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의 만추'는 옛시인의 詩를 벗한다
↑ 광주호와 인접한 전남 담양의 식영정 경내에 느티나무와 은행나무 낙엽이 두툼하게 깔려 만추의 운치를 더한다. 식영정 경내의 서하당(오른쪽)은 근래에 복원된 건물로 송강 정철과 함께 '식영정 사선'으로 불리는 김성원이 살던 곳이다.
↑ 송강 정철의 '성산별곡' 무대인 식영정.
↑ 국가명승으로 지정된 식영정 경내의 부용당.
↑ 나뭇잎이 떨어져야 잘 보이는 소쇄원의 광풍각.
↑ 묵은 돌담과 노란 은행나무가 멋스러운 지실마을.
정철을 비롯해 임억령 고경명 김성원 등 '식영정 사선(四仙)'은 각각 성산동의 경치 20곳을 선택해 식영정이십영(息影亭二十詠)을 지었다. 훗날 이 식영정이십영은 정철의 성산별곡의 밑바탕이 되었다. 성산별곡(星山別曲)은 식영정과 서하당 등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성산 주변의 풍경과 김성원의 풍류를 예찬하는 가사로 광주호가 들어서면서 대부분 수몰돼 아쉬움을 더한다.
국가 명승으로 지정된 식영정 경내의 만추는 근래 복원된 서하당과 부용당에서 절정을 이룬다. 은행나무 고목 아래에 위치한 부용당의 기와지붕에는 노란 은행잎이 골마다 차곡차곡 쌓여 있고, 부용당과 맞닿은 장방형의 연못은 쪽빛 가을 하늘을 담고 있다. 소슬바람이 불 때마다 은행나무와 느티나무에서 떨어진 낙엽이 쌓여가는 경내는 차마 발걸음을 떼기가 민망할 정도. 발끝에서 사각거리는 낙엽 소리가 식영정 사선들의 책 읽는 소리처럼 운치 있다.
식영정과 소쇄원 사이에 위치한 지실마을은 묵은 돌담과 노란 은행나무가 인상적인 전형적인 남도의 마을로 가을이 한창이다. 정철의 고향이기도 한 지실마을은 방 얻으러 갔던 나희덕 시인을 애타게 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시인은 '방을 얻다'라는 시에서 고택의 빈방을 세놓으라는 제의에 주인아주머니가 "집안의 내력이 깃든 데라서 맘으로는 늘 안채를 쓰고 있다"고 답하자 세 놓으라는 말도 못하고 돌아섰다. 하지만 그녀는 마음으로는 이미 그 방에 세 들어 살기 시작했다고 고백했다.
허물어진 돌담과 사철 푸른 대숲, 그리고 노란 은행나무는 지실마을을 상징하는 아이콘이다. 청량한 바람소리를 머금은 대숲은 푸르다 못해 검은 빛을 띠고 돌담을 수놓은 초록 이끼는 마을의 역사만큼이나 짙푸르다. 좁은 골목길의 모퉁이를 돌다 맞닥뜨리는 촌로와 송강 정철의 환영이 오버랩되는 것은 지실마을의 매력.
'가을이 드니 바위 골짜기 서늘하고/ 단풍은 이미 서리에 놀라 물들었네/ 아름다운 채색 고요하게 흔들리니/ 그 그림자 거울에 비친 경지로다'(김인후의 '소쇄원 48영' 중 '제44영 골짜기에 비치는 단풍')
조선시대 원림의 정수로 꼽히는 소쇄원(瀟灑園)은 지실마을 바로 위에 있다. 소쇄원은 사계절 아름답지만 만추의 풍경이 가장 시적이다. 죽향의 고향답게 소쇄원 입구의 울창한 대숲은 그림자조차 집어삼킬 만큼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이따금 바람이라도 불면 댓잎 스치는 소리가 여인이 치맛자락을 끌듯 은근하고 댓잎 사이로 산산이 부서지는 아침햇살은 눈이 부실 정도로 황홀하다.
맑고 깨끗하고 시원하다는 뜻의 '소쇄'는 원림을 조성한 양산보의 호 '소쇄옹'에서 비롯됐다. 17세에 과거에 급제한 양산보는 스승인 조광조가 기묘사화로 사약을 받자 벼슬에의 뜻을 버리고 낙향한다. 그리고 55세로 생을 마칠 때까지 손수 조성한 소쇄원에서 대쪽같은 삶을 살았다.
소쇄원 원림(園林)은 자연과 인간, 주인과 객이 서로 예를 갖추도록 설계됐다. 원림은 인위적인 조경으로 동산의 분위기를 연출한 정원과 달리 동산과 숲의 자연 상태를 그대로 조경으로 삼으면서 적절한 위치에 집과 정자를 배치한 것으로 소쇄원이 대표적이다. 입구의 대숲을 지나 기와지붕을 얹은 흙돌담이 시작되는 곳에 이르면 '대봉대(待鳳臺)'라는 편액이 걸린 초가지붕 정자가 반갑게 맞는다. 예로부터 소쇄원을 찾은 귀한 손님이 차 한 잔의 여유와 함께 소쇄원의 풍경을 감상하던 곳으로 대봉대 뒤에는 단풍나무 한 그루가 활활 타오르고 있다.
송시열이 이름을 붙였다는 산책 공간인 애양단(愛陽壇), 홈을 파서 만든 나무로 계곡물을 끌어들이는 연못 등 1400여평의 소쇄원은 자연과 인공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중에서도 백미는 담장 아래로 흐르는 계류가 넓적한 암반을 다섯 번 돌아 흐른다는 오곡문(五曲門). 광주호로 유람을 떠나던 색색의 낙엽이 푸른 이끼로 뒤덮인 오곡문 바위에 눌러앉아 소쇄원의 만추를 즐기고 있다.
주인이 서재로 쓰던 제월당(霽月堂)은 철 잊은 철쭉꽃이 한 움큼 피어있는 양지바른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비 개인 하늘의 상쾌한 달'이라는 뜻의 제월당은 주인의 성품을 닮아 소박하고 검소하면서도 풍류가 녹아있다. 제월당 협문을 나서 계곡으로 내려가면 만추가 어울리는 광풍각(光風閣)이 고색창연하다. '비온 뒤에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이란 의미의 광풍각은 주인이 소쇄원을 찾은 벗들과 함께 풍류를 즐기던 공간. 누마루에 걸터앉으면 마지막 잎새마저 떨어진 앙상한 가지 사이로 소쇄원의 만추가 수묵화처럼 펼쳐진다.
소쇄원에서 한껏 시심에 부푼 남도의 만추는 가을걷이가 끝난 들판을 남도 선비처럼 휘적휘적 걷는다. 그리고 단풍이 횃불처럼 활활 타오르는 독수정(獨守亭) 원림과 정철이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을 썼던 송강정(松江亭), 그리고 송순이 면앙정가를 지었던 면앙정(免仰亭)에서 쉼표와 느낌표를 찍는다.
출처 : 재경 논산시 향우회
글쓴이 : 안재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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