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수필

[스크랩] 수필을 어떻게 쓸까(김학)

운산 최의상 2013. 7. 2. 13:17

수필, 어떻게 쓸 것인가

                    金 鶴

 1.수필이란?
*다양한 마음의 예술 *진솔한 고백의 문학 *담백한 선비정신의 구현

2.수필의 구성
*제목(Title)+서두(Opening)+내용(Contents)+결미(Closing)
#드라마나 영화, 가요의 제목 #다큐멘터리

3.바람직한 수필언어
*진실한 말, 순수한 말, 단아한 말, 품위 있는 말, 유머와 위트가 담긴 말, 정확하고 겸손한 말, 절제와 감동적인 말

4.피해야 할 수필언어
*약어(略語)의 남발-5공, 80년 등 *비속한 언어-배때기, 주둥아리 등 *한자어 남용 *외래어 남용-헤어스타일, 피앙세 등 *상투적인 언어-공수래공수거, 기체후 등 *반복어-발가벗은 나목(裸木)

 5.수필의 문장
*문장은 곧 인생-고결한 인품의 표출 *꾸미거나 과장이 없는 진실한 문장 *미사여구 없는 간결한 문장 *쉬운 문장-전파문장과 활자문장의 차이 *개성적인 문장 *명확하면서도 리듬을 살리는 문장 *품위와 여운이 있는 문장 *간접적이면서도 은근한 문장

 6.수필의 유래
*중국-隨筆-12세기 南宋의 洪邁-容齊隨筆
*한국-18세기 조선의 연암 박지원-일신수필(馹訊隨筆)
*Essay-프랑스의 몽테뉴-영국에서 개화

 7.수필의 특성
*개성적인 자조(自照)의 문학
*무형식의 문학 *산문의 문학
*다양한 제재의 문학 *해학적 비평정신의 문학-지성을 바탕으로 한 정서적 신비적 이미지 *예술성과 철학성을 융해시킨 문학
*고매한 인격의 문학-수필가와 시인의 성격적 차이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문학
*겸손의 문학

8.수필에서 얻는 기쁨
 *바른 사고력을 기른다.
*이해의 폭이 넓어진다.
 *현실 적응력을 키운다.
*탐구정신을 기른다.
 *폭 넓은 상식과 지식으로 능동적이며 적극적인 사람이 된다.
*인내심과 자제력으로 원만한 인간관계를 형성한다.

9.수필을 쓰는 바른 자세
*머리로 쓰지 말고 발과 가슴으로 쓰자.
*남의 잘못을 질책하기 전에 자기반성의 토대 위에서 쓰자.
*많은 소재를 장보기 하여 주제에 맞는 흥미롭고, 재미나며, 독창적인 소재만을 예화(例話)로 남기자.
*문장의 단락(paragraph)을 적절하게 활용하자.
*같은 단어의 되풀이나 동일어법의 중복을 피하자.
 *중학생이 읽어도 이해할 수 있도록 쉬운 우리말을 사용하자.
*자기 자랑을 내세우지 말고 겸손하고 진솔한 태도를 지니자.
 *정(情)의 미학을 담자.

 10.초보자의 수필 쓰기
*유명 수필가의 작품을 모방해 본다. - 원고지에 옮겨 쓰기 -서예기초처럼
 *유명 수필가의 작품을 자기 식으로 바꿔 본다.
*독창적인 소재로 자기 글을 써 본다.

 11.수필의 소재 찾기
 ①체험-여행, 사랑, 직업, 학업
②관찰-사회, 자연, 환경, 인생
③독서-독서론, 독후감, 신문, 잡지, 편지
④사고-죽음, 삶, 종교, 정의, 진리, 양심

 12.수필 쓰기 요령
① 대상인식② 인식내용 정리③ 틀 짜기
④ 꾸미기⑤ 다듬기

13.수필 감상 요령
①수필의 성격분석-경수필/중수필, 서정수필/서사수필/희곡적 수필/교훈적 수필
②수필의 문체분석-간결체/우유체/만연체/강건체/건조체/화려체

 14.문학적 수필의 단계
①체험의 서술  ②체험+느낌
③체험+느낌+인생의 발견+의미부여
④체험+느낌+인생의 발견+의미부여+독자의 감동 유발

 15.수필가의 바른 자세
*등단을 서두르지 않아야 한다. (신문신춘문예, 문예지의 신인상 또는 추천)
 *원고발표에 연연해하지 않는다.(완성도 높은 작품만 발표)
 *서점에 나가 유명 수필가의 수필집을 사서 읽는다.-어미 닭과 계란의 관계
*다른 문학 장르를 기웃거리지 않는다.
*원고는 오래 묵혀두고 퇴고(推敲)를 거듭하는 습관을 기른다.
*컴퓨터를 익혀 원고를 워드 프로세서로 작성한다.(교정보기, 원고 길이 측정, 송고 편의성) *등단 후 자기고장의 수필문학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한다.
*일기 쓰기, 편지 쓰기, 인터넷 메일 보내기, 남의 홈페이지를 방문하여 방명록에 글 남기기 등을 통하여 글쓰기를 생활화한다.
*스스로 판단하여 수준 이하의 작품은 절대 발표하지 않고 퇴고를 거듭한다.
*동식물, 무생물, 사람 등 매사에 관심을 갖고 소재 찾기에 골몰한다.
*같은 사상(事象)을 관찰하더라도 독창적인 자기만의 표현 기법을 개발한다.

