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詩論

[스크랩] 한용운의 대상과 자아의 인식 태도

운산 최의상 2013. 7. 25. 18:27

만해 한용운의 대상과 자아의 인식 태도

- '알수 없어요'를 중심으로

 

 

 시를 창작한다는 것은 대상을 통해 자아를 인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식론을 바탕으로 한 정의이다. 그 인식과정은 시인이 대상에 대해 맺힌 감정을, 소재로써의 언어를 구조로써의 언어로 바꾸어 놓아, '살풀이'를 하듯 풀어내는 일련의 행위이다. 그리고 그를 통해 새로운 세계에의 지평을 열어 보이는 것이다. 

 문학을 예술의 한 형태로 파악하고자 한 흐름 가운데 가장 오랜 연원을 가지고 있는 것이 모방의 이론이다. 그것은 각 시대가 요구하는 문예사조와 방법의 변화에 따라 다양하고 애매하게 변화하여 왔다. 

문학, 특히 시는 한 시인의 정신 세계와 그 시대의 문화 문명의 토양, 기후관계 등에 밀접한 관계를 갖고 창조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만해의 시 연구는 그의 정신세계와 그가 처해 있었던 당대의 성격에서 논해져야 할 것이다. 

 만해에 있어 시적 대상은 불교이면서 동시에 민중이며 조국이었다. 그에게 있어 불교는 出世間에 있으면서 다시 俗世間에 있는 불교였다. 

 현실의 정치 속에서 진실의 실현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그는 세상과 모든 인연을 끊기 위하여 불도에 귀의한다. 그러나 그가 이르게되는 최종적인 입장은 완전히 출세간 불도의 그것이 아니라, 다시 말해 세간을 버리고 세간에 나는 것이 아니라, 세간에 들어서 세간에 나는 것이다. 즉, 한용운에게 불타의 진리는 세상 밖에서가 아니라 세상 안에서이다. 

 그에게 있어서 불교가 그 자체로서 어떤 절대적 가치, 불변의 고정관념일 수는 없었다. 만약에 불교가 장래의 문명에 적합치 않다면 아무리 위대한 불교인이 나온다고 해도 마침내 불교는 존속할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이처럼 '민중의 지혜에 부당한 제약을 주는' 미신과 의혹에서 떠나 깨달음에 이르도록 하는 종교로 보고 있다. 

 대중불교라는 것은 불교를 대중적으로 행한다는 의미이니 불교는 반드시 악을 버리고 선을 떠나서 인간사회를 격리한 후에 행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사회의 만반 현실을 조금도 여의치 않고 번뇌 중에서 보리를 얻고 생사 중에서 해탈을 얻는 것이므로 그것을 인식하고 실현하는 것이 곧 대중불교인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종교에서 신비주의의 껍질을 벗기고자 하는 계몽주의자, 합리주의자의 면모를 읽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만해의 불교 가르침은 평등주의에 입각하고 있으며 만해 사상의 창조적인 점은 이러한 불교 평등의 개념을 형이상학적인 관념으로만 보지 않고 역사적 사회적 현실의 차원"에서 파악해야만 하는 것이다. 만해의 항일 전력에서도 보여주고 있듯이, 그는 불교를 현실과의 적극적인 관계 속에서 해석했으며, 이러한 분석태도는 민족적 위기에 대처하려는 문제의식의 소산이었다. 

 그는 일제식민지주의에 대한 일체의 타협주의적 발상을 단호히 배격함으로써 민족의 자주독립에 대한 완강한 신념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에게 있어 독립은 모든 물질문명이 갖춰진 뒤에야 이룩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독립하겠다는 자존의 기운과 정신적 준비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독립운동가로서, 혹은 시인으로서의 만해는 사상적으로 그 방면에의 업적이 독창적이라기보다는 그의 불교사상의 현실적, 혹은 문학적 확산이라고 봐야 한다. 

 본고(本考)에서 불도인이며 독립운동가인 만해가 <알 수 없어요>식의 수수께끼의 질문방법 -맺힘-을 통해서 밝히고자 한 세계 -풀림- 를 어떤 태도로 접근해 갔으며, 그 세계는 무엇이었나를 중점적으로 밝혀보고자 한다. 

--<알수 없어요>---------------------------------------------------------------- 

(A)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垂直)의 파문(波文)을 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B)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이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 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C)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塔)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D)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우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구비구비 누구의 노래입니까? 

(E)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 없는 바다를 밟고 옥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입니까? 

(F) 타고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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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산문조의 <알 수 없어요>가 시일 수 있는 시적 장치의 비결 하나가 (F)연의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에 있다. 이것이 있으므로 해서 오동잎, 하늘, 향기, 시내, 저녁놀이 "던져진 형태로 있는 것이 아니라 형이 이루어진 변형"이 되는 것이다. 

