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좋은 글방

나 좀 늙게 내버려둬

운산 최의상 2013. 11. 22. 13:32

 

 

 

 

 

 

[삶의 향기] 나 좀 늙게 내버려둬!

[중앙일보] 입력 2013.10.31 00:53 / 수정 2013.10.31 00:53

 

 

 

 

 

 

신아연
   

                                           나 좀 늙게 내버려둬

                                                                                         

                                                                                       신아연 (재호주 칼럼니스트)

 

“교통사고 났을 땐 응급실에 갈 게 아니라 성형외과로 가야 나중에 흉터도 없고 잘 회복된다더라.” 지난달 한국 친정에서 대화 중에 어머니가 하신 말씀이다. 건성으로 들은 것도 아닌데 내용이 언뜻 와 닿지 않았다. ‘사고로 다쳤는데 왜 성형외과를 가지? 성형외과는 쌍꺼풀 하고 코 높이고 턱 깎고 주름살 펴는 곳이잖아.’ 어머니의 ‘지당하신’ 말씀에도 불구하고 나도 모르게 생각이 이렇게 흘렀기 때문이다. ‘성형’ 하면 ‘미용’이라는 자동 연상으로 ‘상처 교정’이나 ‘기능 장애 개선’이라는 본연의 업무가 선뜻 연결되지 않았던 것이다. 순간 실소가 나왔다. 상처 꿰매려고 그토록 많은 성형외과가 있을 리 없고, 기껏 상처 꿰매면서 그토록 많은 성형외과가 광고에 열을 낼 리가 없을 테니 말이다.

 

 

 바야흐로 대한민국은 성형 공화국이란다. 가관이다 못해 모두 미쳤다고 할밖에. 얼굴이 무슨 도화지나 헝겊 쪼가리라도 된단 말인가. 자르고 오리고 쪼개고 도려내고 이어 붙이는 장난을 무시로 하게. 차라리 얼굴 자체를 플라스틱으로 바꿔 끼우고 방부제까지 ‘먹이지’. 그러면 일생 주름 걱정 안 해도 되잖아. 성형 운운 중에서도 제일 듣기 싫은 건 요즘은 남자들까지 가세한 ‘동안 타령’이다. 단지 어려 보이고 싶다는 이유로 중년은 청년들을, 청년은 10대를 부러워하는 기이한 현상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그럼 10대들은 갓난아기를 동경할까? 안 물어봐서 모르겠다. 갓난아기들은 태아의 동안을 흠모하고? 말 못하니 물어볼 수 없다. 어려 보이면 인생이 뭐가 어떻게 달라진단 말인가. 어려 보이는 것이 인생의 행복이나 의미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이 지경이니 얼굴은 다림질한 듯 팽팽한데 마음은 일찌감치 겉늙어 버렸다. ‘몸은 늙어도 마음은 그대로요, 이팔청춘에 마냥 10대’라는 말을 요즘은 거꾸로 해야 할 판이다. 50이 넘어도 몸은 그대론데 허구한 날 동안 타령으로 마음은 10대만 돼도 벌써 시들해진다고. 이러면 살아도 산 것 같지가 않겠지? 백설공주 계모처럼 맨날 거울만 들여다보면서 전전긍긍 두려울 테니. 말은 이렇게 하지만 한국에 가면 솔직히 나도 우울해진다.

 

   “성형수술 같은 건 하는 게 아니다. 자연스럽게 늙어가야 한다. 나의 노(老)를 허하라!”고 글을 통해 시시때때로 ‘잘난 척’을 했으니 이제 와서 남들처럼 성형수술을 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나만 늙어 보이는 것도 싫다. ‘성형수술, 난 그건 안 한다’라고 결론 내리고 사는 사람이라 해도 마음이 마냥 편하진 않다는 뜻이다. 여기를 깎아라, 저기를 꿰매라고 자꾸 ‘지적질’을 하고 ‘충동질’을 해대니 정신 ‘시끄럽고’ 성가셔서 내 인생에 집중할 수가 없는 것이다. 상황이 이쯤 되면 “젊음이란 20대 청년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자기 연령에 걸맞은 청춘을 매번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다”라고 한 철학자의 말도 위안이 되지 못한다. 그러니 어쩔 것인가. ‘생로병사’라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삶의 이행을 ‘이탈’하려는 몸부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말이다. ‘소외’라는 말을 많이 하지만 소외란 ‘낯섦’이란 뜻이나 다름없다. ‘낯섦’은 자기 아닌 외부 대상에서 오는 설뚱한 감정, 어떤 것이 목적이 아닌 수단이 될 때 발생하는 개념을 말한다. 소외 가운데 가장 무서운 소외는 인간 소외를 넘어 ‘자기 소외’다. 자기가 ‘낯설어’지니 정체도 자존도 허물어진다. ‘존재’ 자체가 위태로운 것이다. ‘남의 눈에 보이는 나’를 좇는 순간 나는 이미 하나의 소비재이자 좌판에 놓인 상품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자신을 상품화해 타인의 비위를 맞추려니 자기 자신이 낯설어지고 안정적 삶을 이어갈 지혜를 얻을 수 없다. 

 

한국 말고 지구상 어느 나라에서 자기 얼굴이 마음에 안 든다고 ‘확 뜯어고치고 다 바꿔’버리는 짓을 할 수 있을까. 무서운 생각이고 무서운 일이다. 쌍꺼풀 진 눈, 오뚝한 콧날, 하관 빤 ‘복제인간’들과, 팽팽하다 못해 뻔뻔한 얼굴의 중년들을 마주칠 때마다 난 이렇게 외친다. “나 좀 늙게 가만 내버려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