1. 한글 맞춤법의 원리
한글 맞춤법이 어렵다고?
 한글 맞춤법이 어렵다고 한다. 왜 우리말은 이리도 어려우냐고도 한다. 실제로 맞춤법에 정확히 맞게 문자 생활을 하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예컨대 농구에서 선수가 공을 던져 바스켓 안에 집어 넣는 비율을 '슛율'이라고 적을지 '슛률'이라고 적을지 판단키 어렵다. 또 '책을 집어 던지다'처럼 띄어 써야 할지 '책을 집어던지다'처럼 붙여 써야 할지도 사전이 없으면 판단키 어렵다.
 그러나 문자 생활에서 이런 정도의 어려움은 어느 언어에나 있다. 수년 전 미국의 어느 부통령은 'tomato'를 'tomatoe'라고 써서 말밥에 오른 적이 있고, 영어사전들에는 'database'처럼 붙여 쓴 사전이 있는가 하면 'data base'처럼 띄어 쓴 사전도 있다. 또 미국의 주 이름 중 'Kansas'는 '캔자스'라고 읽지만 그 앞에 'ar'이 붙은 'Arkansas'는 '아칸소'라고 읽는다. 어찌 영어 맞춤법이 더 쉬울쏘냐?
그런데 왜 우리는 한글 맞춤법만 어렵다고 할까? 한글 맞춤법은 한국인이 한국어로 문자 생활을 하는 데 필수적인 지식임에도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초등학교에서 대학교에 이르는 동안 이를 체계적으로 교육받은 경험이 별로 없다. 게다가 우리에게는 한글 맞춤법의 내용이 구체화되어 있는, 그리하여 문자 생활에 표준을 제공해 줄 수 있는 좋은 사전도 드물다. 이러니 한글 맞춤법이 어렵다는 일반인들의 불평도 그리 근거 없지는 않아 보인다.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가?

  첫째는 한글 맞춤법에 대한 쉽고 정확한 해설서를 만들어 이를 학교 교육에서 가르치도록 하는 일이다. 한글 맞춤법은 문자 생활의 바탕이 되므로 그 원리를 알면 문자 생활에 작용하는 많은 규정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예컨대 밥을 먹은 뒤에 그릇을 씻어 치우는 일은 '설겆이'가 아니라 '설거지'라고 적는데 이는 '설겆다'라는 말이 없어 굳이 소리와 달리 '설겆이'로 적을 이유(즉 '설겆이'로 적는 것이 뜻을 파악하기 쉽다든지 하는 따위)가 없기 때문이다.
 둘째는 한글 맞춤법이 구체화되어 국민들의 문자 생활에 표준을 제공할 수 있는 사전을 만드는 일이다. 그리하여 일반인들은 사전만 찾아보아도 맞춤법, 띄어쓰기, 표준어 여부 등을 정확히 알 수 있게 해야 한다. 우리도 이제는 이처럼 권위 있는 사전을 가진 문명국의 국민이 되어 한글 맞춤법이 어렵다는 불평을 거둬들이고 사전과 더불어 행복한 문자 생활을 영위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한글 맞춤법의 원리
 한글 맞춤법이란 무엇인가?
우리말을 우리 문자인 한글로 적는 방식을 규정한 법이다. 우리말을 적는 통일된 방식이 없어 사람마다 적는 방식이 제각각이라면 우리의 문자 생활은 큰 혼란에 빠질 것이다. 따라서 한글 맞춤법은 불필요한 규제가 아니요 효율적인 문자 생활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될 규범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맞춤법이 좋은 맞춤법일까? 독자가 읽을 때 이해하기 쉽도록 적어 주는 방식일 것이다. 맞춤법은 필자와 독자 간의 효율적이고 정확한 의사 전달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한글 맞춤법의 원리는 [한글 맞춤법] 총칙 제1항에 나타나 있다.
 "한글 맞춤법은 표준어를 소리대로 적되, 어법에 맞도록 함을 원칙으로 한다."
위 조항은 한글 맞춤법의 표기 대상이 표준어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즉 우리 국민의 공통적인 표준어를 맞춤법 규정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말이다. 따라서 맞춤법은 표준어가 정해지면 이를 어떻게 적을지 결정하는 구실을 한다. 그런데 표준어를 적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하나는 들리는 대로 적는 것이요, 또 하나는 들리는 소리와는 다소 멀어지더라도 의미가 잘 드러나도록 적는 것이다. 표면적으로 보면 이 두 방식이 상충되는 듯하나 한글 맞춤법은 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히 조화시키고 있다. 즉 "소리대로 적되, 어법에 맞도록"이라는 구절은 바로 이 두 방식의 조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위 구절에서 어미 '-되'는 앞절의 내용을 인정하면서 뒷절의 내용을 단서로 덧붙인다는 뜻을 가지므로 제1항은 소리대로 적는 것이 원칙이지만 그것은 어법에 맞게 적는다는 단서 조항에 어긋나지 않아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렇다면 어법에 맞게 적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 규정의 취지는 뜻을 파악하기 쉽도록 적는다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적는 것이 뜻을 파악하기 쉽도록 적는 것인가? 그것은 문장에서 뜻을 담당하는 실사(實辭)의 표기를 고정시켜 적는 방식일 것이다. 예컨대 '꼬치, 꼬츨, 꼳또'처럼 적기보다 실사인 '꽃'의 표기가 고정된 '꽃이, 꽃을, 꽃도'처럼 적는 것이다. '꼬치'와 같은 방식은 들리는 대로 적어서 적기에는 좋을지 모르나 뜻을 담당하는 실사의 표기가 고정되지 않아 뜻을 파악하기에는 큰 불편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제1항에서 "어법에 맞게"라는 구절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체언과 용언 어간은 대표적인 실사이므로 뜻을 파악하기 쉽도록 뜻을 담당하는 실사의 표기를 고정시켜 적는다는 것은 체언과 조사를 구별해서 적고 용언의 어간과 어미를 구별해서 적는 셈이 되는데, 바로 이러한 내용을 포괄하는 표현으로는 "어법"이라는 말이 적당하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제1항의 "소리대로 적되, 어법에 맞도록"이란 구절을 바르게 적용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어느 쪽으로 적는 것이 어법에 맞는지(즉 뜻을 파악하기 쉬운지) 살펴 그에 따라 적고 둘째, 어느 쪽으로 적든지 어법에 맞는 정도에(뜻을 파악하는 데에) 별 차이가 없을 때에는 소리대로 적는다. 예컨대 '붙이다(우표를 ∼)'와 '부치다(힘이 ∼)'에서 전자는 동사 어간 '붙-'과 의미상의 연관성이 뚜렷하여 '붙이-'처럼 적어 줄 때 그 뜻을 파악하기 쉬운 이점이 있으므로 소리와 달리 '붙이다'로 적고 후자는 전자와 달리 굳이 소리와 달리 적을 뚜렷한 이유가 없으므로 대원칙인 '소리대로'의 원리에 따라 '부치다'로 적는 것이다.