 “누구의..........입니까”는 “혹시 님의 ..........이 아닙니까”로 될 수 있어 실질적으로는 믿고 수긍한다는 역설이 되는 것이다. 가리워진 님의 현존성에 관한 해명이 독창적인 독자의 호응을 기대하는 겸양과 조심성까지 지니고 있으므로 독자는 반발하지 않고 차근차근 헤아려 그 실상을 깨달아 가도록 하고 있다. 이런 심상 전개 방식에 따라 시의 호흡과 행이 길어지는 것이 자연스럽게 보인다. 물론 여기서 ‘누구’는 우주질서 속에 놓여 있는 초절대자인 부처이다. 

 발레리는 인간의 심리상태는 어떠한 특별한 우주감각과 결부되어 있다고 하였다. 우리를 압도하는 듯한 어떤 광경, 석양이나 달빛이나 산림, 바다 등은 때에 따라 우리를 크게 감동시키는데, 이러한 종류의 감동은 다른 그것과 달라서 미의 세계를 형성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하여 이 우주감각의 영역에는 어떤 황홀경을 이루고, 심미적으로 통분(通分)되어 서로 공감을 느끼게 되는데, 이러한 심리상태를 그는 ‘시적 감동’이라고 부른다. 

 <알 수 없어요> 역시 우주감각과의 감동을 노래하고 있다. 이러한 우주 질서의 근원에 직면했을 때, 베그로송은 커다란 경이를 느끼며, 나아가서는 무한 속에 놓인 존재로서의 자아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여, 어떤 초현실적인 절대자를 그리워하고 여기에 의존함으로써 인생이 고뇌와 무상에서 벗어나고자 한다고 한다. 

 유한자인 만해 역시 무한자인 우주질서의 본질에 직면하여 끝없는 물음을 통하여 불교의 윤회로 다시 무한에 놓인 자신을 발견하고 “희미한 등불”로 구도의 길, 즉 영원의 길을 가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이것은 상식을 뛰어넘어서까지 나타나고 있다. (A)연에서 “수직의 파문”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분명 시적 파격이다. 이러한 형태가 논리적으로 근거를 획득할 수 있는 것은 그로 인해 작품의 효과가 배가 되었을 때 뿐이다. 왜냐하면 시는 어떤 개념을 전개시키는데 목적이 있지 않고 논리를 어기면서까지 이미지를 구성하고 종합하려 하기 때문이다. 

 수직이면 파문이 있을 수 없고, 파문이 있으면 수직일 수가 없다. 그러나 불교적 관점에서 볼 때, 영원한 것은 없고, 모든 물상은 영겁이라는 시간으로 볼때, 순간적이요 찰나적인 것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이 시에서 “수직의 파문”을 결점으로 보는 것은 오류이며, 그 파격을 통해 고요함 속에서 미세한 움직임을 보는 불교의 정적 세계, 선적세계의 극적인 표현을 획득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바람은 무시무종(無始無終)의 곳에 처하매 색불이공(色不異空)이요, 공불이색(空不異色)의 무(無)요, 공(空)에 처해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발자취의 거리는 무한으로 파악될 수밖에 없고 오동잎에서 또 무한으로 확대되는 님의 발자취를 봄으로 자연 속에서 님을 보는, 자연과 님이 하나를 이루고 있다. 

 만해는 이러한 본질을 파악하고 있으면서도 짐짓 바람이 없는(無) 곳에서 파문을 내는(有), 즉 무에서 유를 보게 하는 선적체험(禪的體驗)을 가능케 하는 주체는 누구냐고 조심스럽게 묻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다시 (B)연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 선적세계 앞에서 번뇌와 망령 속을 헤매고 있는 “깨달음이 없는 중생”들의 “깨달음의 순간적 기회”를 노래하고 있다. 

 절대적 의미를 지닌 존재로서의 “하늘”은 그 절대적 존재를 부정하고 감추려는 공포의 힘, 즉 “무서운 구름” 속에 존재하고 있다. 깨달음이 없는 번뇌와 망상 속에서 중생의 헛된 시간, 고통의 시간이 “지리한 장마”의 시간이라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보이는 “푸른하늘”은 순간적 깨달음의 순간이며, 동시에 그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시간이다. 그것은 일제하 삶의 형태로부터의 자유인일 수도 있고, 모든 우주현상의 유와 무를 초월하여 공(空)의 세계로 합일하려는 깨달음의 경지에 대한 갈구일 수도 있다. 그래서 다시 만해는 깨달음이 없는 곳에서 자유가 있는 곳으로 행하게 하는 것은 “혹시 님이 아닙니까?”로 묻고 있는 것이다. 

 (B)연에서 문제점이 있다면 ‘무서운’이라는 수식어상의 문제이다. “서풍에 몰려가는”과 이어지지 않는다. 인상을 선명히 하는 데 기여하지 않는 수식어의 사용은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작품의 품격을 떨어뜨리게 된다. 전후 문맥으로 보아 적절하지 않는 이런 수식어는 피했어야 할 것이다. 

