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어떤 회보 에 기고 했던 글입니다.
재미있게 읽어 주시면 ....
박헌영과 뒷 그림자
설악산 봉정암
우리나라 어느 고장에 대한 편견이 하나 있다. 그 곳 지방 사람들에게
대단히 미안한 이야기지만 이미 굳혀진 그 생각은 잘 고쳐지지 않을
성 싶다.
만약 지금 독자들에게 충남 예산(禮山) 하면 막상 무엇이 떠오르느냐
고 묻는다면 어느 분은 우리나라 최고의 서예가 추사가 남긴 고택이라
든가 또는 그윽한 수덕사나 향천사 같은 사찰이 라든가 또는 인근(홍
성) 김좌진 장군의 생가(生家)등이 무엇보다 먼저 머릿속에 떠 오를
지 모를 일이다. .
그런데 필자는 사뭇 다르다. 무엇보다 한국의 공산당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남로당(南勞黨)의 박헌영 (朴憲永)이 태어
난 곳이라는 생각이 처음부터 떠오르니, 사람의 선입감은
참으로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사물을 있는 제대로 보지 못하고 미리 입력된 한 방향
으로만 이해하려고 하니 말이다
수년 전 평상시 친하게 지내고 있는 대학교수 C친구에게 전화가 왔
다..식사나 같이 하자는 것이었다. 내년에 정년으로 퇴직할 예정이
란다.
인근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중 젊은 학생 두 명이 인사를 하고는 지
나갔다. 학생들이 입고 있는 티- 샤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흰 티 에 사람의 얼굴들이 인쇄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학생들이 나간 후 나는 C에게 말문을 열었다.
“ 학생들이 입은 티 셔쓰에 새겨진 인물들이 누군지 알고 있어 ?”
“ 물론이지 , 체 게바라 이잖아 ” 당연하듯이 답하는 것이었다.
“ 응, 남미지역의 혁명가 그 사람은 알겠는데.....,
인물이 둘이 새겨져 있잖아? 그 사람
옆에 한국 사람 얼굴 말이야? 둥근 안경 쓴 인물말이야.”
“ 모르겠는 데.......” 친구는 머리를 갸우둥 하며 모르는
모양을 하였다.
체 게바라와 같이 그 인쇄된 한국사람의 인물을 생각하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 얼굴은 “한국의 체 게바라” 라고 불리우는 남로당의 공산주
의자 박헌영(朴憲永) 임을 이내 알아보았기 때문이었다.
평상시 박헌영에 대하여 비교적 관심이 있었던 덕분이었다.
요즈음 적지않은 학생들은 박헌영을 평생 몸바쳐 혁명활동을
했던 숨은 영웅같은 존재로 마치 중남미에서 혁명가로 사뭇 이
름을 떨친 “체 게바라”쯤으로 여겨지는 듯 하였다. .
그러나 설마 한국 공산주의운동의 역사속에 남로당 대표적인 그
인물을 가슴에 새기고 다닐 수 있는 일인가? 경악 할 일이었다.
그의 일제 때 수차례 걸친 수감 경력, 동아일보 기자 생활 그리고
관에 몸을 숨겨 비밀리 월북하는 장면, 광주의 벽돌공장의 노동자
로 신분을 감쪽같이 숨기고 은익했던 끈질긴 공산당 조직과 혁명
시간들이 아마도 오늘날의 운동권 젊은 학생들에게 하나의 좋은
본보기나 지침으로 삼는 것이 아닌가 보였다.
여기서 공산주의 혁명가로서 박헌영의 일대기나 그가 남로당을 조직하고
활동했던 내용들을 언급하여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이거나 나아가 우리의
현대사에 그를 재조명하거나 하는 거창한 작업을 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왜냐하면 어찌 보면 그는 이미 지나간 과거사에 있었던 잔혹한 공산주의
자이거나 또는 끝내 국제 공산당이나소련 공산당으로 부터 정치적 힘을
얻은 김일성에게 정권의 주도권을 빼앗긴 패배한 어느 공산주의자로 알려
진 것 만으로도 사실 충분 할 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당시 박헌영을 제거해내고 북한내 집권하였던 소련파 김
일성이라는 인물이 사실 한국의 공산주의 운동사에서 정녕 정통
을 이어받은 사람인가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점
을 밝혀야 하겠다는 마음이다.
왜냐하면 공산당사에 존재했던 박헌영의 일대기를 밝히는 연구
조사는 결국 김일성의 집권과정의 무도함과 더불어 그의 정통성
이나 정체성이 박헌영에 훨신 미치지 못한다는 결론이 자연스럽
게 도출되기 때문이다.
요컨대 박헌영에 대한 관심은 사실 우리에게 그러한 측면에서 보
이지 않는 도움을 주는 편이라 하겠다.
이러한 논지는 다음의 글(박갑동저 ‘박헌영’) 을 보면 거의 확실하
게 들어난나고 할 수 있겠다
1947년 9월 당시에 남로당 중앙위원회 간부 부장으로 있었던 이현상(李鉉
相)이 소련 최고당 학교에 사상교육을 받으러 소련 모스크바로 가던 길에
평양에서 당시 북로당 중앙당 최고간부급 인사들이었던 이상조(李尙朝)와
김창만 (金昌滿)을 만나 “그 당시 조선인민의 최고 지도자는 누구냐 ?” 라
는 화제를 두고 논쟁했을때 언급 했던 내용이 남아있다..
이현상이란 사람은 나중에 한국전전후 과정에 지리산지역 빨지산
총책으로 맹활약했던 사람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던 바로
바로 그 사람이다.
