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時調

[스크랩] 홍성란, <현대시조, 형식과 담론> <<문예진흥연감>> 2005.

운산 최의상 2018. 5. 8. 10:27
현대시조, 형식과 담론 / 홍성란
 

1. 정리와 시조의 확산, 그리고 유의미한 시조집들

2004년의 시조 활동을 포괄적으로 논의한다면, 우선 다시 읽을 만한 시조의 선정작업과 중앙일보사가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시조중흥운동을 정리한 편저를 말할 수 있다.

「@로 여는 이정환의 아침시조 100선」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이 책은 이정환이 추구해온 인터넷 시조보급운동의 결실이다.「중앙시조대상 수상작품집은 이 상이 제정되고 시행된 1982년부터 2003년까지의 수상작과 1990년부터 시행하고 있는 중앙시조 지상백일장 연말 장원작까지 필자가 한데 모은 책으로, 중앙일보가 창작·수용·전승의 세 방면에서 현대시조의 저변을 확대하고 위상 제고에 기여한바 그 일정한 문학사적 의의를 담고 있다 하겠다. 이러한 매스미디어의 민족시중흥운동과 함께 우리 시단에서 장르 구분 없이, 현대시라는 양식 안에 수렴되는 자유시와 현대시조를 같은 지면에 게재하는 시전문지가 확산(「리토피아」 「시경」 「열린시학」 「유심」 「현대시학」 등)되고 있다는 데서, 여말 이후 새로운 피로 갱신하며 더욱 근력이 붙고 있는 유구한 현존의 역사적 장르로서의 현대시조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읽을 수 있다.

다음으로 시조전문지 외에 각 지방의 이름을 내건 연간지 형태의 시조전문지들과 동인지 형태의 연간집(역류동인, 「뜬돌에게 묻다」·맥시조문학회, 「산수유꽃 그늘 아래」·시조동인 오늘, 「일상의 여운」 등)도 약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통도사 성파 스님 주재로 창간호를 낸 시조전문지 「화중련」 역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올해의 큰 수확이라 할 수 있는 시조집으로,  문예진흥기금을 받아

김제현이 「백제의 돌」,

윤금초가 「주몽의 하늘」,

박시교가 「독작」,

김원각이 「민박」,

정수자가 「저녁의 뒷모습」,

고정국이 「지만 울단 장쿨래기」,

장수현이 「기억의 모서리에 푸른빛이 스며 있다」를 상재했다.

 

이 가운데

윤금초의 「주몽의 하늘」은 91편의 사설시조를 묶어 서자 취급당하는 현대사설시조를 한국시단의 중심부로 끌어올린 역작임과 동시에 시조의 서술시로서의 가능성을 확인시켜주었다는 점에서,

고정국의 「지만 울단 장쿨래기」는 제주 사투리로 300수의 시조를 엮어 방언학의 자료가 되었다는 점에서 현대시조사적 의의를 논할 수 있다.

 

이 밖에 최승범의 「가랑잎으로 눈 가리고」,

문무학의 「풀을 읽다」, 김일연의 「달집 태우기」,

최영효의 「무시로 저문 날에는 슬픔에도 기대어 서라」, 이우걸의 시조선집 「지상의 밤」,

이희춘의 「마라도」가 상재되었는데 「마라도」는 우리 국토 최남단의 작은 섬에 대한 예찬을 500수나 되는 장편 서술시조로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열정을 평가할 수 있다.

이 다채로운 결실에 더하여 지난해 소작인 윤금초의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는 문예진흥원의 2004년 우수도서로 유일하게 선정되는 기염을 토하였다.

이제 시조단에서도, 동시단에서도 소외되어 있는 동시조에 대한 애정을 불사르고 있는 시인들에 대한 경의를 표해야 할 것이다.

 박경용, 진복희, 허일 등을 중심으로 한 동시조동인 ‘쪽배’는 2003년 끝자락에서 「우리 가락 좋은 동시」를 펴냈는데 이는 올해의 수확으로 넣어야 할 것이다.