 (C)연에서는 “깊은 나무의 푸른 이끼”의 공간적 깊이, “옛 탑”의 시간적 확대, 즉 시공을 초월한 삼계현상(三界峴象)에 꽃보다 더 향기로운 향기는 님의 입김, 또는 조국의 역사적 뿌리와 창조의 역사적 흐름이 아니겠냐고 역설적으로 묻고 있다. 환언하여 꽃이 없는 곳에서 향기가 있는 선적세계를 보게 하는 것이 혹시 님이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A), (B), (C)연의 물음, 다시 말해서 맺힘은 (D)연까지 계속된다. 무시무종, 광대무변의 구천(九泉)에서 솟아 겁으로 흐르는 물줄기는 무한적인 영원성과 무한대로 흘러가는 시내의 모습이다. 그런데 유한자인 인간은 “작은 시내”로 밖에 접근할 수 없는 제한적이지 않는가. 분명 구도의 길은 탄탄대로일 수가 없으며, “수없이 많은 돌부리”에 채이고, “가늘게 흐르다" 진리에 접근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역시 식민지 상황으로 환치해도 다름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 근원도 없는 곳에서 가늘게나마 진리는 있는 것이다. 그러한 선적체험은 누구를 통해서 가능한 것이냐고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A)~(D)연까지의 님에 대한 의혹, 즉 맺힘은 (E)연의 님의 현현(顯現)에 의해 전환이 이루어지게 된다. (E)연에서는 그 존재의 크기와 행동의 영역이, 무한대한 바다와 무한대의 하늘에 미치고 있다고 보며, 동시에 법신(法身)의 나타남을 보게 된다. 유는 무의 세계로 변하고 무는 유의 세계로 변하는 가운데서 다시 공의 세계로 현현하여 법신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저녁놀이 밝음은 밝음의 종말로서 그 비극적인 아름다움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것은 무한자인 인간의 한계 상황으로 볼 수 있고, 조국의 정치상황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시인은 그 아름다운 실체를 경험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E)연에서는 전환을 이루게 되고 (F)연에서 그 맺힌 감정을 풀게 된다. 

 (E)연의 저녁놀이 보여주는 비극적인 아름다움은 순간적으로 보인 절대자의 모습이나 위기상황에 처한 조국의 모습이다. 이를 보고 (F)연에서 하나의 “등불”이 되어, “타고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되어”, “밤을 지키”고자 한다. 거듭나는 윤회 속에서 가려짐에 의한 어둠을 “타고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되어” 밝히려는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이는 의지적 강인성으로 일관한 저항정신이라고 볼 수 있고, 또한 끝없는 구도정신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다시 기름이 됩니다”는 실제상으로는 불가능한 것이지만 의지적으로는 가능한 역설이며, 그렇게 해야 님의 현존이 유지될 수밖에 없다는, 필연의 논리가 확인된 것이다. 더구나 "약한 등불“은 존재의 한계성을 깨닫는 슬픔이면서 사라져 가려는 밝음을 스스로가 지키려는 엄청난 사명이다. 그것은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기여이기 때문이다. 

 만해는 불교와 속세가 하나였듯이 종교적 신념과 조국의 현실이 하나였다. 그는 이 시에서 무에서 유를 보게 하는 그 초절대자가 "누구입니까?"하는 겸손한 태도로 접근하게 된다. 그리고 그 접근과정에서 확인되는 법신과 유한자인 인간의 갈등관계에서 그는 스스로 거듭나는 고통을 감수하며 "약한 등불"이 되어 험난한 구도의 길을 계속 가겠다는 의지를 세계에 표명하고 있다. 그리고 제국주의가 역사의 한 유물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깊이 통찰하고 그 제국주의자와의 열렬한, 그리고 전투적인 "등불"의 시인으로 남기를 자처했다. 또한 조국과 민족에 대한 "그칠 줄 모르고 타는" 지조와 부활에 대한 신념을 보여주고 있다. 하면서도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나 정치상황의 변모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이 시의 기본구조를 도시하면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맺힘>------------------------------------------------------- 

(A) 바 람(無) ---> 파 문(有)한 선적주체는 누구입니까? 

(B) 깨달음(無) ---> 깨달음(有)한 선적주체는 누구입니까?" 

(C) 꽃 (無) ---> 향 기(有)한 선적주체는 누구입니까?" 

(D) 근 원(無) ---> 시 내(有)한 선적주체는 누구입니까?  

-<전환>------------------------------------------------------- 

(E) 님의 현현, 조국의 본체 파악 

-<풀림>------------------------------------------------------- 

(F) 구도의 길을 가겠다. 조국을 위해 투쟁하겠다. 

 따라서 이 시는 우주질서의 초 절대자 또는 조국이라는 대상을 통해 무에서 유를 보게 하는 선적주체에 대한 끝없는 물음 즉, 맺힘이 님의 현현과 조국 본체의 파악으로 전환을 이루게 되어, 구도의 길을 가겠다, 또는 조국을 위해 몸을 바치겠다는, 의지적 자아를 확인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출처 : 경기문학인협회
글쓴이 : 孤岩방영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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