2. 띄어쓰기의 원리
【제2항】문장의 각 단어는 띄어 씀을 원칙으로 한다
 ① 문장의 각 단어는 구분지어 표기한다.
[해설] 띄어쓰기의 기본 단위는 단어이다. 그러나 서로 다른 단어가 결합하여 새로운 단어가 될 수도 있으므로(예컨대 단어 '돌'과 단어 '다리'가 만나면 또 다른 단어 '돌다리'가 된다) 어떤 말이 한 단어인지 그렇지 않은지의 판단이 쉽지 않다. 따라서 어떤 말이 한 단어인지 아닌지는 국어사전을 찾아보는 것이 제일 좋다.
② 실사(實辭)가 잘 드러나도록 띄어 쓴다.
[해설] 문장의 의미는 주로 실사에 의해 전달되므로 실사를 중심으로 띄어쓰기를 하면 의미 전달이 더욱 쉽다.(즉, 조사는 단어이나 실사가 아니므로 앞말에 붙여 쓴다.) 띄어쓰기를 하는 목적은 독자에게 의미가 더 쉽게 전달되도록 하는 데 있다. ◑ 문장에서 뜻을 담당하는 말(즉 명사, 동사 따위)을 실사(實辭)라 하고 문법적 관계나 기능을 나타내는 말(즉 조사나 어미)을 허사(虛辭)라 한다.
③ '-아/어' 뒤에 오는 보조용언이나 의존명사에 '하다, 싶다'가 붙어서 된 보조용언, 그리고 단위를 나타내는 의존명사는 앞말에 붙여 쓸 수 있다. 문제 [76]
[해설] 실질적인 뜻이 미약한 의존명사나 보조용언은 실사와 허사의 중간적인 성격을 갖는다.
[참고] 북한의 규정: 1987년 5월 15일 국어사정위원회에서 펴낸 <조선말규범집>에는 "불완전명사와 이에 준하는 단위들은 원칙적으로 앞단어에 붙여쓰며 일부 경우에 띄여쓰는 것으로 조절한다."라는 규정이 있다.
3. 맞춤법과 띄어쓰기의 실제
 1. '되어'와 '돼'의 구분: '돼'는 '되어'의 준말
 (가) 되어, 되어서, 되었다 돼, 돼서, 됐다
 (가) 그러면 안 돼요( 되어요). 일이 잘 됐다( 되었다) *됬다
      새 상품을 선보이다( 선뵈다), 새 상품을 선뵈어( 선봬).
 (나) 할머니께서는 장차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셨다. 문제 [9]
 (나) "장차 훌륭한 사람이 돼라."

2. '안'과 '않'의 구분: '안'은 부사이고 '않-'은 용언의 어간임
 (가) 안 가다, 안 보이다, 안 먹는다, 안 어울린다, 담배를 안 피움
 (나) 집에 가지 않다(아니하다), 철수가 먹지 않았다(아니하였다). '않다'는 '아니하다'의 준말로서 주로 '-지 않다' 구성으로 쓰임.

3. '-할게', '-할걸'인가, '-할께', '-할껄'인가: 소리와 달리 '-할게', '-할걸'로 적음
 (가) 내가 도와 {줄게, 줄께}. '-(으)ㄹ수록', '-(으)ㄹ지' 등 참조. 그러나 '-(으)ㄹ까', '-(으)ㅂ니까', '-(으)ㄹ쏘냐' 등처럼 의문을 나타내는 어미는 된소리를 표기에 반영함.
 (가) 제가 {할게요, 할께요}.
 (나) 지금쯤은 집에 {도착했을걸, 도착했을껄}!
 (나) 벌써 집에 도착한걸!

4. '있다가'와 '이따가'의 구분: 의미에 따른 구분
 (가) 이따가 보자. / 이따가 주겠다. 뜻: "조금 뒤에"
 (나) 하루종일 집에 있다가 이제서야 어딜 가는 거니?

5. '잇달다'와 '잇따르다'의 구분: 일종의 복수 표준어
 (가) 기관차에 객차들을 잇달았다. "이어 달다"의 뜻일 때는 '잇달다'만 가능함
장군은 훈장에 훈장을 잇단 복장으로 등장하였다.
 (나) 청문회가 끝난 뒤에 증인들에 대한 비난이 잇따랐다/잇달았다/?연달았다. "어떤 사건이나 행동 따위가 이어 발생하다"의 뜻일 때는 '잇달다, 잇따르다, 연달다'를 함께 쓸 수 있음
 잇따른/잇단( 잇달-+-ㄴ)/?연단( 연달-+-ㄴ) 범죄 사건들 때문에 밤길을 다니기 두렵다.
 석교를 지나자마자 초가 지붕의 꼴을 벗지 못한 주점과 점포들이 잇따라/잇달아/연달아 나타났다. '연달다'는 주로 '연달아' 꼴로 쓰임.
 (나) 대통령의 가두행진에 보도 차량이 잇따랐다/?잇달았다/?연달았다.
 유세장에 유권자들이 잇따라/?잇달아/?연달아 몰려들었다. "움직이는 물체가 다른 물체의 뒤를 이어 따르다"라는 뜻일 때에는 '잇따르다'가 자연스러움.
 같은 동사이지만 '잇따르다'에 비해 '잇달다, 연달다'는 다소 형용사에 가까운 특성이 있음('잇따르는/?잇다는/??연다는', '잇따른다/?잇단다/??연단다', '잇따르고 있다/?잇달고 있다/??연달고 있다' 참조). 다만 '잇달다'가 "이어 달다"의 뜻일 때에는 '잇다는, 잇달고 있다'가 가능함.

6. '-던'과 '-든'의 구분: '-던'은 과거의 뜻, '-든'은 선택의 뜻
 (가) 어제 집에 왔던 사람이 민주 신랑감이래.
        그 날 저녁 누가 왔던지 생각이 납니까?
        얼마나 울었던지 눈이 퉁퉁 부었다.
 (나) 배든(지) 사과든(지) 마음대로 먹어라.
        가든(지) 오든(지) 알아서 하시오.

