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중앙대에는 "시론정보 사건"을 통해 표면화된 학생운동의 맥과 별도로 또 하나의 중요한 흐름이 있었다.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문창과)를 뿌리로 한 예술대 문창과 인맥의 움직임이었다. 서라벌예대는 서울대 문리대와 더불어 "한국 문학의 사관학교"라고 불릴 정도로 막강 문맥(文脈)을 자랑한다. 김주영-천승세-유현종-김원일-이문구-조세희-한승원-오정희-윤정모 등 한국 문단을 대표하는 수많은 문인이 서라벌예대 문창과 출신이다. 서라벌예대 문창과 3총사 서라벌예대의 "미아리 시대"는 고작 18년밖에 되지 않는다. 경영난으로 어려움을 겪다가 중앙문화학원에 인수되기 때문이다. 서라벌예대는 1972년 중앙대 본교가 있는 흑석동으로 교사를 옮겼다가 74년부터는 중앙대 예술대학에 흡수돼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하지만 "서라벌예대 문창과"라는 명성과 학풍은 "중대 문창과"라는 이름에 고스란히 계승된다.
1975년 중대 문창과에는 이미 전설이 되다시피 한 "미아리 시대"의 인물이 한 명 있었다. 68학번 송기원(소설가)이었다. 그는 1947년생이었다. 조대부고를 5년이나 다녔고, 대학도 8년째 다니고 있었다. 이런 내력만으로도 그는 학생들 사이에 "전설적" 존재였다. 실제로도 그는 이름값 이상의 문단사적-학생운동사적 기록을 남긴다. 그는 이미 학생 신분으로 신춘문예를 통해 화려하게 등단한 몸이었다. 1974년 [동아일보]에 시 [회복기의 노래], [중앙일보]에 소설 [경외성서]가 동시에 당선됨으로써 흑석동 문학청년뿐 아니라 기성 문단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문재(文才)뿐 아니라 학내 기풍을 형성하는 데도 지도적 위치에 있었다. 시인 이시영(현 중앙대 문창과 겸임교수)-이진행([뉴스메이커] 편집장 역임)과 함께 "서라벌예대 문창과 68학번 삼총사"로 불렸다. 미아리 시절부터 이들은 학교와 문단 선후배의 기대를 한몸에 샀다. 그가 중앙대 학생운동 무대에 본격 등장한 것은 1975년 "대학인의 선언"을 발표하면서다. 중앙대 학생운동은 지금도 두 축으로 나뉘어 있다. 시론정보 사건을 일으킨 문리대-정경대 등 흑석동 캠퍼스의 축과 서라벌예대 문창과를 뿌리로 한 안성캠퍼스(1982년 설치)의 축이다. 흑석동 쪽은 중앙대민주동문회, 안성 쪽은 이내창열사추모사업회가 구심점이다. "숙맥"에서 "투사"로 송기원이 시와 소설로 동시 등단한 것에 머물지 않고 문단과 학생운동권에 동시 데뷔한 "사건"은 한국 문예운동사에서도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소설가 박태순은 민족문학작가회의 홈페이지(www.minjak.or.kr)에 연재한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문예운동사"에서 송기원이 활동한 1975년 긴급조치 9호 발동 전후를 한국 문예운동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꼽았다. "한국 문학 사관학교의 양대산맥이라 할 서라벌예대와 서울대 문리대가 당시 학내적 전환기에 놓여 있었다는 것도 관심을 끄는 사실이다. 서라벌예대는 특수 문학예술 단과대학에서 종합대학인 중앙대학교에 편입되어 예술대로 개편하면서 미아리 시대를 마감하고 흑석동 시대를 펼쳐보이고 있었고 서울대 문리대는 종로5가 동숭동 캠퍼스 시대를 마감하고 1975년 3월 신학기부터 관악캠퍼스로 이전하면서 아울러 그 명칭마저 "인문대"로 바뀌게 되었다."(박태순,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문예운동사)
