곳을 자주 찾던 여고생이던 인병선을 만나 반려자가 된다.

 신동엽은 서울에 올라온 뒤, 가난과 고독 속에서 역사서적과 동양철학, 노장사상에 심취해있었다. 따라서 그의 시세계에는 원수성, 차수성, 귀수성 세계라는 세계관이 녹아있다. 그의 세계관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잔잔한 해변을 원수성 세계라고 부르자 하면, 파도가 일어 공중에 솟구치는 물방울의 세계는 차수성 세계가 된다 하고, 다시 물결이 숨자 제자리로 쏟아져 돌아오는 믈방울의 운명은 귀수성 세계이고. 땅에 누워있는 씨앗의 마음은 원수성 세계이다. 무성한 가지 끝마다 열린 잎의 세계는 차수성 세계이고 열매 여물어 땅에 쏟아져 돌아오는 씨앗의 마음은 귀수성 세계이다.

 봄, 여름, 가을이 있고, 유년, 장년, 노년이 있듯이 인종에게도 태허(太虛) 다음 봄의 세계가 있었을 것이고, 여름의 무성이 있었을 것이고, 가을의 귀의가 있을 것이다. 시도와 기교를 모르던 우리들의 원수세계가 있었고 좌충우돌, 아래로 위로 날 뛰면서 번식 번성하여 극성부리던 차수세계가 있었을 것이고, 바람 잠자는 석양의 노정, 귀수 세계가 있을 것이다.  우리 현대인의 교양으로 회고할 수 있는 한, 유사 이후의 문명 역사 전체가 다름 아닌 인종계의 여름철 즉 차수성 세계 속의 연륜에 속한다고 나는 생각한다.51)

원수(元數)성 세계란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었던 대지의 세계이다. 그것이 인간 문명과 제도에 의해 파괴되어 모순된 모습으로 드러나는 단계가 차수(次數)성의 세계로 현대사회를 말한다.  원수성의 세계로 되돌아 가려는 노력을 하는 단계가 귀수(歸數)성의 세계이다. 그는 시인(詩人)은 차수성의 실상을 잘 알고, 낱낱이 알림으로써 귀수성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매개과정을 수행해야 하는데, 이러한 실천의 노력 결과가 시(詩)라고 하였다.52) 그의 인식은 개인의 문제, 민족의 문제 그리고 인류의 문제까지 포괄하고 있다. 그의 시세계는 현실에 바탕을 두면서도 우주적 사고로까지 확대되었다. 신동엽의 초기시「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의 주제는 대지에 뿌리 박은 원초적인 생명에의 귀의이다. 이 시에서는 그는 원수(元數)성 세계를 떠나 차수(次數)성 세계에서 망가진 원초적 생명을 복원시키려고 하였다.53)

 신동엽의 시는 현대문명을 거부하고 생명(生命)지향 의식을 보여준다. 그는 정치(政治)도 문명(文明)의 산물로 인식함으로써 거부하였다. 그의 시는 대지(大地)의 여성 상징(象徵)을 바탕으로 하여 문명(文明)을 거부하고 원시적(原始的) 생명(生命)세계에 대한 지향(指向)을 보여준다.54)


  2) 역사의식과 근대화의 비판


 신동엽의 시에 나타나는 시어의 특성은 고유(固有)어의 사용이 현저하고, 한자어(漢字語)가 많이 나타난다. 이는 일제치하에서 교육을 받은 50~60년대 시인들의 공통점으로, 그의 시에서 순한글체 시의 비중은 전체 시 67편 가운데 9편(13.4%)에 자나지 않을 정도로 한자어의 빈도가 높다.

 신동엽 시의 어조는 굵고 뚜렷하고 분명하며, 거기에다 여성적 어조를 함께 지니고 있다. 그의 시에 등장하는 여성적 어조는 한국 전통시가와 연관성을 갖고있는 반면에, 남성적 어조는 직설적이고도 능동적인 측면을 보여준다. 이 점에서 그의 시는 상징시의 면모를 나타내기 보다는 직접적인 발언의 저항시로서의 면모를 지닌다. 이렇듯 그의 시적 어조는 강하고 우렁찬 남성적 어조와 여리고 자기 고백적인 여성적 어조가 함께 나타난다.  한국문학에서 여성주의는 부정적 현실 인식에서 나타난 비극적 정서와 이에 대한 여성 주체로서 한국의 시문학을 관류하는 정서적 형질로 파악되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김소월, 한용운, 김영랑, 서정주 등으로 맥을 유지해 왔다. 신동엽의 시 또한 이러한 측면과 상관성을 갖고 있다.55) 신동엽 시에서 어조적 남성적 특성과 여성적 특성의 두가지 모습은 결국 하나의 내면으로 해석된다. 그것은 그의 시에 두드러지게 나나타는 설의․청유․명령형의 종결 양상을 통해서도 살필 수 있다. 또한 신동엽 시의 어조는 곧 율격과도 깊은 관련을 갖고 있다. 그의 시에 나타나는 짧고 간결한 시행은 운율과 연관되기 때문이다. 또한 여성적 어조는 한을 드러내는 민요의 전통적 운율56)과 분위기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서두에 강한 긍정이나 부정을 전제한 후, 그것에 대한 부연 설명으로 시행을 이끌어 간다. 그는 반복․ 대조․ 대립․ 점층․도치․ 영탄 등의 방법으로 시적 긴장과 전달을 의도하였으며, 그의 시는 다양성과 복잡성을 특징으로 한다.

