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詩論

[스크랩] 시란 무엇인가?요즘 시와 수필의 운제점

운산 최의상 2013. 7. 13. 18:02

* 시란 무엇인가

시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는 시인이나 평론가의 수만큼이나 많을 것이다.
그것은 시를 한마디로 정의 할 수 없다는 말과도 같다.

그러나 우리가 시의 정의에 대해 가장 오랜 세월 인구에 회자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있는 이야기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는 "대상을 통한 자아의 인식이다"라고 정의 했다.
우리 이 말을 어렵게 생각하지 말자. 대상은 소제이다.
자아의 인식은 주제이다. 즉, 어떤 소재를 통해 어떤 주제를 인식했냐이다.
그러면 시의 가장 중요한 것은 소재와 주제가 될 것이다. 김소월의 진달래는 진달래라는 대상을 통해 이별의 아픔,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고 떠나는 님을 축복하는 자아를 인식한 시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인식의 과정이 필요하다.
그 과정은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진달래>처럼 떠나는 님을 축복하는 감정의 절재로 이루어져야 시가 되는 것이다.
님이 떠났다. 그래서 뒤를 밟아 망치로 뒤통수를 쳤다. 그러면 시가 아니라, 주간지의 기사거리가 될 것이다.
"갑돌이와 갑순이"는 갑돌이가 장가가자 갑순이는 화가 나 시집을 가버렸다.
이는 통속적이다. 그래서 대중가요가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시는 언(言)과 사(寺)가 결합된 말이다. 이는 말로 절을 쌓듯 정성을 다해 시를 만들라는 뜻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잡스러운 것은 모두 털어버리고 비유(직유와 은유)나 상징을 사용하여 압축적이면서도 함축적인 표현을 해야 할 것이다.
불필요한 불순물 같은 언어를 제거 해야 된다는 뜻이다. 꼭 필요한 최소한의 말로 보다 더 많은 말을 하는 것이 시이다.
여백의 미가 한층 돋보이는 우리 한국화의 여백을 생각하면 이해가 될 터이다.

끝으로 시는 산문이 아니라 운문이다. 말 그대로 음악적 효과를 고려해야 하다.
시어나 음보(음의 보폭)들을 적절히 배치하여 반복에 의한 음악적, 청각적 효과가 드러나야 한다.


* 시적 표현법

앞에서 시란 무엇인가에도 언급되었다시피 시란 대상을 통한 자아의 인식이다.
때문에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대상물에 자신의 생각을 넣어 (감정이입이나 동일시) 표현해야 된다.
예를 들어 보자,

여러분이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의 1연만 가지고도 충분히 설명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이것을 가지고 설명해 본다.

1) 꽃은 여자이다. 국화는 가을에 핀다.
가을에 해당하는 여자는 40대 중년이다.
그러니까 국화는 40대 여인이 된다.

2) 봄에 해당하는 여자는 20대이다.

3) 소쩍새는 봄에 처절하게 우는 새다. 망제가 한을 품고 죽어 새가 되었는데, 그것이 두견새이고, 소쩍새는 두견새의 다른 이름이다.

4) 한 송이는 이런 뜻이 될 터이다. 단 한송이의 국화(생명, 여성)를 피우기 위해서라도 자연이 합심(소쩍새의 울음)하여야만 된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생명은 그냥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우리가 1) 2) 3) 4)을 연결하면 간단한 결론이 난다.
40대의 완숙한 여인으로 한 사람 성숙되기 위해서 여자는 젊었을 때부터 처절한 고통과 방황을 통과해야만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말을 직설적으로 옮기면 시가 되지 않고 산문이 된다.
여기서 국화, 봄, 소쩍새라는 대상물을 상징으로 사용하여 독자들이 보다
많은 것을 함축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만들었기 때문에 시가 되는 것이다.

더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나는 오늘 기분이 좋다)
산문이다. 느낌이 그저 그렇다
그러나
(꽃이 웃고 있다)
이것은 시이다. 꽃이 웃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기분이 좋기 때문에 꽃이 웃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꽃은 자신의 희망의 상징도 될 수 있다. 내가 좋아서 웃으니 꽃도 따라 웃는 게 된다.
내 희망이 꽃처럼 활짝 펴 웃고 있는 것이 된다. 의인법과 상징법이 결합된 표현으로 함축적 이미지를 전달한다.
반대로,
(나는 오늘 슬프다)
역시 산문이다.
그러나,
(꽃이 폭우에 눈물처럼 뚝뚝 떨어진다)
이것은 역시 시이다.
직유와 상징, 그리고 의인화가 되어 있다.
내 희망이 좌절되어, 또는 내 님이 떠나가,나는 울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꽃의 모습이 그렇게 나타나는 것이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시란 직설적으로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노출시키는 것이 아니라, 어떤 대상물에 자신의 감정을 넣어 표현하여, 비유나 상징을 통해,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은 슬쩍 숨기는 것이 된다. 그래야 함축적, 압축적 표현이 되고 시가 되는 것이다.

* 그런데 요즘 시를 읽다보면 맺힘도 아예 업거나, 맺힘은 있는데 풀림은 없거나, 하여 도대체 이 시인이 독자에게 무엇을 전달하려고 하나, 그 저의를 의심케 하는 시들이 많다.
그리고 맺힘과 풀림이 있다고 하여도 인식의 차원이 상식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해 철학적 깊이가 없고, 어디서 많이 본 구절들을 되풀이 하는 것도 그렇다.
창작이란 남의 흉내를 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자신을 동시에 뛰어넘는 외롭고도 고달픈 작업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 수필도 그렇다. 요즘 마구잡이로 문인이 양산되다 보니 원고지 15매 정도의 짤막한 수필에서 첫문장부터 너무 평이하거나, 문법에 맞지 않거나, 조사나 어미 또는, 주어와 술어의 호응이 안되어, 읽어주기에 참 곤란한 작품들이 많다.
수필에서는 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밀도 있게 다뤄야 하는데, 그리고 스스로 어떤 형식을 만들어 통일성 있게 내용을 추스러야 하는데, 중언부언, 이 이야기 저 이야기,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모르는 작품들이 허다하다.
읽고 나면 씁쓸한 작품이 참 많다. 그러니 "감동"이나 "정화"는 차후의 문제가 된다.
습작에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할 터이다.

<고암/방영주님>

출처 : 월간 문학세계
글쓴이 : 박정아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