박태순은 이런 가운데 채광석-김정환-김도연 등 서울대 문화패가 1975년 오둘둘 사건을 주동하고 송기원 등 중앙대 문창과에서 "대학인의 선언"을 감행한 사실에 주목했다. 그는 1980년대 꽃피는 전투적 문예운동의 큰 줄기 가운데 하나를 긴급조치 9호 발동 전후 학생운동을 주도한 이들 두 학교의 "문화패 동아리"에서 찾았다. 하지만 송기원이 중앙대 학생운동의 양대산맥 가운데 하나의 좌장이 되고 한국 문예운동사의 흐름을 선도하는 위치에 서게 되는 배경은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 말하듯이 당시 그의 시국관은 날카롭지 못했다. 의식이 투철한 것도 아니었다. 1974년 신춘문예로 등단해 기성문단에 발을 들여놓은 뒤 시대상황에 수동적으로 말려들었다는 게 그의 말이다. "원래 나는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퇴폐주의자였다. 그런데 그해 2월 문인간첩단 사건이 터졌다. 이호철 선생은 서라벌예대에서 강의한 적이 있어 잘 알았는데 그를 간첩으로 몰았다. 11월에는 문인들이 광화문에서 시위를 했다. "문학인 101인 선언" 사건이다. 여기에 참여하면서 시국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나쁜 놈들이구나"하고..." 송기원의 최근 회고다. 1974년 11월 18일 문인들의 광화문 시위는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태동시킨 사건이었다. 문인 30여명이 이날 서울 종로구 세종로네거리 비각 뒤 의사회관 계단에서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선언"을 발표하고 시위에 돌입했다. 이 시위로 고은-조해일-윤흥길-박태순-이문구 등이 경찰에 연행됐다. 연행자 중에는 송기원과 그의 서라벌예대 동기생 이시영도 있었다. 뒤늦게 사회문제에 눈뜬 송기원은 이듬해 2월 문창과 학생 명의로 [동아일보]의 "문인 자유수호" 고정광고란에 "썩은 문인은 붓대를 꺾어라"라는 문학담론을 게재한다. 그리고 1975년 신학기가 시작되자마자 대학가를 긴 동면에서 깨어나게 한 이벤트를 결행한다. 중앙대 문창과생 38명은 3월 11일 "대학인의 선언"을 발표하고 교문 앞에서 연좌데모를 벌였다. 송기원은 이 사건으로 학교에서 제적되고 3월 17일 노량진경찰서에 연행돼 즉심에 넘겨져 구류 25일 처분을 받았다. 당시만 해도 송기원은 정식 재판을 청구하면 구류 10일을 산 뒤 일단 석방된다는 사실도 모를 정도로 "숙맥"이었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제적돼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등의 일을 보면서 진정한 "투사"로 다듬어진다. 그는 1980년 복학해 문리대-정경대 등 흑석동 학생운동 그룹과 결합해 중앙대 "서울의 봄"을 총지휘하게 된다. 결과는 이석표(현 문화유통북스 대표이사) 등과 함께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의 "공범"이라는 멍에를 쓰는 것이었지만. 송기원-이석표를 양축으로 하는 중앙대 학생운동은 1980년 봄 "빅뱅"을 일으킨다. 1971년 위수령 세대에서 긴급조치 9호 세대까지 모든 역량이 이 시점에 모여 대폭발하는 것이다. 1980년 중앙대에는 학생운동 관련 제적생 9명이 돌아온다. 1975년 7월 3일 시론정보 사건으로 구속됐던 이석표-김기선(전 민주당 환경위 부위원장)-백상태(소설가)-안정배(현 조선일보 편집부 차장)와 1979년 부마항쟁 직후 문리대를 중심으로 교내 시위를 주도하다 체포돼 조사받던 중 10-26사태가 터져 풀려난 손원대(현 도서출판 행법사 대표) 등 긴급조치 9호 위반자가 5명이었다. 유신잔당 상여의 행렬 이 가운데 손원대는 정오문학회 소속이었는데, 이 서클은 중앙대의 유서 깊은 문학서클일 뿐 아니라 학생운동의 거점으로서도 간단치 않은 역할을 해왔다. 1974년 문인간첩단 사건과 79년 남민전 사건 등으로 두 차례 옥고를 치르게 되는 61학번 임헌영(문학평론가, 현 민족문제연구소장)과 신상웅(소설가, 전 중앙대 문창과 교수) 등이 만든 문학회 "전초"가 이 서클의 전신이다. 1965년 정식 등록한 정오문학회는 15인문학회-원색문학회 등 학내 서클들을 통합하며 위세를 떨친다.