계간 「한국동시조」를 발행하고 있는 박석순이 동시조선집 「아기별을 찾습니다」와 동시조집 「아침이면 별들은 바쁘다」를 펴낸 외에 김재황이 「넙치와 가자미」, 허일이 「메아리가 떠난 마을」을 상재했다. 동심에 시조의 혼을 불어넣는 이들의 외로운 노작을 우리는 호명하고 가야 할 것이다.



2. 시조의 형식 실험과 언어미학적 자아

현대시조가 시조성과 현대성을 담지한 우리 시대의 새로운 장르라면, 그 현대성은 어떠한 양상으로 구현되고 있을까. 사실 형식이란 시조의 율격과 형식을 가시화하는 언어의 선정과 배열 그리고 자율적 정형시로서 각 편에서 창출되는 ‘의사 내재율’이라는 현대시조의 리듬까지를 포괄하는 것이다. ‘내리박이 줄글식’이거나 장 구분을 의식하여 3행으로 표현하던 전통적인 시행 배열에서 인쇄문화의 발달과 함께 현대시조의 3장 형식은 자유로운 시행 배열과 연의 구성으로 시간적 의미율을 생성하면서 판에 박은 듯한 옛시조와는 다른, 부정할 수 없는 새로운 경지를 열어 보이고 있다. 서정시는 시행으로 발화한다는 서구의 전통적 담론이 아니라도 현대시조가 보여주는 3장 형식의 자유로운 발화에 대하여 자유시 추수로 재단하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11월은
어머니가 없는 달이다

벼 벤 그루터기 봇물은 잦아들고
떠나선
다시 못 오는,
방물장수의
낯선



- 박기섭, <11월> 전문, 「서정과현실」, 상반기호.



시조의 정체성을 견지하면서 우리말의 언어미학을 절묘하게 구사해낸 <11월>은 각 장을 독립된 연으로 구성하고 시상단위에 따라 행을 잘게 쪼개어 배열하고 있다. 각각의 행말휴지는 현대시조의 의사 내재율 형성에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라는 접속어로 시작하는 범상치 않은 언술방식 안에 이미 절절한 사연이 함축되어 있다. “떠나선/다시 못 오는,/방물장수”는 이승의 사람이 아닌 “어머니”다. 이승이 아닌 낯선 풍경 속으로 길을 떠나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11월의 쓸쓸하고 황량한 이미지가 실낱같이 휘어진 아름다운 길 속으로 겹쳐지고 있다. <11월>은 우리가 건너온 저 궁핍한 시대의 모든 어머니들의 초상을 담고 있다. <슬픔도 그만하면>(「현대시학」, 8월호)과 <홍류동(紅流洞)>(「서정과현실」, 상반기호) 또한 박기섭의 시적 개성을 확연히 드러내는 작품이다. <슬픔도 그만하면>에서 구사하고 있는 버력·감돌·거랑금 같은 시어는 그만의 독보적인 시어 발굴 노력의 소산으로 광산 같은 채광현장에서 쓰이는 용어이다. 종구라기라는 시어도 신선하고 감칠맛 나게 다가온다. 한 시인을 집중 조명한다는 데에는 넘치는 감이 있으나 그가 보여주는 시 세계가 빛나는 시적 성취를 이루고 있다면 하나의 전범으로 우리가 재삼 음미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홍류동> 전문을 옮긴다.



