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이지 터너*
무음의 협연이 시작되고 긴장이 흐른다
그는 연주자의 그림자 연주자와 한 몸이 되는 순간, 페이지가 넘어간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이 울려 퍼지고 여든여덟 개 건반을 눈으로 넘나들며 숨소리도 나지 않게 열 개의 손가락과 호흡을 맞춘다
그늘에 묻힌 그의 손끝에서 갇혀있던 갖가지 음표가 걸어나오고 분위기는 날개를 단다
음악의 끝부분이 가까울수록 연주자의 두 손 보다 앞서가는 페이지터너의 눈 음의 선율에 발을 헛디딜까 악보를 넘기는 손끝에 진땀이 흐른다
드디어 절정이 고개를 꺾으면 피아니스트의 손이 건반에서 조용히 가라앉고 연주자의 머리위로 우레처럼 쏟아지는 관객의 박수소리
페이지는 제자리에 놓이고 그는 박수의 뒤편으로 밀려난다
---------------------------------------- *페이지 터너: 악보를 넘겨주는 사람
● 손가락 끈 - 노숙자들의 템플 스테이*
세상의 끈을 놓친 손가락이 끈 하나 붙잡고 한 발 한 발 짝을 지어가는 시간 오른쪽 둘째손가락 끝만 간신히 맞대고 눈 감은 사람이 눈 뜬 사람을 따라 간다 용주사 절 마당을 지나 다다른 돌계단 높낮이가 달라 서로 마음을 놓칠까 아슬아슬 손가락 끝에 온 마음을 매단다
눈을 뜨고도 깜깜한 세상 도시의 귀퉁이를 헤매던 바람들 어디서부터 엉켰는지 바람 부는 거리에서 몸 하나 뉠 곳 없었다
손가락 끝에 잠시 흘러간 시절을 묶어놓고 불운에서 벗어나고 싶은 사람들 메마른 손가락에 힘을 준다 이젠 거리의 질긴 끈을 놓고 싶다는 듯 따뜻한 끈 하나 갖고 싶다는 듯
붙잡을 곳 찾아 이곳에 모인 바람 따라 도시의 그늘도 함께 따라 왔다 골목을 헤매고 다닌 저 바람에서 노숙의 냄새가 난다
------------------------------- *사찰 체험
● 거위벌레의 집
뒤꿈치를 들고 바람이 지나간다 나뭇잎 포대기 한 채 참나무가지를 붙잡고 대롱대롱 그네를 탄다 도르르 말린 나무이파리 그 속에 어린것이 잠들어 있다 저 편안한 반동 다디단 잠은 단단히 포장되었다 흠 없는 잎맥 골라 꼼꼼하게 재단하고 홈질에 박음질까지 정성어린 손끝이 야무지다 원통으로 마무리한 저 품에 어미의 기도가 쌓여있다 애벌레가 나뭇잎 뭉치 뚫고 땅 속으로 들어가고 하늘을 나는 멋진 성충될 때까지 더위를 등에 업고 참나무에게 빌붙어 혼신을 다하는 거위벌레 자식을 위한 生은 어미의 몫이다 버림받는 아이들의 눈물이 뉴스로 장식되고 따뜻한 요람은 사라지는데, 작은 거위벌레가 새끼를 위한 집을 짓고 마지막 숨을 거둔다 여름 숲속 둘둘 말린 나뭇잎 한 채 바람이 조심조심 어르고 간다
● 연두
다관 속에 아침을 담는다 여린 찻잎으로 숙우가 기울어지면 마른 잎이 오금을 펴는 소리 머금었던 하늘이 연둣빛이다 저 여린 찻잎이 토해낸 녹색의 피 뜨거움에 볶이고 수없이 주무른 손 끝에 덖여 밀봉된 입 그늘에서 서서히 말라간 찻잎의 마음들 이제야 찻잔 가득 속마음을 털어 놓는다
나 한때 다향茶香처럼 푸르렀으니 그 물기어린 시절은 연두였으니 내 몸에서 빠져 나간 시간들은 헐거나 눈이 멀어 모두 퇴색되었다
우러난 차 한 잔, 오래 마른 침묵이 열리고 녹차를 따던 여린 손과 바구니에 담긴 햇살이 이렇게 싱그럽다 연두 한잔으로 마음을 채워 걸쭉한 피를 걸러낸다 마음의 응어리를 다 풀어 놓는다
● 설화(舌花)
내 몸에 자주 꽃이 핀다
사철 봉긋 봉긋, 명절이나 집안 행사 때가 가장 꽃 피우기 좋은 시기 입안에 숨어 있던 꽃씨를 틔워 알알이 쓰린 꽃잎을 혓바닥에 피운다
까칠한 설화 맵고 짠 음식에 닿으면 벌겋게 만개한다 좋아하는 평소의 음식 모두 물리치고 매미처럼 한세상 청렴하게 살다가겠다고 찬물로 세치의 혀를 달랜다
일복 많은 종부, 나는 저 꽃의 속내를 알지만 어찌할 수 없어 칭얼대는 설화를 달래가며 밤을 지샌다
몸이 몸에게 보내는 붉은 메시지 나는 그의 경고를 무시한다
꽃 피울 곳은 오직 이곳 설화가 지친 몸에 뿌리를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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