 신동엽의 참여시는 역사의식(歷史意識)이 압도하여, 사회(社會)의식․시민(市民)의식이 압도한 김수영의 참여시와 대조를 이룬다. 4․19 정신이 민족정신으로 지속(持續)되기를 소망하는 그의 역사의식은 이육사의 광야(廣野)를 상기하게 한다. 개인(個人)문제의 인식(認識)에서부터 사회적 삶의 자각으로 나아가는 김수영과는 달리, 신동엽의 시는 공동체(共同體)로서의 민중(民衆)을 발견한데서 출발한다.57)

 그는 분단극복(分斷克服)과 반제국주의(反帝國主義)의 의지를 「껍데기는 가라」라는 시에서 선명하게 부각시켜, 참여시인의 대열에 오른다.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4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58)

<52人詩集․1967년. 전문>


 해방직후 남한에서는 일제에 아부(阿附)하던 껍데기가 실세를 장악하고, 진정한 민족독립을 원하던 사람들은 또 다른 외세(外勢)에 의해 밀려난다. 6․25전쟁을 겪은 뒤 외세에 의해 국토분단이 더욱 영속화되었으며, 휴전이후 지금까지 민족통일을 말하는 사람들은 좌/우 이데올로기에 의해 저울질을 당하고 있다. 신동엽은 동학(東學)정신을 민족의 알맹이로 보았으며, 민족통일을 가로막는 무기(武器), 외세(外勢), 독재정권(獨裁政權) 등을 껍데기로 보았다.


鐘路五街

 

이슬비 오는 날,

종로 5가 서시오판 옆에서

낯선 少年이 나를 붙들고 東大門을 물었다.


밤 열한시 반,

통금에 쫓기는 群像 속에서 죄없이

크고 맑기만 한 그 소년의 눈동자와

내 도시락 보자기가 비에 젖고 있었다.


국민학교를 갓 나왔을까.

새로 사 신은 운동환 벗어 품고

그 소년의 등허리선 먼 길 떠나 온 고구마가

흙묻은 얼굴들을 맞부비며 저희끼리 비에 젖고 있었다.


충청북도 보은 俗離山, 아니면

전라남도 해남땅 漁村 말씨였을까.

나는 가로수 하나를 걷다 되돌아섰다.

그러나 노동자의 홍수 속에 묻혀 그 소년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

눈녹이 바람이 부는 질척질척한 겨울날,

宗廟 담을 끼고 돌다가 나는 보았어.

그의 누나였을까.

부은 한쪽 눈의 娼女가 양지쪽 기대 앉아

속내의 바람으로, 때 묻은 긴 편지 읽고 있었지.


그리고 언젠가 보았어.

세종로 고층건물 공사장,

자갈지게 등짐하던 勞動者 하나이

허리를 다쳐 쓰러져 있었지.

그 소년의 아버지였을까.

半島의 하늘 높이서 太陽이 쏟아지고,

싸늘한 땀방울 뿜어 낸 이마엔 세 줄기 강물.

대륙 섬나라의

그리고 또 오늘 저 새로운 銀行國의

물결이 딩굴고 있었다.


남은 것은 없었다.

나날이 허물어져 가는 그나마 토방 한 칸.

봄이면 쑥, 여름이면 나무뿌리, 가을이면 타작마당을 휩쓰는 빈 바람.

변한 것은 없었다.

이조(李朝) 오백년은 끝나지 않았다.


옛날 같으면 北間島라도 갔지.

기껏해야 뻐스길 삼백리 서울로 왔지.

고층건물 침대 속 누워 肥料廣告만 뿌리는 그머리 마을,

또 무슨 넉살 꾸미기 위해 짓는지도 모를 빌당 공사장,

도시락 차고 왔지.


이슬비 오는 날,

낯선 소년이 나를 붙들고 東大門을 물었다.