이 서클의 대표적 인물로 약학과 71학번 임종철(현 한미약품 자문위원-어린이 의약품 지원본부 상임이사)이 있다. 1988년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건약)"를 창립해 초대-4대 회장을 지내는 그는 1973~74년 정오문학회 회장으로서 약대 시위를 주도했다. 그는 1975년 초 교지 [중앙문화] 편집을 하면서 그 내용이 문제가 돼 조기징집(?)되는 바람에 그해 봄 대학가를 덮친 격랑은 피했다. 하지만 1976년 복학해 직간접적으로 학내 운동에 관여하면서 위태위태하게 학업을 계속, 79년 "전과" 없이 졸업하게 된다. 1970년대 중앙대 학생운동의 왕고참은 68학번 백남기(전 가톨릭농민회 전국본부 부회장, 법학과)와 69학번 이명준(현 아이마스 회장, 신방과)-남철희(현 71동지회 사무총장, 정외과) 등이다. 백남기-남철희는 1971년 위수령 때 제적된 "71동지"이고, 이명준은 1975년 명동성당 7인위원회의 일원이다. 이 가운데 백남기는 실제로 명동성당 이기정 신부에게 세례까지 받고 가칭 전국대학생연맹(전대련) 멤버로 활동했으나 이 사건이 종료된 뒤에 검거되는 바람에 투옥은 면했다. 하지만 그는 이 일로 두 번째 제적돼 수녀원-수도원 등의 날품팔이와 인천 포도밭 머슴살이를 하다가 1980년 복교통지서를 받는다. 나머지 복교생은 1975년 긴급조치 9호 발동 직전인 봄 시위 사건으로 제적된 이들이다. 3-11 "대학인의 선언" 사건으로 제적된 송기원이 백남기와 같은 68학번으로 최고참이었다. 그 다음은 4-9시위를 주동한 김영철(소설가, 사회사업학과 73학번)-경영준(현 성신여대 학술정보지원팀장, 도서관학과 73학번)이었다. 김영철은 1학년이던 1973년 10월 시위 때 교양과정부 데모를 주동하면서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를 쓴 열혈학도였다. 그는 중대부중-고를 전학년 장학생으로 다녔고 총학생회장을 지냈으며 중앙대에도 특별장학생으로 입학했다. 1975년 4-9시위 때는 비상총학생회장을 맡아 경영준과 함께 시위를 이끌었다. 이 일로 제적돼 강제징집된 그는 1978년 제대해 민청협 활동을 했다. 이문구-송기원-이시영 등과 세계시인대회에 참석해 김지하 석방투쟁을 벌이다 구류를 사는가 하면 카터 방한 반대데모를 주도하기도 했다. 임헌영-이재오 등과 남민전 사건에도 연루된다. 이렇게 해서 68학번 송기원-백남기와 73학번 이석표-김기선-백상태-안정배-김영철-경영준-손원대 등 1970년대 중앙대 학생운동 계보를 총망라한 복학생 조직이 움텄다. 1980년 "흑석동의 봄"을 이끌 9인위원회가 만들어진 것이다(그러나 실제로 이들이 다 복교한 것은 아니다. 이석표는 YWCA 위장결혼식 사건으로 수배중이라 복학하지 못하고, 김기선은 복학을 늦추고 있다가 포고령 위반으로 구속된다. 김영철은 남민전 사건으로 복역하다 5월 초 합류한다). 이들은 복교하기 전부터 몇 차례 회합해 새학기 학생운동 전략을 수립했다. 4월 10일부터 일주일간 단행된 "유신잔당 재집권 음모 분쇄 및 학원민주화를 위한 복교생 단식농성"은 이때 계획을 실행에 옮긴 것이었다. 답답하기 짝이 없는 시국상황과 학내 분위기를 재학생에게 환기시키기 위한 일종의 고육책이었다. 이들은 기존 학도호국단을 해체하고 학생회를 구성하는 과정에도 적극 개입해 백남기가 부회장을 맡도록 했다. 5월 7일과 8일 벌어진 횃불시위와 계엄철폐 교내시위는 이들과 총학생회의 합작품이었다. 1980년 중앙대 시위의 하이라이트는 5월 14일 서울역 진출과 동시에 결행한 "유신잔당 장례식"이었다. 이날 복교생과 총학생회 지휘로 중앙대생 4,000여명이 서울대-숭실대 등 남부지역 시위대와 합류해 노량진, 여의도, 마포를 거쳐 서울역으로 진출했다. 당시 서라벌고에서 교생실습중이던 송기원은 이날 낮 12시쯤 조퇴를 하고 뒤늦게 흑석동에 도착했다. 이미 시위대의 주력은 학교를 빠져나가 교내에는 총학생회 부활축제의 일원으로 계획된 유신잔당 장례식에 참여할 의대-약대-예술대생 등 일부만 남아 있었다. 유신잔당 장례식은 안정배의 아이디어였다. 상여는 백남기가 흑석3동의 목공집을 수배해서 제작한 뒤 교내에 보관하고 있었다. 상여행렬 인솔은 송기원-손원대 등이 맡았다. 긴조9호 처절한 터널 끝에는... 뒷날 "김대중 일당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돼 육군본부 계엄보통군법회의에서 중형을 선고받은 송기원은 항소이유서에서 유신잔당 장례식에 대해 사전에 알지 못했다고 밝혔다. 뒤늦게 학교에 도착해 총학생회로부터 자세한 내용을 듣고 오후 3시부터 장례행사를 주도했다는 것이다.