홍류동 단풍물에 말은 죄 저당 잡히고
그 저당 풀 생각마저 덤으로 저당 잡혀
눈뜬 채 추레한 입성을 감출 데가 없구나

억새가 될 말들은 억새로 다 흐드러지고
붉나무 될 말들은 붉나무로들 타붙는데
지친 내 근시안 밖에 목숨이야 한 벌 진솔

지상에 남은 술은 구름 위에 부어 놓고
아주 알몸으로 물가에나 나앉을까
이 저승 환한 돌문을 누가 밀고 올 것처럼


이승과 저승의 경계가 없는 곳에 “알몸으로” “나앉”은들 누가 뭐랄까. 이승과 저승의 경계는 또 누가 없애줄 수 있을까. “단풍물” 든 “홍류동”의 비경은 어떠한 인간의 “말”로도 형언할 수 없겠다는 화자의 인식이 한없는 겸사를 끌어온다. 가을의 장관 속에 다만 화자의 모습은 “추레한 입성”일 뿐이다. 연년세세 가을이면 돌아오는 “억새”이거나 “붉나무”이거나 유구한 저 자연 앞에 다만 인간의 빛깔은 지어서 한 번도 빨지 않은 풋내기 새 옷, “진솔”일 뿐이다. 이 작품에서 홍류동이라는 자연이 갈아입는 단풍물에 견주어 인간의 옷은 입성이라는 속된 말로 표현되고 있으며, 입성이나 진솔은 모두 옷을 가리키는 시어이다. 각 편의 적재적소에 동원되는 일련의 시어에 대한 천착은 이 시인의 남다른 언어미학적 자아를 확인시키는 점이다.



바람이 부는 날엔
새- 하고
노래하고 싶다.

오랫동안
떠나지 않는
기억도
약속도

난분분
꽃잎 지는 틈타
함께 날려 보내고 싶다.

악물고
닫아 두었던
가슴을 열고 나면

한 마리 새가 되어
가벼워진 몸뚱아리
눈물도
묵은 한숨도
새- 하고 날아간다.

- 김동찬, <새-> 전문, 「열린시학」, 여름호.



우리가 “새-” 하고 발음하게 되면 자음과 모음을 통과한 날숨이 지속된다. 이 날숨의 지속 의지는 어디에도 막히고 싶지 않다는 자유의지에 닿아 있다. “바람이 부는 날엔/새- 하고/ 노래하고 싶다”는 화자에게서 그를 속박하는 “기억”이나 “약속”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은 욕망을 읽을 수 있다. 일상에 지친 현대인들은 누구나 “난분분/꽃잎 지”듯이 가벼운 몸이 되어 “한 마리 새”처럼 “날아”가고 싶다. 이 날짐승인 “한 마리 새”는 “바람이 부는 날”에 “노래하고 싶다”는 “새-”와는 다르다. <새->는 ‘새’라는 동음어를 택하여 시상을 전개하고 있는 시인의 언어미학적 감수성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날숨으로서의 “새-”는 “악물고/닫아 두었던/가슴을 열고 나”서 만들 수 있는 마음의 소리인 동시에 어디에도 막히지 않는 자유의지의 표백이다. 그런데 “악물고/닫아 두었던/가슴을 열고 나면” “눈물도/묵은 한숨도/새- 하고 날아간다”는 고백에서 우리는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일체유심조와도 만나게 된다. 그러니 바람이 불지 않아도 우리는 가끔 “새-” 하고 노래해볼 일이다. 한 마리 새처럼 가벼워진 몸이 될 테니.



3. 미더운 상상력과 형상적 자아

시가 “상상의 표현(셸리)”이라 할 때, 상상은 “영혼의 감각(블레이크)”이다. 상상은 영혼의 감각이므로 그 육체 없는 감각은 삼라만상 어느 시공에도 가 닿을 수 있다. 그리하여 시인은 상상력으로써 거룩한 신처럼 세상에 없던 형상들을 창조해 낸다. 기실 세상에 없던 형상이란 것은 무의식 속에 침잠하고 있었던 것이며 그 가라앉았던 것들이 상상의 힘으로 솟구쳐 발현하는 것이다. 이 상상력은 심상을 만드는 데 바쳐진다.



풍장에서 매장으로 긴 길을 헤적이며
일련번호가 매겨진 고인돌 군을 본다
누천년 주검의 집에 뿌리내린 시간을

불시에 따라 묻힌 권속들의 신음을
풍상에 되새기듯 으늑한 저 표정이
일몰을 휘감고 앉은 마지막 족장 같다

그러나 앉은 채로 풍화를 꿈꾸기엔
순장의 침묵이 비명보다 깊어서
아직도 눈뜬 주검의 주문을 받는다고

밤이면 그 혼일랑 모조리 들쳐업고
청동기 우물께로 마실 다녀오는지
육중한 죽지 안쪽에 바람이 그득하다

- 정수자, <고인돌> 전문, 『리토피아』, 가을호.