7. '-데'와 '-대'의 구분: '-데'는 과거에 직접 경험한 내용임을 표시. '-대'는 남의 말을 전달.
 (가) 어제 보니까 혜정이가 참 예쁘데. / 사진을 보니 옛날에는 참 예뻤겠데. <형용사>
        그 아이가 밥을 잘 먹데. / 철수가 벌써 제대했데. <동사>
        곁에서 보니 참 훌륭한 신랑감이데. <서술격조사 '이다'> 뜻: "-더라"
        신부가 그렇게 예쁘데? / 그 사람 키가 크데?
        밖에 누가 왔데? / 얼마나 되데? 뜻: "-던가?"
 (나) 사람들이 그러는데 진옥이가 예쁘대(예뻤대/예쁘겠대). <형용사> '대'는 "-다(고) 해"가 줄어 된 말임.
        진옥이가 결혼한대(결혼했대/결혼하겠대). / 진옥이는 추리소설만 읽는대(읽었대/읽겠대). <동사>
        진옥이가 학생회장이래(학생회장이었대). <서술격조사 '이다'> '이다' 뒤에서는 '-대'가 '-래'로 바뀜.
 (다) 오늘 날씨 참 시원한데. / 오늘은 기분이 참 좋은데. <형용사> '-ㄴ데'는 스스로 감탄하는 투로 넌지시 상대방의 반응을 묻기도 함.
      두 사람이 아주 잘 어울리는데. <동사> "두 사람이 아주 잘 어울리데."
      철수가 아니라 진옥이가 학생회장인데. <서술격조사 '이다'>
 (다) 결혼식장에는 혜정이 신랑도 왔던데( '-았더-'+'-ㄴ데').
        혜정이 부모는 벌써 왔는데(( '-았느-'+'-ㄴ데').
        결혼식장에는 혜정이 신랑도 왔겠는데( '-겠느-'+'-ㄴ데').
      '-ㄴ데'와 '-ㄴ대'의 구별 방법: 앞말이 형용사이면 '-ㄴ데'이고(동사 어간 뒤에는 'ㄴ' 없이 바로 '-데'가 붙음), 앞말이 동사이면 '-ㄴ대'이다('-ㄴ다'가 동사 어간 뒤에 붙는 경우 참조). 참신한데(형용사 '참신하-'+'-ㄴ데'), 결혼한대(동사 '결혼하-'+'-ㄴ대')
'-던-' 뒤에는 '데'만 올 수 있고 '대'는 올 수 없다('-던다'가 불가능하기 때문임). 따라서 '-던데'란 말은 가능해도 '-던대'란 말은 불가능하다.


불행의 강을 건너 행복의 문으로 들어선 무자년
-2008년 우리 집 10대 뉴스-    김 학

 10년 만에 정권이 교체되고 경제를 살리겠다고 공약한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하자 경제가 살아나리란 기대가 컸었다. 그러나 미국의 광우병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촛불집회가 전국적으로 들불처럼 번져 사회가 시끄러웠다. 유모차를 끌고 나온 젊은 주부로부터 초등학생과 직장인에 이르기까지도 밤마다 촛불을 들고 거리로 뛰쳐나왔다. 그 촛불집회가 잠잠해지자 기다렸다는 듯 미국에서 촉발된 금융위기가 세계를 강타했다. 우리나라 역시 그 회오리바람에 휩쓸려 휘청거리고 있다. 문을 닫는 식당과 자영업이 늘고, 실업자가 불어나며, 크고 작은 기업체들도 저마다 살아남으려 처절하게 몸부림을 치고 있다. 새 대통령이 들어서자 남북문제는 꽁꽁 얼어붙어 통일의 꿈도 더 멀어져 버렸다. 10년 전의 IMF위기가 코앞까지 다가온 것 같아 하루하루를 보내는 게 살얼음판 같다. 그런데도 국회에서는 여야가 싸움질만 하고 있으니 한심할 따름이다.

 가정적으로 보면 지난해에는 어머니와 장인어른을 하늘나라로 보내드려야 하는 슬픔을 겪었다. 그 불행의 강을 건너자 올해엔 행복의 문을 여는 기쁜 일이 많았다. 2008년을 마무리하면서 뉴스 가치에 따라 우리 집의 10대 뉴스를 선정하여 무자년 우리 집의 가족사(家族史)를 정리해 보기로 한다.

 1. 둘째아들 김창수와 며느리 최수영 첫아들 출산
2005년 9월 9일에 결혼한 둘째아들 내외가 유학 중인 미국의 피츠버그 어느 병원에서 3월 18일 오후 3시쯤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낳았다. 이름을 동윤(東閏)이라 지었다. 이제 나의 아들딸 2남1녀는 모두 첫아들 하나씩을 낳은 셈이다. 아기의 몸무게가 3.9킬로그램이었다니 산모의 고생이 컸을 것이다. 그래도 순산했다니 얼마나 다행인가. 미국까지 달려가서 출산 뒷바라지를 해주신 사부인(査夫人)이 한없이 고마울 따름이다. 둘째내외가 메일로 간간히 보내주는 손자 동윤이 사진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2. 큰아들 김정수 과장으로 승진
LG텔레콤 대리로 근무하던 큰아들 정수가 지난해 연말 승진연수를 받더니 2008년이 열리자마자 과장으로 승진했다. 가족 모두의 기쁨이요 가문의 영광이다. 직장인의 소망이 승진과 월급인상인데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조직사회에서 능력과 인간성 두 가지를 다 갖추면 어느 자리, 어떤 사람에게서나 환영을 받는다. 이 두 가지를 다 갖추기 어렵다면 그중 어느 한 가지는 갖춰야 살아남을 수 있다. 그렇지 못하면 축구공처럼 차여 이곳에서 저곳으로 저곳에서 이곳으로 옮겨 다니다가 결국 퇴출되기 마련이다. 부디 큰아들 정수가 이 교훈을 가슴 깊이 새겨두고 더 성실하게 근무하여 직장에서 승승장구하기를 바랄 따름이다.

3. 고명딸 김선경 서울광운초등학교 교사로 발령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에 합격하여 등록까지 마친 고명딸 선경이는 사립학교인 서울 광운초등학교 교사공모시험에 합격하여 교사발령을 받았다. 두 가지를 겸하기 어려운 선경이는 박사과정을 휴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경이는 성균관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는데 서울시내 초등학교 교장이신 시부모님들의 권유에 따라 경인교육대학교에 학사편입을 하여 교사자격증을 얻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초등학교 교사가 된 것이다. 또 선경이는 다섯 살 난 큰아들 안병현의 동생인 둘째아기까지 가졌다. 내년 5월이면 출산하게 된다. 우리 집 10대 뉴스에 빠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반가운 뉴스거리를 제공해 주어 고맙고 예쁘다.