장례식을 마친 후 흰 가운을 입은 의대-약대생이 상여를 멨다. 송기원이 상두가를 선창했고, 상여 뒤로 1,000여명의 시위대가 뒤따랐다. 이들이 교내를 한 바퀴 돌고 정문에 이르렀을 때 경찰은 철수한 상태였다. 오후 3시 반에 출발한 장례행렬은 노량진, 영등포, 여의도, 마포, 서대문, 시청앞을 거쳐 8시께 서울역에 도착했다. 4시간 30여분의 대장정이었다. 시위대는 비를 맞아 더욱 처연해 보였다. 흰 가운을 입고 상여를 맨 선두와 비를 맞으며 뒤따르는 행렬을 본 시민들 사이에 "시위로 학생이 죽었다"는 소문이 떠돌기도 했다. 송기원-손원대 등은 서울역에서 유신잔당 장례식을 다시 치른 뒤 석유를 뿌려 젖은 상여를 불태웠다. 직간접적으로 긴급조치 9호라는 터널을 처절하게 통과했던 이들 9명은 5-17계엄확대조치와 함께 장렬하게 "산화"한다. 백남기-백상태는 이날 흑석동 교정 기숙사에 있었다. 이튿날 새벽 탱크를 앞세운 군이 교내에 진입했을 때 백상태는 탈출하고 백남기는 기숙사에서 체포된다. 안정배-경영준은 총학생회관에서 다음주 시위계획을 논의하다 복교생 수배령이 내려졌다는 정보를 듣고 피신한다. 송기원-이석표는 김대중내란음모사건과 관련해 중형을 받는다. 백남기-김기선-백상태는 포고령 위반으로 구속된다. 같은 혐의로 수배된 안정배-경영준-손원대는 8월 하순 김대중내란음모사건 기소와 김영삼 전 신민당 총재의 정계은퇴 발표 때까지 몸을 피해 구속을 면한다. 김영철은 계엄군에 연행됐다가 극적으로 탈출한다. 징역 7년형이 확정돼 부산교도소에서 복역하다 1982년 형집행정지로 풀려난 이석표는 실천문학사를 인수해 운영하다 91년 7월 국가보안법 위반(이적표현물 제작 및 배포)으로 또다시 구속돼 옥고를 치른다. 실천문학사가 출판한 정지아의 장편소설 [빨치산의 딸]이 지리산 빨치산의 투쟁과 마르크스-레닌의 세계관을 찬양, 북한의 대남 혁명전술에 동조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1970년대 중앙대 학생운동은"문학"이 결합된 운동이라는 점이 특이하다. 대부분이 "글"로 먹고사는 길을 택하기 때문이다. 송기원뿐 아니라 백상태-김영철도 문단에 데뷔하고 안정배는 신문기자, 이석표-손원대는 출판업에 투신한다. 1971년 위수령, 75년 전대련 사건과 관련해 두 차례 제적됐던 백남기는 80년 세 번째 제적된 뒤 12년에 걸친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고향 전남 보성으로 내려간다. 원래 농사를 짓는 게 꿈이던 그는 복학을 포기하고 농업에 전념, 지금껏 농사꾼으로 살고 있다. 신동호 편집위원 hudy@kyunghyang.com
출처 : 서라벌예대 방송학과 동문회
글쓴이 : cho1881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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