“고인돌”은 “주검의 집”이다. 화자는 우리를 강화도의 삼거리나 부근리쯤의 고인돌 군으로 안내한다. 어느 왕족일까. 왕족보다 그 “주검”을 지키기 위해 “순장”된 “권속들”의 “비명” 소리가 바람에 실려 오고 있다. “청동기”라는 아득한 세월의 풍상을 견디어 온 고인돌 군에서 “일몰을 휘감고 앉은 마지막 족장”의 또렷한 환영과 맞닥뜨린 시인의 이 미더운 상상력은 “아직도 눈뜬 주검의 주문을 받”고 있는 “권속들의” 깊은 “침묵”을 듣는다.

부근리가 바둑판 형상을 한 남방식인 데 비해 삼거리의 고인돌은 북방식으로 네 개의 판석을 세워 장방형의 돌방을 구성하고 그 위에 거대하고 편평한 돌을 뚜껑돌로 올려놓은 것인데, 유해가 매장되는 돌방을 지상에 노출시킨 형태라고 한다. 이 고인돌이 북방식일 것으로 상상하는 것은 “육중한 죽지 안쪽에 바람이 그득하다”는 표현에서 가능하다. 날갯죽지가 있다면 새의 다리가 있을 것으로 네 개의 긴 판석이 그 다리에 해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상전의 “혼”을 “들쳐업고/ 청동기 우물께로 마실”간 “순장”된 “권속들”이 고인돌 그 육중한 뚜껑돌 안쪽으로 “그득”한 “바람”을 몰고 돌아오고 있다.

4수 4연 형식을 보여주는 이 작품에서 명징하게 드러나는 화려한 심상은 형상적 자아의 전범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시조가 3장의 완결구조를 가지는 형식이라는 점에 주목하게 되면, 첫째 수 종장과 둘째 수 초장에 보이는 통사·의미론적 연속성으로 하여 3장 의식의 모호성을 지적할 수 있다. 특히 둘째 수 초장은 첫째 수 종장과 구조적 반복 형태를 보임으로써 첫째 수와 응집력을 가지게 되며 “뿌리내린 시간을”과 함께 “권속들의 음악을”도 첫째 수 중장의 가진다고 할 때 종결의미를 취하게 되어 결과적으로 둘째 수는 중장과 종장만 남게 되는 문제가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시인이 의도적으로 수 단위의 연 구분을 함으로써 시조 3장의 정체성을 견지하는 가운데 단단하고 아름다운 상상력을 지닌 형상적 자아의 전범을 보여주고 있다.



4. 우리 삶의 이야기, 일상적 자아

시조가 서술시로서의 면모를 보일 수 있다는 것은 시조 안에 진솔한 우리 삶의 이야기를 가감 없이 보여줄 수 있을 때 가능하다. 그것이 꼭 사설 엮음으로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채천수의 <국솥이 있는 풍경>과 <민화>(『열린시학』, 가을호)에는 선명한 이미지와 함께 삶의 애환이 담겨 있다.



일요일 한낮 쌍책중학교 운동장에는
돼지 잡아 국 끓이고 동네 윷이 한창이다
까마득 긴긴 겨울에 살아남은 소식 풀며,


어쩌면 도도 개도 걸도 윷도 모도 아닌
남은 목숨 인정 같은 술 한 잔 나누고파
완연한 봄 윷가락에 촌로(村老)들이 얻는 생기


한나절 땅을 밟고 어깨춤도 절로 추는
누가 그들을 외지다고 말하는가
이 봄날 누가 그들을 휘둘린다고 말하는가

- 채천수, <국솥이 있는 풍경> 전문,
『열린시학』, 가을호.



3수 전연 형태를 취함으로써 연 구성의 해체를 보이는 이 작품은 첫째 수 종장에 해당하는 제3행은 의미론으로 첫째 수 초장 앞에 놓이게 된다. 또한 둘째 수와 의미의 연속성을 가지며 의미의 완결지점은 둘째 수 종장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 9행의 이 작품이 9행으로 된 자유시가 아닌 시조라는 장르적 정체성을 가지는 이유는 각 행에서 보이는 4마디의 분절성과, 종장에 해당하는 각 행이 시조 특유의 종장 구조가 보여주는 음량 배분을 실현하고 있다는 데 있다.