 4. 큰며느리 천지숙 취직
 직장을 그만두고 아들 김동현(金東炫)을 낳아 똘똘하게 잘 키우더니 그 아이가 다섯 살이 되자 다시 취직을 했다. 보령메디앙스 아이맘 M1팀 주임이 되었다. 직장을 구하지 못한 젊은이들이 많은 세상에 기특하고 자랑스러운 일이다. 대학 때부터 영어를 잘 한다더니 그게 도움이 되었는지 평사원이 아니라 주임(Assistant Manager)으로 발탁된 것이다. 자랑스럽다. 하지만 동현이 동생을 하나 더 보았으면 좋겠다는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5. 아내 유영금 여사 회갑

어느덧 아내 유영금 여사가 올해로 회갑을 맞았다. 세월은 누구에게나 예외를 인정하지 않는다. 가족끼리 조촐하게 식사를 하는 것으로 회갑잔치를 끝냈다. 둘째아들 내외는 미국에 있으니 참석할 수 없어 아쉬웠다. 자녀들의 도움으로 아내와 나는 5월 24일부터 4박 5일 동안 일본 홋카이도 여행을 다녀왔다. 즐거운 해외여행이었다.

 6. 둘째아들 김창수 미국 카네기 멜론 유니버시티 대학원으로 전학
 미국 텍사스주립대학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공부하던 둘째아들 창수가 올해부터는 미국 펜실베니아주 피츠버그 카네기 멜론대학으로 옮겨서 공부하게 되었다. 카네기 멜론대학은 미국의 최고 사립명문 아이비리그대학으로서 둘째아들이 전공하는 전자마그네틱분야에서는 미국에서 가장 알아주는 대학이라고 한다. 학비가 1년에 3만 달러일 뿐 아니라 지도교수 Dr, Mark Kryder 교수 역시 Hard Disk 분야에서는 세계 최고의 권위자라고 한다.
둘째아들이 옮겨간 카네기 멜론대학은 MIT, 스탠포드와 더불어 미국의 3대 명문 공과대학일 뿐 아니라 세계적인 권위를 지닌 지도교수까지 만났으니 드디어 소원성취를 한 셈이다.  다행히 둘째아들은 카네기 멜론대학교 전자과 Dean's Fellowship 수상자로 선정되어 3만 달러의 등록금 일체를 면제 받고, 매달 1,950달러의 월급을 받으니 넉넉하지는 않지만 공부하는 데는 큰 지장이 없을 것 같아 안심이다. 두드리면 열린다더니 둘째의 도전정신이 이룬 쾌거다. 이름난 학교와 명성 높은 지도교수를 만나게 되었으니 천만다행이다. 둘째아들이 부디 세계적인 석학으로 성장하기를 바랄 뿐이다.
 
7. 전주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개설
 탁구를 치고 노래교실에 다니다 안골노인복지관 이연숙 관장과 인연이 되어 그곳에 수필창작반을 개설했다. 1월부터 3층 강의실에서 강의를 시작했는데 입에서 입으로 소문이 번져 등록 수강생이 33명에 이르렀다. 호기심으로 등록을 했다가 삼베바지에 방귀 새듯 슬그머니 그만두는 어르신들도 있지만 10여 명의 어르신들은 열심히 출석하고 매주 한 편씩 수필을 써서 내게 메일로 보내주기도 한다.

 전주안골노인복지관에서 첫 등단수필가가 태어났다. 올해 74세이신 김길남 어르신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초등학교 교장으로 퇴직하신 김길남 어르신은 종합문예지 《대한문학》2008년 겨울호에서 〈내 고향, 그리운 ‘장뜰’〉과〈옷이 날개라지만〉이란 작품으로 신인상을 수상하여 당당히 등단의 관문을 뚫었다. 축하의 박수를 받아 마땅한 경사다.

 전주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윤석조 회장은 이미 계간 《문예연구》와《대한문학》으로 등단하신 수필가로서 올해에는 제2수필집《커플 반지》를 출간하셨다. 70대란 연세를 잊고 열심히 수필에 몰두하는 그 분들의 모습을 보면 실로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11월말 종강을 하게 되자 은종삼 어르신은 그 동안 쓴 수필을 모아 앤솔로지를 한 권 만들자고 제안하였다. 마령고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직하신 은종삼 선생은 스스로 편집위원장을 맡아 《안골은빛수필》창간호를 발간하였다. 이 앤솔로지에는 윤석조 회장의 창간사를 비롯하여 지도교수인 나의 격려사와 이연숙 관장의 축사 외에 12명의 수필작품이 선보이고 있다. 특히 이들 안골수필반 수강생들은 행촌수필문학회에 가입하여 함께 활동할 뿐 아니라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강생들과 더불어 <수필의 날 행사>와 <문학기행>, <송년 수필의 밤> 등 여러 가지 행사에 동참하여 형제애를 다지기도 했다. 앞으로도 계속 끈끈한 유대를 가졌으면 좋겠다.

8. 열 번째 수필선집 《자가용은 본처 택시는 애첩》출간
 나는 올해 수필집으로서는 10권 째이고 총 11권 째 저서인 《자가용은 본처 택시는 애첩》을 출간했다. 비교적 많은 저서를 낸 것이니 그만큼 보람도 크다. 그런데 이번 수필선집은 자비출판(自費出版)이 아니라 <좋은 수필사>에서 기획출판을 한 것이어서 인세로 책을 몇 권 받고 보니 예전처럼 아는 분들에게 한 권씩 나누어드릴 수 없어 아쉬웠다. 내가 한 권씩 구입하여 나눠드리면 되겠지만 그러자니 책값이 만만치 않아 그만두었다. 아는 분들에게는 대단히 미안하다고 사과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전국의 유명서점에서 판매 중이라는데 과연 몇 권이나 팔릴지 궁금하다.