그 소년의 죄 없이 크고 맑기만한 눈동자엔 밤이 내리고

노동으로 지친 나의 가슴에선 도시락 보자기기

비에 젖고 있었다.59)

<東西春秋 1967년․6월호. 전문>


 신동엽 시의 출발을 이루고 있는 물질적 조건은 4․19의 실패와 파행적 근대화 초기의 도시적 현실이다. 근대화 되어 가는 도시의 한 복판에서 신동엽은 파행적 자본주의의 전개와 노동의 소외라는 절망적이고 우울한 근대의 이면을 읽어낸다. 신동엽은 근대화의 진행과정의 본질을 노동과 소외라는 점에서 짚어내고 있으며, 그것은 도시화로 인한 민족 공동체의 파괴라는 근대화의 부정적 측면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과 비판의 시선으로 이어진다. 그는 도시의 그늘 속에 자신을 위치 지우며, 근대(近代)를 외세에 의한 분단(分斷)과 도시의 거리에서 드러난 노동(勞動)과 소외(疎外)의 비극(悲劇)으로 인식한다.60)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네가 본 건, 먹구름

그걸 하늘로 알고

一生을 살아갔다.


네가 본 건, 지붕 덮은

쇠 항아리,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닦아라, 사람들아

네 마음 속 구름

찢어라, 사람들아,

네 머리 덮은 쇠 항아리.


아침 저녁

네 마음 속 그름을 닦고

티없이 맑은 구름을 닦고

티없이 맑은 永遠의 하늘

볼 수 있는 사람은

畏敬을 

알리라.


아침 저녁

네 머리 위 쇠항아릴 찢고

티 없이 맑은 久遠의 하늘

마실 수 있는 사람은


憐憫을 

알리라

차마 삼가서

발걸음도 조심

마음 아모리며.


서럽게

아 엄숙한 세상을

서럽게

눈물 흘려


살아 가리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자락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61)

<高大文化․1969년 5월. 전문>



 신동엽은 현실(現實)에 대해 부정(不正)과 비판(批判)을 담은 목소리로 자아(自我)를 드러낸다. 그는 근대적(近代的) 일상(日常)을 비판의 대상으로 설정하여, 시인의 주관적(主觀的) 이상(理想)과 대립시킨다. 그는 사람들이 하늘이라고 알며 살아가는 하늘이 진정한 하늘이 아니라, 쇠로 만든 항아리일 뿐임을 알린다. 자연(自然) 그대로 티없는 하늘이 아니라 인위적(人爲的)인 쇠붙이에 둘러싸인 하늘을 머리에 이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흐려진 인식(認識)을 향해 그는 외친다. ‘네 마음 속에 낀 구름을 닦고, 네 머리 위의 쇠항아리를 찢어 티없이 맑은 하늘을 바라보라’는 그의 외침은 의식없이 현실에 안주하는 일상에 대한 반격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파란 하늘을 볼 줄 아는 사람은 말간 의식(意識)을 가진 사람으로서, ‘마음 속의 구름을 닦으라’는 글에서 신동엽의 구도(求道) 자세를 발견하게 된다.

錦江


1.

우리들의 어렸을 적

황토 벗은 고갯마을

할머니 등에 업혀

누님과 난, 곧잘

파랑새 노랠 배웠다.


울타리마다 담쟁이넌출 익어가고

밭머리에 수수모감 보일 때면

어디서라 없이 새 보는 소리가 들린다.


우이여 훠어이


쇠방울소리 뿌리면서

순사의 자전거가 아득한 길을 사라지고

그럴 때면 우리들은 흙토방 아래

가슴 두근거리며

노래 배워주던 그 양품장수 할머닐 기다렸다.


새야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잘은 몰랐지만 그 무렵

그 노랜 침장이에게 잡혀가는

노래라 했다.


지금, 이름은 달라졌지만

정오가 되면 그 하늘 아래도 오포가 울리었다.


 일많이 한 사람 밥 많이 먹고

 일하지 않은 사람 밥 먹지 마라

오우우.......하고.62)

<앞부분 일부>


 그는 「금강」에서 동학 혁명과 4․19는 현재(現在)화 되고 있는 역사(歷史)이며, 영원(永遠)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았다. 신동엽의 시에서는 현실에 대응하는 주체인 민중(民衆)의 시선으로 근대의 부정성(否定性)을 넘어서려는 의지가 나타난다. 신동엽은 동학농민전쟁이 3․1운동과 4․19를 거쳐 오늘로 이어지는 현재적 사건이며, 민족자주․민중해방이라는 과제를 제시하고 있음을 「금강」에서 보여준다.