“ 너희들이 말하는 그 사람(김일성)은 조선의 국토와 인민
으로부터 떨어져 외국에서 성장했고, 외국 공산당에 입
당하여 그들의 지시로 외국의 이익을 위하여 투쟁한 것
밖에 더 있느냐 “ 라고 언급하면서 반면에 박헌영에 대해
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박헌영은
국내에서 투쟁했다. 그것도 그 사람보다 15년이나 일찍이
말이다. 박헌영은 1925년에 이미 조선 공산당과 조선 공산
청년동맹을 자기 손으로 만들었고 혹독한 일제 탄압과 옥중
생활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 투쟁해 왔다. 그사람의 경력이
야말로 한 점의 흐린 데도 없는 (조선공산당사에서 보면) 사
람 이다.“
라고 북한에 들어와 북로당을 이끌고 있는 김일성과 비교하
였다. 그리고 김일성의 출생등과 관련하여 적지 않은 의문
을 제기하였다.
그리고 박헌영의 최후 장면과 관련하여 이렇게 서술하고 있음에
우리는 주목해야 할 것이다.
박헌영은 지난 1955년 12월 15일 그 당시 민족보위상 ( 우리의 국방부 장
관격)인 최용건 을 재판장으로 하여 열린 평양 최고재판소 특별법정에서
사형을 언도받은 후 지체없이 그 다음날 형집행이 이루어졌다.
김일성에 의하여 체포되어 평북 철산군내의 어느 산골에 감금당한 채 갖은
고문 가운데 자기들이 작성한 조서를 승인하고 지장을 찍으라는 강요를 2
년 반 동안을 버티다가 끝내 굴복하였던 것이다.
경성고보(현 경기고교)를 졸업하자마자 이 땅에 공산혁명을 이루기 위해
한 평생을 공산주의 운동에 온 몸을 던졌던 철두철미한 한 공산주의자는 끝
내는 북한정권내 부수상 및 외상이라는 직책을 떠나보내고 같은 공산주의
자 동료이기도 김일성을 위시한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손에 의하여 최후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사형 현장에 끌려나갔던 박헌영은 집행되기 직전 마지막 말을 이렇게 외쳤
다고 한다.
“역사의 날조자, 혁명의 찬탈자, 민족의 반역자, 인민의 원수 김일성을 타도
하라” 고 온힘을 다하여 소리쳤다고 전해지고 있다.(북경의 극비 재판기록중)
한 세상을 살아온 인간 삶이, 세상이라는 허울이, 얼마나 무상한가
를 보여주는 순간이었다고 여겨진다.
최근들어 우리나라 해방이후 남로당과 북한 공산당 (현재는 조선 노동당 )
과의 관계를 밝혀 보면서 과거 한국의 공산주의 운동을 했던 박헌영의 일
대기를 살펴보는 움직임이나 연구들이 종종 눈에 띄게 많아지고 있다.
과거를 단지 흘러간 일로 알고 넘어가기에는 요컨대 지난 일들을 너무 단순
하게 다루는 데에 반작용이 아니가 여겨지기도 한다.
일본 와세다 대학 출신으로 박헌영을 추종하여 남로당의 중앙선전부및 중요
한 기관지 <해방일보>의 정치부 기자로 좌익 활동을 하다가 월북하여 북한에
서 고위인사를 지냈던 박갑동이 회고형식으로 저술한 “박헌영” 이라는 책과
더불어 북한에서 월남한 노동당 간부출신 김남식이 남로당의 여러 전략이나
전술이 공개된 “박헌영 노선비판” 이라는 책자가 관심 있는 사람들이게 많은
파문을 일으켰다.
물론 미국에서도 스칼라피노와 한국계 이정식교수등이 비교적 편견없이 해방
후 남북한의 혼란상이나 공산당 활동등을 포함한 내용들이 담겨진 “한국 공
산주의운동사”가 출판되어 나왔다. 그리고 드디어 2006년에 ‘박헌영 전집“
총 9권이 세상에 나오면서 골수 혁명주의자 박헌영의 지난 활동상이나 생활
면등의 자취들이 과연 어떠했는냐 하는 것들이 속속들이 들어나고 있는 형
편이다.
과거 박헌영의 고향인 신양면과 인근의 대흥면에 소재한 소년시절 다녔던
대흥 초등학교 (당시에는 보통학교라 불리어 졌음)와 광시면 일대를 탐방
한 지 십여년도 더 지난 지금 예산일대를 다시 둘러보고 그가 남긴 아들
과 만나고 있다.
박헌영의 젊은 시절 미인 주세죽(朱世竹)과 만나 결혼하고 나서 같이 혁
명활동을 하다가 임신한 부인을 모스끄바에 두고 헤어지게 된다.
바로 그 당시 태어난 사람이 그러니까 박헌영의 남은 유일한 혈육붙이
노년의 아들이 경기도 모 사찰에서 긴시간 수행하고 있는 필자 앞의
바로 P 스님이다. P스님과 차를 나누며 많은 이야기를 바람같이 나누
었다.
한국전쟁시 남한지역 곳곳까지 남로당 세포조직을 만들고
한반도의 적화를 위하여 많은 국민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남로당의 최고 우두머리 박헌영은 김일성에 의해 끝내 미제
의 간첩이라는 누명과 함께 사라지고 그와 연결된 생명의
연줄로 이어진 세간의 한 인간은 더 큰 깨달음을 향하여 부
단히 정진하는 수행자로서 남아있었다.
“시대의 변화와 사람 삶의 무상함이 바람같다” 는 그의 말이 머리속
에 햇살 가득한 녘에 여울지고 있었다.
솔향기 나는 산 속에 조용한 바람이 불고 있었고 이름 모를 산새소리
울려나오고 있었다.(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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