 9. 해외나들이가 잦았던 2008년
 올해엔 해외나들이가 잦았던 한 해였다. 5월 12일부터 5박 6일 동안 중국 텐진[天眞]을 방문하였다. 텐진작가협회와 한국 펜클럽이 번갈아가며 주최하는〈중․한문학 포럼〉에 한국 펜클럽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석한 것이다. 중국에서 돌아 온 뒤 5월 24일부터는 아내의 회갑기념으로 일본 홋카이도에 다녀왔다. 또 8월 12일에는 당일치기로 전북문인협회 회원들과 더불어 북녘 땅 개성을 다녀오기도 했다. 5백년 고려수도 개성을 두루두루 구경하지 못하고 박연폭포와 선죽교 등 몇 군데만 둘러보고 오려니 돌아오는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또 지난 12월 1일부터 3박 4일 동안에는 평화대사 특별 세미나에 참석차 일본 도쿄에 다녀왔다. 잘 해야 1년에 한 번 외국 나들이를 하는 것이 고작이었는데 올해엔 여러 번 해외나들이를 한 것이다.

10. 구강공사비(口腔工事費)로 620만 원 투자
나는 원래 이빨이 부실한 편이다. 40대 때부터 이빨을 하나둘씩 빼다 보니 젊은 나이에 틀니를 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틀니도 10여 년 사용하다 보면 보수공사를 해야 한다. 올해가 바로 보강공사를 할 때였던 것이다. 어떤 치과를 선택하느냐가 문제였다. 수소문 끝에 MD치과를 택했다. 박정희 원장은 이종택 회장의 사위이니 믿음직했다. 반 년 정도 걸려서 공사를 마쳤다. 무려 620만 원짜리 공사였다. 소형 승용차 한 대 값을 구강공사비로 소모한 셈이다. 그래도 불편 없이 음식을 씹어 먹을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2008년이 역사 속으로 떠나가고 있다. 미국에서 비롯된 경제한파가 세계경제를 뒤흔들고 있다. 그 여파로 우리나라에서도 노숙자들이 불어난다는 무자년이 저물어가고 있다. 오래지 않아 희망찬 2009년 기축년(己丑年) 새해가 밝아 올 것이다. 새해에는 신음하는 경제가 회복되어 우리 모두가 다시 활기 넘치는 삶을 살게 되었으면 좋겠다.


방망이 깎던 노인                      윤 오 영(尹五榮)

 벌써 사십여 년 전이다. 내가 세간난 지 얼마 안 돼서 의정부에 내려가 살 때다. 서울 왔다 가는 길에 청량리역으로 가기 위해 동대문에서 일단 전차(電車)를 내려야 했다.
동대문 맞은쪽 길 가에 앉아서 방망이를 깎아 파는 노인이 있었다. 방망이를 한 벌 사 가지고 가려고 깎아 달라고 부탁을 했다. 값을 굉장히 비싸게 부르는 것 같았다. 좀 싸게 해 줄 수 없느냐고 했더니,
 "방망이 하나 가지고 값을 깎으려오? 비싸거든 다른 데가 사우."
대단히 무뚝뚝한 노인이었다. 더 깎지도 못하고 깎아나 달라고만 부탁했다.
 그는 잠자코 열심히 깎고 있었다. 처음에는 빨리 깎는 것 같더니, 저물도록 이리 돌려 보고 저리 돌려 보고 굼뜨기 시작하더니, 이내 마냥 늑장이다. 내가 보기에는 그만하면 다 됐는데, 자꾸만 더 깎고 있다. 인제 다 됐으니 그냥 달라고 해도 못 들은 체한다. 차 시간이 바쁘니 빨리 달라고 해도 통 못 들은 체 대꾸가 없다. 점점 차 시간이 빠듯해 왔다. 갑갑하고 지루하고, 인제는 초조할 지경이다.
더 깎지 아니해도 좋으니 그만 달라고 했더니, 화를 버럭 내며,
 "끓을 만큼 끓어야 밥이 되지, 생쌀이 재촉한다고 밥이 되나?"
하면서 오히려 야단이다. 나도 기가 막혀서,
 "살 사람이 좋다는데 무얼 더 깎는단 말이오? 노인장, 외고집이시구려. 차 시간이 없다니까……."
노인은
 "다른 데 가 사우. 난 안 팔겠소."

하는 퉁명스런 대답이다.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그냥 갈 수도 없고, 차 시간은 어차피 늦은 것 같고 해서, 될 대로 되라고 체념(諦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마음대로 깎아 보시오."
 "글쎄, 재촉을 하면 점점 거칠고 늦어진다니까. 물건이란 제대로 만들어야지, 깎다가 놓으면 되나?"
좀 누그러진 말투다. 이번에는 깎던 것을 숫제 무릎에다 놓고 태연스럽게 곰방대에 담배를 담아 피우고 있지 않은가? 나도 그만 지쳐 버려 구경꾼이 되고 말았다. 얼마 후에, 노인은 또 깎기 시작한다. 저러다가는 방망이는 다 깎여 없어질 것만 같았다. 또, 얼마 후에 방망이를 들고 이리저리 돌려 보더니, 다 됐다고 내준다. 사실, 다 되기는 아까부터 다 되어 있던 방망이다. 차를 놓치고 다음 차로 가야 하는 나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 따위로 장사를 해 가지고 장사가 될 턱이 없다. 손님 본위(本位)가 아니고 자기 본위다. 불친절(不親切)하고 무뚝뚝한 노인이다.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그러다가 뒤를 돌아보니, 노인은 태연히 허리를 펴고 동대문의 추녀를 바라보고 있다. 그 때, 어딘지 모르게 노인다워 보이는, 그 바라보고 있는 옆 모습, 그리고 부드러운 눈매와 흰 수염에 내 마음은 약간 누그러졌다. 노인에 대한 멸시와 증오심도 조금은 덜해진 셈이다.