  3) 참여시의 시사적 의의


  4․19의 의미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등장한 제3공화국이 매달렸던 경제개발계획은, ‘잘살아 보자’ 라는 구호의 결과, 상대적인 빈곤과 갈등을 불러왔다. 60년대 시들은 이런 시대의 질곡(桎梏)으로 인한 현실 문제를 직시하고, 이를 구체적으로 형상화(形象化)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60년대 참여시인들의 리얼리티 추구를 통해서, 1950년의 시문학에 나타났던 관찰(觀察)과 방임(放任)의 시 세계가 극복될 수 있었다. 

 1960년대 시인들은 민중적 일상성에 대한 시적 천착(穿鑿)을 바탕으로 소시민적 상황을 극복하고, 민중 지향적인 의식과 삶을 보여준다. 이러한 이들의 노력은 시적 소재의 확대라는 외연적 변화 외에 시인과 독자간의 의사소통 구조의 근본적 변화라는 양상을 가져왔고, 그렇게 씌여진 민중시는 삶의 구체성에 뿌리를 둔 시적 상황 자체를 중시하는 독법을 요구하게 되었다.63)

  60년대 시는 해방이후 민족진영의 순수 예술지향성에 대한 근본적 반성을 촉구한데서 의미가 놓여진다. 60년대 시는 이 땅에서 역사전개의 주체가 민중이어야 하듯이, 문학이 이들의 삶을 떠나서 참된 생명력을 획득하기 어렵다는 점을 4․19 사회시를 통해 선명히 제시한 데서 의미가 주어진다. 모더니즘 시를 썼던 김수영의 변모와 신동엽 시세계의 연장선은 1960년대를 시문학사에서 새롭게 위치시키는 역할을 한다.64) 김수영의 비판의 정신과 신동엽의 민중적 세계관은, 주류를 이루었던 ‘순수시’의 아성(牙城)에 맞서서, 1970~80년대 민중시의 초석을 다지게 되었다. 1960년대는 1970년대 민중시의 개화를 준비했던 모색기였고, 자본주의의 발전과 독재권력의 심화에 대항하였던 1970년대 저항시들의 전사(前史)를 이루는 시기라는 점에 시사적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65) 

 

Ⅳ. 결론


 지금까지 60년대 시의 전개양상을 고전주의적 서정시, 시적확대의 사물인식 시, 역사주의적 참여시의 세 갈래로 살펴보았다. 고전주의적 서정시는 전통시의 맥을 이은 박재삼의 시를 중심으로, 사물인식의 시는 60년대 초 등단하여 지금까지 언어를 갈고 닦는 이승훈의 비대상시를, 현실 참여시는 60년대의 사회현실을 역사의식과 비판의식으로 바라보는 신동엽의 시를 중심으로 살펴 보았다.

 이러한 세 갈래의 양상은 1930년대와 해방 뒤에도 있어 왔지만, 60년대에 들어서는 앞 시대의 흐름을 계승하여 현대시로서의 위치를 자리잡기 시작하였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해방 뒤 60년대까지 우리 시단의 주류를 차지하였던 순수시의 원로들은 새롭게 등단한 신진 시인들에 의해 극복되고, 순수/참여 논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이는 한국 현대시의 주류로서 시단을 대표하던 기성 시인들에 대한 비판과 반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양분된 순수/참여시 사이에서 여전히 자아와 대상과의 의미를 탐구해 나가는 모더니즘시가 언어 예술을 추구하며 고도의 추상성과 난해성으로 세계에 대한 부정정신을 노래하고 있었다. 30․50년대 모더니즘시와 60년대 모더니즘시의 변별성은 자아의식의 내면화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사물에 대한 방임에서 벗어나 자아와 사물과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소외의식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부정(不正)했다는 것이 60년대 모더니즘시의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부당한 사회현실을 정확한 역사의식과 비판정신으로 인식하여, 그것을 생생하게 묘사하여 리얼리티를 추구하였다는 것도 60년대 시의 성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참여시는 자연이나 구도정신(求道情神)으로 세상을 미화(美化)하여 바라보기 보다는, 사회현실의 모순을 생생하게 밝혀내어, 진정한 민족통일을 염원하는 민족시․민중시로 발전하게 되었다. 60년대 시에서 볼 수 있는 이러한 세 갈래의 전개 양상은 아름다운 것의 추구, 고도로 세련된 언어의 추구, 문학의 실천성의 추구를 바탕으로 하여, 우리 현대시가 발전해 오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제 양상들의 시가 서로를 자극하여, 한국 고대시가와 현대시의 전통단절을 극복하고, 고도의 은유와 상징의 시어(詩語)로서 사회현실을 노래하여, 한 시대(時代)의 선구(先驅)적 위치에 서는 것이 현대(現代)시의 과제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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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진리는 나의 것
글쓴이 : 나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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