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작가와 문학

[스크랩] 월북 시인 임화 문학세계 재조명

운산 최의상 2012. 11. 24. 18:35

월북 시인 임화 문학세계 재조명

남북 문학사에서 모두 지워진 ‘조선의 랭보’임화 문학이 꽃핀다

 

    

역사 뒤안 서성이던 ‘임화 문학’ 되살아난다

카프 활동 앞장 ‘한국문학 풍운아’ / 1947년 월북뒤 스파이 몰려 사형

 

이번주 월요일(10월13일)은 한국문학의 풍운아 임화(1908~1953)가 태어난 지 꼭 100년이 되는 날이었다. 임화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 중앙위원회 서기장을 역임한 좌익 문예활동가이자,

<네거리의 순이> <우리 오빠와 화로> 같은 ‘단편 서사시’를 최초로 시도한 시인이며, 선구적인 리얼리즘론과 민족문학론을 개진해 1970, 80년대 민족문학론의 골간을 마련한 문학비평가이기도 하고, ‘개설 신문학사’ 연재를 통해 유물사관에 입각한 문학사 연구의 깊이를 실증해 보인 문학사가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빼어난 외모로 <유랑> 같은 영화에도 주연배우로 출연한 바 있는 전방위적 예술가였다.

 

그러나 1947년 말 월북한 그는 1953년 박헌영을 필두로 한 남로당 계열이 숙청될 때 ‘미제의 스파이’로 몰려 사형당한 비운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 뒤로는 남에서나 북에서나 그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었다. 그렇게 역사의 미아가 되어 문학사의 뒤안에 내팽개쳐져 있었던 임화가 되살아난다. 탄생 100년을 맞아 그를 기리는 출판과 학술행사 등이 활발히 이어지는 것이다. 우선, 지난 2월 창립 10주년 기념식 자리에서 ‘임화문학상’ 제정 사실을 공표한 바 있는 소명출판(대표 박성모)이 임화문학상 운영위원회(위원장 염무웅)를 정식으로 출범시키고, 내년 10월 1회 시상을 목표로 활동에 들어갔다.신경림·구중서·임형택·도종환씨 등으로 운영위원회를 꾸린 소명출판은 “임화의 문학정신과 실천활동에 근거해 수상자를 선정하겠다”며 “여느 문학상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새롭고도 특색있는 문학상이 탄생할 것”이라고 예고했다.

 

이와 관련해 운영위원인 임형택 성균관대 교수는 “한국 근대문학사 연구는 임화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면서 “그만큼 풍부한 창조성과 현재적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지금도 임화에게서 퍼올릴 것들은 무궁무진하다”고 말했다. 운영위원회 간사를 맡은 임규찬 성균관대 교수도 “임화가 시와 비평과 문학사, 문예운동에 두루 걸쳐서 활동한 문인인 만큼 적어도 그런 정도의 전인적 활동을 보여준 문인을 수상자로 삼을 것”이라고 밝혔다.

 

문학상 시상에 앞서 이달 말에는 전체 8권으로 된 임화문학예술전집이 역시 소명출판에서 발간된다. 전집은 <시> <문학사> <문학의 논리> <문학평론 1> <문학평론 2> <산문 1> <산문 2> <연보, 색인, 화보> 등으로 이루어졌다. 월북문인 해금 직후인 1988년, 풀빛출판사에서 전집 발간을 시도했으나 첫째 권으로 시집 <현해탄>을 낸 뒤 무산되었으며, 그 뒤 <문학의 논리>(서음), <임화 신문학사>(한길사), 미완의 ‘임화 전집’ 1권(시)과 2권(문학사)(이상 박이정) 등의 간헐적인 출간이 있었을 뿐 임화의 글을 총망라한 전집이 나오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한겨례신문,2008.10.16

 

시인과 혁명가

 

임화는 시인으로 출발해 혁명가로 살다가 나중에 다시 시인으로 되돌아왔고, 바로 그 때문에 처형당했다고 보는 것이 국문학계의 통설입니다. 임화는 자신이 쓴 한 편의 시로 인해 북한 당국에 처형의 빌미를 제공했던 것입니다. 그 시의 제목은 〈너 어느곳에 있느냐〉(1951년)였습니다.

'아직도/ 이마를 가려/ 귀밑머리 땋기/ 수집어 얼굴을 붉히던/ 너는 지금 이/ 바람 찬 눈보라 속에/ 무엇을 생각하며/ 어느곳에 있느냐// 머리가 절반 흰/ 아버지를 생각하며/ 바람 부는 산정에 있느냐/ 가슴이 종이처럼 얇아/ 항상 마음 아프던/ 엄마를 생각하며/ 해저무는 들길에 서 있느냐…'

낙동강 전선에서 인민군이 패퇴하자 임화는 첫 부인과의 사이에 난 딸을 남쪽에 두고 떠났다고 합니다. 이 시에서 임화는 반백의 시인으로서 애절하게 딸을 찾는 아비의 절규를 들려줍니다. 혁명가 임화의 모습은 자취를 감췄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이 시로 인해 그는 반동으로 몰립니다. '가슴을 조리며 애처러이 전선에 간 어머니와 아버지의 형상을 그림으로써 영웅적 투쟁에 궐기한 우리 후방 인민들을 모욕하고 그들에게 패배주의적 감정과 투항주의 사상을 설교하였으며…'(북한의 《조선문학통사》(1959)

임화의 문학과 생애를 깊이 연구한 문학평론가 김윤식 명지대 석좌교수는 "임화의 실수랄까 비극적 운명은 그가 시인으로 환원한 곳에 있었던 것"이라며 "그는 시인이었던 것이다. 누가 시인을 단죄할 수 있으랴"라고 물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임화는 탄생 100주년을 맞아 비로소 온전하게 시인으로서, 문인으로서 객관적으로 재평가 받기 시작한 것이 아닐까요. '임화는 모국어에 기여한 것이 없는 시인'이란 비판(평론가 유종호)도 나오고 말입니다. 그러해서 임화는 '남과 북에서 모두 잊혀진 시인'이 아니라 이제 '북에서만 잊혀진 시인'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 박해현 기자의 컬처 메일.조선일보,2008.10.20

 
출처 : 들꽃따라 문학향기
글쓴이 : 들꽃따라문학향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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