 집에 와서 방망이를 내놨더니, 아내는 예쁘게 깎았다고 야단이다. 집에 있는 것보다 참 좋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전의 것이나 별로 다른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데 아내의 설명을 들어 보면, 배가 너무 부르면 다듬이질할 때 옷감이 잘 치이고, 같은 무게라도 힘이 들며, 배가 너무 안 부르면 다듬잇살이 펴지지 않고 손에 헤먹기가 쉽다는 것이고, 요렇게 꼭 알맞은 것은 좀처럼 만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나는 비로소 마음이 확 풀렸다. 그리고 그 노인에 대한 내 태도를 뉘우쳤다. 참으로 미안했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죽기(竹器)는, 대쪽이 떨어지면 쪽을 대고 물수건으로 겉을 씻고 뜨거운 인두로 곧 다리면 다시 붙어서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요사이 죽기는, 대쪽이 한번 떨어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가 없다. 예전에는 죽기에 대를 붙일 때, 질 좋은 부레를 잘 녹여서 흠뻑 칠한 뒤에 비로소 붙인다. 이것을 "소라 붙인다."고 한다.

 약재(藥材)만 해도 그렇다. 옛날에는 숙지황(熟地黃)을 사면 보통의 것은 얼마, 그보다 나은 것은 얼마의 값으로 구별했고, 구증 구포(九拯九暴)한 것은 3배 이상 비쌌다. 구증 구포란, 찌고 말리기를 아홉 번 한 것이다. 눈으로 보아서는 다섯 번을 쪘는지 열 번을 쪘는지 알 수가 없다. 말을 믿고 사는 것이다. 신용이다. 지금은 그런 말조차 없다. 남이 보지도 않는데 아홉 번씩이나 찔 리도 없고, 또한 말만 믿고 3배나 값을 더 줄 사람도 없다.

 옛날 사람들은 흥정은 흥정이요, 생계(生計)는 생계지만, 물건을 만드는 그 순간만은 오직 훌륭한 물건을 만든다는 그것에만 열중했다. 그리고 스스로 보람을 느꼈다. 그렇게 순수하게 심혈(心血)을 기울여 공예(工藝) 미술품을 만들어 냈다. 이 방망이도 그런 심정에서 만들었을 것이다. 나는 그 노인에 대해서 죄를 지은 것 같은 괴로움을 느꼈다. "그 따위로 해서 무슨 장사를 해 먹는담." 하던 말은 "그런 노인이 나 같은 청년에게 멸시와 증오를 받는 세상에서 어떻게 아름다운 물건이 탄생할 수 있담." 하는 말로 바뀌어 졌다.

 나는 그 노인을 찾아가 추탕에 탁주라도 대접하며 진심으로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다음 일요일에 상경(上京)하는 길로 그 노인을 찾았다. 그러나 그 노인이 앉았던 자리에 노인은 와 있지 아니했다. 나는 그 노인이 앉았던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허전하고 서운했다. 내 마음은 사과드릴 길이 없어 안타까웠다. 맞은쪽 동대문의 추녀를 바라다보았다. 푸른 창공으로 날아갈 듯한 추녀 끝으로 흰구름이 피어나고 있었다. 아, 그 때 그 노인이 저 구름을 보고 있었구나. 열심히 방망이를 깎다가 유연히 추녀 끝의 구름을 바라보던 노인의 거룩한 모습이 떠올랐다.

 오늘, 안에 들어갔더니 며느리가 북어를 뜯고 있었다. 전에 더덕북어를 방망이로 쿵쿵 두들겨서 먹던 생각이 난다. 방망이를 구경한 지도 참 오래다. 요사이는 다듬이질하는 소리도 들을 수가 없다. 애수(哀愁)를 자아내던 그 소리도 사라진 지 이미 오래다. 문득 사십여 년 전, 방망이 깎던 노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해와 감상1

 이 작품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방망이 깎던 노인의 여유 있는 자세와 조급하고 이기적인 작가 자신의 행동을 대비시켜 성실한 삶의 태도를 부각시키고, 사라져 가는 전통에 대한 아쉬움을 표현한 서사적 수필이다. 전체는 네 단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첫째 단락은 사십여 년 전 방망이를 깎던 노인에 대한 회고이고, 둘째 단락은 자신의 일에 성실했던 노인에게 퍼부었던 타박과 그에 대한 뉘우침의 회상이며, 셋째 단락은 옛 사람들의 자세와 노인의 거룩한 모습에 대한 자신의 반성이고, 넷째 단락은 사라져 가는 옛것에 대한 향수이다.

 이 작품에서의 방망이와, 그것을 깎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노인은 우리가 흔히 소홀히 하기 쉬운 옛 전통의 상징이다. 작자는 이를 통해 잊혀져 가는 옛 전통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고 있다.

이해와 감상2

 방망이로 옷을 두드릴 일도 , 방망이를 살 일도 없어진 시대에 이런 명수필 한편을 읽게 되는 감개는 각별하다. 일회용품과 인스턴트 상품이 범람하는 산업사회에 방망이를 공들여 손으로 깍아 파는 이 노인의 이야기는 확실히 귀하고 값지다. 에누리도 해주지 않고 손님에게 곰살맞게 굴지도 않고 설사 주문자가 차시간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허술한 물건을 내놓을 수 없다는 정신, 그 귀한 장인정신을 오늘날 우리는 잃어가고 있는게 아닌가. 라고 지은이는 조용히 외친다.

 갑갑하고 지루해서 그만 깎고 달라고 안달을 해도 대꾸없이 완벽한 물건을 만들어 내놓는 노인을 윤오영은 <거룩하게>까지 느낀다. 그 배경으로 동대문의 지붕 추녀가 놓인 것 또한 허리를 펴고 바라보는 지점, 거기에는 <푸른 창공에 날아갈 듯한 추녀끝>이 놓여 있다. 노인은 그 추녀 끝을 보면서 장인이란 허술한 물건을 만들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을 늘 새로 다짐한다는 것일까. 한국인의 기질은 이런 은근과 끈기라는 것을 동대문 추녀가 강조한다는 의미일까

 지은이가 노인을 찾아 추탕에 탁주라도 대접하려고 다시 갔을 때 노인은 없고 <동대문 추녀 끝에 피어나는 흰구름>에 이르러 이 글의 아름다움은 절정에 이른다. 이런 배경은 물론 지은이가 일부러 지어내서 붙인건 아닐 것이다. 실제의 배경이 바로 그랬을 것이다. 우리 인생에서 늘상 마주치는 한 장면을 떼어내 확대경으로 들여다보면서 그 속에 있는 큰 진실과 미를 발견하는 것, 그게 바로 수필의 힘인 것이다.