<국솥이 있는 풍경>은 경상북도 상주의 외진 쌍책중학교 운동장에서 벌어지는 정감 어린 동네 잔치마당을 선명하게 그려내고 있다. 완연한 봄날 골방을 뛰쳐나온 촌로들이 인정스런 돼지국밥 한 그릇에 지난겨울의 무기력과 외로움을 털어버리고 생기 넘치는 윷판을 벌이고 있다. 따스한 봄볕에 취해 막걸리 사발에 취해 신명나게 어깨춤도 추고 호기 좋게 술잔을 돌리고 있다. 봄은 재생과 환희의 계절이다. 이 봄날, 촌로들은 더 이상 세월의 무게에 휘둘리지 않는다. 굳이 인용부호를 붙이지 않아도 이 작품은 정겨운 시골 잔치마당의 이야기를 선명한 동영상으로 보여주고 있다. <민화>의 둘째 수는 “큰어머님 구순치마 벽에 걸면 백동자도/형수님 육순 눈빛 짚어보면 세시풍속도/철없던 내 여름 한낮은 발가숭이 천렵도”로 민화 세 장 속에 구절양장 같은 많은 이야기를 함축하고 있는 개성적인 작품이다.



잘라낸 대파 밑둥에 새파란 순이 돋았다
죽은 듯 말라붙은 껍데기는 그냥 그대로
더 이상 키가 자라지 않는 어머니 모습이다

몸으로 온몸으로 알맹이를 지킨 후에야
마침내 지상에서 흔적 없이 허물어지는
이 세상 모든 어머니는 향기로운 껍데기다

별들의 배경이 막막한 어두움이듯
알맹이의 배경 또한 껍데기임을 알겠다
지상에 마지막 남은 사랑임을 알겠다

- 유해자, <향기로운 껍데기> 전문, 『개화』 13집.



각 수를 독립된 연으로 하여 3수 3연의 형태를 보이는 이 작품은 특별한 시적 장치 없이 장별배행을 통하여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을 담담하게 표출하고 있다. 우리들 자식이라는 “알맹이”를 낳고 신산의 세월을 건너 “죽은 듯 말라붙”어서 “더 이상 키가 자라지 않는” “이 세상 모든 어머니는 향기로운 껍데기다”. 이 “어머니”라는 “껍데기”는 못난 우리 “알맹이”들의 “배경”인 것이다. “몸으로 온몸으로 알맹이를 지켜” “새파란 순”을 “돋”우게 하고 “향기로운 껍데기”는 “흔적 없이 허물어”져 갈 것이다. 이것이 순명인 것을 깨달은 우리 속절없는 알맹이들의 어둠이 아득하게 만져진다.



5. 우리 시대의 엇시조와 사설시조

전화기 속에서 어머니가 우신다
‘니가 보고 싶다’① 하시면서/ 나는 울지 않았다
더욱더/서러워하실 어머니가 안쓰러워

어릴 적 객지에서 어머니 보고 싶어② 울었다
그때는 어머니/독하게 울지 않으셨다
외롭고/고단한 날들 이겨내야 한다고

언제부턴가 고향이 객지로 변해 버렸다
어머닌 객지에서/외로움에 늙으시고
어머니/날 낳던 나이보다, 내 나이 더 늙어간다

- 김영재, <어머니> 전문, 『시선』, 여름호.
(빗금·원번호·밑줄은 인용자)



각 수를 각각의 연으로 하여 3연 15행을 이룬 이 작품은 첫째 수 중장과 둘째 수 초장이 엇구 형태로 늘어난 엇시조와 평시조의 혼합형이다. 현재의 시점에서 출발하여 과거를 회상하고 다시 현재의 시점으로 돌아와 어머니에 대한 연민과 객지생활로 어머니를 홀로 늙어가게 하고 있는 자식으로서의 회한을 담고 있다. 이 밀려오는 연민과 회한에서 누출되는 감정을 통어할 수 없는 지점에서 ①, ②와 같은 엇구의 확장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①은 중장 첫째 마디가 3개의 어절로 6음절을 이루어 음절형 엇구로 늘어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②는 초장의 셋째 마디가 3개의 어절로 7음절을 이루어 역시 음절형 엇구로 늘어나 있음을 보여준다. 현대시조가 4음 4보격의 자율적 정형시라 할 때, 하나의 마디가 5음절을 초과하여 6음절 이상으로 음량이 늘어날 경우 2개의 마디로 분할된다는 율격론에 따라, 첫째 수와 둘째 수가 보여주는 율격적 특징으로 하여 이 작품은 우리 시대의 엇시조로 분류되는 것이다.