      인연
                                                                                                      피천득
지난 사월, 춘천에 가려고 하다가 못 가고 말았다. 나는 성심여자대학에 가보고 싶었다. 그 학교에 어느 가을 학기, 매주 한 번씩 출강한 일이 있었다. 힘드는 출강을 한 학기 하게 된 것은 주 수녀님과 김 수녀님이 내 집에 오신 것에 대한 예의도 있었지만, 나에게는 사연이 있었다.

 수십 년 전, 내가 열 일곱 되던 봄, 나는 처음 토오쿄오에 간 일이 있다. 어떤 분의 소개로 사회 교육가 M선생 댁에 유숙을 하게 되었다. 시바쿠에 있는 그 집에는 주인 내외와 어린딸, 세 식구가 살고 있었다. 하녀도 서생도 없었다. 눈이 예쁘고 웃는 얼굴을 하는 아사코는 처음부터 나를 오빠같이 따랐다. 아침에 낳았다고 아사코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고 하였다. 그 집 뜰에는 큰 나무들이 있었고, 일년초 꽃도 많았다. 내가 간 이튿날 아침, 아사코는 스위이트피이를 따다가 화병에 담아 내가 쓰게 된 책상 위에 놓아 주었다. 스위이트피이는 아사코같이 어리고 귀여운 꽃아라고 생각하였다.

 성심 여학원 소학교 1학년인 아사코는 어느 토요일 오후, 나와 같이 저희 학교까지 산보를 갔었다. 유치원부터 학부까지 있는 가톨릭 교육 기관으로 유명한 이 여학원은 시내에 있으면서 큰 목장까지 가지고 있었다. 아사코는 자기 신장을 열고 교실에서 신는 하얀 운동화를 보여 주었다. 내가 토요쿄오를 떠나던 날 아침, 아사코는 내 목을 안고 내 뺨에 입을 맞추고 제가 쓰던 작은 손수건과 제가 끼던 작은 반지를 이별의 선물로 주었다.

 그 후, 10년이 지나고, 3, 4년이 더 지났다. 그 동안 나는 국민학교 1 학년 같은 예쁜 여자 아이를 보면 아사코 생각을 하였다. 내가 두 번째 토오쿄오에 갔던 것도 사월이었다. 토오코요역 가까운 데 여관을 정하고 즉시 M선생 댁을 찾아 갔다. 아사코는 어느덧 청순하고 세련되어 보이는 영양이 되어 있었다. 그 집 마당에 피어 있는 목련 꽃과도 같이, 그 때 그는 성심여학원 영문과 3학년이었다. 나는 좀 서먹서먹했으나, 아사코는 나와의 재외를 기뻐하는 것 같았다. 아버지, 어머니가 가끔 내 말을 해서 나의 존재를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그날도 토요일 이었다. 저녁 먹기 전에 같이 산보를 나갔다. 그리고 계획하지 않은 발걸음은 성심 여학원 쪽으로 옮겨져 갔다. 캠퍼스를 두루 거닐다가 돌아올 무렵, 나는 아사코 신장은 어디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무슨 말인가 하고 나를 쳐다보다가, 교실에는 구두를 벗지 않고 그냥 들어간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갑자기 뛰어가서 그날 잊어버리고 교실에 두고 온 우산을 가지고 왔다. 지금도 나는 여자 우산을 볼 때면 연두색이 고왔던 그 우산을 연상한다. <셀부르의 우산>이라는 영화를 내가 그렇게 좋아한 것도 아사코의 우산 때문인가 한다. 아사코와 나는 밤늦게까지 문학 이야기를 하다가 가벼운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새로 출판된 버어지니아 울프의 소설 <세월>에 대해서도 이야기한 것 같다.

 그 후 또 10여 년이 지났다. 그 동안 제 2차 세계 대전이 있었고, 우리 나라가 해방이 되고, 또 한국 전쟁이 있었다. 나는 어쩌다 아사코 생각을 하곤 했다. 결혼은 하였을 것이요. 전쟁통에 어찌 되지나 않았나, 남편이 전사하지나 않았나 하고 별별 생각을 다 하였다. 1954년, 처음 미국 가던 길에 나는 토오쿄오에 들러 M선생 댁을 찾아갔다. 뜻밖에 그 동네가 고스란히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M선생네는 아직도 그 집에 살고 있었다. 선생 내외분은 흥분된 얼굴로 나를 맞이하였다. 그리고, 한국이 독립이 되어서 무엇보다도 잘 됐다고 치하를 하였다. 아사코는 전쟁이 끝난후 맥아더 사령부에서 번역 일을 하고 있다가 거기서 만난 일본인 2세와 결혼을 하고 따로 나가 산다는 것이었다. 아사코가 전쟁 미망인이 되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다. 그러나, 2세와 결혼하였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만나고 싶다고 그랬더니, 어머니가 아사코의 집으로 안내해 주었다.

 뾰죽 지붕에 뾰죽 창문들이 있는 작은 집이었다. 20 여년 전 내가 아사코에게 준 동화책 겉장에 있는 집도 이런 집이었다.
 "아! 이쁜 집! 우리, 이담에 이런 집에서 같이 살아요."
아사코의 어린 목소리가 지금도 들린다. 10년쯤 미리 전쟁이 나고 그만큼 일찍 한국이 독립되었더라면 아사코의 말대로 우리는 같은 집에서 살 수 있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뾰죽 지붕에 뾰죽 창문들이 있는 집이 아니더라도 이런 부질없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 집에 들어서자 마주친 것은 백합같이 시들어 가는 아사코의 얼굴이었다. <세월>이란 소설 이야기를 한 지 10 년이 더 지났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싱싱하여야 할 젊은 나이다. 남편은 내가 상상한 것과 같이 일본 사람도 아니고 미국 사람도 아닌, 그리고 진주군 장교라는 것을 뽐내는 것 같은 사나이였다. 아사코와 나는 절을 몇번씩 하고 악수도 없이 헤어졌다.

 그리워 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오는 주말에는 춘천에 갔다오려 한다. 소양강 가을 경치가 아름다울 것이다.


출처 : 조규열 사랑방
글쓴이 : sinsa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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