별 떨기 튀밥같이 어지러이 흩어질 때

①어둑새벽 등 떠밀고 달려오는 먼 산줄기, 풍경이 풍경을 포개어 굴렁쇠 굴려 간다. ②자궁 훤히 드러낸 회임의 연못 하나, 제각기 펼친 만큼 내려앉은 햇살 속으로 염소떼 주인을 몰고 질라래비, 질라래비…. ③이 땅의 잔가지들 손잡고 살 비비는가. ④질라래비 훨훨, 질라래비 훨훨, 활개치는 풀빛 아이들.

봄날도 향기로 와서 생금 가루 흩뿌린다.

- 윤금초, <질라래비 훨훨> 전문,
『주몽의 하늘』에서.(원번호는 인용자)



현대사설시조는 대체로 중장에서 사설을 길게 엮고 초장과 종장은 평시조와 같은 형태를 보이는데 <질라래비 훨훨>은 이러한 현대사설시조의 전범이라 하겠다. 평시조의 각 장이 4마디로 이루어지듯이 사설시조의 중장에서 사설이 아무리 길어져도 2음보격 연속체라는 사설 엮음의 원리에 따라 통사·의미론적 4마디로 분할된다. 이때 가장 우선되는 분할원리는 의미의 응집력이다. 이 작품은 시인이 의도적으로 4개의 마침표를 사용하여 마디 분할을 하고 있다.

“질라래비 훨훨”은 어린아이에게 새가 훨훨 날 듯이 팔을 흔들라는 뜻으로 하는 말이다. “어둑새벽 등 떠밀고” 새벽이 가까워오면 총총하던 “별 떨기”도 “튀밥같이” “흩어”져 밝음 속으로 사라진다. 그 밝음 속으로 “굴렁쇠 굴려” 오듯 “먼 산줄기”들이 하나씩 달려온다. “햇살 속으로” “아이들”은 “질라래비 훨훨”을 부르며 날갯짓하며 “활개 치며” “염소 떼”를 이끌고 “연못”이 내려다보이는 둑방길을 간다. 이 해맑은 풍경 속에 “봄날도 향기로” 다가“와서 생금 가루”를 뿌려주고 있다. <질라래비 훨훨>은 이 시편이 잉태하고 있는 환하고 따뜻한 희망의 전언을 이 각박한 시대를 부대끼며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부와 장수 그리고 탈 없이 살아가라는 벽사의 상징인 “생금 가루”를 “흩뿌”려 주고 있는 것이다.

이제까지 몇 가지 시적 자아의 미적 영역과 엇시조와 사설시조의 측면에서 살펴본 작품들 외에도 논의하고 싶은 괄목할 만한 작품이 많았으나 원고 분량을 넘기고서도 논의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2004년 시조단의 성취를 일람하며 시조라는 짧은 형식 안에 많은 내용을 담으려는 의욕이 앞서 직설적이거나 췌언에 떨어지지는 않았는가, 신선하고 남다른 상상력을 더 길러야 하는 것은 아닌가, 세계 속의 한국 시조시학을 조명해낼 수 있는 형식미학과 언어미학의 천착에 더 심혈을 기울여야 하는 것은 아닌가, 특별히 한국어의 질감을 완미(玩味)하게 드러낼 수 있는 시조의 번역 문제는 어느 지점에 다다라 있는가 등등에 대한 의문과 문제를 제기하며 우리를 반성하게 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 筆者 : 홍성란 시인│한국방송통신대학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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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유심 시조아카데미
글쓴이 : 홍성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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